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th=100% |
백강전투 묘사도 |
백강 전투 | ||
날짜 | ||
663년 음력 9월 8일 | ||
장소 | ||
백강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백제 잔당군, 왜 | 신라, 당나라 |
지휘관 | 부여풍 아츠미노 히라부노 무라치 사네노 무라치 에치노 하타노미야츠코 다쿠츠 카미츠케노노 키미 와카코 하시히토노 무라지 오호후타 코세노 카무사키노 오미오사 미와노 키미 네마로 아헤노 히케타노 오미 히라부 오호야케노 오미 카마츠카 이호하라노 키미 오미 | 유인궤 두상 부여융 |
병력 | 왜군 27,000명~32,000명[1] 백제군 불명 | 웅진도독부 당군 17,000명+@ 신라군 불명 나당 연합군의 자세한 수치 불명 |
피해 규모 | 왜군 1만여명 전사 | 불명 |
결과 | ||
신라, 당 연합군의 승리. | ||
기타 | ||
백강 전투로 부여풍의 백제부흥군 세력 멸망. |
1 개요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서기 663년에 백강[2]에서 신라, 당나라의 연합군과 백제 잔당군, 왜의 연합군이 맞서 싸운 전투다. 일본에서는 백촌강 전투(白村江戰鬪, 白村江の戦い[3]),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4]. 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승리하면서, 3년 전에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멸망한 백제의 잔존 세력까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이 전투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과 일본의 군대가 충돌하여 전쟁을 벌인 전투이기도 했다.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의 예고편?
2 배경
660년에 사비가 점령당하고 의자왕과 부여융이 수모를 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백제가 멸망한 후, 당시 일본에 있었던 왕자 부여풍을 일본에 요청해 데려와 왕으로 세워 도침, 귀실복신 등이 주도해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키면서 당나라에서는 군사를 파견해 이들을 보내 공격하는데, 유인궤, 유인원 등이 진현성을 함락하자 이들은 임존성을 임시 도읍지로 삼았지만 도침, 귀실복신 등의 다툼으로 내분이 벌어져 부여풍은 이들을 죽였다. 이 기회를 틈타 당나라의 유인궤는 신라와 연합해 주류성을 공격했고 백제 부흥군은 왜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백제의 멸망을 불안스럽게 지켜보던 왜[5]는 부흥군의 지원요청에 응하여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3 진행
3.1 양측의 병력
이 전투에 참여한 병력에 대해서는 이상한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전투에 당군 13만, 신라군 5만이라는 대병력이 참전하였으며 백제는 겨우 5천, 왜가 4만 2천명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병력이 말이 안되는 것이 당시 고구려 정벌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당나라가 13만이라는 대병력을 다시 백제에 파병했으리라 보기 어렵고, 백제부흥군은 풍왕이 복신을 죽여 지도부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던 것이지, 주력 병력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실제 사료에서 확인되는 병력은 다음과 같다.
- 당군 : 소정방이 퇴각하면서 현지에 남긴 유인궤 휘하 육군 10,000명 + 유인궤의 지원요청으로 파견된 손인사 휘하 7,000명 & 병선 170척
- 왜군 : 이호하라노 기미오미의 수군 10,000명 + 가미쓰케누노 기미와카코의 17,000명[6] & 병선 1,000척
- 신라 : 불명. 다만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의 장수들이 총출동했기에 신라군 주력 병력이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백제 : 불명. 이쪽은 백제부흥군이 목숨을 걸었기에 마찬가지로 총 병력이 집결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실제 전투는 동원된 함선의 숫자로 보았을 때, 백제-왜 연합군의 병력숫자가 나당연합군의 병력숫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이정도만 해도 상당한 대규모 전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백강전투가 22만명이 참가한 대규모 회전이었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당연합군의 병력수를 잘 보자. 어디서 많이 보던 숫자 아닌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은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동원한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면 백제군 5천의 비밀도 자연히 풀리는데 바로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즉 660년 나당연합군의 병력규모가 663년 백강전투 병력으로 그대로 Ctrl+C, Ctrl+V 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오해가 발생했는가하면 660년 백제가 멸망당하기 직전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사비성 전투인데, 연구자에 따라 이 사비성 전투를 '백강 전투'라고도 부른다. 사비성이 백강 근처에 있었기 때문.[7]
당연히 이 660년 백강 전투는 663년 백강 전투와 이름도 같고 시기도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운데 인지도는 663년 백강 전투쪽이 넘사벽이다. 660년 백제 최후의 전투는 사비성 전투로 불리건, 백강 전투로 불리건 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뚫리자 백제가 멸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 이런 상황에서 660년 백강전투 병력표를 663년 백강전투 병력으로 자연스럽게 오해하여 663년 백강전투를 20만명이 넘는 대병력이 한번에 맞부딪친 화끈한 전투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전투에는 당, 신라, 백제, 왜 4개국이 동시 참여했으니 더욱 그렇게 볼 소지가 높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위에서 밝힌대로 이다. 백강 전투가 규모에 비해 저평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장되게 이해하지는 말자.
3.2 전개
유인궤가 백강 입구에서 부여풍·왜인과 4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00척을 불태웠다
《구당서》 권199 열전149 동이백제전.
8월 무술일 : 적의 장수가 주유[8]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당의 장수가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늘어섰다.8월 무신일 : 일본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당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일본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당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8월 기유일 : 일본의 장수들이 백제(百濟王)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 하였다. 다시 일본의 어지러운 대오(隊伍)와 중군(中軍)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쳤다. 당(의 선박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의) 관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 다쿠쓰(朴市田來津)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려로 도망했다.
9월 신해 초하루 정사 : 백제의 주유성이 비로소 당에 항복했다. 이 때 나라사람들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으니, 일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데(弓+ 一)禮城에 가서 일본의 군장들과 만나 서로 현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처음부터 枕服岐城에 있던 처자들로 하여금 나라를 떠나려는 마음을 알게 하였다.
《일본서기》
나당연합군은 8월 17일경 한발 앞서 백강에 도착하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였다. 27일에 도착한 백제-왜 연합군은 그럼에도 숫적 우세를 믿고 진형을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나당연합군은 화공을 이용하여 백강 입구에서 백제-왜 연합군과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00척을 불살랐다. 백제부흥군의 수장 부여풍은 몸을 빼내어 고구려로 달아났다.
4 결과
이 전투로 인해 부여풍의 세력은 멸망하고 살아남은 부흥군의 지도자들은 왜로 망명했다. 백제 부흥운동의 끝을 알린 전투 중 하나다. 백제와 왜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5 평가
삼국시대에 일본에서 수만의 군세가 대한해협을 건너올 정도로, 시대의 차이를 감안해보면 후대의 임진왜란에 비견될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의 전투였지만 별로 잘 알려져있지 않다. 대한민국의 한국사 교과에서는 짧게 넘어가고 있고 일본의 교과서에는 조금 더 길게 서술하고 있다. 미디어에서는 삼국통일전쟁을 다루는 매체에서도 백제부흥운동 부분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 아니라서 대충 보고 바로 고구려 말기 쪽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6 창작물에서
- 대왕의 꿈에서 묘사되지만 대부분 배 2척을 세워놓은 것이 티가 날 정도로 빈약하며, CG의 규모도 작아서 1000여 척에 이르는 일본군의 함대 규모를 살리지 못했다
왜 조정에서 백제를 돕기 위해 전선 1천 척, 군사 2만 7천명을 파견했다고 하며, 당군은 손인사가 이끄는 1백 70척으로 웅진도독부로 향한다. 백제 부흥군에서는 부여풍은 부여충승에게 당군의 배보다 군량미와 병장기를 실은 일본군의 배가 먼저 도착할 것이니 일본군의 배를 맞이하라고 하는데, 충숭은 당군이 덕물도에 당도했고 신라도 사비에 군사를 파견했음을 이야기하며 대비해야 한다고 하지만 부여풍은 이를 가볍게 여긴다.
나당 연합군에서는 김유신은 부여풍이 일본군과 합세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격할 것이고 그 전에 주류성을 함락해야 한다고 했다. 당의 유인원은 일본군이 어디로 들어올지 모른다면서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해 사비를 비운다면 오히려 허를 찌를 수 없다고 우려를 표한다. 김유신은 기벌포로 들어와 백강 하류에 상륙해 일본군과 합세할 것이며, 저들은 먼 뱃길로 지쳤을 것이니, 상륙하기 전에 수전으로 공격하고 철기병을 앞세워 부여풍의 군사들을 공격하면서 저들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 와중에 군량미를 실은 일본군의 선발대가 백강 하구로 상륙해 백제 부흥군에게 병장기, 군량미 등을 보급하며, 부여풍은 충숭에게 일본군의 본대와 합류해 그들을 지휘해 백강 하구로 상륙할 것을 지시하면서 부여풍 자신은 일본군의 군사를 맞이했다가 사비를 공격하기로 하면서 군대를 둘로 나눈다. 부여충승은 일본군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백강을 건너려 했지만 후방에서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의 배가 나타나 화살을 쏘자 부여충승이 이끄는 일본군은 승산이 없다고 여겨 퇴각하기로 하며, 당군은 추격해 화살을 날리지만 일본군의 배의 속도가 매우 빨라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한다.
문무왕이 군율을 세우기 위해 나당 연합군의 지휘권을 김유신에게 맡기기로 하고 당군들에게도 김유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자 당군도 응했으며, 다음날 김유신은 회의를 소집해 주류성에서 나오는 부여풍이 기벌포로 나온 일본군의 함대와 백강 하류에 합세할 것이니, 문무왕, 손인사 등에게 이들을 격퇴시키라고 한다. 유인원에게는 신라 수군과 합세해 전선들이 상륙하는 것을 막고 강 위에서 괴멸시켜야 한다고 했으며, 유인원은 자신들의 배는 170척 뿐이라 1천 척의 배를 저지할 수 있겠냐는 우려를 표한다. 김유신은 병력이나 배가 많지만 물때와 바람이 낯설다는 점을 이용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며, 예원, 양도, 김삼광에는 유인원의 배에 승선하게 하고 유인궤에게는 사비성을 지키게 한다.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의 배는 백강으로 진격하는 부여충승,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이끄는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백강 하구의 육지에서 문무왕과 부여풍이 싸우는 것을 본 김유신이 당군의 배에 진격할 것을 지시하며, 이를 들은 당군의 배가 일본군의 배로 진격하자 서로 화살을 쏘면서 전투를 벌인다. 당군의 배가 일본군의 배를 그대로 들이받는데, 김유신은 일본군의 배는 날렵하고 빠르지만 선체가 작고 목재가 물러 당군의 배가 부딪히면 좌초될 것이라 한다.
또한 일본군의 배 1천 척이 백강으로 들어오면 배를 돌리기가 어려워 당파 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공격하면서 육지로 들어가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했으며, 당파 전술을 통해 일본군의 배를 좌초시키고 일본군의 배로 진입해 난전을 벌인다. 물때와 바람이 바뀌는 시각이 되자 짚더미, 기름항아리를 투척하며, 당군에서 일본군의 배에서 퇴각할 것을 명령하고 일본군의 배에서 모두 물러나자 불화살을 날려 일본군의 배를 모두 태운다.
부여충승은 싸우던 도중에 예원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며, 화공으로 큰 피해를 입는 도중에 육지에서도 부여풍이 패해 물러나자 일본군은 육지에서 신라군이 날린 포차의 공격을 받으며, 일본군은 400여 척의 배가 부숴지는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 1988년쯤에 소년중앙으로 연재한 한국만화(작가가
현재는 환빠 만화가인한재규.)에서는 일본인 악역 빠가사리(...)가 한국으로 와서 백마강을 둘러보며 663년 왜군 2만여명이 고기밥이 되었다는 걸 회상하며 울부짖으며 선조들은 여기서 물고기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슬퍼하는 대목이 나왔다.
-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에서도 언급이 되는데...환빠 아니랄까봐 야뫼도(야마토를 이렇게 부른다...) 조정에서 보낸 군사들이 전멸했다는 대목을 넣었다.
- 일본의 보드 게임 잡지인 게임저널의 제15호에서 부록으로 백강 전투를 소재로 다룬 전략급 백촌강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보드 게임이 있다.
- 명탐정 코난의 TV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에피소드인 모모타로 의문 해결 투어(TVA 377~378화) 편에서도 언급된다. 현재 오카야마현 일대에 남아있는 7세기경의 산성을 근거로 이 전투가 모모타로 설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학설을 코난의 내레이션으로 초반부에 소개한다. 다만 한국판에서는 왜색 문제 때문에 방영되지 않았다.
7 기타
- 금강 유역을 공유하는 충청남도 일대 지역에선 종래부터 금강을 백마강이라 불러 왔다. 일종의 지역 방언. 더불어 전화는 설화는 당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적에 강에 사는 용 때문에 애를 먹자 백마(白馬)를 미끼로 낚시해 물살을 평온케 했다는데(...) 해당 항목인 백강(백촌강)의 지명이 당대에 이미 실존했던 것으로 비정한다면, 소정방과 관련된 상기의 구전 설화는 훨씬 후대에 백제 외지의 사람들[9]에 의해 창작, 가미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태양편의 주인공 이누가미 스쿠네는 이 전투에 참전했던 백제 왕족이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야마토 캠페인 마지막 미션인 'Tang Invasion'은 이 전투를 다룬 시나리오로, 일본군이 백촌강(하쿠스키노에)에서 당나라 군대를 무찌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 논란이 일어 'Kyushu Revolt'로 제목과 내용이 수정되었다.
8 관련 항목
- ↑ 661년 백제에 파견된 5000명의 왜군까지 포함한 수치.
- ↑ 금강으로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으나 최근에는 동진강 설도 상당하다. 한편, 아산만 근처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 ↑ '백촌강'을 일본어로는 '하쿠스키노에(はくすきのえ)'라고 읽는다.
- ↑ 다만, 국내에서도 저 두 명칭은 매우 빈번하게 혼용된다. 대표적 예시로 구글 검색을 들자면, 정식 명칭인 '백강 전투'보다 '백강구 전투'가 더 많이 검색된다.
- ↑ 백제가 망하면 당이 왜로 쳐들어 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따라 당군을 막기 위해 일본 최초의 성이 건설되기도 하는 등 왜 본토에서도 많은 대비를 했다.
- ↑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6월에 이 27,000명의 군대가 신라를 공격하고 8월에 또다른 10,000명의 부대를 백제에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측과 한국측 사료에 관련된 기록이 보이는 것은 8월의 백강 전투 뿐이다. 따라서 6월에 기록된 27,000명의 병력이 실제로는 8월에 출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이 2만7천명과 1만명을 따로 파견한 것으로 본다해도 3만7천명으로 4만2천명은 되지 않는다.
- ↑ 혹은 기벌포 전투라고 칭하는 연구자도 있는데 이러면 나당전쟁 당시에 있었던 676년 기벌포 전투와 헷갈리게 된다.
- ↑ 백제부흥군의 수도인 주류성을 말한다.
- ↑ 도독부를 설치했던 당나라 군대나 대신라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