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아들(Dracula)
목차
1 개요
루마니아어 별명 : Vlad Ţepeş (블라드 체페슈, 블라드 가시)
영어 별명 : Vlad the Impaler(블라드 더 임페일러, 블라드 찌르는 자)
왈라키아 공 블라드 3세(Vlad III, 1431년 겨울 ~ 1476/1477년 겨울).
15세기 루마니아 지방의 영주. 용공(龍公)이라 불린 블라드 2세의 뒤를 이은 왈라키아(Wallachia)[1] 공국의 공작(원어는 보이보드)이다.
별명인 블라드 체페슈(Vlad Ţepeş)로 더 유명하다. 체페슈는 루마니아어로 가시 혹은 꼬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2]. 그래서 한국어로 직역하면 블라드 가시공(公). 블라드 가시공이 생존할 당시에는 체페슈보다는 드러쿨레아(Drăculea)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으며, 본인 역시도 그 별명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본인의 필적으로 보이는 서명에도 Wladislaus Dragwlya라고 쓰여 있다.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체페슈들의 원조이며, 그 유명한 드라큘라의 모티프가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계 여러 문화상품에 끼친 영향이 엄청나게 크다. 본국인 루마니아에서는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숭상받고 있다.
2 생애
2.1 용의 아들
블라드 가시공은 시기쇼아라(Sighișoara)에서 태어났다. 루마니아는 역사적으로 3개의 지방으로 나뉘어져 각 지방마다 고유의 왕조를 지니며 역사가 진행되었는데,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중 트란실바니아가 영역이 가장 넓지만 대대로 오랫동안 헝가리의 지배하에 놓여있었으며 자주적인 기상을 간직한 곳은 남쪽의 왈라키아 공국과 동쪽의 몰다비아 공국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 몰다비아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소행으로 몰도바라는 국가로 분리되어 루마니아로부터 떨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헝가리의 드래곤 기사단[3] 소속인 왈라키아 공 블라드 2세이다. 블라드 2세는 블라드 드라쿨(Vlad Dracul, Vlad the Dragon)이라고 불렸는데 드라쿨은 용(드래곤)을 의미하므로 번역하면 블라드 용공(龍公)이 된다.[4]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라고 하지만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형제관계는 형들인 장남인 블라드[5]와 차남 미르체아, 삼남인 블라드 자신, 그리고 남동생 라두 이렇게 넷이었다. 1436년까지는 왈라키아가 아닌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한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색슨족들이 모여살던 시기쇼아라에서 자랐다.[6]
블라드는 자신이 아버지를 이은 왈라키아 공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드라쿨(Dracul)+아들이라는 뜻의 단어(a)를 붙여 스스로를 '드러쿨레아(Drăculea)'라고 불렀는데, 이 별명이 바로 블라드 가시공의 대명사가 되었다. 결국 드라큘라(드러쿨레아)란 '용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용뼈?!?
2.2 볼모 생활
블라드 가시공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정적인 바사랍 2세를 물리치고 왈라키아 공에 복위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조약을 맺으면서 블라드 가시공과 라두를 오스만 제국의 황실에 인질로 보낸다[7]. 다행히도 아버지 블라드 2세는 복위에 성공했지만, 이때 블라드는 한 살 어린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인 메흐메트(훗날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많은 희롱을 당했고[8] 감옥에서 감금 생활을 당하는 등 어린 나이에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기에 그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염세주의자가 된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더구나 그가 청년이 된 후 동생 라두는 철저히 '골수 오스만 빠돌이'가 되어 관직까지 얻게 되고[9], 인질생활을 하던 중인 1447년에 헝가리와 반대파 귀족들의 공격을 받은 아버지와 형 미르체아 2세가 참살[10]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를 얻어 왈라키아로 진군하여, 공작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 헝가리의 반격으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2.3 몰다비아에서
헝가리의 공격으로 폐위된 뒤 블라드 가시공은 외숙 보그단이 있던 몰다비아 공국으로 피난했다.[11] 블라드는 이 곳에서 외숙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후 거의 영구적으로 동맹 관계가 될 사촌 슈테판 3세와 친교를 쌓은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몇년 뒤 숙부가 암살되고 몰다비아가 혼란에 빠지자 블라드 가시공은 몰다비아를 떠났다.
2.4 야노슈 후냐디의 제자
몰다비아에서 사라진 블라드 가시공이 다시 나타난 곳은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였다. 헝가리에 온 그는 헝가리의 섭정이자 "기독교 세계의 방패", "백색 기사"로 불린 명장 야노슈 후냐디를 찾아갔다. 야노슈 후냐디는 블라드 2세 생전 그와 자주 다투었고, 블라드 2세를 공격하여 그가 귀족들에게 살해당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도 찾아간 것이다. 이는 가시공이 오스만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보여준다. 찾아온 블라드에 대한 후냐디의 반응도 놀라운데, 그는 블라드를 환대하고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이 시기 동안 블라드는 야노슈 후냐디에게 전략,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
1456년 블라드 가시공에게 드디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헝가리가 공작으로 세웠지만 오스만측으로 배반한 블라디슬라프 2세를 토벌하고 왈라키아 공에 오를 것을 명받은 것이다. 블라드 가시공은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가 블라디슬라프를 죽이고 공작에 올랐다.
2.5 가시공
상술한 바와 같이, 블라드 가시공이 즉위했을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자리는 툭하면 귀족들이 공작에게 반란을 가해 죽이는 하극상이 끊임없이 지속되었던 상황이었고,[12] 공국 내에선 잉글랜드계와 독일계 상인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물건을 팔아 주민들의 괴로움은 극에 달해 범죄율도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블라드 가시공은 가혹한 인질 생활로 인한 성격파탄 증세와 주변의 더러운 상황에 의해 전쟁포로와 범죄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주민들을 항문을 꼬챙이에 끼우고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벌을 도입하는 등... 잔혹한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체페시(Ţepeş, 가시)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13]. 또한 공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계 상인들을 탄압했는데 일순간에 특권을 잃은 독일계 상인들은 이후로 가시공을 증오하게 되어 그의 만행을 과장하거나 날조하여 선전하였고 관련 인쇄물로 적극적으로 만들어 퍼뜨렸다. 실제로 가시공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이후에 생겨난 잔학한 가시공의 이미지는 여기서 기인하는 바 또한 크다. 또한 강력한 세력으로 공국의 내정을 농단하면서 가시공의 아버지와 형제를 죽게 만든 귀족 세력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했다.[14]
다만 이렇게 잔혹하기는 해도 공정함 또한 극히 강조하였다. 게으르거나 사소한 범죄라도 엄단했으므로 그 공포심 때문에라도 범죄율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 시대의 일화에서는 황금컵을 마을 광장에 놔두어도 가져가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15]
비슷한 일화로 한 상인이 상품과 돈을 잔뜩 가지고 가시공의 영토를 지나가게 되었다. 도중에 도적떼에게 강도당할 것을 두려워한 상인이 가시공을 알현하여 선물을 바치고 호위를 요청하였다. 이에 가시공은 화를 내며 어느 누구도 너의 재산을 강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인의 우려대로 짐을 도둑맞고 말았는데 이에 가시공은 포고를 내려 도둑맞은 그 마을에 상인의 짐을 돌려놓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짐은 돌아왔는데 가시공은 짐을 상인에게 돌려주면서 몰래 금화 한 닢을 끼워놓았다. 상인은 되찾은 짐을 확인하다가 금화가 한 닢 더 있는 것을 보고 가시공에게 가서 그의 사건 처리를 찬양하면서 금화가 한 닢 더 있더라면서 내놓았다. 이에 가시공은 "네가 그 금화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널 가시에 꿰어 죽였을 텐데."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공정함에 대해서 널리 알리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블라드 가시공의 종교적 신앙심은 대단해서 대부분의 정적들을 죽인 후에는(설령 미워했던 원수라 하더라도) 그들이 천국[16]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뤄주었으며 곳곳에 동방정교회 성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자신의 잘못을 신앙심으로 메꾸려는 시도였다. 당시 동유럽은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마저 무너져 왈라키아가 동방 정교회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라는 도시는 콘스탄티노플 이후 동방 정교회 사상의 중심지였다.
가시공의 치세는 이 지역의 성채 축조가 절정에 이른 시기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왕궁부터 요새급으로 중축했고 수도 트르고비슈테의 방어를 위해 남방에 부쿠레슈티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다. 트란시바니아와의 접경지대에 포에나리라는 요새를 축조한 것도 가시공이다. 이는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 '사라진 문명' 에서도 다룬 바 있다.[17]
2.6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
한편 블라드는 즉위하자마자 헝가리와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아버지 블라드 2세가 오스만 제국에 바치기로 약속했던 연공을 바치지 않았는데, 결국 복위 4년째인 1459년에 오스만 제국 쪽에서 연공을 바치지 않는 이유를 따지기 위해 사절들을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가시공은 사절들이 감히 공작인 자신의 앞에서 '모자' 를 벗지 않는다는 이유[18]로 모자를 쓴 채 머리에 대못을 박아 죽이라고 명령했고,[19] 그로써 오스만 제국과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그리고 1차 원정을 온 함자 파샤의 군대를 매복한 뒤 일제 사격하여 죽이거나 포로로 잡고, 함자 파샤를 비롯해 포로로 잡힌 오스만 제국군을 모두 꼬챙이형에 처했다[20]. 이후 가시공의 선공에 의해 불가리아 일대의 오스만 진지가 파괴되고,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이 왈라키아로 이탈했다. 왈라키아의 항구 파괴를 목적으로 나선 오스만 제국 재상 마무드 파샤도 실패하자 결국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흐메트 2세는 친히 왈라키아를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에 맞선 블라드 가시공의 전략은 매우 뛰어났는데, 청야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했고, 본인이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진지를 기습했으며,[21] 오스만군이 진군하는 곳마다 포로들의 시체를 걸어놔[22] 용맹스러운 예니체리(오스만 정예 보병대)와 시파히(오스만 기병대), 실라흐타르(술탄의 용기병대)들도 겁을 먹게 만들었다. 그 절정은 트르고비슈테 성채를 둘러싼 꼬챙이 무더기였다. 심지어 전염병에 걸린 병사나 시신을 오스만 군 진영에 보내어 병을 퍼트리는 일종의 생화학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군은 블라드의 전술에 겁을 먹고, 왈라키아의 수도 트르고비슈테를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퇴각하기로 결심했다.
2.7 패배
하지만 이러한 블라드 가시공의 노력도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한 차례 패배했다고는 해도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막강한 수준이었으며[23], 블라드가 동원한 왈라키아군은 현대 루마니아의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Radu Florescu)에 따르면 외국 용병에 보통 징집 대상이 되는 나이의 남자는 물론 아녀자들까지 긁어모아도 3만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수도까지 내주었던 만큼 왈라키아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 라두의 오스만 군이 가시공의 요새이던 포에나리를 함락하자 귀족들이 블라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결국 왈라키아는 블라드의 동생이자 예니체리 군단장에 올라 있던 라두를 앞세운 오스만 제국의 3차 원정군 앞에 무너지고 말았고, 라두가 라두 3세(Radu III)로서 후임 공작으로 취임했다[24]. 결국 블라드는 동맹이었던 헝가리로 피신하여 왕 마티아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지만, 마티아슈는 그를 돕기는커녕 포로로 잡아 장기간 [25]감옥에 가두었다. 이는 당시 헝가리는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고. 양쪽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일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26] 마티아슈의 친척 일로나와 결혼하는 등의 노력을 한 끝에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과 왈라키아 귀족들 가운데 일부의 협력을 얻어 당시의 공작 바사랍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27].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군과 싸우다 죽었는데[28], 향년 45세. 서기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의 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군이 그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 꿀에 절여서 이스탄불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3 왈라키아 공 재임
블라드 가시공의 왈라키아 공 재임기는 다 합쳐봐야 7년도 채 되지 않으며(약 6년 반 가량 된다.), 그마저도 세 차례에 걸쳐 집권하고 쫒겨나고를 반복했다.
- 1차 재임기 : 1448년 가을(약 두 달 가량. 오스만 제국의 지원으로 즉위했으나 곧바로 헝가리에 의해 쫓겨나, 몰다비아로 도망쳐왔다.)
- 2차 재임기 : 1456년~1462년(헝가리의 지지를 얻어, 복위에 성공. 블라드 가시공의 원조 전설이나 말뚝형에 관한 설화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긴 재임기간이였지만 겨우 6년밖에 다스리지 못하고 오스만 제국에 밀려나서 실각하고 헝가리에게 배신당해 감옥에 갇혔다.)
- 3차 재임기 : 1476년 가을(헝가리와 몰다비아, 왈라키아 일부 귀족들의 도움으로 재차 복위했지만, 오스만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죽었다[29].)
4 평가
조국을 오스만에게 지키려고 한 영웅이자, 군주권을 위해 잔혹한 학살과 공포 정치를 일삼은 폭군
현대에는 구국의 영웅과 잔혹한 폭군이란 평가로 논쟁되고 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고
루마니아인들에게는 비록 잔혹하기 짝이 없었지만 항상 서민들 편에 서서 정의를 추구했던 블라드 가시공을 위대한 영웅이라 칭송했고, 세상을 잃더라도 옮음을 실행하라라는 의미의 라틴어 격언인 'Fiat justitia, Pereat Mundus'의 상징이자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인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의 시대를 부정적이고 오만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정의의 시기(루마니아어: un timp al drepatatii)'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블라드 가시공의 잔혹함이 도를 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어느 정도 귀족과 상인을 억누르는 것은 필요했고, 실제로 그렇게 루마니아에서 법치가 확립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공포를 기반으로 한 통치였기에 귀족들은 그에게 진절머리를 냈다. 귀족들의 전횡과 그들에 대한 원한이 컸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의 국가의 최고 실권자로서 어느 정도는 귀족과 협력하거나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단결력을 강화할 필요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그 귀족들은 블라드 가시공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이건 블라드 가시공 개인의 통치자로서의 정치적 능력의 부재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30]
5 그 외 일화
러시아의 폭군이자 현군이었던 이반 뇌제가 그를 존경하여 블라드 가시공의 잔인한 통치방식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드라큘라 전설'은 크게 독일어권, 슬라브어권, 루마니아어권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독일어권의 전설은 주로 잔혹한 행동과 통치를 강조하는 내용이 많으며[31], 슬라브어권의 전설은 거기에 더해서 드라큘라가 말년에 가톨릭 교도로 개종한 것을 비난하는 내용이 섞여있다. 루마니아 지역의 전설은 상대적으로 잔혹함보다는 공정함과 엄격함[32], 민족주의를 더 강조하는 편이다.
5.1 흡혈귀 이미지
블라드 가시공이 죽은 후 얼마 뒤 공교롭게도 인쇄술이 발달하였다. 대체로 블라드 가시공의 잔학함을 비난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민담집이 독일 일대에서 인쇄술의 초기 저작물로서 퍼졌다. 사실 이때만 해도 유달리 잔혹한 폭군 정도의 이미지 정도만 있었다. 굳이 독일에서 이런 민담이 퍼진 것은, 가시공에게 된통 당한 독일 상인들의 피해 사례(…) 보고집의 이미지도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또 루마니아 민담에서도 블라드 가시공과 흡혈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또한 현재 드라큘라성으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브란 성은 사실 블라드 가시공 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일절 없는 곳으로[33], 그냥 소설 《드라큘라》에 나오는 드라큘라성의 모티프가 되었을 뿐이다. 심지어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등은 1989년 전까지는 루마니아에서 아예 그 존재를 몰랐다고 카더라(…).
블라드 가시공이 흡혈귀 전설과 연관된 건 1897년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가 처음이었다. 스토커의 초고에서는 제목과 흡혈귀의 이름도 왐피르 공(Prince Wampyr)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브람 스토커가 작품을 위해 조사를 하다, 블라드 가시공의 별명 드라큘라가 간지폭풍이라고 여긴 나머지(...) 흡혈귀의 이름을 드라큘라로, 출신지를 루마니아로 정해버린 것. 그래서 그런지 소설 드라큘라의 흡혈귀와 블라드 가시공간에는 공통점은 거의 없다. 작위부터 공작이 아니라 백작이며, 소설에서 언급되는 성장과정도 블라드 가시공과 딴판이며, 유명한 말뚝형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중에서 미나 하커가 조사를 하며 "이 놈은 오스만 제국과 싸운 그 드라큘라임에 틀림없다"라는 언급을 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 드라큘라가 엄청난 대박을 치고, 기존의 흡혈귀 소설, 민담들을 완전히 뛰어넘어 흡혈귀의 전형이 되어버린 것. 이 상황에서 드라큘라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블라드 가시공에게 이 이미지가 덧씌워져 버렸다. 결국 1975년 프레드 세이버헤이겐(Fred Saberhagen)이라는 작가가 소설 《드라큘라 테이프》에서 "블라드 가시공이 바로 그 소설 드라큘라의 드라큘라다!"라고 한 것을 시작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블라드 가시공=드라큘라라는 창작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 중 유명한 것만 봐도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 히라노 코우타의 만화 《헬싱》, TV 드라마 《영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한 에피소드,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소설 《히스토리언》의 '체페슈'라는 캐릭터 등등이 있다.
당연히 루마니아인들은 서구의 온갖 매체들이 만들어낸 흡혈귀로써의 블라드 가시공의 이미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소설 《드라큘라》나 드라큘라 관련 영화가 출판금지되는 등, 서구권의 왜곡에 맹렬하게 항의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망하고 서구권에 개방된 후에는 오히려 《드라큘라》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관광산업을 개발하는 중... 이래저래 돈이 웬수(…).[34]
그나마 블라드 가시공에게 위안이 되는 거라면, 흡혈귀 드라큘라의 명성 덕에 덩달아 블라드 가시공의 명성도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 오늘날 블라드 가시공은 그와 마찬가지로 당대 메흐메드 2세의 오스만 제국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던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메흐메드 2세에게 대승을 거뒀으며 블라드 가시공과 관련이 깊던 헝가리의 야노슈 후냐디와 마티아슈 1세 부자, 어쩌면 메흐메드 2세 본인보다도 세계적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6 대중문화 속의 블라드 가시공
생전의 업적들이 알려지면서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형 마왕물이나, 위악자로 재평가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 동방프로젝트 - 레밀리아 스칼렛이 스스로 블라드 체페슈의 먼 후예라고 칭한다. 동방홍마향 6면 졸개전의 필드 배경음도 '체페슈의 어린 후예'이다. 다만 제작자인 ZUN은 '사실 체페슈의 혈통을 이어받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 대항해시대 3 - 대항해시대 3에서는 브라도 공으로 등장하며, 발견물 중 하나인 흡혈귀에 해당한다. 도서관에서 흡혈귀에 대한 힌트를 얻고 육상 탐험을 통해 부쿠레슈티를 찾은 다음, 성에 들어가면 된다. 발견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백작의 제안으로 하룻밤을 지내야 할 상황에서[35] 집사의 도움을 받아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 둘째는 백작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하는 것이다. 다만 백작은 체력이 100으로 대항해시대 3에서 가장 강한 상대 중 하나이며[36]], 일기토에서 패하면 바로 게임 오버이므로 일기토 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발견 조건을 충족시키면 '제혈여왕'이라는 복식품을 증거물로 얻게 된다. 어차피 일기토 안 해도 발견물은 얻을 수 있는 데다, 일기토를 벌일 경우 악명이 50 올라가므로 괜히 져서 게임오버당할 위험이 있는 일기토를 할 필요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기토 하는 게 더 멋있잖아?오밤중에 집사 따라 도망 나오는 건 아무래도 모양이 좀 빠지지
-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 어린 시절에 투르크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그 용맹함으로 '용의 아들(드라큘라)'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투르크의 메메드 2세의 전쟁 선포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부러진 이빨' 산에 올라 그곳의 괴물과 계약하여 힘을 얻는다. 인간의 피만 마시지 않으면 사흘 뒤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이용해 전쟁이 끝난 뒤 인간으로 돌아올 참이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인간의 피를 빨아 완전한 흡혈귀로 변한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흡혈귀가 되었다는 이야기.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에서 악의 조직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설정되어있다.
흡혈귀로 나오는 다른 매체들에서 받는 대접과 다를 게 뭐야1476년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왈라키아를 침공할 때 오스만의 고관이기도 한 암살단원 이샤크 파샤에게 암살되었고 그의 목과 검은 콘스탄티노플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레벨레이션 특별판 예약구매 특전으로 그의 검과 머리가 보내진 "블라드 가시공의 감옥"에서 "블라드 가시공의 검"을 얻을 수 있다. 저 검이 좀 물건인데, 적병을 죽일 때 피니시가 잔혹하게 바뀌며, 죽일 때마다 주변 적군의 사기를 꺾어서 도망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참고로 이 감옥을 뒤질 때는 게임 분위기가 완전히 호러로 변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더 포가튼 : 캠페인 중 하나로 나오며, 블라드 체페슈가 정권을 잡고 왈라키아의 대공이 되어 오스만과 싸우는 과정이 나온다.
- 영웅의 군단 - 블러드 체페쉬로 나오며 브란성의 성주이지만 비중은 공기...
- 영웅전희 - 다른 역사인물들처럼 모에화되어 등장하며 스탠딩 CG에서는 말뚝이 박힌 곰인형을 들고 있다. 황당하게도 등용할 수 있는 지역이 오스트레일리아인데, 이후 플레이어가 트란실바니아를 점령하면 개인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다.
- 카사비안의 3집에 수록된 'Vlad The Impaler'
- 퇴마록 - 세계편에서 영혼으로 나온다. 루마니아에 가서 연희와 영혼이 만나는데 미래 사람들에게 흡혈귀 대명사로 자기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야길 하며 씁쓸해한다. 연희와 대화를 하면서 연희의 눈빛을 보더니 자신의 아내와 같은 느낌이 든다며 아내의 눈빛을 보면 죄책감에서 잠시 남아 벗어날수 있다고 하다가 연희가 부르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고 하고 잠깐 사라진다. 코제트와의 싸움이 끝난후 지하동굴이 무너지려고 할때 연희가 도움을 요청하자 다시 나타나 어느 한벽을 가리키며 "흡혈귀의 관은 크로커스의 것이라오[37]"라며 말을 남기며 사라진다. 준후의 말로는 고통의 방황에 벗어나 승천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참고로 블라드 3세가 아닌 4세로 번역이 되어 있다.
- 참고로 여기서 후반 아카드의 능력에 의해 자신의 나라의 인간들과 적국의 군대모두 다 튀어나온다. 즉 왕이 그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교적 별 상대도 안되는 나라 하나 잡다가 자기들의 군대 대부분이 빨려버린 셈.(...) 그리고 묘하게도 현실에서 블라드 가시공의 나라를 멸망하게 한 원인인 군인들이 여기선 아카드의 무적의 원인이 된 게 아이러니.
근데 슈뢰딩거 때문에 아카드가 30년동안 생명들을 하나하나 족쳐주는 귀찮은 일을 하게 했으니 그나마의 복수는그래봤자 어차피 생명하나가 무한급이 된지라 상관없지만
- 흡혈마법소녀 G쨩 - 드라큘라 백작
- 별개의 인물이지만 설정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 이쪽은 광기에 빠진 흡혈귀로서의 드라큘라를 형상화했다.
- 이 쪽은 루마니아의 영웅으로서의 블라드 가시공을 형상화했고, 그 때문에 바로 위의 항목의 랜서로 대표되는 흡혈귀로서의 이미지를 부당하게 여긴다.[38]
오죽하면 힘줄을 띠운 채로 "어이쿠, 무심코 찢어버렸군 하하하."라고 말하며 억지로 웃으면서 드라큘라 책을 찢는 일러까지 있겠는가.
- 이 쪽은 루마니아의 영웅으로서의 블라드 가시공을 형상화했고, 그 때문에 바로 위의 항목의 랜서로 대표되는 흡혈귀로서의 이미지를 부당하게 여긴다.[38]
- Apocrypha와 동일한 면모지만 보구에 의해 흡혈귀 드라큘라가 되어 현현하고 만다.
7 참조 서적
- 드라큘라 , 그의 이야기 (레이몬드 맥널리 & 라두 플로레스쿠)
- 신화의 나라 드라큘라의 나라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 ↑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어 표기인 '발라히아(Valahia)', 혹은 '문테니아(Muntenia)'라고 불러야 하지만 여기선 그냥 '왈라키아'라고만 부르겠다.
- ↑ 다만 바로 위에 영어로도 쓰여 있지만, 정확히 직역하자면 '가시 또는 꼬챙이' 라기보다 가시나 꼬챙이로 '꿰뚫는 자' 라는 뜻이다.
- ↑ 헝가리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헝가리어식으로는 지그몬드)가 1408년에 창설한 기사단으로, 오스만 제국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걸고 설립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상서롭게 여긴 동물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악한 존재로 여긴 용을 상징으로 삼은 것은 조금 의아한 부분이지만, 15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번영했다.
- ↑ 혹은 용의 사악함에 빗대어서 악마공(惡魔公)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고 하나, 설득력은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블라드 2세 자신은 딱히 '사악' 하다고 볼 수 있는 행적을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드래곤 기사단에 가입하면서 지기스문트로부터 드라쿨이라는 별명을 받은 것이기 때문.
- ↑ 블라드 가시공이 아니다. 이 사람은 수도공이라는 별칭을 갖는 사람이다.
- ↑ 블라드 2세가 이들과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가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고 실재로 시기쇼아라의 성벽은 당시 옛 루마니아의 성채 중 가장 견고했지만 권좌에 오른 블라드 3세는 이들과 같이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또다른 색슨족의 도시인 브라쇼브를 공략하는데 써먹기도 했다.
- ↑ 당시 왈라키아는 공작 라두 1세(재위: 1377~1383)의 장남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와 차남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로 갈려, 수시로 정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발칸 반도의 두 강국인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는 왈라키아를 서로에 대한 완충지대로 인식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공작을 즉위시키려 하고 있었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면 자다가 일어나면 공작이 교체되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또한 1436년에 즉위하였으나 1442년에 퇴위하여 아들 미르체아에게 자리를 넘겼으나 1443년 야노슈 후냐디의 공격을 받고 축출되었다가 같은 해 오스만 제국과 조약을 맺어 지원을 받은 것이다.
- ↑ 가시공은 죄수를 항문에 말뚝을 꽂아 죽이는 형벌로 유명해지는데 이 형벌은 사실 양성애 성향이 있던 메흐메트에게 성폭행, 즉 항문성교를 당했던 기억이 남아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형벌로 발전한 것이라는 설.
- ↑ 이전 버전에서는 '매국노' 라고 되어 있었는데, 블라드 가시공과 사고관이 조금 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매국노' 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다. 실제로 그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왈라키아인의 지위 상승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즉 오스만의 지배는 기정 사실이므로 저항해 봐야 무의미하고, 제국 내에서 왈라키아인의 지위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
- ↑ 형 미르체아가 특히 끔찍한 죽음을 당했는데, 산채로 눈이 뽑히고 매장당했다. 형의 무덤을 이장하려고 파봤더니 관 속에서 관뚜껑을 손으로 마구 긁은 자국이 발견되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 ↑ 상술했듯 가시공의 친모는 불명이다. 그러나 이런 가시공의 행동이 그의 친모가 몰다비아의 귀족 여성이 아닌가 추측하게 하는 근거이다.
- ↑ 한 명의 젊은 귀족이 몇 년 사이에 30명의 주군을 섬길 정도로 공국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다만 당시 왈라키아 공작의 임기가 7~8년이면 오래 집권한 쪽에 속했고 심하면 1,2년만에 갈려나가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저 문제의 30명 운운하는 것은 왈라키아의 귀족들이 공작을 능멸하는 언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 '인류에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하라고 했다고.
- ↑ 그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파게 하고 거기에 묻어죽였다.
- ↑ 다만 그 처벌 강도가 너무나 높았으므로 제대로 된 의미의 치안 확립이라고 하기는 조금 힘들다. 게다가 한 사람이 잘못해도 마을 전체가 책임져야 하는 면도 있었기에 더더욱.
- ↑ 동방정교회는 연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죽은 이들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하는 기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 이후 왈라키아가 투르크에 복속되면서 성채축조는 금지당했다고 한다.
칼사냥? - ↑ 여기에서의 '모자'는 당연히 터번을 가리킨다. 터번을 술탄 앞에서도 벗지 않는 게 우리네 관습이라고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는데도...
- ↑ 터번을 벗는 것은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다는 말에 "그딴 관습은 너네 동네에서나 지키시던지"("벗기 싫거든 그럼 평생 안 벗게 해줄게"라고 했다고도 하고)라면서 터번 위에 신발을 같이 못질해서 그걸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까지 떡하니 실어 보냈으니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안 빡칠 리가 있나. 이슬람에서 '신발'이 어떤 의미인지는 신발투척 참조.
- ↑ 이 전투로, 블라드는 유럽의 군주들 가운데 오스만 제국에 맞서 총기를 사용한 최초의 군주가 된다. 한편 이때 격파한 오스만 제국군의 총사령관인 함자 파샤는 지위에 걸맞게 특별대우하기로 결정하는데, 꼬챙이 가운데에도 가장 높은 꼬챙이에 꽂으라는 것(...)이 그것.
- ↑ 이 전투는 '공포의 밤' 전투로 불렸으며 1462년 6월 17일에 벌어졌다. 루마니어어로 Atacul de noapte(영어로 해석하면 The Night Attack)라고 불리는 전투이다. 이날 하룻동안에만 1만 5천여 명의 오스만군이 죽었다.
- ↑ 그것도 자국민들에게 행한 형벌을 그대로 채용, 꼬챙이에 꽂아 죽을 때까지 전시해 놓는 잔혹한 방법을 사용한다.
- ↑ 황제가 친정한다고 하면 10만 대군이 기본이었다.
- ↑ '라두 셀 프루모스(Radu cel Frumos)'. 즉 '미남공(美南公) 라두'라고도 한다.
- ↑ 정확히 몇년 동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인 추측으로는 피신한 1462년부터 가시공이 일로나와 결혼하는 1466년까지.
- ↑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유폐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용서를 받아서 감옥을 빠져나와서 헝가리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왈라키아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부다페스트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 ↑ 블라드의 동생 라두는 이미 죽었으며, 그는 공작으로서의 치세 말에 바사랍 3세와 공작 자리를 빼앗고 빼앗기는 내전을 벌였다.
- ↑ 부카레스트와 지우르지우(Giurgiu) 사이의 어느 지점이라고 추정될 뿐이고, 죽음에 대해서도 오스만 제국군에게 살해당했다는 것부터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 협력하기로 약속한 귀족에게 배신당했다는 이야기, 부하의 실수로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 ↑ 위의 각주와 같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므로, '전사했다' 라고 못박지는 말자.
- ↑ 물론 아버지와 형을 죽게 만든 귀족들과 협력하기 쉬웠을 리는 절대 없다. 그 귀족들이 아버지와 형을 어떻게 죽였는지 생각해본다면...
- ↑ 아이를 죽인 다음 요리해 그 어머니에게 먹인다든가, 여자의 젖가슴을 잘라 남편에게 먹인다든가 하는 흠좀무한 내용도 많다.
- ↑ 한 농민이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불러서 너 부인 없냐, 부인이 건강하지 못하냐, 하는 걸 물어보더니 "남편이 가족들을 굶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이 약한 것도 아니면서 왜 니 마누라는 자기 남편한테 허름한 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게 놔두냐?"하면서 그 아내를 잡아다 양손을 잘라 처형해 버리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게 했다고.
- ↑ 차라리 브란 성은 드라큘라의 정적과 크게 연관이 있다고 말하는게 좋을 성이다.
- ↑ 만화가 이원복은 자신의 만화 현대문명진단에서 이 모습을 드라큘라를 보면서 무서워하기는 커녕 $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도리어 드라큘라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흡혈귀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가 드라큘라의 피를 빨아먹으려 드라큘라를 쫓아다니는데 드라큘라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 좀 그만 빨아먹어라"라고 도망다니면서 신세한탄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 ↑ 처음 성에 들어가려고 하면 낮에는 손님을 받지 않으니 밤에 다시 와달라고 하는데, 두번째 방문했을 때 백작이 이왕 손님으로 왔으니 저녁식사를 대접하겠으니 같이 먹자고 권하는 선택지가 뜬다. 식사를 먹는다고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날 밤에 백작의 야식으로 전락하며 바로 게임오버(...)가 뜬다. 저녁을 거절하면 왜 찾아왔냐고 물어보며 세가지 선택지가 뜨는데, 백작을 쓰러뜨리러 왔다는 선택을 하면 바로 일기토로 넘어간다.
- ↑ 부관을 시켜 싸울 경우 천하의 로꼬라도 멈칫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력까지 감안하면 체력 100에 무력 98인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이 가장 세다.
물론 롱기누스의 창에 신전기사단 갑옷이면 둘다 그냥 눕는다 - ↑ 참고로 크로커스는 블라드공이 죽인 보얄중의 한명. 그런 크로커스의 영혼을 코제트가 크로커스의 관을 찾아 옮겨놓아 흡혈귀로 만든 것임
- ↑ 자신이 생전에 한 행동으로 인한 악명은 긍정하지만 19세기 영국에서 뜬금없이 뒤집어 쓴 오명이라 혐오한다. 게다가 흡혈귀 드라큘라로서의 기억이 강제로 섞여있다보니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