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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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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의 봄'은 제4공화국 말기의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던 기간(1979년 10월 26일 ~ 1980년 5월 27일)을 일컫는 것으로, 1968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프라하의 봄을 빗댄 것이다.
2 발단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자, 그가 세운 유신 체제 또한 치명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과 여러 원로들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으며, 윤보선 등 시민사회 원로들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철폐와 유신헌법 폐지 및 민주적 선거를 요구하였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 체제가 끝나고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많았다.
한편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 신군부를 형성한다. 대학 방학을 이유로 이 쿠데타에 대한 지식인 계층의 대처와 항명서는 뒤늦게 이어진다. 대학가가 개학을 맞이한 3월에서야 신군부에 의한 군부장악과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3 서울의 봄
이에 더해서 군사훈련반대 움직임이 일어난다. 유신정권당시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아야했다. 박정희가 죽은 이때 학생들은 당연히 이 불합리한 훈련에 반발했다. 그러나 이 반발은 어찌어찌하며 가라앉았고, 총학생회는 훈련장으로 가는 후배들을 독려했다. 이 와중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은 "정부에서 안개정국을 해결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실력행사에 나설 수 밖에 없다"라며 5월 13일을 그 한계로 못박았다. 의도한 발언이었는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학생회의 이 발언은 곧 전 대학으로 퍼졌고, 예정된 날 운동권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를 '서울의 봄'이라고 하였다. 특히 이는 5월 15일에 절정을 이루어서, 서울역 광장에는 서울 32개 대학에서 약 10만여 명의 학생과 군중들이 모였다. 잘하면 청와대까지 진출할 분위기였다고 한다.
1980년 5월, 여야는 5월 20일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은 정권을 장악할 의도에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5월 20일 예정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고 비상기구인 국보위를 설치하는 등 '시국수습방안'을 마련해 군부 주도로 정국을 이끌어나갔다.
4 서울역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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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
- 심재철
후일 5․17 내란이라고 불리게 되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앞두고, 이런 상황을 우려한 전국대학생회가 소집을 하는데 이렇게 모여든 대학생과 시민들이 서울역에 집결한 것이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집회였다. 이 때 서울역 광장에 모인 사람은 약 10만. 그리고 이 집회 인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당시 인사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 인사들이 나름 화려한데,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철,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형난옥, 서울대 복학생 대표 이해찬,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이수성이 그들이다. 사실, 네임드가 아닌 일반 참여인들도 화려하다. 당시 서울대 복학생 중에는 김부겸이 있었고, 경희대 복학생 중 한 명이 이 날 복학생협의회 활동을 하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사건으로 청량리 경찰서로 체포되어 연행되었다가 사법고시 2차합격 발표가 났고 경희대 총장이 나서서 석방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문재인이다.
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모이자 이들을 통제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고, 이들을 해산 시킬 것인가, 군중을 이끌고 진군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자리에서 농성을 할 것인가로 격론이 벌어진다. 당시 서울역 앞 서울 소재 대학교 총학생회장 16명이 회의를 통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충돌이 벌어질 경우 대규모의 유혈사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해 이날은 해산하고 다시 준비를 해 다음에 집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심재철 서울대총학생회장이 발표를 했다.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잘하면 민주화에 성공할 지도 모르는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가 왔다는 소문에 겁을 먹은 그는 연설대(버스) 위에서 해산 결정을 내리게 된다. 유시민 당시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등 반발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귀가하여 마지막까지 남았던 고려대학교가 해산하며 서울의 봄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리고 5월 17일자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두환 정권은 시위 주모자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이 사건은 서울역 회군이라고 하여 일각에서는 민주화를 10여 년 뒤로 늦춘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산 결정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던 일이다. 20년 전의 사례[2]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당시 군부를 누가 주도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해산하지 않고 군경과 본격 충돌할 경우 민주화는 고사하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광주광역시가 아닌 서울특별시에서 미리 벌어질 것은 거의 확실했다. [3]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신군부가 학생운동권을 사회혼란을 유발하는 세력으로 판단하여, 강제제압명령이 나오기 직전까지 상황이 악화되자 군사개입을 우려한 학생운동권에서 자진 해산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5 5월 18일, 그 이후
군부는 5월 17일 단행된 조치에 항거한, 5.18 민주화운동을 학살로 진압하였고, 이로써 서울의 봄은 막을 내렸다. 결국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6월 항쟁이 일어나는 1987년까지 미뤄지게 되었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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