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1 조선의 교육기관

1.1 소개

조선 시대 유교의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1.2 구조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로 크게 나뉘어 있다.

1.3 역할

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며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래서 서원은 교육기능과 교화기능을 주축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중기 사대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통합한 서원을 창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교육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 있어서의 교육의 목표는 인품이 훌륭한 성현을 본받고 관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학생들은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사서와 오경을 모두 익힌 다음에는 『가례』, 『근사록』과 같은 성리학에 관한 지식을 배우도록 했다.

정치적 혼란으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목표는 초기의 서원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서원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었던 것이다.

서원의 또 한 가지 기능인 교화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그리고 우리나라 18현 및 송대의 6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황이이, 송시열 등을 배향한 서원이 가장 많았으나 배향인물의 선택 폭에 있어서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한편 국립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 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다.

선현을 제사하는 기능 이외에도 서원은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다. 즉, 지방의 인재들이 모이는 집회소였으며, 학생들의 학문을 위해 다양한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책을 출판하는 기능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서원에는 ‘장판각’ 또는 장판고라는 서고가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서원은 지방의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로 설치된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사람을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원에는 다양한 유교문화가 존재하며 각종 의례와 도서보관, 출판과 문화, 정치적 여론 형성 등 복합적인 문화를 내포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다.

1.4 역사

서원의 기원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이미 당나라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형태는 송나라 때에 와서 완성되었으며, 특히 서원의 위상은 주자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서원이 설립된 것은 1542년이었다.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은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학문을 하던 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설립하였다. 안향은 중국의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세붕이 세운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이라 칭했지만,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황을 비롯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서원의 보급운동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리하여 명종대에 17개소에 불과했던 서원이 선조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에는 전국에 700여개소에 이르렀다.

서원은 지금으로 치자면 사립대학 정도의 위치이다. 유명한 서원들은 명문 사립대 정도라고 보면 된다. 서원의 부작용도 잘 보면 현재의 사학재단 비리와 비슷한 것들도 많았다. 각 지방에서 사족들이 현재로 치면 학연 지연의 기반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처음엔 향교의 과거 입시 교육에 대한 대안학교 성격으로 출발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좀 문제점이 많았다. 재밌는 것은 각 서원에 가보면 자식의 입학 기념으로 건물 세워줬다는 것도 가끔 눈에 띈다. 유명한 서원들은 들어가기 까다로왔는 지 가문의 영광이라는 문구도 보이고 부정입학의 증후가 보이는 글귀도 있다. 가령 공부도 잘 못하고 자리도 안나서 한해 서원 재수 했는데 드디어 자리가 나서 입학하게 되어 아버지가 건물하나 지어 주었다는 둥. 조선시대도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해당 학교에 건물을 지어 주어야 하는 선진적인 미국식 교육제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16세기 사림파가 향리에 은거하면서 향촌 사회에 대한 사림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서원이 설립되던 초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순기능이 컸다. 본래 국가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인 향교가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서원이 난립하자 관리가 제대로 안 돼서 황폐화가 심했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4.1 폐단

하지만 17세기 이후 서원이 남설되면서 부작용이 커졌다. 서원에 딸린 토지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고 서원의 노비는 국역(國役)을 지지 않았다. 따라서 서원이 증가함에 따라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겼다. 엄청난 숫자의 서원들 때문에 민생에 끼치는 폐단이 엄청났고 심지어 산 사람을 모시고 성현도 아니지만 자신의 조상이라는 이유로 모시느라 집안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모시는 서원이 5~6곳에 이르는 등 말이 아니었다.
19세기부터 세도가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서원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어졌지만 그래도 지방에선 터줏대감으로 큰소리를 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폐단이 말이 아니었다.

1.4.2 서원 정리

맨 처음 손을 댄 것은 숙종이었다. 숙종은 한 사람을 중복되게 모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중복되게 선현을 모신 서원을 일부 정리하였다. 그리고 100여년이 흐른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사액서원(국가가 현판을 내려준 서원) 47개만 남기고 서원을 철폐하였다. 참고로 이 당시 난립해 있던 서원은 1000여곳이 넘었으며 안동 한 곳에만 40여개의 서원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낸 만력제를 제사지내기 위한 만동묘가 있던, 송시열을 모신 화양동서원은 워낙 파워가 막강해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1]시켰으며 할당된 비용을 내지 못한 백성들을 함부로 붙잡아서 폭행하거나 고문하는 등 그 폐해가 심했다. 당시 이 일대에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또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대원군 역시 집권 전에 만동묘에서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대원군은 우선 만동묘를 철폐해버렸다. 이에 경악한 좨주 송내희와 전국의 유생들이 반대소를 올리자 황단에 편액을 합쳐 보관했으면 됐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씹혔다. 이어 고종의 직계 조상인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이 세워지자 본보기로 그것을 없애버렸고 고종 5년에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허용된 정원 이외의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 하면 면세 혜택을 없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애고 관의 통제 하에 둔 다음에 곧 이어 47개소만 남기고 대거 철폐했다. 숙종, 영조조에 줄곧 지적된 중첩된 서원은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예외없이 모두 철거되었다.

야사에는 유생들의 반대가 극렬했다 하는데 실록을 보면 매우 조용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가 너무 확고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종이 김병학에게 한 말인데 서원 철폐의 명분이 매우 분명하다.

1. 서원이 온통 백성만 더럽게 괴롭히니 이게 뭔 꼴이냐?
2.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곳에서 모시는게 뭔 짓이냐?
3. 제현을 존중한다면 온통 지네 조상 모시는게 서원이냐? 심지어 산 사람을 모시는 사당이 말이나 되냐?
4. 정 책 읽으면 향교 가서 읽으셔. 향교는 장식이냐?[2]

까놓고 말해서 이 말에 반발할 건덕지가 전혀 없었다. 서원을 아주 없애는 것도 아니니 성현을 모욕한다는 말도 궁색했고 서원의 폐단은 안동 김씨들조차도 동의할 수준이었다. 결국 대원군 집권기에는 가시적인 서원 반대소들이 없었고 대원군이 쫓겨난 후에야 쏟아졌는데 고종은 이 중에서 만동묘 복구만 받아들였고 그나마도 관아의 통제 하에 두었다. 끝없는 상소에 고종은 "너넨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중할 줄을 모르니?"하고 비웃었다. 사실 서원 복구 주장들만 해도 서원의 폐단이 분명하고 산 사람을 모시고 한 사람을 5~6곳에서 모시는 병크가 너무 분명하여 1000여개를 다 복구하잔 소리를 하는 인간은 없었고 송시열을 모시던 화양 서원을 비롯해서 상징적인 곳에 대한 복구 요구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고종에 의해 씹혔다.

여담으로 서원 철폐가 붕당의 온상이라서 없앴단 말이 있는데 이건 고종이 서원을 철폐하면서 형식적으로 서원에서 붕당질을 한다는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조선의 정치에서 붕당은 순조조에 마지막으로 정치적 의리를 지니고 있던 당파인 노론 벽파와 남인이 완전히 실각하면서 사라진 후였기 때문에 세도가문 독재였지 붕당이 없었다.

1.5 주요 서원 목록

2 일본의 건축요소

쇼인(書院)이라고 한다. 일본 문화에서 다다미가 깔리고 뒤로는 몇가지 장식들을 놓은 도코노마 등이 있는 거실같은 공간.

원래 중국 건축의 선종계 승려들이 글을 읽는 공간이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에 도입된 이후 주거양식의 하나로 계속 발전되었고 이른바 쇼인즈쿠리(書院造)로 발전하게 된다.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쇼인즈쿠리가 되면서 공부방이라는 느낌에서 좀 격식 있는 생활공간처럼 변하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독특한 양식을 가지게 된다.

일반 가정집에서도 작은 쇼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일본 군주와 가신들이 죽 늘어설 수 있는 커다란 쇼인도 있다. 쿄토 니조 성의 쿠로쇼인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

3 한국의 배우

서원(배우) 항목 참조.

4 한국에 존재했던 비디오 회사

서원프로덕션.

여러모로 출시작이 삼원비디오와 겹치는 작품이 많은데, 동일 회사로 추정된다.

5 삼국지의 인물들

서원(삼국지) 항목 참조.
  1. 이것을 화양묵패(華陽墨牌)라고 한다.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백성들에게 제사 지낼 돈을 내라는 청구서. 심지어 워낙 위세가 강력해서 수령들도 어쩌지 못했다.
  2. 이 발언은 고종 8년에 따로 한 말이다.
  3. 쇼인이 서원으로 리다이렉션 되므로 여기에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