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농공상

1 개요

고대부터 근대까지,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에서 사용되었던 신분제도. 한국을 제외한 중국과 일본에서는 사민(四民)이라고도 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한국, 일본과 계급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사민이라고만 표현한다.

상공업 계층보다 농민을 더 우선시하는 관념, 즉 농본사상을 영어로는 "Agrarianism"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

2 중국

용례는 춘추전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士(학자), 商(상인), 工(장인), 農(농민)으로 백성을 분류하였다. 다만 아주 초창기의 士는 학자가 아닌 병사를 뜻했다. 공자를 보면 알다시피 이 당시에는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상류층의 기본 소양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군현제가 확립되면서 의미가 변한 격이다.

보통 우리는 사농공상이란 표현을 고려조선과 연관해서 접하기 때문에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중국에서 사농공상 대신 사민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특정한 신분제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민은 그냥 백성이란 뜻으로 쓴다.

관자에서 사농공상, 춘추곡량전에선 사상공농으로 표기했는데 어느 쪽이든 그냥 백성을 통틀어 부르는 표현이다.

士農工商四民者,國之石民也.
-관자-

굳이 요즘 식으로 쓴다면 "산업은 1차산업 2차산업 3차산업이 있다" 같은 표현에 불과하다.

사실 중국은 대한민국와 달리 장사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다. 당장 화교를 떠올려보자.

여담으로 상인(商人)이란 표현 자체가 "상나라(=은나라) 사람"이란 뜻인데,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뒤 흩어진 상나라 백성들이 장사를 해서 먹고살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3 일본

일본의 사농공상은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에도시대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계급 체계는 사농공상 순 그대로이나, 사에 선비 대신 일본의 무사(武士)가 들어간다. 무사, 즉 사무라이가 득세했던 일본의 사회상황이 반영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대 조선과 달리,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던 에도시대의 상인들은 공식적인 사농공상의 순위와 달리 현실에서는 생각보다 파워가 셌다고 한다. 상공업의 발달에 적응하지 못하고, 기존의 토지 생산에 기반한 경제에 의존하던 대부분의 다이묘들로서는 점차 상인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가서, 오죽하면 오사카[1] 의 상인이 대노하면 천하의 다이묘들이 벌벌 떤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유럽과는 달리 이 상인 계급들은 근대화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을 뿐이지, 다만, 조연 정도는 되었다. 일단 에도시대부터 나름 재벌가문이었던 미쓰이같은 가문이 유신 웅번 측에 자금을 대었고, 이들은 그 덕분인지 몰라도 이들 재벌 가문은 메이지 유신 후 국가와 결탁하여 독점재벌로 성장했다. 그리고 재벌 가문들은 화족이 되었다. 이 외에도 조금 더 뒤에 유명해진 미쓰비시, 스미모토 재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 경제의 발전사와 함께 했다. 하지만 덕분에 일본은 상업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1차 산업인 농업이 붕괴되어 버렸고, 이는 에도시대 후기에 일본 국민의 평균 신장이 감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담으로 바람의 검심에 사농공상의 언급이 간헐적으로 나온다.

최근에는 일본의 사농공상제도가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2000년경을 기점으로 일부 교과서에서 사농공상제도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2] 사농공상이 삭제된 최근의 교과서 내용에 의하면 무사(武士)만 상위계급이고 농민을 백성(百姓), 상공업인을 정인(町人)이라고 하며 백성과 정인은 대등한 관계였다고 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일부의 상인은 무사보다 상위로 취급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4 한국

이 문화는 중국으로부터 한국에 전래되었으며, 고려 후기와 조선 시대 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실제 조선 시대에는 사농공상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였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성종 대 3건, 연산군 대 2건, 중종 대 2건, 광해군 일기 중초본에 1건, 현종 1건, 헌종 1건, 고종 7건으로 지극히 저조하다.

사농공상의 순서는 당시 신분제의 순서 그대로이다. 사는 중국과 다르게 선비를 뜻하고 농은 농민을 뜻하며 공은 공장을 뜻하며 상은 상인을 뜻하였다.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학문(혹은 정치)을 하는 선비들을 가장 고귀하게 생각했으며, 꼭 필요한 식량을 만들어내는 농민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우리네 생활에서 쓸모있는 도구를 만들어내는 공장(장인)이 그 뒤를 이었으며, 아무 것도 안 만들어내고 물건 팔아 이득을 내는 상인들을 잉여 취급하는 이념이었다.

유교의 이념에 의해 통치되던 조선 사회의 특징과도 같은 사회 계급으로, 생각해 보면 조선은 이를 너무 융통성 없이 적용하여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 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조선이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아 망했다고 하기엔, 개항 시기부터 시작해 임오군란 이전까지를 보면 상당히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옳지 않다. 그 이후는 일제에 의한 속국 신세라 개혁을 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갑오개혁의 개혁안은 1880년대 초에 이미 논의된 내용이다.) 또한 사농공상이 그리 엄격했으면 정조 때 수원에서 연암 일파 등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던 양반의 상업 종사가 실제로 일어난 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사농공상의 문제점은 그 차이를 너무 과도하게 해석해서 격차를 크게 벌려놨다는 것. 유교의 사농공상 이념에 의하더라도 원래는 사>농>공>상 정도여야 되는 것이 사>>>>(넘사벽)>>>>농>>>>공>>>>상 의 상태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이념은 산업혁명을 겪지 않았던 한국에선 필요한 이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농업 기반의 사회에서 생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자기 집에서 농사 짓고 사는 사람이 많으면 소출이 늘고, 그렇게 되면 세곡도 늘어나니 큰 변화가 있을 리 없는 농경시대에는 이러한 규칙이 효율적으로 먹혀 들어갔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식량생산의 증진을 위해 농업을 상대적으로 중시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당시 현실을 살펴보자면 사실 사(선비)만 양반이었고 농공상은 양인이었기 때문에 농공상 사이의 차이는 얼마 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상인 중의 일부는 상인 생활을 하다가 외국인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레 외국어를 익혀서 역관이 되며 중인으로 신분상승을 하기도 하고, 공장 중에 재능 있는 사람은 관직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3] 기회가 없는 농민이 제일 불쌍한 것일지도 모른다.[4]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사회 제도가 개판이 되면서 이 제도 역시 서서히 붕괴하게 되었지만, 이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문제는 제대로 된 정치 이론이나 학문은 내팽겨두고 권력 다툼에 여념이 없었던 자들. 당연하지만 기득권층의 권력 사용은 그들에게 유리한 현 현실에 대한 현상 유지를 목적으로 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발전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었으며, 결국 사농공상의 개념은 점점 더 막장으로 흘러갔다. 결국 결과는 우리가 배우는 근대사와 같다. 그러니까 기술을 무시하면 안 된다. 아니, 인간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말해야 할까. 앞서 적었듯이 조선이 망한 것은 사농공상과 무관하므로 이는 옳지 않다.

조선 시대가 막장 사회로 돌입하고 돈으로 신분을 사는 공명첩의 등장으로 가장 많은 신분 상승을 이룬 계층은 모내기법을 도입하여 수확량을 10배 가까이 끌어올린(이 수치는 극히 과장된 게, 이앙법은 필요 노동력을 감소시키는 것일 뿐 수확량이 폭증하지 않고, 이앙법을 하면 이모작이 가능해지긴 하나 이모작을 해봐야 겨울은 일조량이 짧고 거름도 한계가 있어 겨울이 사실상 없는 중국 남부나 동남아도 이모작을 해봐야 수확량이 1.3~1.4배 정도밖에 안되었다.) 대지주 즉, 농민 계층(중 일부). 이건 신분을 떠나 구성원 수와 재력의 문제.

원래 사농공상에서 말하는 '사(士)'가 의미하는 선비는 학문을 하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는 사람(벼슬아치, 관료)까지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유교의 관존민비 문화로 이어졌다. 한편 현재의 한국사회에서는 관(官)의 민(民)에 우월의식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고, 공직자/관료 들이 갑의 위치에서 군림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것들을 두고 전근대 조선 시대의 사농공상이 남겨놓은 유물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하다. 대한민국의 근대화 과정과 경제 발전은 일단 근대 시절 독일이나 일본의 경우처럼 정부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정부 관료의 파워가 막강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관의 민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비춰진 것일 뿐이다. 즉, 이러한 관의 우위 사상은 유교 문제라기보다는 제국주의 시기 ~ 5,60년대 일본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게 맞다. 그리고 관청이나 관료들이 하는 일 자체가 애시당초 규제나 통제, 허가업무 등이므로 갑의 위치에 있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공직자/ 관료들이 갑의 위치에서 군림하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사회가 사농공상의 신분제사회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 사농공상적 관점이 아직도 남아서 직업의 귀천을 따진다는 주장도 그런데. 한국도 어찌되었던 건국 후 자본주의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한 국가기 때문에 불황을 여러번 거친 현대에 와선 귀천이고 뭐고 안정적이고 돈많이 벌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퍼져있는 상황이다.[5] 대기업전문직이 선호받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다. 요컨데 "돈을 못버는" 직업이라 천대받는것이지 딱히 사농공상이 내려와서 그런건 아니라는 것.

5 유럽과 중동

5.1 유럽

앙시앵 레짐 이전의 유럽 사회는 전통적으로 "사" 계급의 우위가 확정적이었으나, 그 이하 계급의 신분 차이는 명확하지 않았다. 신분을 기도하는 자싸우는 자, 그리고 일하로 나누어 사실상 앞의 두 계급이 뒤의 계급을 지배하는 형식이었던 것. 사농공상에서 "사" 계급의 위치는 기도하는 자싸우는 자가 맡았고, 나머지 농공상의 위치는 일하가 차지했다.

하지만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하위 계급 내에서도 농민 계층의 지위가 대체적으로 장인 계층이나 상인 계층보다 훨씬 열등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 숙련된 기능공과 석공의 사회적 지위는 농노는 물론이고 자유민 농민과도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이는 어느 정도 재산과 권세가 있는 상인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이후 상인의 지위는 절대왕정 시대의 중상주의 정책의 수혜를 받아 점차 높아져 갔다.

장인과 상인의 지위가 높았다는 점에 있어서 사공상농 내지는 사상공농 정도로 요악할 수 있을 것이다. 상인의 지위가 장인보다 낮았거나 비슷했던 시기에는 한동안 사공상농의 구도로 흘러갔고, 이후 중세를 지나 근세/근대로 접어들면서 자본주의의 기틀이 잡히고 상인의 지위가 장인보다 높아진 시기에서부터는 사상공농의 구도가 자리잡았다. 물론 한국과 정반대로 농민을 지나치게 천대하는 전통에 반발하여 농민의 권익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었고 (Agrarianism) 그러한 이론과 사상을 가진 정당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의외겠지만 지금도 몇몇 유럽국가들은 이 Agrarian 성향의 정당이 어느정도 세가 되는 편이다.

5.2 중동

이렇게 농민의 지위보다 장인과 상인의 지위가 높았던 사정은 중동도 비슷했으나, 한편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에서는 상인들의 파워가 동시대의 기독교 유럽 사회와 비교해서도 훨씬 더 강했고 따라서 사상공농의 구도가 유럽 사회에 비해서 훨씬 빠른 시점에서 자리잡았다. 이는 이슬람 자체가 상인이었던 무함마드가 이끌었던 종교였기 때문에, 전근대 어느 문화권보다 상인 계급에 대한 배려가 강했던 종교가 이슬람이였던 것이다.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유럽 사회보다 한 발 앞서 상인의 높은 지위가 확립되고 상업 활동을 일찍부터 우대하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중세를 이슬람 문명의 최전성기로 이끄는 주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이후 근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상업 활동을 다른 생산 활동보다 우대하는 경향이 유럽 기독교 세계에 대한 경계심과 더불어 오히려 유럽 기술의 수용에 의한 기술 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지장을 주기도 했다는 의견도 있다. 참조
  1. 당시에는 수도였던 교토의 외항이었다.
  2. 물론 국정교과서가 아니므로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사농공상제도를 가르치는 교과서도 있다.
  3. 그렇지만 사대부들은 절대로 역관이나 의관들을 자신들과 동급으로 여기지 않았다. 조선 성종 때 역관들을 사대부 반열로 옮기려고 성종 자신이 제안했으나 설공찬전의 저자이기도 했던 채수가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당대 가장 깨여있던 지식인 중 하나였던 (설공찬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어찌보면 상당히 과격한 사상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채수마저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4. 기본적으로 조선 법제상의 신분제도는 양-천제였다. 즉 양인(양반, 중인, 평민)과 천인(노비, 백정, etc)의 이원구조였다. 법적으로 양반과 평민은 같은 신분이지만 사회 통념 상의 신분 제도가 반-상제였으므로 (양반-중인-평민-천인)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후자가 적용되었다. 단 법제 상의 신분 제도 덕분에 힘들기는 했지만 평민이 얼마든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양반으로 올라갈 길이 좀 힘들지만 열려있었다.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과거 합격자의 50%정도가 평민 출신.) 그래봤자 감투 쓰면 겪어본 것도 있겠다, 있어 보이는 척 붓과 한지로 키배 뜨며 단점 고칠 생각 하지 않았던 것는 마찬가지였던지라……. 이건 현재까지도 마찬가지다.
  5. 물론 일부 예외도 있다. 40 ~ 50대 정도의 어른들은 간혹 공장에서 돈 많이 번다는 사람을 보면 천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하니. (물론 대기업 같은 예외는 있다.) 이런 경향은 젊은 층에서도 꽤 보인다. 블루칼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