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三分之計
3분천하가 아니다.
천하3분찌개도 아니다
말 그대로 셋이서 솥발과도 같이 천하를 삼등분 하는 계책.
1 삼국지 시대의 계책
삼국지연의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는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가 유명하며, 실제로 당대의 천하를 조조-손권-유비의 축으로 '삼분(三分)'하겠다는 구상은 그에게서 나온게 맞다.
노숙이 먼저 주장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이것은 중국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노숙전에서 노숙이 등용 당시 손권에게 진언을 한 것이 천하삼분지계라고 보는 것.[1] 제갈량이 융중대(=천하삼분지계)를 설파한 것은 207년 삼고초려 때이며, 노숙이 손권에게 그나마 비슷한 계책을 진언한 시점은 유표 사망 직후인 208년의 일이다.(노숙전) 노숙 이외에도 봉추 방통과 손권에게 진언을 한 감녕 등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 적이 있으나, 이들의 계책은 엄밀히 말해 천하삼분이 아니라 지역 점령책에 가까울 수도 있다.
물론 보다시피 논자들 사이에 형주를 중심으로 엇비슷한 계책들이 구상된 바는 있으나, 1)삼분의 주체를 설정하고, 2)구체적인 방안 제시를 통해 주인을 한 축으로 만든 뒤, 3)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구상은, 사료에 기록된 대로라면 제갈량이 가장 먼저 했고, 당대의 현실에 구체화 되어 역사를 이끌어 갔던 것 또한 제갈량의 안이었다. 노숙은 유비를 형주의 장기말로 쓰려했고, 감녕은 형주를 먹고 익주를 넘보자고 했으나, 결국 유비는 제갈량의 진언대로 형주,익주,한중을 모두 제패했고, 이로써 삼국의 초기 형세가 성립되었다. 고래로 '천하삼분지계=제갈량의 전략'으로 인식된 것은 그 때문이며, 이는 연의의 유명도와는 별개의 문제다. 초한지에도 괴철이 한신에게 제시한 비슷한 계책이 제시되나, 이는 한신의 거절로 인해 실현되진 못했다.
중원을 장악한 조조에 대항하기 위해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야 된다는 점, 천하가 삼분된 이후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조건으로 반드시 북방에서 변란이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라 삼은 점, 북방이 안정될 경우에는 자기 세력을 키우고 지키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처럼 당대에 천하 삼분지계를 이야기 한 사람이 많았던 이유는... 왜 굳이 '삼분' 지계인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단, 흔히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서로 캐삭빵 떠서 센 쪽이 이기는 것으로 끝나기 쉬운 1:1 구도에 비해, 1:1:1 구도는 협력과 견제를 통한 균형 유지가 가능하다. 하나가 유독 강해지면 둘이 손을 잡고 맞서면 된다.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 할 때 흔히 솥발에 비유하여 발이 두개인 솥은 세울 수 없지만 세개면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또한, 이 문서의 배경인 삼국시대(중국)의 상황에 따라 생각해 본다면, 당대의 최강자는 황제를 옹립하고 중원과 하북을 장악한 조조였고, 조조 이외의 세력들에게는 '어떻게 조조를 막을 것인가' 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는 점, 그리고 당시 조조에 맞서던 대표적인 세력은 유표(형주), 유장(익주), 손권(양주)의 세력으로, 조조의 영토 남쪽에 포진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등이나 마초, 공손공 등의 예를 보면 동북과 서북방면 역시 확고한 조조의 영향권은 아니었다고 봐야겠지만, 천하삼분지계가 나온 시기는 조조의 남정 시기이니 일단 저 세 세력에 초점을 맞추자.)
이 경우, 가장 조조에게 강하게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익주(촉), 형주, 양주(오니까... 교주는 덤이다.) 전체를 통합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묶는 것이다. 일단 상식적으로 작은 세력 여럿보다는 큰 세력 하나가 더 효율적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조조가 장악하지 못한 중국 남부 전체를 하나의 세력으로 묶어서 조조에게 맞서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당대 중국 사회,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던 중원을 장악한 조조보다 세력이 크다고 하기는 힘들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 되어 패권을 다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중국 남부의 반 조조 세력 자체가 3개의 중심지에 3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는 상태에서 누가 조조에게 맞서기 위해서라고 자기 세력을 남에게 통채로 넘겨주겠는가? 그렇다면 무력으로 다른 세력을 합병해 버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서로간에 큰 세력 차이가 나지 않는 동등한 세력들 사이에서 무력 합병이 쉽게 이루어질 리가 없고, 조조가 바보가 아닌데 이 세 세력이 통합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다. 서로 싸우다가 세력 통합은 못 하고 지치기만 한 틈에 조조에게 잡아먹힌다거나, 다른 세력의 압박을 견디다 못한 세력이 오히려 조조에게 붙는다거나, 세 세력중 두 세력이 싸우는 틈에 조조가 나머지 한 세력을 먹어버릴 수도 있는 것. 말하자면, 조조라는 강적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반 조조세력간의 분쟁에 힘을 소모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 게다가, 문화-경제-정치의 중심지이던 중원을 장악하고 황제까지 옹립했다는 권위를 얻은 조조와는 달리, 중국 남부의 반 조조 세력은 서로 동등한 세 중심지로 나뉜 상태였다. 설령 무력으로 다른 세력을 장악해도 한 중심지에서 다른 중심지까지 통제하기는 어렵고, 이는 결국 잘해야 본래 중심지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반 독립적 세력 정도로 유지할 수 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반 조조세력의 전략적 구상은 중국 남부의 반 조조세력 전체를 통합하기는 어렵고, 각 세력 단독으로 조조를 막기도 어려우므로 반 조조세력의 협력을 통하여 조조를 막아내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를 생각하면 천하사분지계... 같은 것도 가능하겠으나, 삼자 동맹은 아무래도 양자 동맹에 비해 유지가 까다로울 가능성이 높고, 제한된 남부의 세력 기반이 셋으로 나뉜 것 보다는 둘로만 나뉜 것이 역시 효율적이다.[2] 게다가, 천하삼분지계가 본격적으로 구상되고 실현되던 시기는 유표의 죽음으로 형주가 혼란에 빠진 시기였으니, 이를 흡수하기가 비교적 용이한 상황이었던 점도 있다. 말하자면, 노숙의 것이든 제갈량의 것이든 천하삼분지계란 결국 '남부의 반 조조 세력을 효율적으로 재편성하고, 손을 잡아 조조에 맞선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는 것. 다만, 노숙은 손권이 우위에서 유비를 통제하는 것을 지향한데 비해, 제갈량은 유비가 손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이 되는 것을 지향했다는 점이 다르다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삼국시대의 천하삼분에서는 "하나가 유독 강해지면 둘이 손을 잡고 맞선다"는 원리에서 어긋나게 된다. 천하를 삼분해서 남쪽 세력 둘이 힘을 합쳐도 조조나 중원과 하북을 장악한 위나라에 비해서는 여전히 열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천하삼분지계에서 통일의 조건으로 북방의 변란을 꼽은 것 역시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조조의 경우 북방의 유목민및 그 유목민에 맞서기 위한 변방의 군벌세력과 접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방에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이것이 곧 다소 열세인 남부의 세력이 조조를 제압할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1.1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제갈량이 삼고초려 당시 유비에게 진언한 계책으로서, 괴철 이래 '삼분천하(三分天下)'를 노린 전략들 중, 실제로 중국을 세 구역으로 분할하는데 성공했던 최초의 사례다. 물론 이는 제갈량의 원맨쇼가 아니라, 그가 제시한 구상을 바탕으로 유비 이하 참모진 모두가 진력한 결과였다. 사족을 달자면, 제갈량의 천하삼분은 천하통일을 위한 1차 목표였을 뿐, 삼분 그 자체를 최종 목표로 둔 전략은 아니었다.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제 1단계로 북방의 조조는 강하고, 동쪽의 손권도 기반이 잡혀있으므로, 쇠락한 유표를 대신해 형주를 접수하여 기반으로 삼고, 손권과 협력하여 조조를 막은 후, 유장의 익주, 장로의 한중을 제패하면서 유비의 세력권을 완성시켜 천하를 셋으로 나눈다. 제 2단계로 서쪽으론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론 이족들을 위무하고, 동쪽으론 손권과 화친을 강화해 변경을 안정시키면서 내정을 충실히 키우다가, 제 3단계로 북방에 중대한 정세 변화가 발생하면 유비가 익주에서 장안으로, 다른 장수(역사적으로 보면 관우)가 완성을 넘어 낙양으로 진격해 조조를 격멸한다. - 여기까지가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 통칭 융중대의 골자다.[3]
유비가 형주를 접수하는 계책을 끝내 거부했고, 조조의 기습 때문에 그럴 시간도 부족했으므로, 실제 계획은 약간 수정 되었다. 그러나 손권과 협력하여 조조를 격파한 순간부터, 유비 세력이 보여준 행보는 철저히 제갈량의 전략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 형주와 익주를 제패했고, 자칫 전면전으로 이어질 뻔한 손오와의 형주 분쟁을 대치로 마무리 짓고 상호 합의를 봤으며, 조조를 격파하여 한중을 점령함으로써 전략의 제 1단계인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한 가지 미진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조조에 대항하는 촉한오동맹의 결속성이었다. 제갈량의 계책에 따르면 이 동맹의 유지가 필수였는데, 최초 융중대 계획의 수정으로 인해 양자간에 형주 영유권 문제가 발생했고 이 패인 골이 촉의 발목을 잡았다.[4] 이후 손권의 형주 뒷치기와 관우의 전사가 발생했고, 그로 인한 유비의 이릉대전이 이어졌으며, 이 두 차례 전쟁에서 촉한의 군사력이 개박살남으로써, 제갈량이 세운 계획은 완전히 끝났다. 이미 215년에 양자의 합의로 분쟁을 종결지었음에도 계속해서 형주를 노릴 계책을 짜서 상대방을 경계시키고 굳이 동맹을 배반한 손권도 손권이지만,[5] 그 전에 관우의 외교적 실책+측근들과의 불화 또한 거하게 한 몫했고, 그런 관우를 대체할 자원이 없었던 유비 정권의 한계도 명백했으므로, 어느 한쪽의 잘못으로만 보긴 힘들다. 이순신은 이걸 "조조가 형주로 두 영웅을 낚은 것이다." 라며 형주를 놓고 서로 다툰 유비와 손권을 쌍으로 깠다.
깃발 꽂을 땅조차 변변찮던 유랑 군벌을 천하의 한 축으로 만들어, 당대 최고의 세력을 위협했다는 점에선 분명 훌륭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전략은 끝내 미완으로 남았으며, 그 미완의 기저엔 내부 문제의 비중도 컸다. 요약하자면, 전략은 훌륭했지만 그 전략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정도로 평할 수 있을 듯 싶다.
1.2 노숙의 천하삼분지계
이중톈의 저서 '삼국지 강의'에 따르면 중국의 역사가들은 노숙이 제갈량보다 먼저 천하삼분지계를 말했다고 보고 있다.
손권이 노숙을 초빙하였을 때 진언한 계책과, 유표 사망 이후에 이를 구체화하여 설파한 계책이 있다. 사실 형주를 점령해서 세력을 굳힌다는 이야기는 주유도 하고 있었지만, 주유는 잔챙이들 다 쓸어버리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하는 천하이분지계에 가까웠고, 노숙은 제 3의 세력(초기에는 유표, 유표가 죽은 후에는 유비로 전환)을 변수에 넣고 서로 협력하면서 조조의 군세를 분산시켰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북방에 변란이 생길 경우 장강(양쯔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한 후에 중원을 도마한다는 계책이다.[6] 다만 손권이 "형이라면 모를까 나에게는 그런 장대한 계획을 실천할만한 능력이 없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적벽대전이 끝난 후 주유가 요절하고 그 후임으로 노숙이 임명되자 자신의 계책을 설파하고 형주를 유비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하여 조조와 손권 세력권 사이에 총알받이완충지대로 두었다. 이에 당시 유비는 형남 4군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세력권이 없었는데, 강릉을 비롯한 다른 남형주의 주요 지대에 대한 권리까지 양보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권리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유비가 일정 수준 이상의 세력을 키울 때까지 한시적인 권리였다.
노숙의 계책은 어디까지나 유비가 자신들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 세워진 것이지만, 유비가 서촉을 점령하고 한중에서 조조와 현피를 뜨면서 사실상 오의 통제력을 벗어나 버렸기에 노숙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던 친유비 성향이던 노숙이 요절하면서 사실상 노숙의 천하삼분지계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중국 역사가들은 노숙이 천하삼분지계를 제갈량보다 먼저 말했다고 보지만, 이 계책은 천하삼분이라 보기 힘들 수도 있다. 두 번째 진언의 시점인 208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노숙의 안엔 형주 세력인 유종과 유비만이 있을 뿐이며 형주를 제외한 지역엔 별다른 고려가 없기 때문. 예를 들어, 제갈량의 계책엔 '유장을 잡고(익주 평정), 장로를 잡고(한중 평정), 서융을 위무해(마초, 한수 등 관서 군벌) 어찌어찌 한다'와 같은, 당대에 건재하던 군벌들에 대한 대책이 있는데, 노숙의 계책은 이런 부분이 없다. 더군다나 제갈량의 진언은 삼분의 주체[7]가 명확히 제시된 것에 반해, 노숙의 구도는 손권vs조조 뿐이다. 유비를 손권의 말로 형주에 박아둔다한들, 나머지 드넓은 익주와 한중, 서량주의 군벌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노숙이 진언한 계책은 두 가지 모두 당대에 존재하던 형주 군벌에 대한 전략이라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며,[8]실제로 계책 내부의 대상도 시간 흐름에 따라 유표->유종->유비로 바뀌고 있다. 이것을 단지 형주와 유비라는 키워드가 있기 때문에 천하삼분이라고 명명해버린 듯 하나, 실제 노숙의 진언만보면 중원의 조조, 양주의 손권, 형주의 유비, 익주의 유장, 한중의 장로, 관서의 마초까지 천하육분지계가 된다(...)
2 초한지의 천하삼분지계
당시 유방의 한, 항우의 초가 대결하는 가운데, 본래 유방 휘하에서 출발한 한신은 항우의 세력권이었던 제, 연, 한 등을 정복하여 하북지방을 손에 넣었고, 이미 유방/항우와 맞먹는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한신이 유방의 휘하를 떠나 독립을 선언하고, 한초의 대결에서는 중립을 선언하면 중원은 거의 대등한 세력을 가진 3국으로 갈려 균형이 유지된다는 전략안이다.
그러나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한 한신은 역이기가 유방의 명을 훌륭히 수행해 제나라를 복속시키자 공을 빼앗기게 생겼다는 초조함에 공격을 감행하여 죽게 만들거나, 또 얼마 후 한창 항우한테 두드려 맞던 유방이 원군을 요청하자 뜬끔없이 왕을 시켜달라고 하는 등의 행동으로 유방을 상당히 자극했음에도 불구, 아무것도 없던 자신을 등용해준 유방을 배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괴철의 제안을 물리친다.[9] 그리고 이때 괴철의 말을 안 들은 한신은 훗날... 당하고 만다.[10]
3 총평
제갈량 안대로 진행된 천하삼분은 삼국 시대가 유일했고[11], 차후 남북조 시대에 숱하게 전개된 분열 양태는 주로 괴철 안 혹은 주유 안과 비슷했다. 관중/하북/강남 구도가 괴철 안인데, 실제로 삼국지 이후 전진-전연-동진으로 형성되었고, 이후 주유 안이라 볼 수 있는 북위- 남조 왕조들 이었다가 다시 서위(북주) - 동위(북제) - 양 구도가 되었다. 수나라의 통합 이후에 이런 공식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게 되지만, 금나라의 융성으로 오랜만에 다시 남북 대결 구도가 나타나다가 이후 원나라 시대 이후론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주유의 구도대로 된 남북조 분열 구도의 경우, 남방 국가가 주유의 구상보다는 훨씬 유리했는데도[12]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북조에게 흡수되는 결말을 맞았다. 남조의 패망은 남방 국가의 한계란 점보다는 제도적인 혁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게 더 원인이 크지만, 여하튼 흥미진진하게 생각해볼 수는 있는 사실이다.
4 기타
사실 이것과는 관련없지만 정감록 같은곳에서도 나라가 셋으로 갈라질거라고 하는등 삼국정립을 예고하기도 했다.- ↑ 단 주인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일 뿐, 계책으로 보긴 조금 무리다. 구체적인 방안은 물론이거니와, 삼분의 주체도 없는 막연한 비전 제시였다.
- ↑ 3자가 대치중인 상황에서는 1위를 견제하기 위해 2,3위가 좋든싫든 연합할 수 밖에 없다. 2,3위가 서로 싸우면 이겨봤자 1위의 밥이 되기 때문. 물론 어디까지나 각자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이고 예외도 있다. (이릉대전이라던가...) 헌데 4자 대치는 이러한 자연적인 균형점이 없다. 2,3위가 4위를 협공해서 갈라먹어도 3자 대치상황으로 바뀔 뿐 균형은 유지되므로, 4위는 어느 셋중 하나에 흡수될 운명이다.
- ↑ 물론 조조 세력의 병합에 성공하면 훗날 등지/손권이 예상했듯, 촉과 오의 싸움이 있었겠지만, 융중대에선 시점이 시점인만큼, 거기까진 언급하지 않았다.
- ↑ 문제는 형주를 차지할때 유비의 힘이 강했다면 문제가 없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손권을 달래야 했는데 손권이 이걸 근거로 형주를 요구했다. 이걸 들어줄 생각도 처지도 안된 유비가 거부했다가 골이 패인것
- ↑ 근데 좀 배반이라고 하기도 뭣한게 손권 입장에서는 오히려 유비가 배반자로 보였을 가능성이 다분한지라
- ↑ 다만, 이 부분에서 주유와 노숙의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기 보다는, 주유가 좀 더 강경파, 노숙은 온건파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노숙의 천하삼분지계도 어디까지나 중요한 동맹 후보인 유비에 비해 손권의 세력이 우위에 있고, 상황 변화에 따라서 흡수할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세력기반이 미약하던 유비에 비해 탄탄한 세력기반을 갖춘 손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입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
- ↑ 중원과 하북의 조조, 강동의 손권, 형주와 익주(+한중)의 유비
- ↑ 물론 그 전략의 궁극적인 목표는 손권의 천하통일이다. 형주대책은 그 목표의 제 1보.
- ↑ 후엔 다른것도 아니고 모반 혐의로 유방이 군사를 끌고 오는데도 '에이, 설마 폐하가 날 죽이겠어?'라며 맨몸으로 나갔다가 단숨에 붙잡히는 걸 보면(…) 한신은 유방에게 정말로 크게 감사하고 있었고, 유방이 그걸 당연히 알아줄 거라 여겼던 모양.
- ↑ 처형당하기 직전 괴철의 계책을 쓰지 않았음을 후회했다고 한다.
- ↑ 비슷하게 영토가 전개된 예는 있다. 바로 북조 국가인 북주인데 이 국가는 관중을 중심으로 형주 북주와 강릉(후량)을 손에 넣고 파촉을 아울러 제갈량의 플랜인 형-익주를 아우르고 이민족과 화친을 쌓고 진천(관중)을 확보한다는 플랜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 ↑ 익주 일대는 물론 수중에 있었고, 오가 그토록 애썼는데도 얻지 못했던 합비 일대는 디폴트로 깔아두고 있었으며, 회수 이남은 다 평정한 상태에서 가끔 그 이북으로도 찔러보는, 삼국지 시대의 오나라는 상상도 못했던 형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