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1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죽었다는 기생

(1574년 9월 3일 ~ 1593년)

47ad347086824&filename=%EA%B5%AD%EA%B0%80%ED%91%9C%EC%A4%80%EB%85%BC%EA%B0%9C%EC%98%81%EC%A0%95.jpg
논개 표준영정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

전라북도 장수군 출신, 성은 주 씨라고 하나, 이는 양첩설과 함께 유포된 것으로 지방 전승이 출처라 근거가 희박하다. 이름인 논개를 '놓은(낳은)+'라고 해석하여 술년 술월 술일 술시에 태어났다고 보기도 하고, 논개라는 이름 자체가 본명이 아니라 일본군이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였다는 설도 있다. 의기 주씨(義妓朱氏)라고도 불린다. 현재 사과와 함께 장수군을 대표하는 마스코트로 쓰인다. 그런데 논개가 목숨을 끊은 지역인 진주시 또한 논개를 마스코트로 쓰는지라, 이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까지 벌어져 국사편찬위원회에 논개가 어디 사람이냐는 민원까지 제기한바 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1]에 최초로 등장하며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계사년(1593)에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를 근거지로 왜병과 싸우다가,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모두 죽었다. 이때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으니 아래는 만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면서 왜장을 맞았다. 왜장의 손이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자 논개는 왜장을 힘껏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다.

적장을 안고 뛰어내릴 때 손가락이 풀어지지 말라고, 아는 사람들로부터 반지를 빌려 열 손가락에 끼운 후에 손을 엇갈려 끼우고 뛰어내렸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가락지가 얼마나 두꺼운데 그걸 어떻게 열 손가락에 다 끼우지? 굉장하네 남강을 가르는 진주교에 가보면 논개를 기리기 위해서 다리 교각에 가락지가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고 아름다운 가락지다. 진주에 놀러가면 확인해보자.

-어우야담-[2]
婦人之性輕死。然其下者。或不耐忿毒。幽鬱而死。其上者義不忍汚辱其身而死。及其死。槪謂之節烈。然皆自殺其軀而止。至若娼妓之屬。自幼導之以風流淫蕩之物遷移轉變之情。故其性亦爲之流而不滯。其心以爲人盡夫也。於夫婦尙然。矧有能微知君臣之義者哉。故自古兵革之場。縱掠其美女者何限。而未嘗聞死節者。昔倭寇之陷晉州也。有妓義娘者。引倭酋對舞於江中之石。舞方合抱之。投淵而死。此其祠也。嗟乎。豈不烈烈賢婦人哉。今夫一酋之殲。不足以雪三士之恥。雖然城之方陷也。鄰藩擁兵而不救。朝廷忌功而樂敗。使金湯之固。失之窮寇之手。忠臣志士之憤歎恚恨。未有甚於斯役者矣。而眇小一女子。乃能殲賊酋以報國。則君臣之義。皦然於天壤之間。而一城之敗不足恤也。豈不快哉。祠久不葺。風雨漏落。今節度使洪公。爲之補其破觖。新其丹碧。令余記其事。自爲詩二十八言。題之矗石樓上。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인 사람은 분독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데 그친다. 창기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가 진주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을 기리는 사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을 하였으니 군신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정약용여유당전서 중 전주의기사기 번역출처

"논개는 기생이 아니라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양첩이었다"라는 주장이 있으나 논개에 관한 최초의 문헌인 어우야담에서 논개를 분명하게 기생이라고 적고 있다. 당대 유몽인이나 후대의 정약용조차도 '일개 이름없는 창기[3]도 절개를 지켰는데 사대부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논리로 하는 식으로 당대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논개 이야기를 인용했다.[4] 그러나 논개가 충절의 표상으로 국가적인 숭상을 받게 되자. 그녀가 기생 출신이라는 걸 부끄럽게 여겨 논개양첩설이 유포된 것. 대부분 1960년대 이후 나온 이야기라 신빙성이 없다. 그것도 최초 출처가 장수군 교육청이다. 장수군은 아예 안면 몰수하고 논개 생가지와 가묘까지 만들었다. 장수군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장수군과 논개 가지고 싸우는 진주시조차 이 논개양첩설은 채용해서 써먹고있다.
논개양첩설의 요지는 논개는 원래 양첩인데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죽이기 위해서 스스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렸다라는 것이다. 대중매체 중에선 MBC조선왕조 5백년이 이 설을 채택했다. 아울러 논개는 사실 불운한 사주(앞에도 언급했듯이 개띠해, 개띠월, 개때일, 개띠시)를 타고 났기 때문에 친정이나 시가에서도 배척받은 양민인데 최경회가 거두어서 소실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이야기도 KBS에서 단막극으로 80년대 방영했으며 이규태 선생도 이 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5] 2016년 4월 5일에 채널A에서 방영된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도 최경회의 첩으로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최경회의 복수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는 이 설을 채택하여 방영하였다.
소설가 김성한은 소설 임진왜란(김성한)에서 이를 어느 정도 절충해 '본래 장수군의 관기였다가 장수를 방문한 최경회를 모시게 되었고, 이후 최경회가 천첩으로 거둬들였다'라고 표현하였다. 물론 에필로그에서는 '논개는 기생이 분명하다'라고 단언하며 '기생이라는게 창피하다는 이유로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여간 역사적 근거는 하나도 없지만 지방자치단체나 관련 사업하는 곳에서 '논개는 사실 기생 맞음 내지는 실존인물인지도 불분명함'이라고 하면 봉변을 당하니 주의를 요한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알려진 일화는 계사년 제2차 진주성 전투진주가 함락되고, 성 안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을때 아름답게 치장하고 왜군의 승전 축하연으로 들어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적장을 해치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이때 죽었다는 기록은 한국 쪽의 주장이며, 이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료가 부족하고 임진왜란 후 일본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는 일본 쪽의 기록과도 맞지 않아,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아니 논개의 실체가 불분명하듯이 투신 일화자체가 거짓말일 수도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계월향에게 끔살당했다는 전설이 유포된 것과 같은 이치.

아무튼 그녀의 의거는 전후 진주 사족 및 주민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되며 너무나 유명해져서, 1722년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의기' 칭호를 받게 된다.[6] 진주기생들은 매년 6월 29일, 즉 진주성 함락일이자 논개의 기일에 모여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행사가 그대로 진행되었다. 현재까지도 매년 춘추제를 지내고 6월 중 길일을 잡아 3일간의 제전을 연다.

1970년대에 논개 위패를 일본에 기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90년대 후반 한 주간지가 이를 보도했는데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는 이 위패가 "왜장을 사랑한 조선 여인"이라는 왜곡으로 신사에 모셔져 있다고 비난했으며, 기증한 당시 진주시 시장을 친일파 급으로 비난했다. 이에 그 전직 시장은 한일친선이라고 변명했다. 부연하면, 1970년대에 우에츠카 히로우라는 일본인이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조선의 기생(즉, 논개)한테 살해당한 것을 알고, 승려로 위장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한일 친선을 핑계로 논개의 영정과 비석을 취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가묘와 논개의 가묘를 나란히 두고 이들을 부부로 조작한 것이다. 이후로 일본에서 논개는 부부 금슬의 상징(?!)이 되어 일명 '섹스의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다는 것.[7]

진주성 촉석루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논개가 왜장을 안고 떨어졌다는 바위 의암(義巖)이 있다. 어우여담에의 표현과 달리 만길 낭떠러지는 아니고 수면 위로는 사람 키 높이 정도다. 뭍에서 약 한 걸음 정도 떨어져 있어서, 건너다닐 때는 약간 조심해야 한다. 표면이 평평하고 물이 가까워서 시원하기 때문에 위에 앉아서 놀기 좋다. 봄이나 가을철 맑은 날 그 위에 앉아 멍 때리고 있으면, 햇빛도 따끈하고 강물도 반짝거려서 쉬기 딱 좋다고도 한다. 다만 너무 신나서 놀다가 가끔 논개의 뒤를 따르는 사람도 있는 모양.[8] 실제로 익사 사고가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곳이다. 강 자체는 천천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전형적인 하류형 강인 반면, 의암 주변은 물이 바위 사이로 흐르면서 아래로 빨려 내려가는 급류를 형성한다. 때문에 수영에 자신있는 사람이라도 위험한 곳이다.

의암은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그것을 경고하기 위해, 강변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사람이 건널 수 없게 된다고. 반대로 가까워져서 벼랑과 딱 붙으면 난이 터진다는 설화도 있다. 가까워져도 안 되고 멀어져도 안 된다실제로 자료사진을 보면 의암과 그 근처 벼랑의 거리는 줄곧 변하고 있다. 원인은 불명. 2000년대까진 의암 위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남긴 다양한 내용의 낙서가 가득했는데 2010년대 들어서는 다 없어졌다.

한편 북한에선 논개와 유사한 위상으로 계월향이란 기생을 기리고 있다.

논개 본인과는 별 상관없는 흑역사가 많은데 특히 황당하게 친일 쪽 인물과 많이 엮여있다.

친일파로 논란이 거센 모윤숙이 대하서사시 논개를 발표한 것이 대표적 흑역사이다. 여기서는 최경회가 아닌 김시민을 사랑한 관기로 묘사되고 있으며,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이 전사하자..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로 나간다.[9] 모윤숙이 해방 전후에 스캔들에 얽혀든바[10] 있고, 유엔군 고급 장교 접대용으로 낙랑클럽이라는 사교단체를 조직한 후 자신을 논개에 비유했다는 걸 본다면 이런 시를 지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cjnews_229891_1%5B319916%5D.jpg
두번째 흑역사는 영정이다. 이 3가지 그림은 모두 동일 인물의 작품으로, 좌측 부터 논개, 성춘향, 아랑이다. 우선 척봐도 얼굴, 자세, 의상 등이 하나의 그림을 원형으로 하고 있고, 고증은 엿바꿔 먹었다. 애초에 영정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미인도로 그린 것을 돌려막기한 것인데 영정으로 쓰고 있으니 이것도 문제. 두번째는 화가인데, 이 화가가 제자인 운보 김기창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화가로 꼽히는 이당 김은호이다. 친일 화가가 그린 논개영정, 이거야말로 블랙코메디다. 이 논개영정은 불행중 다행으로 표준영정으로 제정되지는 못했지만, 대신에 진주성에 있는 논개사당 의기사에 오랫동안 봉안되어 있었다. 결국 2005년 이 그림의 철거를 주장하면서 진주시 측과 대립각을 세우던 진주시민단체연합이 들고 일어나서[11] 이 그림을 강제 철거해버렸다[12]. 결국 장수군 의암사의 논개영정과 촉석루 의기사의 논개 영정은 모두 철거되었고, 이후 장수군과 진주시 사이의 지루한 공방[13]이 이루진 끝에 상단에 있는 표준영정이 제작되었다.

349407_264346_4742.jpg
그 밖에 흑역사로 2011년 제10회 '논개제' 때 했던 일명 '논개 체험' 행사가 있다. 의암 옆 수상무대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의암에서 강으로 뛰어드는 '논개 순국 재현극'이 펼쳐졌는데 왜장으로 꾸민 인형을 끌어안고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이벤트였다. 물론 난간 아래에 푸른색 에어매트가 있었고 안전요원도 있었지만 많은 어린이들이 이 행사 체험을 했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으며, 또한 페이스북에 관련 사진들이 올라오면서 시끌벅적했다. 관련 기사 결국 문제가 되었는지 그 다음 해부터 폐지되었다.

부산광역시이기대(二妓臺)에도 거의 똑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점은 기생 두 명이 왜장 하나를 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점.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2 1에서 파생된 칭호

인터넷 상에서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악역급 인물과 동귀어진한 인물에게 붙여주는 칭호가 되었다.

홍석천에게 붙여진 홍논개, 임요환에게 붙여진 임논개, 2009년 한정으로 심수창에게 붙여졌던 심논개 등.

스타판에서는 주로 프로리그에서 주로쓰는 용어인데, 일부러 상대팀 에이스가 나올 맵에 맞춰서 신예라든지, 상대적으로 자신팀의 에이스가 아닌 선수를 내면, 그 선수를 논개라고 지칭하고 이러한 작전을 논개작전으로 부른다.[14]

그리고 가끔 이런 논개가 에이스를 잡는 수훈갑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삼성전자 칸 vs CJ 엔투스 전에서 신동원을 잡은 유준프로. 당시 승기를 잡았을 때 찍힌 가을이횽의 피식하는 웃음이 찍히기도 했으며, 심지어 승자인터뷰에서도 유준희가 하는 말에서 김가을 감독이 유준희한테 너는 논개다.라고 그랬다고. 안습.

10-11 시즌 이영호, 송병구, 김구현 등 에이스들에게 줄줄이 패배하며 팀을 승리로 이끈(?) 이재호는 당시 아이디도 NoN.ge로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워낙에 투명하신 분인지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의 주인공인 김자연 성우를 두고 자신의 목소리를 희생해서 트위터에 숨은 메갈리아들을 끌어내고 메갈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었다며 반쯤 비꼬는 식으로 논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블리자드의 온라인 게임 오버워치의 영웅 라인하르트 빌헬름이 절벽을 향해 돌진해 적과 함께 떨어져 죽는 모습을 따 라인하르트를 논개하르트로 부르기도 한다.적만 떨어뜨리고 돌아오면 인성하르트라 카더라

해외에서의 예로는 레프트 4 데드 2의 카르마 차져가 있다. 레프트 4 데드 2/감염자 항목 참조.
  1. 사실 이게 최초의 기록이라서 주요 기록으로 전하긴 하지만, 어우야담은 야담집의 효시로 꼽힐 정도의 이야기책이다. 정식 역사서는 고사하고, 야사집으로도 많이 부족하다. 다만 어차피 사서기록이 없고 이후 일화와 일치되는 점이 많기 때문에 이걸 주요자료로 꼽을 뿐이다. 특히 어우야담은 선조 시기에 원본이 쓰여지고 200년이 지나서 순조시기에 활판본이 나왔으며 필사본만 30종이 넘어서 이 책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논개양첩설 같은 것의 신뢰도와는 별로 상관없다. 논개가 기생이었는지, 아니 애초에 이런 기생이 실존하긴 했는지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확인은 안된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2. 어떤 판본에는 이름 없는 기생이라고 되어 있고 후일에 논개라는 이름이 덧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지로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서는 이름없는 기생이라고 되어 있고 논개라는 이름은 없다.
  3. 정약용은 의기사기와 의기사중건기(사당 지은 이야기)를 썼으나 여기에는 논개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의기사에는 정약용이 쓴 글 외에도 일제시대의 기생 산홍이 쓴 시, 설창수, 변영로 등이 쓴 시가 남아있는데 논개라는 이름은 이들의 시에서만 등장한다.
  4. 유몽인은 광해군 계열이었기 때문에 인조반정 후에 주살당하고 어우야담도 오랫동안 금서가 되었다.
  5. 씨받이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이규태 선생의 조선야사의 경우는 일제강점기8.15 광복 이후에 나온 전설을 그대로 사실처럼 기록한 경우가 많다.
  6. 다만 이러한 기록은 국가의 정식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순조 대에 간행된 충렬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7. 2016년 4월 9일자 채널A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142회)
  8. 실제로 가보면 물에 발담그기 좋아 보이는데 바위가 약간 높다. 따라서 발만 좀 담그려고 슬슬 내려가다 미끄덩~ 하면 훅 가게 되고 마니 물놀이엔 항상 안전사고 조심하자. 그리고 아래에 나오지만 이런 문화재 급 신비한 바위에서 노는 건 좀 자제해야 될 듯.
  9. 김시민은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10. 인도 대표 제논과의 관계가 대표적. 저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모윤숙도 인정했고, 제논도 인정했다. 이걸 어느 계통출판사에서는 우정을 통한 민간외교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모윤숙과 제논 당사자들도 인정한 미인계이다.
  11. 김은호 그림 철거가 얼마나 시민단체들의 지지를 받았냐면, 진주에서 논개 그림 철거할 때 42개 시민단체가 연합했고, 성춘향 그림 철거하라는 종교계 발표가 있을 때 남원의 YMCA와 불교계가 같이 합동으로 발표했다.
  12. 이후 이 그림은 당국에 반환되었으며 일단 사과성명이 나왔다. 표준 영정 제작방침이 나온 뒤의 일이지만.
  13. 앞서 언급된 정통성 논란으로, 이 비용을 어떻게 부담할 것이냐를 두고 대립이 있었다. 장수군에서는 장수군을 팔아서라도 공동 제작이니 비용반분을 주장했고, 진주시는 아무래도 규모가 더 큰 진주시가 더 내야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표준영정의 원본을 어디에 두느냐 문제이다. 같은 화가가 같은 그림을 그려도 어느 그림은 표준영정 원본이 되고, 다른 그림은 같은 화가의 사본이 되는데 원본을 어디에 보관할 것이냐로 대립이 붙은 것이다. 김은호의 그림이 철거가 안된 이유중 하나가 이거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본은 진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었고, 촉석루 의기사와 장수군 의암사에 사본이 공개되고 있다.
  14. 사실 이런 방법의 원조는 손빈이다. 전차경주에서 이기는 방법(항목 참조)으로 "하급 전차를 상대의 상급 전차와, 중급 전차를 상대의 하급 전차와, 상급 전차를 상대의 중급 전차와 붙이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