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공 이순신

李純信.
1554~1611

1 개요

조선무신. 자는 입부(立夫). 시호는 무의공(武毅公), 봉호는 완천군(完川君)이다. 명장 충무공 이순신과 발음이 같지만 한자는 다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부관을 맡기도 했다. 흔하지도 않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모두 동시대의 무신이며 심지어 사적으로 친한 절친 사이에다가, 전쟁까지 같은 부대에서 부하와 상관으로 함께 한, 그야말로 엄청난 인연이다. 그래서 둘을 구별할 때는 보통 시호인 '충무공'과 '무의공'으로 구분한다.

전주 사람으로 양녕대군의 후손. 즉 왕족이다. 양녕대군의 7대손으로 나이는 이억기보다 10살 정도 많은데 항렬은 더 낮다. 왜란 발발 당시에는 방답 첨사였으며, 칠천량 해전 이후에는 도망간 배설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로 승진하였다. 전쟁 기간 내내 충무공 휘하에서 수군 지휘관으로 일했다.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사망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부대를 이끌고 개선하여 전투를 마무리 지었으며, 전후 훈련대장직에 올랐고 선무훈이 되었다.

보통 기록에서 '이순신이 무예가 뛰어났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 '입부 이순신'을 말하는 것이며, 우치적과 더불어 양대 명궁이라고 한다. 통념과는 달리 충무공은 무과 낙방도 그렇고, 난중일기의 기록[1]으로 볼때 딱히 명궁이라고 할 정도는 못 되었던 것 같다. 물론 현대 기준에선 상당한 실력의 사수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쏘기가 무관은 물론 양반들의 기본 소양급이었던 조선 기준으로는 그렇게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충무공은 지장(智將)이었고, 무의공은 무예에 능한 장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무예도 우수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보좌해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능력있는 장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명이인에다 먼치킨사기 캐릭터상관 때문에 묻혀버린 조금 안습한 인물.

거기다가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뇌물 수수혐의로 탄핵받아 사임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뇌물 수수 및 부정을 저질러 여러 번 탄핵받은 기록이 있어서 본인의 명성에 흠이 많이 있는 편.[2][3]

충무공과는 공적으로는 지휘관과 부장의 사이였으나 사적으로는 거의 가까울 정도로 허물없는 매우 절친 사이였다. 그래서 두 이순신들은 전투가 없는 날은 같이 승경도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면서 같이 놀았다. 이후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하게 되자 첫날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위로하였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을 정도.

묘는 광명시에 있는 서독산에 위치하고 있다.[4] 고속철도 광명역 근처이다. 향토유적 제4호이며, 산 아래에서도 잘 보인다.

2000년에 취역한 대한민국 해군 장보고급 잠수함 7번함은 바로 무의공의 이름을 따서 'SS-068 이순신함'으로 명명되었다. 충무공의 이름을 딴 KD-2 구축함의 초도함은 3년 뒤에 취역하였는데, 동명이인의 이름이 붙여진 함이 이미 있다보니 구분을 위해 시호까지 넣어 DDH-975 충무공 이순신함이 되었다.[5]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이순신함(잠수함)의 함명을 무의공이 아닌 충무공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의외로 흔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9대조 조상이다.

2 미디어에서의 무의공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태조 왕건에서 견훤의 아들 금강 역을 맡았던 전현이 무의공 이순신 역을 분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하도 "예산"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캐릭터로 그려졌는데, 그 때문 인지 세무사라는 애칭이 있다.[6] 불멸의 이순신 스페셜에서 그의 드라마 속 '예산 퍼레이드'를 편집한 장면이 있을 정도.[7]

웹툰 포천에서도 등장. 무예가 뛰어나나 교만하여 여러번 탄핵된 적이 있다고 설명되었다. 주인공 이시경도 그의 점을 봐주면서 속으로 '큰 인물이 될 상이지만 오만방자한 성격 때문에 발목을 잡을 것'이라 하였다.

KBS 2TV의 주말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의 주인공 이순신은 무의공 이순신과 같은 한자 표기를 사용한다.

웹툰 조선왕조실톡 28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같이 활을 쏘는 것은 무의공이 충무공을 1:1 과외로 가르친 것으로 해석되었다. 뇌물을 받은 일은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1. 40발을 쏴 30발 넘게 맞추면 기뻐하며 일기에 기록했다.
  2. 비슷한 경우로 세종 시대의 박연이 있다. 음악에 대한 재능을 높이 사서 세종이 아꼈지만…
  3. 근데 뭐 이 시대의 장군치고 충무공 급으로 대단한 장수는 정말 드물었다. 어찌보면 이쪽도 그 당시에서는 평균이나 평균 이상의 수준일듯
  4. 실제로 그의 거처도 당시 기준으로 경기도 금천현 서면 일직리였다. 이 지역 일대가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시흥시 서면을 거쳐 지금의 광명시 일직동으로 들어간 셈.
  5. 외국에서는 실존인물의 이름을 함명으로 쓰면서 본명 뿐만 아니라 작위나 계급, 직책 등 다른 호칭까지 넣는 경우를 비교적 쉽게 볼 수 있지만, 지명만을 써 오다가 한국형 구축함 시리즈에서 처음 인명을 함명에 쓰기 시작한 우리 해군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6. 하지만 애초에 맡은 그 시대 역할이 오늘날로 치면 세무사이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7. 하필 전현은 이후 정도전에서도 '토지와 경제 전문가' 조준 역을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