사카이 사부로

坂井三郎( さかい さぶろう)

1 개요

"사카이씨 다시 조국을 위해 영전零戰을 타라면 타실 건가요?"

"영전을요? 사양하겠습니다."
- 인터뷰어와 사카이 사부로의 대화 중

제2차 세계대전시의 일본군 해군 전투기 조종사. 에이스 파일럿. 최종 계급은 해군 중위. 1916년 8월 26일 사가현 출생 - 2000년 9월 22일 아쓰기 주일 미 해군 기지에서 사망했다.

2 상세

공인된 격추수는 28기이다. 격추 순위에선 전체 일본군에서 5위이지만, 후쿠모토 시게요(72기), 스기타 쇼이치(70기))와 달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1위인 이와모토 테츠조(80~87기) 역시 끝까지 살아남았다. 또한 전쟁 이후《넓은 하늘의 사무라이(大空のサムライ)》라는 수기를 썼으며, 대한민국에는 '대공의 사무라이'라는 제목으로 가람기획에서 정식발매되었다. 일어판 원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판을 발번역으로 유명한 이동훈 중역[1]했지만, 영어판에서는 사카이의 개인사나 사생활 등 일어판에 없는 내용도 많이 다루고 있기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본군인 사람이 쓴 책이 대한민국에 번역돼서 정식 출간될 정도로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간 구 일본 해군의 생활상과 전투사, 그 밖에 여러 실상을 밝히는 책으로서 유명하며 군인으로서의 분전분투를 그린 책으로 전후에 미국 등지에서도 발간되어 호평을 받았다. 다만 한국판은 오탈자가 많으므로 이 점에 대해서 유념해야 한다. 오탈자 상태를 봐서 편집자가 검토 자체를 아예 안한 거 같다 아울러 아래 항목에서 보듯 신빙성이 의심되는 내용이 많으므로 걸러 읽는 게 좋다.

3 생애

3.1 활약상

중일전쟁 중 애기 96식 함상전투기에서 웃는 사카이 사부로
중일전쟁 중 한 컷

사카이 사부로는 일본군에서 드물게 군국주의 정신이나 미신주의에 심취하지 않은 군인 중 하나로 똥별말고는 다 심취하지 않았긴 했지만,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 열악한 환경과 격납고도 없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몇 명 되지도 않는 동료들과 함께 매일 같이 미군과 싸운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총 28대의[2] 미군기를 격추시켰으며, 덕분에 전쟁 중 일본 해군에서 단 두 명 뿐인 사병장교로의 특진 사례를 기록한다. 전쟁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 이외에는 특진 없다'라는 방침이 있었고, 사카이 사부로의 장교로의 특진이 번번히 막힌 이유도 전사자만 특진이란 게 아예 관행이 되어버렸기 때문. 이 특진마저도 전쟁 끝나기 몇 달 전에 기적적으로 이뤄진거다.[3] 특진 외에 1944년에까지 해군에는 특무사관이라 하여 하사관에서 장교로 임관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지만, 정복 수장 위에 사쿠라 3개를 달아서 특무사관임을 표시하고, 계급명칭에도 특무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는 등 일반 사관들과 구분시키는 데다 군 내에서도 통상 1~2계급 정도 일반 사관보다 낮은 취급을 하는 등 차별이 심했으며, 진급도 극소수만이 소좌중좌 정도까지밖에 진급 못하는 등 불합리한 제도였으며, 결국 1944년 기존 특무사관들을 일반 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해버렸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적의 민간기를 격추시키라는 명령에 거부하고 그 민간기를 안전한 영공으로 유도해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주장 이외에는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증언도 증거도 없다. 게다가 일본군의 공식 기록에는 당시 사카이의 비행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 과달카날 전투에서는 미군 파일럿 제임스 서덜랜드와 교전하여 부상을 입혔으나, 격추시키지 않고 옆에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따라가는 등 기사도, 아니 사무라이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4] 그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사카이 사부로가 20mm 기관포를 쓰기 위해 기체를 가속시켰고, 그 타이밍에 서덜랜드가 기체를 감속하며 역으로 꼬리를 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서덜랜드는 기관총이 고장난 상태라 사격을 하지 못했고, 사카이는 서덜랜드의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부상을 입은 서덜랜드를 보게 된다. 하지만 서덜랜드가 기체를 상승시키자, 엔진을 조준하여 기관포를 사격, 격추시켰다.뭐야 이게

그가 머물렀던 뉴기니의 라에 기지에서 있었던 일화 중 하나로 한국판 《대공의 사무라이》에 나온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사카이 사부로를 포함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공중기동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을 때, 부대에 가끔 보급품을 싣고 찾아오던 수송기 조종사가 이를 듣다가 문득 '나도 언젠가는 그런 멋진 루프 기동을 하고 싶다... 그런데 내 비행기로는 안 될 듯'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다들 이를 흘려 들었는데, 며칠 후... 사카이와 동료들이 미군기에 요격당하는 아군 수송기들을 구출하러 갔는데, 아군기는 거의 대부분 격추 당하고 한 대만이 벌집이 된 채로 불이 붙어 간신히 날고 있었다. 사카이가 '저거 오래 못 가겠군...'이라고 생각하며 누군지도 모르는 그 불운한 파일럿을 마음속으로 애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이 수송기가 루프 기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카이는 그때의 조종사를 떠올렸으나, 그 수송기는 루프 기동을 반쯤 돌았을 때 폭발하고 만다.

기지로 돌아온 조종사들은 다들 그때의 조종사를 떠올리며 매우 침울해졌으나, 사카이는 그 조종사를 추모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상관 몰래 출동한 사카이와 동료 조종사는 미군기지 상공을 기습해 완벽한 루프 기동을 몇 회 시전한 뒤 자신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한 편지를 투하하고 갔다. 이 에피소드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며칠 뒤 다른 때처럼 맹폭격을 가한 미군[5]이 돌아가기 직전 편지를 투하하고 갔다. 거기에는 "얼마 전에 그쪽에서 보여준 곡예비행에 대해서 우리 모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신의 후임에 대해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는 바이지만, 다음에 또 오면 그때는 당신을 격추시키기겠다" 라는 편지가 왔다. 훈훈한 에피소드지만, 하필이면 사카이의 부대장도 이 편지를 보는 바람에 해명하느라 진땀 뺐다고...

3.2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생환하다

전쟁 중반에 F4F 와일드캣 전투기로 오인하고 후방 쪽으로 접근한 미군 전투기가 사실 후방에 기관총좌를 지닌 SBD 돈틀리스였던 탓에 사격을 얻어맞아 죽을 고비를 넘긴다. 게다가 돈틀리스의 숫자도 1기가 아니라 1개 편대였고, 이미 후방으로 접근하는 사카이 사부로를 알아채고 돈틀리스간에 연락도 완료돼서 후방사수들이 일제조준사격을 가했으니 아무리 에이스 조종사라도 절대 피할 수 없었다.[6]

그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그가 탑승한 제로센은 당장 비행이 불가능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50구경 기관총탄 두발이 조종석을 뚫고 사카이의 두개골에 명중해서 조종석 캐노피는 전부 박살나고 두개골에 출혈을 일으키며, 충격으로 몸의 왼쪽이 마비, 오른쪽 눈을 실명하했으며 동료들도 전부 그가 죽은 줄 알고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운 이야기다. 일단 아래 자료를 보자.

전투보고서 개요
전투보고서 상세

이것이 사카이 사부로가 부상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에서의 전투 보고서. 사카이 사부로는 기체에 3발을 피격당하기는 했으나 인명피해란에는 부상자가 0명으로 되어있다[7]. 그 외의 인명피해는 다른 파일럿 2명이 MIA 상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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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것이 대공의 사무라이에 당시의 모습이라고 실려있는 사진인데, 그냥 멀쩡하다. 사카이 사부로의 주장대로 머리와 눈에 부상을 입었다면 당장 목에 감고 있는 하얀 머플러부터 피범벅이 돼있어야 한다. 또한 사카이의 직속상관인 사사이 쥰이치 대좌가 가족에게 쓴 8월 11일자 편지에는 사카이 사부로에 대한 언급이 있음에도 부상에 관한 내용은 없다[8]. 덕분에 SBD에게 피격을 당하긴 했으나 뭔가 엄살이 섞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시력을 잃은 것도 성병이 원인(...)이며, 사카이가 분명히 라바울에 존재했던 위안부 시설을 실제로는 없었다고 주장하며 다닌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다만 저 전투 이후 사카이 사부로의 비행기록이 뚝 끊기고 일본으로 복귀해 파일럿을 은퇴할 작정으로 안마사 교육까지 받았다는 것을 보면 그 무렵 어떠한 원인으로 눈에 문제가 있다는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3.3 외눈이 되다

부상 여부는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당시 눈에 이상이 생겼다는것 자체는 사실이고 그는 한쪽 눈이 사실상 멀고 쓸모없는 인간이 됐다는 생각에 비탄에 잠긴다. 딸을 일본의 영웅과 결혼시키겠다며 찾아온 약혼녀의 부모님에게 자신은 이제 애꾸눈이며 자신과 결혼하여 그녀의 인생을 망칠 수 없다고 한탄하며 돌려보내는 장면 역시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는 부분 중 하나. 원래 약혼녀와 정확히 약혼을 한 건 아니지만, 사실상 암묵적으로 약혼 관계였다. 참고로 약혼녀는 그를 좋아한 사촌동생 친구의 언니.

이후 사촌여동생과 미묘한 감정의 사이가 되어, 간접적으로 고백을 재촉받았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 사촌간의 결혼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당시 일본에서도 좋게 보여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 또 사카이 사부로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동료이자 친구인 에이스 니시자와가 새 기체를 수령하러 가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생긴다. 그것도 교전으로 전사한 것이 아니라 타고 있던 수송기가 격추되었다고 하는, 실로 어이없고 허망한 최후였다.[9]

에이스에게 합당하지 않은 죽음이라고 생각한 사카이 사부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격정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사촌여동생에게 '자신이 진짜로 아끼는 사람이 너'라고 말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과의 관계는 이것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그런데 이틀 뒤 사촌여동생과 큰어머니가 기지에 나타난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지만,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 때문에 결혼하게 되었다(...) 원래 사촌동생과는 그가 도쿄학교에 진학했을 때 큰아버지 집에서 머무르면서 처음 만났다. 그때도 약간 시스콘 기질이 있었는데 사촌동생도 점점 브라콘화(...) 애초에 동생이 찾아온 것도 '자랑스러운 오라버니의 부인이 되고 싶어서' 였으니. 시대를 앞서간 에로게 주인공

그러나 전쟁 막바지로 몰리며 파일럿이 극도로 모자라게 되자, 처음에는 전투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서 전투출격을 금지한 상부도 급하게 대응을 바꿔서 믿음직한 에이스로 인정했으므로 결국 다시 전쟁터로 투입된다.

3.4 헬켓의 포위망을 돌파하다

하지만 이미 일본의 조종사는 대부분이 햇병아리 상태나 다름이 없었고, 이들을 성치 않은 몸상태로 이끄는 사카이 사부로 같은 소수의 엘리트 조종사들이 열심히 훈련시켰지만 이미 때가 늦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사카이 사부로가 가르친 내용은 일본이 유리한 상황에서 얻은 경험인데 당시 전쟁의 상태와는 맞지 않는등 교관으로도 그리 유능하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교육이라는 핑계로 신참 조종사들을 상습적으로 구타하기까지 했었다.

결국 사카이 사부로도 이오지마 상공에서 수평선 너머로 끝없이 몰려오는 미군 전함과, 하늘을 가득 매운 백수십 대의 적기를 보고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알았다고 하며, 적기를 요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그만 동료들과 떨어지고 15기의 헬캣콜세어에 둘러싸여 공격받으면서도 살아 돌아온다. 그 자신은 "의사가 왜 나에게 다시는 출격하지 마라"고 했는지 알겠다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외눈으로는 멀리서 적기와 아군기를 구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비행기는 이 전투에서 단 한 발의 총탄도 맞지 않았다. 문제는 이 부분 또한 진위여부가 불분명한데 헬켓 15기의 포위망을 뚫었다는 것도 그 장면을 상공에서 목격한 동료 파일럿은 '15기가 아니라 4기였고 딱히 포위된 상황도 아니었다'라고 증언하였다. 물론 동료 조종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도 없기는 하지만 사카이의 주장이 다른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은 상황에서 이런 증언이 나온다는건 사카이의 주장이 의심스럽게 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불과 3일 사이에 일본군 전투기 80대 중에서 71대가 격추당하고, 남은 9대로 카미카제 공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고 만다. 이에 사카이는 "나 같이 유능한 파일럿을 1회 공격용으로 써먹으려고 하는 사령부이니 전쟁에서 이기긴 다 틀렸다"라고 말하고 동료들과 함께 출격한다. 이때 그는 2명의 부하들과 함께 적진으로 향했지만, 걸레짝이 다 된 항공기로 적의 방공망을 뚫고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결국 가던 도중, 적기로부터 살아남으려 기동을 하다보니 결국 연료부족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귀환한 후 그는 상관에게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나"고 항의했지만, 상관은 그를 책망하지 않고 "수고했어"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그와 함께 출격했던 편대원 2명은 무사히 살아서 귀환했다. 이걸 본 사카이의 친한 동료인 무토 카네요시는 "사카이, 내게 침을 뱉어. 내게 침을 뱉으라고"라며 절규했다고 한다. 편대원들을 다 잃고 혼자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분 또한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운 부분인데 일본의 공식 기록상으로는 사카이 사부로에게 카미카제 명령이 내려졌다는 기록은 없다. 거기다 사카이 사부로가 카미카제 당시 함께 출격하여 돌아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공식 기록상으로는 나중에 기지에서 폭격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돼있는 등, 신빙성이 낮은 상태.

그 후 343 해군항공대 소속이 되어 종전시까지 희망 없는 저항을 계속하지만,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다.

사카이의 부대는 흔히 알려진 경직된 일본군의 군부대와는 달리 전우애가 강하고 지휘관과 장교부터 사병들간의 사이가 동료로서 인식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미군기의 성능이 나날이 강화되고 파일럿들이 겁이 없음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기량과 제로기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언제나 승리를 거뒀다. 국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부대원끼리의 전우애, 개인적인 명예에 따라 싸웠으며 실제로 사카이가 있던 라바울 기지의 편대는 일본군 전체에서 유달리 에이스가 많이 나온 부대였다고 한다.

또한 태평양 전쟁 최후의 사망자 역시 그에게 당했던 파일럿이었다. 위에서 말한 B-32의 격추는 실패했지만 그의 실력은 여전해 완벽히 우주쓰레기로 전락한 제로센을 몰고도 아군 손실 없이 해당 B-32의 승무원 한 명을 사살하고 두 명을 부상시킨다. 그러나 이 부분도 의혹이 있는 부분이다.도데체 의혹이 없는게 뭐냐 정작 사카이 사부로가 자신과 함께 B-32를 공격한 인물로 언급한 코마치 사다무는 사카이 사부로를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시덴을 타고서야 겨우 쫓을 수 있었던 B-32를 제로센 따위로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며 확실하게 부정했다. 첨언하자면 저 출격은 종전이 선포되었는데 미군기를 보고 기분이 나빠진 조종사들이 지휘관을 무시하고 멋대로 출격한 사건이다.

3.5 전쟁 이후

전후 구 일본군 출신자에 대한 미군정 및 신생 일본 정부의 박해가 진행됐다. 이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묻는다는 뜻에서 정당했고 모든 구 일본군 복무자는 공직 취임이 금지되고 연금 및 미지급 급료의 지급도 금지됐다. 이 조치는 50년대 중반에 들어서 해제된다. 어차피 일본군은 군인 연금 제도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부실해서 받을 것도 없었지만 모아둔 재산도 없었고 원래 집안이 가난한 사카이 사부로에게는 심각한 타격이었다. 게다가 패전 직후 일본의 처절한 경제난 속에서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인이 병사하고 본인도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이 같은 시련을 견디고 막노동으로 자금을 모아 차린 인쇄소 영업이 잘 되고, 여기에 저서인 '넓은 하늘의 사무라이'가 전세계에서 베스트셀러(한국 공군에서도 비공식적으로 번역하여 조종사들이 돌려 읽었단다)가 되어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이후 '넓은 하늘의 사무라이'는 동명의 제목으로 일본의 토호 영화사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 사카이 사부로 역은 가면라이더 1호 후지오카 히로시가 맡았다.

또한 방송에 출연한 그에게 질문자가 자동차와 전투기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라는 질문에 "자동차가 더 쉽다. 왜냐면 전투기는 후진할 수가 없으니까"라고 말해 좌중을 웃긴 적도 있으며, 풍부한 비행이론을 바탕으로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컴뱃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에 일본측 기술진과 미군전술이론가로 참가하기도 했다.

3.6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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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주일 아쓰기 미 해군기지에서 개최된 미해군 서태평양함대사령부 50주년 기념만찬에 빈객으로 참가해 자신의 사명감을 말하고 식사 후 돌아가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미 해군병원에서 치료 중 의사에게 "이제 눈 감아도 좋겠지..." 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4 어둠

일단 그의 전과 자체가 여러모로 미심쩍은 편. 64기라는 격추기록은 그가 책의 매상을 위한 선전문구로 써먹기 위해 미야모토 무사시의 결투횟수인 64에 끼워맞춘 것이라고 본인이 직접 언급했다. 본인의 말로는 그보다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고. 결국 정확한 격추수는 알 수 없다. 일단 공인된 격추수는 28기.

그의 발언과 비행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은 것도 미심쩍은 부분이다. 앞에서 말했던 의혹들도 충분히 많는 내용이지만 저게 다가 아니다. 전함 야마토의 오키나와 특공 때도 야마토를 공격한 미군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일본군의 공중전은 없었다. 적의 민간기를 안전한 영공으로 유도해줬다는 주장도 일본군의 공식 기록상으로 그날 해당 구역에 사카이 사부로의 비행은 없었던 것으로 돼있다. 전후에 당시 민간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과 만나 감사받았다는 이야기도 사카이 사부로의 주장일 뿐 딱히 인증 같은 것은 없다. 그 외에도 공식 기록이나 다른 인물들의 증언과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단순한 오인이나 전과를 부풀린 보고 같은 것들은 다른 파일럿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카이 사부로의 경우 그것을 까마득히 뛰어넘는 수준.

또한 그의 활약은 대부분 눈에 부상을 입기 전까지, 즉 일본군이 우위에 있던 상황에서 기록한 것들로, 미군이 우세를 잡은 전쟁 중후반 무렵 활약한 일본군 에이스들에 비교하기에는 다소 미묘한 감이 있다. 사카이 사부로가 활약했던 시기는 일본이 상대하는 미군의 주력기가 막 F4F로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까지이며, 그 이전까지의 전과는 대부분이 P-40 워호크라든가 F2A 버팔로 등. 부상에서 복귀한 이후 일본이 열세에 처한 상황에서는 2년간 출격이 1회 밖에 없다[10].

미군 파일럿들 사이에서 사카이 사부로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도 대공의 사무라이가 출판된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까지는 양국 에이스 파일럿들의 모임에 초청되는 일이 일절 없었다. 당초에는 미군 파일럿에게 사카이 사부로의 이야기를 꺼내도 '그게 누구임?'이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11]

눈에 이상이 생긴 뒤로는 사실상 전력외 판정을 받고 대부분의 시간을 신참 파일럿들을 교육하는 교관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경험은 모두 일본군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겪은 것들이었던지라 젊은 파일럿들에게는 당치도 않은 헛소리를 늘어놓는 늙은이 취급을 받았던 모양. 교육의 일환이라며 신참 파일럿들을 상습적으로 구타한 것도 이러한 반감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사카이 왈, '때리면 곧바로 반성을 하니까 교육효과가 좋았다'라고. 뿐만 아니라 다른 베테랑 파일럿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등 비행대의 트러블 메이커였던지라 결국 지휘관이 다른 비행대의 파일럿과 교환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상대 비행대에서 '그런 눈병신을 어디다 써먹으라는 소리냐!'라며 맹반발했던지라 결국 다른 파일럿을 한 명 더 붙여서 2:1로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얼마나 보내고 싶었으면

전력외 판정이었던 탓인지 본인이 직접 카미카제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본인은 카미카제에 참가하는 명령을 받고서 명예로운 일이지만 '어째서 내가 죽어야 하나'라고 생각했다고 회상. 결국 출격은 했지만 적을 발견하지 못해 그대로 귀환했다고 하는데, 공식 문서상으로 사카이 사부로에게 특공 명령이 떨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 카미카제 파일럿을 육성하는 교관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사카이 사부로가 카미카제에 대해서 이렇다 할 거부감을 보였다는 증언은 없다. 사카이 사부로의 카미카제 비판은 모두 전쟁 이후에 나온 것. 그에 반해 레이센 코테츠라 불렸던 이와모토 테츠조는 사카이 사부로와는 달리 카미카제에 대해 상관에게 대놓고 항명까지 할 정도로 카미카제 특공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전후에는 자살공격과 당시 군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자살공격으로 사기를 올리려는 대본영의 발표는 미친 짓'이라고 오히려 사기를 떨어뜨린 짓이었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하지만 '대공의 사무라이'의 내용을 보면 '전후 미군은 카미카제를 미친짓이라고 비난하지만 일본군이 할 수 있는 최후의 명예로운 방법이었다' 식의 비판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내용이 적혀있다. 이유를 따져보자면, 사실 이 '대공의 사무라이'라는 책 자체가 사카이 사부로 본인이 직접 쓴 책이 아니다. 사카이 사부로의 취재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인 몇 가지의 책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 원판의 출판 시기도 각자 다르고 내용도 서로 미묘하게 다르다. 본인이 쓴 책이 아니기에 사카이 사부로가 말을 바꿨을 수도 있고, 책의 저자에 따라 미묘한 가필이나 조작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덕분에 역사적 자료로서는 신빙성에 문제가 많다는 평을 듣는 책.

전쟁 이후 태평양 전쟁 연구가를 자처하며 여러가지 인터뷰나 글 등을 쓰면서 죽은 사람만 까는 걸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당사자에게서 해명이나 자초지종을 물을 수 없는 일방적인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사람을 까기 시작했다는 것. 처음에는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의 악담만 늘어놓았지만, 차츰 지병이나 수명으로 죽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레퍼토리가 점점 늘어갔다(...) 특히 자신의 지휘관이었던 겐다 미노루의 경우 생전에는 함께 허허하하 웃어가며 TV에도 출연하는 등 사이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겐다가 사망한 이후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다짜고짜 까는 모습을 보여줬다. '겐다상'이라고 부르던 호칭도 겐다가 죽은 이후로는 그냥 '겐다'(...) 이와 같은 행보로 인해 전후에도 과거 동료였던 파일럿이나 군인들에게 기피되었다는 말이 있다.[12]

말년에는 다단계 판매에 뛰어들어 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무려 112만명의 피해자를 낸 일본 최대의 다단계 판매 사건인 천하일가의 모임(天下一家の会) 사건이었는데, 유명세를 등에 업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끌어들인 탓에 말년을 소송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고, 결국 동료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사카이 사부로의 장례식에 참가한 동료 파일럿은 단지 4명 뿐.[13]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허세만 떠는 무능력자인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자신을 격추한 이가 사카이라는 증언을 한 파일럿들도 있었고,[14] 전투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호위를 해줬기에 공격기 파일럿들에겐 인기가 좋았다.

일단 태평양 전쟁에서의 전과의 대부분이 전쟁 초반부에 올린 것이고 전쟁 중후반 제로센을 잡아먹으며 일본의 열세를 가져온 헬켓과 돈틀리스를 상대한 공중전은 단 한 번 뿐이긴 하지만, 여기서도 한 기를 격추시키고 무사히 귀환한 것은 사실.

묘하게 한국에서는 제국주의에 경도되지 않은 평화주의자이자 참군인 같은 이미지를 띄고 있는데, 이는 위의 역자 이동훈이 그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2000년대부터 '대공의 사무라이'를 번역하면서 위 같은 이미지로 포장해 여러 군데서 책 판촉용 언플질을 해댄 탓이 크다. 옛날 엔하 시절에도 이 항목에 에이스 파일럿인 동시에 사무라이의 자세를 잊지 않은 일본군에 걸맞지 않은 영웅이라는 식으로 왜곡 서술되어 있어 많은 이들의 혼란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진정한 대공(大空)의 사무라이로 잘못 알고 있던 이들에게 이 같은 진실은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또한 현재 일본에서 제로센을 신성화하고 있는 풍조도 이 사카이 사부로와 대공의 사무라이에서 기인한다. 전쟁에서 미군기를 수도 없이 때려잡았다며 국민적 영웅이 된 에이스 파일럿이 제로센은 최고의 전투기라고 떠들고 다닌 덕분에 일본에서 제로센의 평가가 그렇게 된 것.

4.1 일제의 잔혹행위에 대한 부정

사카이 사부로는 인터뷰에서 난징 대학살과 종군 위안부에 대하여 이런 발언을 했다. 영어 원문, 번역[15]

난징 대학살에 대해.

그곳에서 일본군이 수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였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100,000명~300,000에 가까운 사상자 수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라고 봅니다. 그리고 학살 당한 '시민'들은 아마 시민으로 변장하고 있던 중국 군인들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건 국제법 위반입니다. 제가 왜 그 사실을 믿지 않냐고요? 그 당시 난징의 인구수는 300,000명이 채 되지도 않았거든요. 일본군이 진격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난을 간 상태였어요.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당시 그곳에는 200여명의 외국 기자들이 있었는데, 당시 발간된 신문에는 잔혹행위에 대한 묘사가 없어요. 애당초 그렇게 큰일을 어떻게 숨기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전후부터 나돌기 시작했죠. 그리고 당대 사건이 묘사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진들 역시 이 사건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조작된 것들이고 말입니다.

사카이 사부로는 난징 대학살의 피해자 수천명 단위로 축소하면서 중국에 의해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제법을 운운하며 "학살당한 시민들은 시민이 아니라 중국군이고, 중국이 원인을 제공하였기에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라는 논지로 학살극의 책임을 중국에 전가하였다. 난징 대학살 사건 부정파 참조.

종군위안부 보상문제에 관하여.

외국으로부터 50년도 전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보상을 요구한다고요? 이봐요, 살인 공소시효도 15년입니다. 더불어 전후 일본은 한국과 더불어 다른 나라와 함께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련한 조약을 채결했습니다. 각 나라의 합법적인 정치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정해진 거죠. 고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엄한 외국이 아니라 자기 나라 정치인들에게 따져야 한다고 봅니다. 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워싱턴에 가서 미국 정치인들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잖아요. 일본 정부가 그들의 보상금을 지급해주죠. 만약 종군위안부들이 요구사항이 있다면, 한국이나 필리핀 정부에 따져야 할 일입니다. 지금 일본이 잘 살고 있으니까 돈을 타낼 목적으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이하는 역사통(歴史通) 2012년 1월호의 실린 사카이 사부로의 생전(2000년 5월) 인터뷰 내용.

당시에 「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없었어요. 애초에 전장에 여자 따위 없었어요. 한 명도 본적이 없다고요. 애초에 하루종일 행군하고 나면 여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요. 38식 보병총을 들고서 군장을 매고 앞에다 48발, 뒤에다 48발 탄환을 매달고서 수류탄까지 들죠. 행군이 끝나서 짐을 내려놓고 나면 허리가 긁혀서 피 투성이에요. 이미 성욕은 커녕 식욕조차 없죠. 그냥 쓰러지는 거에요. 그런 상태에서 여자를 데리고 다녀요? 하물며 길가에서 강간을 하면서 행군을 했다니 웃기는 소리죠. 분명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후방기지에는 위안부가 있었죠. 하지만 위안부는 사령관의 급료의 몇 배씩이나 돈을 받고 있었어요. 군용 수표를 끈으로 묶으면 그 한다발이 딱 벽돌 크기가 돼가지고 흔히들 「벽돌」이라고 불렀는데요, 그걸 4, 5개씩이나 받고 있었어요. 게다가 자유도 주어져서 오늘은 손님 받기가 싫다고 하면 밥만 먹고 여기저기 놀러다녀도 됐다고요.
「난징 대학살」도 그래요. 육군의 대부분은 난징이 함락되자마자 난징을 떠났어요. 남은 건 1500~1600명 정도였죠. 1500명이 어떻게 2~30만명을 죽일 수 있단 거에요. 구멍을 파는 것만 해도 큰일이죠. 시체를 강에다 버렸다고도 하는데, 그럼 시체가 상하이까지 둥실둥실 떠내려갈 것 아니에요. 거긴 전세계의 보도반이 모여있다고요. 대학살이 있었다면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죠. 도쿄재판까지 그런 얘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일본군의 학살 행위를 촬영했다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는데요, 그건 일본군이 아니에요. 공산군이었죠.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지만, 우리들이 보면 금방 알아요. 일본군, 장개석군, 공산군은 제각각 각반을 두르는 법, 군화가 달라요. 제가 본 영화에서 일본군이라고 나오는 건 죄다 각반을 두르는 법이 공산군이었어요. 분명 군복과 군모는 일본군 것이었지만, 어떤 속임수를 써봤자 사소한 곳에서 마각(馬脚)이 나와버리죠.
요약하자면 위안부 문제와 난징학살 모두 일본이 경제대국이 되어 돈이 생기니까 한국과 중국이 꺼내든 말이에요. 일본이 먹고살기가 힘든 나라였다면 그런 소린 안 했을 걸요. 돈을 타내기 위한 날조에요. 그러니까 이로정연(理路整然)하게 대항해야 해요. 변명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죠.

사카이 사부로는 종군 위안부에 대해 일본이 저지른 전범행위에 일본의 책임이 없다고 발언했고 미국의 원폭투하에 피해자가 미국에 보상요구를 하지 않는다고 빗대었다. 또한 종군 위안부 피해보상 문제에 관해 "그것은 일본에게 돈을 울궈낼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비하하였다. 이는 한일기본조약과 그 후에 있었던 일들과도 연관이 있어보인다.

이하는 전쟁 전반에 관한 역사관.

전쟁에서는 졌지만 전쟁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뉴욕 타임즈 기자가 '무슨 소리냐'고 묻길래, '국제연합을 봐라'고 대답했습니다. 제2차대전까지 국제연맹의 가입국은 일본이 탈퇴할 무렵에 50개국 정도였던 게 현재 국제연합은 170개국이지 않으냐. 즉, 독립국이 대충 120개국 정도 늘어난게 된다. 그 가맹국들을 봐라, 그 대다수가 비(非)백인의 나라들이다. 일본이 전쟁을 시작한 덕분에 그만큼 유색인종 국가가 독립했다. 우리를 침략자라고 부르는데, 그럼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가 한 짓은 뭐냐. 백인들은 얼마나 유색인종을 죽이고 착취했는가. 그걸 때려잡으려면 현지로 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 우리들이 싸웠기 때문에 아시아는 백인들로부터 해방됐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죽은 전우들은 어떻게 되느냐. 녀석들의 죽음은 개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탁자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더니 입을 다물더군요.
내가 일본인으로서 대단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위령비에요. 거기에 뭐가 새겨져 있냐면, 「편히 잠드시길. 과오는 되풀이하지 않을 테니」. 이걸로 잠들 수 있겠습니까. 20몇 만의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전쟁을 시작한 것은 누구인가. 누가 원폭을 떨어뜨렸는가. 그 자는 벌을 받았는가. 그런 것들이 해결되고 나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5 기타

  • 해군 에이스가 되는데 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시력 관련 훈련을 해서 한낮에도 별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하늘을 올려다보면 대낮에 천연 플라네타리움이 펼쳐지는 그런 건 아니고, 별 지도를 암기한 뒤 시선을 하늘로 고정한 채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희미하게 별이 보이게 되는 식이었다는 모양. 교관 시절의 사카이 사부로는 자신의 교육생들에게도 이러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16]
  • 주로 탑승했던 기체로는 제로센 21형. 그중에서도 V-103, V-128, V-138 등이 있다. 모두 기체의 식별넘버로[17], 제로센 프라모델의 식별넘버 마킹은 대부분 이것들에서 따오는 경우가 많다.

6 대중매체의 사카이 사부로

  1. 과거 중역본의 상당수는 일본어판 번역본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 90년대 영어교육 광풍 이후 영어 번역자의 수가 일본어 번역자보다 훨씬 많아졌고 싸졌기 때문. 그런데 이동훈의 실력은 그 발에 채일 만큼 많은 영문 번역가들의 평균 수준보다 한참 미달되므로 그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2. 자서전인 《넓은 하늘의 사무라이(大空のサムライ)》에서는 64기라고 주장하였으나 공인 격추수는 28기이다.
  3. 저서 《대공의 사무라이》에 의하면 '입대 11년 만에 기념비적인 정규 장교 진급을 이루게 되었다' 라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4. 여기서 사무라이라면 온갖 만행부터 떠올릴 한국인의 입장에선 뜬금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무라이는 본래 侍라고 쓰며, 누군가를 '섬기는' 사람이란 뜻이다. 에도시대에 성립된 사무라이 정신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살생을 최소화하고 몸가짐을 항상 조심하는 자세를 뜻했다. 즉 사무라이라는 단어도 원래는 좋은 의미다. 사무라이 항목 참조.
  5. 사카이의 묘사로는 미군기가 거의 매일 라바울 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흠좀무.
  6. 다큐멘터리 Battle of 360'에 의하면 그는 과달카날 전투 초반 비행장을 수비하는 과정에서 피탄당했으며 그에게 공격받았던 다른 파일럿의 증언도 나온다. 사카이 본인 역시 SBD 돈틀리스였다고 후일 정정했다.
  7. 참고로 사카이의 격추기록에 있는 F4F의 협동격추 1대는 제임스 서덜랜드의 것이다.
  8. 대충 '한쪽 눈 시력이 0.8인데도 나보다 더 빨리 적을 찾아내는 놈이다'라는 내용이다. 사카이 사부로는 중일전쟁 당시 비행 중 동공에 파편이 박히는 사고 이후로 왼쪽 눈의 시력이 전투기 탑승가능 최저치인 0.8까지 떨어졌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친 오른쪽 눈의 시력은 전투기 탑승이 불가능한 0.7까지 떨어진다.
  9. 니시자와 히로요시는 사카이 사부로가 자신이 본 파일럿 중 최고의 파일럿이라고 인정한 에이스였다. 그는 사카이에게 '나는 절대로 공중전에서 격추되지 않는다!'고 큰소리 치곤 했다. 그러던 니시자와가 죽기 얼마 전, 자신의 곧 죽을 것 같다며 카미카제 특공에 지원했다. 당연히 이런 초특급 에이스를 카미카제로 내보낼 수 없기 때문에 상층부에선 거절했고, 자신의 새 기체를 수령하러 가던 도중에 격추되어 전사한 것이다. 니시자와는 사카이에게 장담하던 대로 공중전에서 격추되지 않고 전사한 것이다.
  10. 본인이 주장하고 있는 카미카제 출격까지 포함하면 2년간 2회다. 일단 일본의 공식 기록상으로는 사카이 사부로에게 카미카제 명령이 내려졌다는 기록은 없다. 사카이 사부로가 카미카제 당시 함께 출격하여 돌아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공식 기록상으로는 나중에 기지에서 폭격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돼있는 등, 신빙성이 낮은 상태.
  11. 진위 여부는 불명. 다만 그 당시에는 양측 모두 암호문 해독이나 포로심문 등으로 상대의 에이스 파일럿이 누가누가 있는지 정도는 대강 파악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12. 역시 진위 여부는 불명. 또한 이러한 내용들의 출처 대부분이 과장된 헛소리와 근거 없는 루머가 난무하는 2ch이라는 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13. 다만 태평양 전쟁은 1945년도에 끝났고 사카이 사부로가 사망한 건 2000년도였다. 다단계 판매 사건과 별개로 사카이가 사망했을 때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동료 파일럿, 특히 사카이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게 생존해 있던 동료 파일럿이 총 몇 명이었을지 고려해보면 참석자가 4명 뿐이라는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수 도 있다.
  14. B-17의 파일럿들의 이야기도 있었고, 미 해병대 에이스 그레고리 보잉턴도 그에게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히려 이쪽은 사카이가 '콜세어를 몇 번 만났는데 그걸 다 기억하냐'면서 자신은 모르겠다고 부정한 케이스.
  15. 글쓴이 Scott Hards는 미국인이지만 일본에서 살고 있으며, 일본의 프라모델, 피규어 쇼핑몰인 하비링크 재팬을 운영하는 프리랜서 기고가다.
  16. 그냥 꼬장. 헛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타카나시 릿카도 아닌데 중2병에 단단히.. 관계자가 다 죽고 난 뒤라 말했는 지 몰라도 그의 다른 어록에는 구일본군의 파일럿 양성체계가 안 좋다고 비판했다고도 하는데, 저 내용을 보면 사카이도 별로 나을 것 없는 교관이 된 것.
  17. 일본군은 전용기라는 개념이 없고 그냥 적당히 상태가 좋은 기체를 골라 출격하는 식이었다.
  18. 놀랍게도 저 팬아트는 픽시브에서 '사카이 사부로' 태그를 단 게시글이다!! 이건 고인모독 같은데... 등록된 태그 중 하나는 '사카이씨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