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

(진시황제에서 넘어옴)
역대 진나라 왕
30대
진 장양왕(秦 莊襄王)
31대
진 시황제(秦 始皇帝)
통일 진 시대
진의 역대 황제
칭제건원초대 황제
진 시황제(秦 始皇帝)
2대 황제
이세황제(秦 二世皇帝)
제호시황제(始皇帝)
영(嬴)[1]
조(趙)[2] / 여(呂)[3]
정(政)
출생지나라 영자초 사저(私邸)
사망장소진나라 사구
아버지영자초(嬴子楚)[4]
생몰기간음력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9월 10일(50세)
재위기간음력기원전 246년 ~ 기원전 210년 9월 10일

1 개요

유사 이래 최초로, 하나의 중국(一個中國)을 창조해 낸 인물[5]

중화 최초의 황제(皇帝)

현대 표준중국어로는 친스황, 친스황디(Qín Shǐhuáng, Qín Shǐhuángdì)라고 한다. 진(秦)나라의 31번째 왕이자 첫번째 황제로 본명은 영정(嬴政).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고 황제라는 직위명을 세계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동양에서 '황제'라고 흔히 번역되는 칭호 emperor의 어원이 된 imperator(최고사령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 출생으로, 시황제와는 1세기 이상 차이난다. 물론 카이사르도, 이후의 로마 황제들도 킹왕짱 칭호 하나 만들어서 붙인 진시황과는 반대로 전제군주 냄새가 나는 칭호가 로마의 정체성인 공화정을 부정한다는 느낌이 들어 이리저리 돌려 말하긴 했지만. 물론 진시황 이전 시대에 아케메네스 왕조에서는 왕을 황제나 천자와 비교해서도 결코 격이 떨어지지 않는 칭호인 샤힌샤도 있었고, 그 이전에는 전세계의 어느 곳도 원시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시절 혼자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파라오도 있었지만 동양에서는 이들을 황제라고 안 부르고 원 명칭을 써준다.

고대 중국의 연, 조, 위, 제, 한, 초 6국을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이후 청나라 멸망까지 약 2000년에 걸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며, 따라서 중국 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진시황이 없었으면 현재의 중국은 유럽처럼 되어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광동어를 쓰는 홍콩과 그 주변지역은 남월, 오어를 쓰는 상하이와 그 주변지역은 오나라, 묘어를 쓰는 후난 지역의 초나라 이런 식. 이 때문에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며 통일중국을 찬양하는 현대 중국에서 특히 주목되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는 유학자들을 탄압하는 등의 여러 이유 때문에 대대로 좋지 못 한 평을 들었다. 대표적인 폭군의 이미지. 이는 애초 북방의 오랑캐들이라며 비난 받던 북방민족의 정복황조인 나라들이 동북공정이후 중화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재평가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선대왕인 소양왕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으나, 소진이 실시한 합종책으로 실패하고, 소양왕이 이루던 통일을 진시황이 마침점을 찍었을 뿐이다. 사실 진시황이 없었다면 중국은 유럽처럼 더 다채로운 지역이 됐을 수도 있다. 진시황은 중화제국의 원조라 봐도 된다.

또한, 기껏 중국을 통일해놓고 가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괴롭힌 것과 후계자를 잘못 세워 통일 진나라를 2대 만에 망하게 한 것으로도 꽤 혹독한 평을 듣기도 하였다. 크고 아름다운 토목공사를 좋아해서 아방궁, 만리장성, 병마용갱 등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구에 가장 잘 알려진 중국인이기도 하다. 사실 서양에서 중국 역사 얘기 보면 대부분은 진시황->이외 생략->몽골침략->이외 생략->아편전쟁 이후 정도이며 사기의 경우는 오로지 진시황 본기만 번역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평민 황제이자 사실상 중국의 정치 패러다임을 설립한 유방한나라는 오히려 무시당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유명하다.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다. 진시황이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진시황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시황제는 말 그대로 첫 번째 황제라는 뜻. 호해가 '이세황제'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진나라가 망한 후 전한 시대에 시호를 부활시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나라 멸망 후 쓰지 않았던 묘호까지 부활시켰다. 황제라는 칭호는 이미 유용성이 입증됐다고 봐서 그대로 사용한다. 진시황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양한(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진시황과 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쓰니 왠지 시황제만 황제(皇)이고 무제는 황제가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진나라 이세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그 다음 군주인 자영은 아예 왕을 칭했다. 따라서 진시황이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닌 듯. 물론 진황한무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2 일생

2.1 출생과 어린 시절

진시황의 아버지는 진나라 왕족인 영이인으로 비록 할아버지가 소양왕이고 아버지가 태자인 안국군 영주(嬴柱)였지만, 영이인 자신은 장남도 아니고 서자인지라,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았다…[6] 어느정도 나이를 먹은 이후 6국의 볼모로 파견된다. 이때 진나라 소양왕은 나머지 6국과 수시로 정복전쟁을 벌이던 상황이라, 6국으로 가는 진나라 볼모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별볼일 없는 왕족이나 귀족으로 보내졌고, 그중에서도 영이인는 기원전 262년 부터 3년간의 전쟁과 장평대전때 벌인 대학살로 관계가 최악인 조나라의 볼모로 가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숙소나 수행원이 영 빈약했다는 사기의 기록을 볼때 권력과는 가장 거리가 먼 왕족중 하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얼마나 떨거지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게 장평에서 조나라가 대패를 한 뒤에도 조나라는 저런 떨거지 하나 죽여봤자 뭐하겠냐라며 영이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출처 요망)[7]

그렇게 조나라 수도 한단에 사실상 시한부인생을 살던 영이인을 알아본 인물은 한단의 상인 여불위였다. 여불위는 영이인를 비범한 인물이라 판단하여 자신의 전재산을 털면서 후원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영이인은 여불위에게 받은 재물을 가지고, 비록 아버지 안국군의 정비였지만 자식이 없었던 본처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의 환심을 사기위해 갖은 편지와 선물로 화양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결국 영이인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었고, 덤으로 화양부인은 자신의 고향인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뜻의 자초(子楚)라는 이름을 영이인에게 주었고 이때부터 영이인은 영자초라 불린다. 이후 화양부인은 남편 안국군에게 후계자를 영자초로 삼자고 요청했고, 이에 안국군 영주(嬴柱)는 영자초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로 약속하고 옥을 갈라서 징표로 삼았다(출처-사마천, 사기 여불위열전).

이때즘 영자초는 여불위의 집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무희 조희를 만나고 한눈에 반하고 여불위에게 조희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조희여불위의 첩이였지만, 자초와의 관계를 위해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친다. 이후 12달뒤인 기원전 259년 1월 영자초와 조희사이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나고 그가 훗날 진시황이 되는 영정이다.

기원전 257년, 영정이 3살때 진나라가 왕의(王齮)를 보내 장평대전때 함락하지 못했던 조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고, 조나라 효성왕은 진나라 인질 영자초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으나, 여불위가 600금을 뇌물로 써가며 아버지 영자초만 간신히 구출했다. 어머니 조희와 영정 자신은 한단에서 탈출하지 못했지만 조희가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진나라로 귀국한 영자초는 안국군의 후계자라는 강력한 지위와 영향력을 손에 쥐었고, 이 덕에 영자초의 후원자 여불위는 진나라에서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어린시절 영정은 연나라에서 볼모로 온 연단과 친하게 지냈는데(출처-사마천, 사기 자객열전) 이때 친분을 계기로 연단은 영정이 진왕이 된 후 진나라의 볼모가 되었지만 사이가 틀어져서 탈출하고 후술할 형가의 암살시도로 이어진다.

기원전 251년 영정이 13살 때 소양왕이 죽자 소양왕의 아들인 안국군은 1년간의 장례를 치르고 진나라 효문왕으로 즉위하고 영자초도 과거 약조대로 태자가 되고, 조나라도 태자에 오른 영자초를 두려워해서 조희와 영정을 진나라로 보냈다. 하지만 효문왕이 즉위한지 3일만에 병사하고 태자 영자초가 진나라 장양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정도 진왕의 후계자에 오른다. 그리고 영자초의 후원자였던 여불위는 승상이 되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2.1.1 출생 문제

여불위는 한단 땅의 여자 중에 매우 아름다우며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다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 여불위는 노했으나 이미 영자초를 위해 집안이 무너져도 진기함을 낚으려는 일을 생각해 마침내 첩을 바쳤다. 그녀는 스스로 임신을 숨기고 만삭이 될 때에 이르러 아들 영정(嬴政)을 낳았다.

-사기 여불위 열전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씨는 원래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던 기생인데, 이후 여불위가 진나라 승상까지 된 것을 보고 원래 진시황은 조씨가 임신했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진시황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여정[8]이라고 낮춰 불렀다.

사실 사마천사기 여불위 열전에서 진시황은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는데 확실한 근거가 발견되진 않았으므로, 현대에는 진나라의 멸망 이후, 진왕조의 정통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아 부정하는 견해가 주류이다. 원래 저자인 사마천 자신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자료를 위주로 역사서를 써야 한다."고 주장이 강했지만 '시황제의 진짜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소문이나 주장이 워낙 거센 터여서 이를 여불위 전기부분에 삽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9] 더구나 여불위 열전의 기록도 "그 무희(조희)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이윽고 12달 만에 아들 정(政) 을 낳았다"라는 기록으로 볼때 혼인 후에 사통을 했으면 몰라도 의학적으로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 되는건 불가능하다. 때문에 사마천은 같은 사기 안에서도 공식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본기의 시황제편에서는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더욱이 여불위열전에는 위의 기록 바로 다음에 이런 서술도 있다.

진 소왕 50년에 왕의(王齮)를 시켜 한단을 포위하게 하여 위급해지자 조나라는 자초를 죽이려 했다. 자초는 여불위와 모의하여 금 600근을 내어 자초를 감시하는 자에게 주고 탈출한 다음 진나라의 군대로 도망쳐서 마침내 귀국했다. 조나라는 자초의 아들과 부인을 죽이려 했으나 자초의 부인이 조나라의 부잣집 딸인지라 숨을 수 있었고, 이로써 모자는 결국 살아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초의 부인은 문맥상 바로 앞에서 여불위의 첩이었다가 자초의 부인이 된 그 여인임이 분명한데, 여기서는 그녀가 조나라 부잣집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국가를 피해 도피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부자라면 보통 부자는 아니었을 것인데, 그런 부잣집 딸이 무희(이자 일종의 접대부)였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기록이다. 물론 이 기록이 거짓이고 자초의 부인이 무희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여불위를 등에 업고 진나라의 대권을 잡기 위해 각종 포석을 두고 있는 자초가 무희이자 다른 사람의 첩이었던 사람을 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순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자초의 부인이 조나라 부잣집의 딸이었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이렇게 보면 이미 여불위열전 안에서도 여불위 친부설은 쉽게 믿기 힘든 설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기 안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읽힌 부분은 딱딱한 본기가 아니라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고 스토리의 성격이 강한 열전인 것도 자연히 시황제의 아버지는 여불위라는 주장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인 듯하다. 다만 이를 꼼꼼하게 읽지 않고 단장취의를 하다 보니...

2.2 왕위에 오르다

영자초가 귀국한 이후, 당시 진나라 왕이자 진시황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사망하였다. 진시황의 할아버지인 효문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사흘만에 사망하고 말았다.[10]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이 3년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훗날의 진시황인 영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2.3 왕권을 되찾다

아직 진왕 영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써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방(相邦)[11]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는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12]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진시황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

여불위가 상방에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영정(진시황)의 어머니 조태후와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했으나 조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 환관 노애(노대)를 조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하였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태후는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노애와 조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고 키우면서 영정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

그러나 영정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이 되었다. 당시 노애는 하인을 1천여명을 거느릴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지고 있었다. 이러한 귄력덕택에 그의 성격은 점점 더 거만해졌으며 하루는 연회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다 도리어 노애에게 모욕을 당했고 모욕을 당한 그 신하는 속터지며 분개하며 그곳을 나가다 지나가던 영정이 그의 분개한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모욕을 당한 이 이야기를 들은 영정은 노애를 몰래 조사하여 이 과정에서 노애가 아이를 숨겨 왕위에 옹립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게 된다.

노애는 조태후와의 불륜이 드러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영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영정이 곧 창문군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승리한 영정은 조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후 자신의 어머니인 조태후를 싫어하게 되어 그녀를 유폐하였다.[13] 하지만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

한편 영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태후의 스캔들 깊이 연루된것으로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한때 왕과 견줄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결국 영정은 노애와 조태후 그리고 여불위까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2.4 천하 통일

영정(진시황)은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영정은 모사인 울료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이간질을 시키도록 조언하였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매수당한 간신들은 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의 활동을 저지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영정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장군 '등'이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조나라를 장군 왕전이 수도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초나라는 이신의 주장대로 15만의 군사를 주어 첫 공격을 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이 이를 격파하고, 이후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 향연을 패퇴시키고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킨다.

이때 영정의 조나라 볼모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 태자 연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영정의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영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공격했다.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왕 연희는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영정은 거부하고 요동까지 집요하게 추격해서 연나라 왕을 사로잡고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 왕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제위 17년인 39살에 약 10년만에 만에 영정은 중국을 통일하는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진시황은 모든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나라(衛, 1번 항목)가 남아있었기 때문. 진시황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이 분말고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멸망시켜 버린다.

2.5 제국의 통치

통일 후 영정은 기존의 전국시절 군주의 호칭인 진왕(秦王)을 대체할 호칭을 찾았고 신하들은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지만, 진시황은 그 주장을 물리고 태황에서 '황'만을 남기고 신을 뜻하던 상고의 호칭 '제'를 붙여 황제란 칭호를 만들고 자신이 진나라의 첫 황제 진시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교(敎)가 아니라 조(詔)라고 바꾸고[14],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고(孤)나 과인(寡人) 대신 짐(朕)으로 바꾼다. 이전까지 '짐'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15] 진시황은 '짐'을 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다. 나 혼자 짐이라고 할테니 너네는 다른 대명사를 써라! 이때 진시황이 확립한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16]

또 진시황은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진시황이 천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시호라는 게 군주가 사망 후에 후대왕이나 신하들이 생전의 공과 과를 평가하여 정하는 것이라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릴 경우 감히 아들(새로 즉위한 군주)이 아버지(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고, 감히 (살아 있는)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게 된다. 진시황은 이것이 굉장히 무엄하다고 생각해서 폐지했던 것이다.[17] 그래서 진나라의 황제는 다른 왕조와 달리 시황제(첫 번째 황제), 이세황제(제 2대 황제)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관습은 진시황의 아들 이후 한나라 때에 바로 부활했다.

2.5.1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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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은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는다.

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전에 주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러한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아무래도 주나라가 봉건제도로 나라를 다스리던 중에 지나치게 성장한 제후국에게 온갖 못볼꼴 다보였던 것을 보고 배운 듯 하다.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 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 역사책이나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적들을 없앨 것을 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8]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다. 법가의 지나치게 업격한 법률이 중국 전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엄격한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진시황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기존 7국의 성벽들을 보수해서 길다란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 멸망이후에도 여러나라들이 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게 된것이다.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중국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문자가 달라 서로간에 교류하는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중국 전역의 화폐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통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넓은 중국 전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2.6 말년

이렇게 통일과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우선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의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는 백성들 특히 정복당한 6국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무거운 형벌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고 또 진나라의 신분제는 군공수작제로 운영되었는데 전쟁에서의 공로, 정확히는 수급 하나당 한계급씩 올려주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진나라의 형벌과도 관련이 있는데 죄인은 계급에 따라 감형이나, 형벌을 계급 강등으로 교환할 수 있었는데, 진나라의 백성들이야 지난 정복 전쟁에서 획득하였던 군공과 계급이 있었지만, 정복당한 육국의 백성들은 공을 세운 바가 없었기에 당연히 작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었다.[19] 결과적으로 보면 6국의 백성들은 진나라 백성들과는 달리 보다 가혹한 제도와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덤으로 진시황릉을 시작으로 흉노정벌과 만리장성 건설에 수십 만의 인력을 동원했으며, 아방궁 건설 등 초대형 국책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잦은 인력 동원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진승, 오광이나 유방의 경우처럼 민중의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러한 점들이 진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농민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이 때문에 태자인 장남 부소마저 보다못해 과도한 사업들을 중단하고 민생을 돌보라는 간언을 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부소를 몽염이 있는 만리장성 건설 현장으로 추방해버리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아방궁의 경우 아방궁터로 알려졌던 유적을 조사 결과 건축물이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아 존재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만리장성은 사업규모와는 별개로 전혀 실용성이 없는 사업이었는지는 이견이 갈린다.

2.6.1 진시황의 미신집착

(중략)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주상께서 천하를 다스리시지만 욕심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머무시는 궁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시황은 “짐이 진인을 흠모해왔다. 이제부터 짐이라 하지 않고 ‘진인’이라 부르겠다”라고 했다. 바로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관 207곳을 구름다리와 회랑으로 연결하고, 휘장, 종, 북, 미인들로 채우되 모두 등록된 각자의 부서에서 함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하여 거처하는 곳을 발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사기 진시황본기

말년에 들어 진시황은 미신에 집착하게 되었고 미신 때문에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시황릉으로 진시황 본기에 따르면 즉위 직후부터 짓기 시작해서 통일 이후에는 70만명(총인원으로 추정)을 동원해서, 수십년간 나라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되는 초대형 무덤을 만들었고 결국 죽을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외에도 진나라는 때문에 망한다는 망진자호야라는 점쟁이의 허무맹랑한 점괘[20]를 믿고 수십만을 동원해서 흉노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는 삽질을 벌이고, 불로불사에 미쳐서 불로초로 사기치는 잡초를 사들이거나 당시 귀금속인 수은을 사는 등 국고를 낭비하고, 최후에는 홍의동자 꿈을 꾸고 꿈속의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거라는 해몽을 믿고 순행길에 올랐다가 병사하는 등 미신에 푹 빠져 버린다.

진시황의 미신집착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불로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던 진시황은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로불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갖은 사기를 당하며 재정을 낭비하였다. 특히 서복이라는 사기꾼이 동해바다에 살고 있는 신선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뻔히 보이는 구라를 치자 진시황이 이에 넘아가 서복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를 딸려보내 주었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제주도서귀포시의 이름도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아 온 서불의 전설에서 나온 지명. 이외에도 수많은 사기꾼들이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겠다면서 진시황에게 돈을 뜯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진시황은 늘 속아넘어갔다. 근데 이럴거면 무덤은 왜 만들었냐

2.7 진시황의 죽음과 사구정변

말년에 불로초찾기 대모험과 같은 삽질만 하던 진시황은 자신이 제패한 중국의 천하를 둘러보고자 전국순행을 단행했으나 중도에 병에 걸려 회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210년 7월 사구(沙丘;河北省 平鄕縣 부근)에서 병사하면서 약 50년 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이에 대하여 사기에서는 한가지 일화를 전한다. 평소에 미신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진시황이 낮잠을 자던 도중,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홍의동자와 청의동자가 나타나 서로 그 태양을 가지기 위해 싸웠는데, 청의동자가 홍의동자를 수 차례 때려 쓰려뜨려도 기어이 일어나 마침내 홍의동자가 청의동자를 물리쳤다. 진시황이 홍의동자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나는 백제(百帝, 서쪽의 방위신)의 아들이며 이후 사백년 황조의 기틀을 다질 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바로 한고조 유방을 상징하는 것. 당연히 청의동자는 항우로, 시황제는 이 홍의동자를 찾기 위해서 대규모 전국순행을 벌였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후 진시황의 유서에 의해 멀쩡한 장남 부소몽염과 같이 사형시키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호해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나라가 작살나 버렸다. 이 때문인지 호해가 이사와 조고 등과 짜고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호해 제위 직후부터 돌아서, 진승 · 오광의 난등 부소를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 이후 공식화 되어서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정설이 되었다. 위에서도 말한 이야기지만 문제는 그 측근들이 설사 정말로 유서를 위조했다 하더라도 대체 그들이 유서를 위조했는지 여부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흔히 떠돌던 낭설을 2세 황제의 바보짓 때문에 시황제같은 사람이 정말 2세 황제를 후계로 삼았을 리가 없다고 여긴 사마천이 믿어 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이 이 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자세한 것은 사구정변 항목 참조.

아들 호해와 관련되어 한 가지 민간 설화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는 호에게 멸망할 것이다(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라는 점괘가 사실은 이민족(胡)이 아니라 호해에게 망하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오랑캐에 의해 멸망할 줄 알아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되려 나라는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는 무능한 아들인 호해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3 평가

중국 최초로 하나의 중국을 만든 큰 업적을 세운 군주

비록 진시황이 말년에 폭정하여 기껏 통일해놓은 진나라를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진시황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때 건설된 운하는 이후에도 역대 왕조를 거치며 점차 확장되어 오늘날까지도 수로 교통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이며, 문자와 도량형, 화폐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갈라져있던 중국이 하나의 정부 아래에 통합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존재하지 못했고 오히려 유럽처럼 많은 나라들이 들어서게 되어 역사가 완전히 변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진시황과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는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알렉산더 대제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게 꼭 진시황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진시황 말고도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위인이 후대에도 나오고, 중국의 역사가 통일과 분열을 반복하는 걸 보면, 후대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문제라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유럽에는 통일 위인 히틀러가 나오면 독립 위인 처칠이나 드골이 나타나는데, 중국에는 조조가 나오면 그와 똑같은 유비 손권이 나와 서로 통일 운운하며 패권싸움한다는 것. 다같은 땅따먹기 놀이.

어찌되었든 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워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과 중국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는 역사적으로도 있었고, 중국 정부의 평가도 폭군으로서의 실정은 나름 인정하는 등 찬양일색은 아니므로 "이게 다 중국 정부 때문이다"라는 식의 인식은 어느정도 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황하유역, 장강유역, 나아가 서부내륙과 난링, 우이산맥 이남 남중국 일원까지 모조리 통일하여 단일국가하에 놓이게 한 첫 인물이 진시황임을 상기함, 그가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개념, 문명권 개념이 태동함에 있어 끼친 영향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라 평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또한 그가 최종적으로 완성해 낸 법가적 국가운영방략과 그에 기반한 율령, 관료체제는, 유교적 이념과 함께 후일 동양왕조의 한 전형성을 구성하는데 있어 필수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까지 고려함, 그가 적어도 역사의 한대목에서 기념비적 이정표를 제시한 인물이란 점은 부정키 어렵다.

또한 계속 언급되듯 진시황의 업적이 똥망수준의 변방의 후진국을 홀홀단신 발전시키고 전국6웅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천하통일을 17년만에 했다고 포장하는 건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기엔 어려운 것이 그 숟가락도 밥상에 못 얹는 멍청이들은 분명 있다. 멀리 가지 않고 당장 몇십년 전 만 해도 천하명장 악의가 제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킬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를 실각시킨 연나라 혜왕이라든지. 춘추시대의 정장공이나 춘추오패들의 후손들이 하는 짓을 기억하라. 밥상에 숟가락 얹히는 것도 능력이며 그 마저도 못해먹은 것 뿐만 아니라 그 밥상을 뒤엎어버린 작자들도 수두룩한데 천하통일이란 업적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그 정도?" "거품 쩌네?"라 하며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시황의 조상들은 진시황이 적어도 정복군주로써의 능력이 차려진 밥상이라도 제대로 먹을수 있었던 정도는 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신과 왕전의 기용 면에서 보더라도 군사적 안목과 재능은 별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군주로서의 아량과 그릇은 참 되어 이신의 대패에 상심하지 않고 바로 백전노장 왕전을 기용하며[21] 이례적으로 이신 항목에서 볼수있듯이 패배한 이신을 재신임하여 연나라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우도록 다시 쓴 정도로 보아 그가 정말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천하통일을 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3.1 비판

다 차려둔 밥상에 수저만 올려서 얻은 통일
자신이 이룩한 대업을 스스로 망친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였던 대업적은 당연히 높게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최초의 통일 이후 가면 갈수록 벌이던 갖은 폭정, 병크와 숱한 실책들은 보면 볼수록 화려하기만 하다.(…)

통일 이후를 보면 민중들 진나라인들을 제외한 6국의 후예들은 대토목 공사군역, 가혹한 세금 때문에 겨우 먹고사는데 진시황 본인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자회자찬하며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 대표적인 사실이 윗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던 불로초를 찾아 헤메고 수은을 복용한 것.

진나라가 가혹할 정도로 민중들을 쥐어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진시황이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의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현실과 맞지않는 법률들을 계속 이어간게 치명적이였다. 현대의 법도 안정성 때문에 그리 쉽게 바꾸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을 맹신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가도록 하진 않는다. 법은 사회를 안정되고 질서있게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 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 진시황의 진나라는 법을 지키는 게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특히 현대의 법과 당시의 진나라의 법은 전혀 달랐었다. 당시 진나라의 법들은 공정한 게 아니라 군주의 전제권력을 정당화하며 민중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주요 수단이였기 때문.

게다가 법을 초월하는 존재인 황제에게 간언하기가 과연 쉬울것인가? 게다가 시황제는 폭군들이 대개 그렇듯이 간언을 싫어했으며, 잔혹하고 의심이 많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당장 왕전도 초나라 대군과의 일전을 앞에 두고도 진시황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고심했을 정도이다. 번어기도 진나라의 뛰어난 인재인데 진시황과의 사소한 언쟁 때문에 괘씸죄로 찍혀 가족이 몰살당하고 번어기 본인이 달아나야할 했다. 자식인 태자 부소의 간언조차 용납하지 않아 국경으로 추방하기까지 했다.

그런만큼 통일 이후 진시황의 폭정과 실정을 어느 누구도 간언할수가 없었으며 결국 진나라의 모순들은 썩고 곪아가기만 하였다.

결국 통일 이후 진나라는 전국칠웅 시대와 중국의 첫 통일제국이라는 새롭게 바뀐 상황과 현실에 대해 과거 전국칠웅 시절 때의 법가정책을 강요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결국 진시황의 통치시기와 사후에도 끊임없이 귀족과 백성들의 불만들을 가중시켰고 그로인해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를 견디지 못한 민중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중국 최초의 통일이란 대업을 성취해냈음에도 진나라는 3대만에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멸망해버렸다. 자신을 시황제로 칭하며 이후의 진나라 황제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를 칭할 것을 기대었건만......

길이길이 해먹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진시황의 자뻑질이였으며 진나라는 3대만에 멸망했고 이후 진시황은 폭군의 대명사로 걸주와 같이 후세에 길이길이 씹히게 된다.

3.1.1 암군

후계자 선정 실패 및 무리한 토목공사

진시황은 진나라를 3대만에 망하게 하는 시발점을 제공하였는데 바로 후계자 결정이였다.
사마천사기에서는 진시황본인은 정상대로 태자 부소를 진나라의 2대 황제를 이어받을 황제로 지명했지만 조고이사가 자신들이 권력에서 소외될 것을 두려워해 유언을 거짓으로 조작하여 호해를 2대 황제로 옹립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구정변항목에서도 지적했듯이 사기 이사열전에 실려있는 대화의 내용은 옆에서 직접 보고 듣지 않으면 도저히 알기 힘들 정도로 너무 상세하고 구체적이다. 게다가 시황제 본인의 유서 조작같은 엄청난 사건을 꾸밈에 있어 조고와 이사가 희대의 병신이 아닌 이상 철저하게 보안에 신경써서 기밀유지를 했을 것인데 고대 궁궐의 비밀스러운 대화 내용들이 알려지기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진시황이 조고, 이사에게 농락당했던 것이 아니면 진시황 본인이 결정을 내린 것인데 진시황이 부소를 죽이고 호해가 왕이 되게 하였다는 설이 진짜로 진시황의 결심이였다면 진시황은 중국 최초의 통일이란 대업을 성취했음에도 이를 본인 스스로 걷어 차버린 희대의 병신짓을 한 것.

법가도 유가 못지않게 적서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데 스스로 법가사상도 거슬러 주시는 가식의 극치를 달린셈. 법은 지켜야지 물론 니들만

계다가 통일후 토목공사를 남발함으로서 진나라를 제외한 육국인들은 가혹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3.1.2 금수저

진시황 본인의 통치기간동안 전국시대의 중국을 하나로 통일한 것도 사실은 혜문왕[22]소양왕[23]들이 대부분 이뤄놓은 것을 진시황이 다 차려진 밥상에 그냥 숟가락 얹은 것에 불과했다.

우선 진나라는 전신 소양왕의 통치기간동안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당시 전국시대의 중국영토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소양왕 재위 51년에는(BC.255년) 천자의 나라였던 주나라를 아예 멸망시켜버리고 춘추전국시대 천자의 상징이던 구정을 진나라로 가져왔다. 비록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주의 영향력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라도 해도 이러한 만행에 대해 형식적으로라도 제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라도 한 국가들이 아예 없을 정도로 나머지 육국에 대한 진의 우위는 이미 넘사벽으로 압도적이였다.진 : 집정관, 육국들 : 저글링

진시황이 물려받았을 당시의 진의 국력을 살펴보면 황하 문명의 근거지로 평가받기도 한 위수 인근의 비옥한 황토지대 + 기원전 316년의 파촉 정벌로 인해 전국 칠웅중 1위의 경제력을 자랑했다. 이는 나중에 진이 스스로의 병크로 멸망한 이후 흐트러진 행정력을 재정비한 소하덕분에 초한대전에서 유방이 항우를 꺾고 중국을 다시 완벽하게 재통일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할정도 였는데, 항우가 죽기 전 남긴 70여번의 전투에서 무패였지만 유방측은 전투에서는 패했어도 소하가 멸망했던 진나라 영역을 재정비하여 끌고온 물자들로 인해 좀비처럼 계속 항우에게 대항했던 것이 항우의 패배요인이였다. 참고로 이 공로로 인해 소하는 초한대전 종결후 논공행상에서 유방의 천하통일 기여도 1순위자로 인정받았다.

이는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끝없는 보급을 통해 초한대전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재상 소하의 먼치킨성과 진의 국력이 깡패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3.1.3 하나의 중국은 한(漢)제국

무슨 말이 필요하리?

진시황의 대업은 최초로 중국을 영토적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진시황은 육국의 망군인들의 반발로 인해 중국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엔 실패하였다. 결국 진시황의 업적으로 흔히 알려져 있던 하나의 중국을 실현시킨 대업을 이룬 것은 한고제다. 한고제가 건국한 한(漢)제국은 이후에도 중국이 여러 분열기를 겪음에도 하나의 중국으로 인식하고 느끼는 것에 대의명분과 정신적 기반이 되어준다.

명백하게 중국은 한(漢)제국 400년 통치를 겪으면서 하나의 중국의 개념과 정신이 형성되었다. 결국 진시황이 이룩한 것은 최초로 중국을 영토적으로 하나로 묶은 것 뿐이다. 분명한 대업이긴 하지만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은 한제국임에도 이를 호도해 진시황에게 하나의 중국을 형성했다고 하는 것은 영토상의 통일에 그친 것과 한(漢)제국이 이룩한 영토상의 통일,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권을 묶어낸 차이점들을 착각한 것.

3대만에 망한 진나라에서 하나의 문화개념과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을 심어줄 수 있었을까? 진시황의 최초의 통일은 얼마 못가고 3대에 끝났으며 진시황의 진은 진나라를 제외한 육국인들에겐 억압과 탄압, 착취, 저주와 증오의 상징일 뿐이였다. 진시황이 하나의 중국을 이룩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뿐이다.

이후 초한대전을 겪으면서 한고제가 건국한 한(漢)은 하나의 중국을 이룩하였다.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개념, 문명권 개념이 태동함에 있어서 진시황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없으며 이를 형성한 업적은 전적으로 한고제가 건국한 한(漢)제국의 업적을 진시황의 업적으로 뻔뻔하게 우기는 것이다.

3.1.4 시황제의 통일 대업을 물려받은 한제국?

한나라에게 있어 진나라는 좋은 반면교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진나라의 중국의 통일에 영향을 받아 한제국이 하나의 중국을 추구한 것이다 라는식의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진은 한제국이 가지게 국가운영방략과 율령, 관료체제, 국가이념성립, 경영전략에 있어 좋은 반면교사[24]이자 참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것이 비약되어서 진이 하나의 국가 개념, 문명관 개념을 태동함에 있어 끼친 영향력은 가공할 것이라고 평가되는 것은 어불성설. 하나의 문명권 개념을 태동시킨 것은 명백하게 한(漢)이다. 게다가 한제국은 국가운영방략을 함에 있어 법가를 시행하면서 정신적 이념으로 유교를 택하는 등, 3대만에 폭망해버린 진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비판하고 버리는 실용적 태도를 보인것일 뿐. 그 대표적인 것이 과진론.

한(漢)과 한(漢)을 건국한 한고제가 무엇을 계기로 하나의 중국을 추구하게 된 것이인지를 언급하는 데 빠져서는 안될 인물이 있다. 바로 서한삼걸중 1인 장량이며 자세한 항목은 아래에 있다.

3.1.4.1 한(漢) 제국이 하나의 중국을 추구한 이유

장량, 젓가락으로 분봉을 막다
한제국의 중국 통일 이유는 진시황과 전혀 상관없었다.

한(漢)제국은 그렇다면 왜 하나의 중국을 추구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 이를 진나라의 개념을 물려 받았다고 언급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 제국은 진시황의 대업을 물려받네 어쩌네 라는 것과는 백억광년과 떨어졌으며 전혀 그런 입장이 아니였다. 하나의 중국을 추구하게 된 계기는 한제국 스스로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였고 이게 어쩌다보니 진시황의 이념과 어느정도 맞아 떨어진 것. 이를 잘 설명하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초한대전 당시 한신이 별동대를 이끌고 항우측의 후방을 유린하고 있을 당시, 항우의 본대를 상대하는 방패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유방은 형양 · 성고 전역에서 서초패왕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정면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BC 204년, 중국최고의 무신 항우의 맹공을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측근인 역이기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역이기는 자신의 생각을 한고제에게 설파한다.

“옛날 탕왕은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토벌하고 나서, 하나라의 후손들을 기(杞)에 봉했고, 주무왕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한 다음 그 후손들을 송(宋)에 봉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나타나 덕과 도를 저버리고 각 제후국들을 침략하여 6국을 멸하고 그 후손들의 대를 끊어 그들은 송곳 하나 세울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다시 세우시고 그들 모두에게 제후의 인수(印綬)를 나누어주신다면, 그 나라의 군신들과 백성들은 폐하의 은덕에 감읍하여 대왕에게 달려와 귀의할 것이고, 폐하의 도의를 앙모하여 기꺼이 폐하의 신민이 되기를 자청할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과 정의가 행해지면 폐하께서는 남면하여 패자를 칭하게 될 수 있으며, 초왕은 틀림없이 의관을 정제하여 공손한 태도로 달려와 폐하께 조배를 드릴 것입니다. ”

즉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삼아, 과거의 봉건제를 부활시키자는것. 이에 유방은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며 이 일을 준비하게 했다.[25] 그런데, 마침 잠깐 외지에 나가있던 장량이 도착했고, 밥을 먹으려던 유방은 식사를 하다 말고 장량에게 "좋은 일이 있다." 면서 그 일을 설명 해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량은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따위 계책을 폐하께 올린 것입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폐하께서 도모하려고 하는 대사는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오?"

"청컨대 앞에 있는 젓가락을 빌려주시면 대왕을 위해 당면한 형세를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그러더니, 유방의 앞에 있는 젓가락을 자기가 들어올리고는, 그 젓가락으로 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옛날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고 그 후손들을 기(杞) 땅에 봉한 것은 걸왕을 사지에 몰아 넣어 능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항적(項籍)[26]을 사지에 몰아 넣어 그를 제압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제후들을 새로 세울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나라주왕(紂王)을 정벌하고 그 후예들을 송나라에 봉한 것은 주왕의 머리를 이미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항적의 머리를 능히 얻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은나라에 들어갈 때 상용(商容)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里門)에서 그의 어진 마음을 표창했고, 감옥에 갇혀있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했었으며, 또한 주왕에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무덤에 흙을 더 쌓아 그 높이를 높여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성인의 분묘를 다시 새로 쌓고, 현인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며, 재능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앞을 지나며 그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거교(鉅橋)의 창고에 있던 식량과 녹대(鹿臺)에 쌓여있던 금품을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부고 있는 식량과 금품을 모두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일이 끝나자, 병거를 개조해서 수레를 만들고, 병장기를 모두 거꾸로 세워 창고 속에 넣고 모두를 호랑이 가죽으로 덮음으로써 천하에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무력의 사용을 중지하고 문치를 행하여 다시는 병장기의 사용을 금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다시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전마들을 풀어놓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천하에 보였습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전마들을 풀어주어 다시는 그 말들을 전쟁에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돌아와 소들을 도림(桃林) 북쪽 기슭에 풀어놓고 다시는 용병(用兵)의 일로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겠다고 천하에 보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수레를 끄는 소들을 풀어 방목시킴으로써 천하에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겠다는 뜻을 보일 수 있으십니까?"

“난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일곱 번째의 이유입니다. 또한 천하를 돌아다니는 선비들이 그의 친척과 이별하고, 그 조상의 분묘를 버리며, 옛 친구들과 떨어져 폐하를 따라 천하를 전전하는 것은 단지 매일 밤마다 한 뼘의 땅이나마 떼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오늘 육국(六國)을 복국시켜 한(韓), 위(魏), 연(燕), 조(趙), 제(齊), 초(楚) 등의 후손들을 제후왕으로 세운다면, 천하의 선비들은 각기 그 주인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 친척과 친구 그리고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버릴 텐데, 폐하께서는 천하를 얻기 위해 누구와 함께 싸우려고 하십니까? 그 불가한 여덟 번째 이유입니다.

더욱이 지금 초나라보다 더 강대한 나라는 없어, 세력이 약한 육국의 제후국들은 결국은 초나라를 다시 따를 것입니다.[27] 폐하께서 어떻게 그들을 신하로 삼으실 수 있겠습니까? 문객의 계책을 시행하신다면 폐하가 도모하려고 하는 일은 모두 그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역이기는 튀김이 되었다.

한 마디로 "지금 서초패왕 항우과 싸움이 한참인데 애들 밥그릇 챙겨주면 애들 정신이 밥그릇에 팔려서 가뜩이나 밀리는 싸움을 제대로나 하겠습니까?"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고도 일목요연한 설명을 듣자 유방은 먹던 음식을 뱉어버리고 역이기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유생 놈 때문에 하마터면 천하의 공사(公事)를 망칠뻔 했구나!" 라고 격노하였다. 이때, 한나라 군 내부에서는 각 제후들을 임명하며 줄 인장들을 제조하고 있었는데, 유방은 즉시 인장들을 전부 싸그리 녹여버렸다.

결국 역이기의 봉건제에 대해 유방의 최측근 장량이 젓가락으로 천하의 정세를 설명하고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이를 막아낸 것. 진시황의 최초통일이 한제국에 끼친 영향력은 단 1g도 없다.

역이기, 장량, 유방 3인의 회담의 여파는 실로 엄청났는데, 이는 이후 유방 본인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봉건제가 아닌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게 되며, 또한 훗날 오초칠국의 난(吳楚七國의 亂)을 거쳐 한나라가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3.1.5 법가사상의 맹신

진시황은 법가를 신봉하다 못해 맹신해 통일후에 불편함을 이유로 도량등을 통일,개선하면서도 정작 진나라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가제도의 개선을 하지 않고 통일된 중국 전역에 적용 지속시켜 주시는 돌이킬 수 없는 삽질을 저질러 주셨다. 상앙시절부터 내려온 진나라의 법가정치는 진나라의 강성한 국력의 기반이였으며 전통이였다. 법가사상이 진나라에게 천하통일을 안겨주었으니 곧바로 개선해야한다는 그만큼 유능한 개혁가가 출현해야 가능했을것이니 이건 비단 진시황만의 문제가 아니며 그 유방의 한나라도 유교사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정치의 근간은 계속 법치에 중점을 뒀다고 하는데 한제국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며 법가를 제국을 운영하는 공존을 보인것이지 근간이 법가라고 하는것은 명백한 호도일뿐이다. 당장 한제국은 법가를 통치수단으로 활용하면서도 과진론이라 하여 진의 과실을 분명하게 따졌다.

진나라의 법가는 엄격하지만 이십등작으로 부여된 작위에 따라 팔다리를 자르거나 사형, 혹독한 유형지로 끌려가는 신체적 처벌 대신 자신이 얻은 작위가 강등되는 등으로 처벌이 감형받거나 용서받고 면제받을 방법이 있었기에 실제 진나라 백성들이 법류에 적힌 혹형들을 그대로 받은건 결코 아니였다. 작위가 실제로 공을 세워서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무거운 처벌이다.

그런데 진나라의 중국 통일후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됐는데 진나라 백성들이야 진나라가 육국들과 벌인 전쟁등에서 자주 징병되면서 올라간 작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복된 육국 백성들이 작위가 있을린 없으니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진나라의 멸망스타트를 끊은 진승과 오광의 반란도 기일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바로 참수형당하는 진나라 특유의 법률 때문이었다. 정작 진나라 자체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지역이었으므로 태업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전역이 진나라가 아니고 폭우가 자주오기 때문에 발이 묶이는 지역에서는 그냥 죽으라는 것과 차이가 없다. 일을 저지르고 죽으나 기일내로 당도해서 죽으나......

3.1.6 여담

한(漢)이 이처럼 법가 하나에 똥고집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매달렸던 진나라와 달리 좋은건 받아들이고 잘못된것은 철저히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있어서는 한고제 특유의 유연한 태도도 있었다. 이는 최초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도 3대만에 망해버린 진과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권을 태동시킨 400년 역사의 한(漢)제국의 명백한 차이점.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서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28]
육생이 옛날 시경과 서경을 때때로 인용하여 유세하자 고조(유방)가 꾸짖었다.

“이 어르신(乃公)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육생이 대답했다. “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고제(유방)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 사기 역생 육가 열전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실제로도 한은 법률과 관료체제 자체는 법가에 준해서 만들며, 국가 통치 이념과 법의 적용에 대해서는 유가나 도가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치에 경중과 가감을 두었다. 이렇게 하면 법가의 장점을 활용한 체계적인 국가체제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으고, 법이 규정하지 않은 예외상황들에 대해 멍청하다싶이 법에 대해 꼬장꼬장하기만 하여 경직된 진나라와 달리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진시황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3대만에 절단된 진과 달리 한제국이 400년간 지속할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4 그 외에

4.1 분서갱유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건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여,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해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분서갱유라는 사건 자체가 유학자들에 의해 다분히 부풀려졌으며, 한편으로 굳이 진시황 개인의 폭정 문제를 꼽지 않더라도 일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항목 참고.

4.2 용모

사마천의 『사기』에서 울료는 시황제의 용모를 가리켜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했으며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같은 자"라고 혹평한다.

중국 근대의 학자 곽말약은 그의 저서 '십비판서(十批判書)'에서 "진시황은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의 외모가 추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려했고,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전형적인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랑 안 좋은 환경 때문에 비뚤어진 케이스"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배우지 못했을 텐데, 이게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 게 아닌가 그래서 뭔가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 통일을 이루거나, 만리장성 축조 등 큰 규모의 건축을 계획하게 된 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는 고대인지라 세상이 지금과 비교하면 단순하고 평균수명이 낮았기에 13세 정도면 성인이었기에 반론이 있다.

진시황의 비정상적인 외모와 말년에 보인 정신착란 증세가 사실 심각한 뇌 손상이 가져온 결과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수은은 소량 섭취시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어 진시황은 이를 불로장생 약으로 믿게 되고 진시황은 매일 같이 수은을 먹고, 발라서 결국 수은 중독에 이르렀고, 거기에 수은은 금단증상까지 있어서 결국 진시황은 수은을 더 많이 더 자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수은중독에 과로까지 겹쳤는데도 50대까지 살았다(...). 수은 안 퍼 마셨으면 100살까지 살았을 기세[29] 결국 죽어서도 진시황릉에도 수은으로 만든 강을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30]. 실제로 진시황릉의 토지 수은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있다.

4.3 암살 위협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국가를 멸망시키고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증오를 한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공신이 되는 젊은시절 장량등이 있다. 이연걸 주연의 영화 "영웅 (부제:천하의 시작)"을 보면 이 암살시도를 모티브로 한것을 알수있다.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진시황은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5 그 외

이상하게도 진시황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가 십칠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하렘물 그러나 진시황의 황후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진시황은 절대권력 확립에 집착해 현대 독재자처럼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 가량이였다고 한다. 여불위의 섭정과 어머니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탓으로 추정된다

6 대중문화 속의 진시황 영정

6.1 미이라 3


황제(미이라)를 참조할 것.

6.2 진용

진용 항목 참조

6.3 Fate 시리즈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영령.

Fate/strange Fake에서는 쿠루오카 츠바키의 부모가 촉매를 이용해서 소환할 계획이었는데... 그 전에 라이더에게 당해서 소환하지 못했다.

Fate/Grand Order에서는 형가가 언급. 형가의 비수 투척을 쳐냈다고. 작중 형가의 무력과 이 시대 중국이 인외마경(…)이란 걸 생각하면[31]  진시황은 무력도 상당한 모양.

6.4 킹덤

진시황(킹덤) 항목 참조.

6.5 어새신 크리드

에덴의 조각을 지녔던 인물로 나온다. 물론 암살당한다.(...) 제국의 동부를 시찰하던 중에 '웨이위'(魏羽, Wei Yu)라는 암살단원의 에 찔려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6.6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13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는데 삼국지 12에서 정치가 100이다.(삼국지 13은 95) 그런데 암살자 형가를 맞았을 때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음에도 형가의 급습을 피했고 칼을 맞대어 형가를 직접 제압한 전력이 있는데도 어쩐 일인지 무력이 50대 후반. 아무래도 '형가가 서툴렀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일지도. 아니면 무력 - 정치 반비례 법칙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삼국지 11에서 무력과 정치력이 둘다 80을 넘는 장수는 등애가 유일하며 둘 중 하나가 90을 넘으면 나머지 하나는 79 미만이 된다.

형가전에는 형가가 "내가 너를 죽이지 않은 까닭은 살려두어 협박하여 제후들에게 빼앗은 땅을 돌려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했다고 했었으니 자객열전을 참조하여 형가가 봐줬다로 결론내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지 11에서 보유한 특기는 징세. 지력까지 90대라서 내정뿐만 아니라 전쟁시 책략용으로도 제법 괜찮지만, 상성이 조조와 같은데도 매력이 78밖에 안되어서 군주로 사용한다면 매 계절마다 충성도 관리에 애좀 먹을 것이다. 더구나 역사 시나리오에선 수명이 얼마 안남았기에 활약할 기회도 거의 영웅집결같은 가상 시나리오밖에 없다. 분서갱유와 혹독한 법치에 의존한 사실 때문인지 공자공융이 혐오무장.

삼국지 12에서 통솔력이 81로 책정되어 전작보다 31이나 올랐다. 매력치가 없어진 걸 감안해도 엄청난 버프. 게다가 전법마저 전공격강화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진나라 군주로 등장한다.

삼국지 13에서 등장하는데 고유 전법이 생겼다! 이름은 시황제, 유선이 갖고있는 천의무봉과 더불어 양대 최강 전법으로, 오히려 천의무봉보다도 강한 13 최강 전법이다, 코스트는 지휘포인트 10이며 효과는 공격 60업, 방어 60업, 기동력 30업, 사기 50업, 지속시간동안 사기 유지...그야말로 개사기. 일단 켜고 달려들면 적진이 개발살난다...
능력치는 통솔 97, 무력 61, 지력 89, 정치 95. 특기는 상업 8, 문화 5, 훈련 7, 순찰 8, 설파 4, 교섭 4, 언변 7, 위풍 9, 공성 7, 공성 7, 견수 7, 귀모 3. 전수특기는 위풍이기에 조조랑 인연맺으면 둘 다 특기 강화는 없다. 병과적성은 창병과 기병이 C이며 궁병이 B. 중신특성은 합리철저이다.

6.7 시드 마이어의 문명

문명 4까지 중국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32]하다가 문명 5에서는 측천무후에게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사실 업적으로 보나 역사적 의미로 보나 중국문명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인데 이렇게 된 것은 문명 지도자의 성별 평등을 맞추기 위해 희생양이 된 것.

파일:Attachment/civilonjshh.jpg
하지만 문명 온라인에서 1차 공개 지도자 4명 중의 1명으로 등장하며 다시 중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체적으로 달걀 모양으로 데포르메된 뚱뚱한 스타일의 이미지로 나왔는데, 머리 위의 관이 거의 자기 키만하게 되었다.

문명 6에서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할 예정이다.

6.8 창제기

손위군홍콩 만화 <창제기>는 미소년 영정이 진시황으로 흑화해가는 이야기이다.(...)

6.9 영웅전희

모에화 되었다. 병약 속성으로 한 약장수에게 비싼 돈을 주고 산 약을 먹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수은...

6.10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판다리아의 안개에 등장하는 초대 모구 황제인 천둥왕 레이 션의 모티브가 되었다.

6.11 신화

성룡김희선이 주연한 2005년작 영화 신화를 리메이크한 2010년작 드라마에서는 영화와 달리 조연급 비중으로 출연한다. 장진성이 배역을 맡은지라 은근 개그 캐릭터. 무지막지한 폭군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만리장성 축조, 불로장생이나 옥수공주에 대한 집착, 조고에 대한 총애 등 어떻게 보면 작중 만악의 근원이라 할만 하다. 임종을 앞두고 역소천의 분전 덕에 그토록 고대한 장생약을 얻지만, 독살을 의심하여 복용을 미루다가 조고에게 뒤통수를 맞고 결국 유한한 인간의 삶을 마친다.

6.12 초한전기

배우는 우화위[33] 한국 더빙판 성우는 김준.

묘사되는 모습은 전형적인 절대 권력자 그 자체지만 어떤 부분에선 다르다. 가령, 궁중연회에서 이사 같은 친한 신료를 자기 자리 근처에 오게 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손으로 막 집어먹는다던지, 이사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손수 잘라 챙겨준다던지,[34] 분서에 항의하는 유학자, 대신들에게 이야기는 들어보겠다던지 하는 소탈하면서도 제멋대로의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장성 축조도 북방 흉노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비를 위함이며 법치주의적인 엄격한 통치도 그런 일환으로 제국 통치에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통치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런 비전은 맏아들 부소를 비롯해 많은 이들에게 이해되지 못하고 그에 대해 고독감이나 소외감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순행을 자주 다니는 것도 궁중 보단 마차 안의 흔들거림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하며 부소에게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일갈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강압적이고 포악한 모습도 그대로라 분서갱유는 물론 운석에 떨어진 문구를 보고 사방 백 리의 거주민을 모조리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불로장생의 약을 찾겠다는 의지는 여기서도 그려지며 선계에 관한 내용을 듣고 바다의 신을 사냥하겠다며 군사를 끌고 나가는 등 불사에 관한 집착도 보여주는 편. 이처럼 초한전기의 진시황은 제정신과 광기가 동시에 나타나는 인물이다.

결국 9화에서 피를 토하며 죽고 마는데 죽기 전 조고에게 장자인 부소를 함양으로 불러와 제위를 이으라고 유서를 작성한다. 유서 작성 후 갑작스레 자기 목을 조른다. 이를 보고 놀란 조고가 다가오자 갑자기 그 목을 조르다 숨을 거둔다. 아무래도 유서를 작성한 조고를 죽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유서는 조작되고 시체로 썩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퇴장.

6.13 영화 영웅

해당항목 참조

  1. 여씨는 강성 중 태공망 여상의 집안, 성 위씨 중 위기(주무자)의 집안 두 계통이 있으나 여불위의 경우는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다.
  2. 사기에 진나라의 선조가 영(嬴)성 조(趙)씨라고 하기 때문.
  3. 여씨는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에서 나온다.
  4. 사마천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진시황의 정사기록인 진시황 세가에는 영자초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고, 여불위 열전에서도 기록이 크게 신빙성이 없다.
  5. 강압과 무력을 통한 물리적 병탄에 그친 통일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6. 당시에 진나라는 법가 사상이 국가의 근본사상이였는데, 한비자를 보면 알겠지만 성리학 못지않게 적서차별이 심한 사상이였다.
  7. 출처는 불명이지만 영이인의 목이 붙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감이 제로에 가까웠다고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긴 하다. 장평대전에서 백기가 항복한 조나라 군사들을 생매장해 버린 탓에 조나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는데, 애초에 인질 역할로 잡아둔 왕자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터치를 안 했다고 볼 만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나라한테 쫄아서 손을 못 댔는지도 모르지만.
  8. 여불위의 성씨를 따랐을 경우 그의 이름
  9. 또한 사마천의 조국이었던 한나라가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였으므로 그만큼 진나라를 깎아 내려야 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10. 진소왕이 죽은지 사흘 뒤에 사망한 건 아니고,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에 추모기간이 몇 달 있었다.
  11.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무기에는 상방(相邦)으로 표기되어 있다. 후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한고제 유방의 이름인 방(邦)을 피휘를 하기 위해서 상국(相國)이라고 표기했다.
  12. 여기서 父를 '보'라고 읽는다.
  13. 이복동생들도 조태후가 살려달라고 울면서 빌어도 차갑게 거절하고 죽였다.
  14.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또 다른 글자 중 하나인 칙(勅 또는 敕)은 이때 도입되지 않았고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15. 그래서 진시황 이전 시대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이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는 예들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16. 유사한 예로 대한민국박정희 이후 각하를 대통령한테만 쓰는 경칭으로 바꾼 것을 들 수 있다. 본래 폐하 아래 전하가 있고 전하 아래 각하가 있다. 전하는 임금을 전각아래에서 뵈온다는 뜻이고, 폐하는 더 높은 분이기 때문에 그 보다 더 아래에서, 섬돌밑에서 뵈온다는 뜻이다. 각하는 내각아래에서 본다는 뜻으로서 왕정시대에 귀족들에게 주로 쓰던 용어인데, 일본에서 천황족을 제외한 높은 계급의 군인이나 공무원에게 각하라 하던 것이 박정희 정권 때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본래 보통사람들 사이에서 쓰는 "귀하"처럼 고위 공직자한테 쓰는 말이라서 장관한테도 쓰던 말이었으며, 대한민국 육군공군에선 장군들에게 사용하였다. 실제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보면 '그때 사단장 각하께서 어쩌구 저쩌구' 식의 표현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 해군은 창군기부터 손원일 제독이 대통령에게만 쓰라고 하여 장군이나 제독에겐 붙이지 않았다. 아무튼 본래 일본과 같은 군주국에서나 쓰는 말이고 우리는 본래 쓸 필요가 없는 말이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 때 폐지되었다.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영감은 2품이상의 고위직에게 쓰는 경칭이였으나 나중에는 남성 노인을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17. 사기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얘기다.
  18. 그러나 굳이 진나라 뿐만 아니라 이후의 중국에서도 정권이 교체될때마다 사상과 서적에 대한 탄압은 자주 있었던 일이다. 또한 분서갱유 자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기록되었다는 설도 있다.
  19. 천하통일 기념으로 통일 진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한 계급씩 특진을 주기는 하였다.
  20. 다만 이 자를 2대 황제 해라고 해석할수도 있다.
  21. 물론 진시황의 의심을 푸는 왕전의 처세술도 기억해야 한다.
  22. 소양왕의 부친
  23. 현실에서 존재하던 전신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먼치킨이였다
  24. 중원을 완벽하게 통일한 한 제국에서 이후 2대 황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건국제인 한고제가 여후의 아들인 혜제 대신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척희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한제국의 예법, 국가 이념을 정비하는 데 큰 업적을 세운 숙손통이 장자 승계의 원칙을 어겨 나라를 망하게 한 실패사례로써 진시황을 언급한다. 진시황으로서는 실로 굴욕.
  25. 덕과 도리를 버린 진의 만행을 회복한다는 대의적 명분과 한고제를 공격하는 항우의 맹공을 줄인다는 현실적인 실리 두가지를 얻을수 있는것.
  26. 항우를 가리킨다. 羽는 字, 籍이 이름.
  27. 당장 유방본인조차도 항우의 맹공을 어떻게든 줄여볼려고 분봉까지 계획하였는데....
  28. 유방본인도 진나라가 법가의 실용성을 주장하며 유학을 탄압하자 오히려 "야, 쓰잘것도 없는거 치워버리니까 좋네!" 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 다시 배우게 되자 과거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였다.
  29. 증조할아버지 소양왕이 70살 넘게 산걸 보아 수은 안 마셨으면 장수했을 가능성도 높다.
  30. 출처:사기 진시황 본기
  31. 중국은 상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밀림이 빽빽한곳이었고 코끼리, 코뿔소, 용, 짐새같은 위험한 생물들이 사는곳이었다. 이중 짐새는 한나라 시대에도 여후의 주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때까지도 살아남았었던듯.
  32. 4에서는 근현대 지도자로 마오쩌둥이 함께 나왔으나, 여전히 고대 문명의 대표 지도자로서 나왔다.
  33. 삼국유비를 맡았다. 조조역의 진건빈의 스케쥴 문제로 대신 맡았다. 헌데 시황제의 주변인들인 이사, 조고, 호해의 배우가 삼국에서 각각 순욱, 원소, 조비를 맡았다는 점을 보면...
  34. 이 모습을 유학자가 참다못해 그 자리에 분노에 찬 간언을 하기에 이른다. 또 고기도 직접 칼로 잘라 칼로 찍어먹는데, 시녀를 시키지 않는것은 남들이 자기 앞에서 칼을 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연출로 진시황의 암살에 대한 경계심을 표현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