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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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日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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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794~1185/1192)

1 개요

일본의 시대구분. 그 기간은 간무 덴노[1]가 헤이안쿄(현재의 교토)에 천도했던 794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마쿠라 막부를 연 1185년 혹은 덴노에게 정이대장군(쇼군)을 제수받은 119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사의 남북국시대[2] 중엽에서 고려시대 중엽과 겹친다. 한국사의 국왕으로 대비된다면 통일신라 38대 왕인 원성왕발해 5대 국왕인 강왕의 치세에서 고려 19대 왕인 명종 치세와 겹치는 시기로 대략 400년에 달한다.[3] 나라 시대에 확립된 율령제와 토지공령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며, 끌어올렸던 덴노 가문의 권력이 외척에게 넘어간 시기이기도 하다....

2 연혁

초기(794~858)에는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중기(858~1068)에는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등원낭방)이래로 후지와라 씨가 덴노의 외척으로 섭정(셋쇼)과 관백(간파쿠)을 독점하면서 귀족정치로 변모한다. 또한 견당사가 중지되고(894년) 대외교류가 규슈다자이후에 제한되면서 국풍문화라고 불리는 독특한 귀족문화가 발달한다. 가나서체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 3대격식(三代格式)이라 불리우는 고닌캬쿠시키(弘仁格式), 죠칸캬쿠시키(貞観格式), 엔기캬큐시키(延喜格式)와 같은 법령의 편찬도 이시기 이루어졌다. 간무 덴노는 지방관제를 개혁하고, 군제 역시 개혁하여 상비군제와 모병제적인 군제로 전환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이 군은 도모(伴) 같은 유력 가문이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몰락한 후 점차 무사씨족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賴光)등이 유명하였다.

하지만 중기 후반부터는 939년의 덴쿄의 난을 시작으로 도호쿠를 중심으로 변방에서 늘 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이 시기의 반란은 스스로 신코(新皇,신황)을 자칭할 만큼 격렬했다. [4] 또한 율령제의 핵심인 왕토사상과 토지공령은 이미 헤이안 초기부터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는 사적 개인들의 능력차나 귀족 지방관의 탐학과 수탈, 개척지 귀속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권력자들이 개척지를 약탈하기도 했고, 국가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토지경작자들이 대귀족이나 대사원에 자신의 토지를 바치고 예속되어 버리는 현상도 계속 증가하였다.

그리고 중앙 권력은 나라시대 말부터 외척 가문이자 실권 가문으로 대두하였던 후지와라(藤原) 셋칸케(摂関家)가 실권을 장악하여 셋칸정치(摂関政治)를 펴면서 장원을 기진받아 최대의 장원소유 귀족으로 대두하였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일부 덴노들의 개혁 시도를 좌절시켰다. 덴노에 협력하던 하급귀족 출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같은 뛰어난 인재도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당하고, 후지와라에 거슬리거나 후지와라의 외손이 아니던 덴노나 동궁이 폐립되는 등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황가가 권력을 회복했던 인세이 시절에는 도리어 도바 상황 때부터 인(院)이 장원소유주로 대두하여 사회문제를 악화시켰다. 이들 셋칸케를 중심으로 가문에 따른 관위 임명이 고착화되었으며, 중앙 권력은 후지와라 가문과 황족 가문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문제 악화로 인한 반란 및 사원의 강소 등을 진압하기 위해 황손이었던 무사씨족들이 중용되었고, 이들이 후에 무가정권의 주역이 된다. 반란이 일어난 경우 무사 씨족의 수장을 지방관이나 토벌대 장군으로 파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토지소유자인 지방의 무사들과 지방관으로서 지방 권력을 쥐었던 유력 무사씨족의 수장이 유착하여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중앙의 후지와라의 셋칸정치는 이런 변천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11세기 고정된 세율의 조세 부과 및 각 쿠니(国)별 수취와 같은 세제 개편을 통해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지방은 토지소유자들이 점차 국가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하여 10세기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의 반란이나 해적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반란 등이 이어졌고, 겐지(源氏)나 헤이시(平氏) 같은 무사씨족들이 이를 진압하여 공을 세우면서 점차 성장하였다. 지방은 지방관인 고쿠시(国司)들이 지방 유력자들과 협조 및 견제하면서 중앙에는 조세만 보낼 뿐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 귀족이나 무사씨족들, 지방 유력 가문들이 고쿠시가 되면서 지방의 근거를 마련하고 토지를 가진 지방 무사들과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혼슈(本州) 동북부에서는 조정군과 이민족[5] 에미시(蝦夷) 간에 갈등이 계속되었고, 강대한 에미시 씨족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다 8-9세기 동안 점차 정벌되었으나 아베씨나 데와씨를 비롯한 그 세력이 남아 11세기까지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었으며, 전 9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 3년의 역(後三年の役) 이후에는 오슈 후지와라(奧州藤原) 가문이 오슈에서 반독립적인 권력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정벌하는 장군명 중 하나였던 세이이다이쇼균(征夷大將軍)은 훗날 무가 정권의 최고 권력자의 관직이 되었다.

후기(1068~1192)부터 섭관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덴노가 양위하여 조우고(상황)[6]으로서 원정(院, 인세이)을 펼친다.

사실 양위 자체는 간무 덴노(재위 781~806) 다음인 헤이제이 덴노(재위 806~809)때부터 있었을만큼 흔했다. 하지만 그 직후 구스코의 변(810)으로 나라(헤이죠쿄)로 다시 복귀하려는 헤이제이 조우고의 계획이 사가 덴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 출가하는 등 실체적인 힘을 가진 덴노는 드물었다.

그러나 우다 덴노(재위 887~897. 이후 출가) 이래 170년만에 후지와라 피가 섞이지 않은 고산조 덴노(1034~1073, 재위 1068~1073)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산조 덴노는 장원을 대거 정리하여 국가로 환수하고, 무너져가던 율령제도의 정비를 도모하였으며 그 수족으로서 중하류 귀족과 지방관들을 등용하는 등의 정책을 펴 국정을 안정시켰는데 이는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으로 칭송받았다. 이로서 장원제의 폐단이 완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졌으며 셋켄케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

고산조 덴노는 자신의 자손이 황통을 잇게 하고자 하여 양위를 실행에 옮기는 도중 40의 나이로 요절했다. 조선 정조? 이후 황위를 계승한 아들 시라카와 덴노(재위 1073~1086, 상황으로 1086~1129)는 무려 아들 호리카와(재위 1086~1107, 요절), 손자 도바(재위 1107~1123, 이후 양위), 증손자 스토쿠 덴노(재위 1123~1142)[7] 까지 3대 42년을 상황으로 있으면서 일흔일곱으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시라카와와 도바 즉위시에는 후지와라 셋칸케(摂関家)에서 내분이 발생한 데다 그 씨장자가 어리거나 무능하여 그 위세를 꺾을 수 있었다. 여기에 스토쿠 덴노가 아직 어렸기에 권력은 새로운 인(院)이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바도 역시 아버지가 죽은 1129년부터 1156년까지 27년간 실권을 휘두른다. 도바인은 자신의 장원 확대에 몰두하여 기존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으며, 민생 악화와 지방의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율령에 기초한 조정의 정치의 왜곡과 자의적 측근정치, 상황의 사욕추구는 민생의 악화와 함께 황실의 권위나 정치의 정당성도 점차 악화되었다.

이때 조우고(上皇)가 일종의 사병이었던 무사들에게 권력을 주면서 무사 출신이 성장하여, 타이라 씨와 미나모토 씨가 두각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이 상쟁한 결과 가마쿠라 막부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이 도바 법황[8]의 죽음 직후 벌어진 도바의 아들 고시라카와 덴노(後白河天皇)와 스토쿠 조우고(崇德上皇) 사이의 무력충돌에서 덴노측이 승리한 1156년의 호겐의 난(보원保元의 난)이다.[9] 그리고 이후의 헤이지의 난 등이 겹치면서 황실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수도의 군사 치안권이 다이라 일족에 집중되게 된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필두로 하는 다이라 일족은 공경 외척 가문으로 승격하고, 수도 인근의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확립했으며, 송과의 교역을 주선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 황실이나 후지와라 가문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게 된다. 키요모리는 조우고를 유폐시키고 자신의 외손 안토쿠 덴노를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과시하였으나, 키요모리 사후 동국에서 궐기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무가정권을 수립하면서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린다. 자세한 것은 인세이, 타이라노 키요모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항목 참조.

2.1 종교

아베노 세이메이가 이 시대의 인물이며 금기와 모노노케를 중히 여겼던 이 시대의 풍조를 대변하고 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뭘 하든간에 음양사에게 길흉을 점치게 했으며, 자신이 있는 곳이 음양도에 따라 불길한 방위라면 잠시 남의 집에 가 있는 것이 일상사였다 그 기회를 틈타 바람도 피고. 또 질병이나 흉사가 모노노케의 짓이라고 생각해 병을 앓게 되면 승려를 초빙하여 경을 읽고 귀신을 퇴치하게 했다.

불교도 융성하였으며, 거대 사찰들은 귀족들과 황가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성장하였다. 황실이나 후지와라 같은 대귀족들이 사찰을 발원하기도 하였으며, 이들 사찰들은 그런 가문들의 지원세력이 되었다. 점차 사찰들은 막대한 장원의 소유, 지주의 세습, 유민들을 모아 승병을 조직하는 등의 문제를 나타내게 되었으며, 헤이안 말기에는 이들 승병을 동원한 거대 사찰들의 횡포가 문제되었다. 이런 문제는 전국 시대 말까지 지속된다.

2.2 문학

한편 후지와라 씨가 자신의 가계 안에서 섭관(섭정/셋쇼+관백/간파쿠 = 섭관/셋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딸을 덴노의 비로 바치면서 당대의 재녀들을 모아다가 시녀로서 섬기게 했기 때문에, 그 시녀들에 의해 겐지모노가타리마쿠라노소시, 일기 등을 비롯한 문학작품이 많이 쓰여졌다. 다른 모노가타리 문학도 쏟아져나왔는데, 타케토리모노가타리도 이 시대 작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일기인 미도칸파쿠키(御堂関白記)[10]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당시에 다이고 덴노(897~930)가 명령해서 엮어진것이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こきんわかしゅう, 고킨와카슈)이다.

2.3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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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덴노를 비롯한 덴노의 근친들이 전통행사 때 입는 옷은 이 시대 복식.

특히 무녀복 비슷한 하카마 위에 12겹의 겉옷을 껴입고 치마까지 두르는 쥬니히토에는 이 시대 시녀들의 제복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머리카락이 긴 것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에 머리채가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길렀다. 이런 상태로 궁중의 일을 맡아 본 궁녀들은 초인이 틀림없다...헤이안의 궁녀는 괴물인가!

반면 지체 있는 귀족 여성들은 가벼운 평상복만 입고 있는 주제에 거동하는 것을 품위없게 여겼다. 신사에 참배가는 것 외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두발을 그대로 드러낸 차림을 창피한 것으로 여겼다. 현대로 치면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과 동급인 셈. 때문에 남성들의 경우 관[11]을 반드시 쓰는 것이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화장하는 방식에 눈썹을 밀고 새로 그리는 마로 눈썹 형태가 유행했다.

2.4 풍습

이 시대의 결혼 풍습은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다가 마침내 그 거처에 드나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것이 삼일 연속 이어지면 결혼으로 인정받는 형태였기 때문에 한 남자가 여러 여성의 거처에 드나드는 호색을 풍류로 여겼다고 한다.[12]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남자가 여자의 방에 몰래 들어와 밤을 지새고 나가지만, 셋째 밤부터는 공인된 사이가 되어 부모가 연회를 여는 것으로 결혼식을 갈음했다. 이때 부부는 '미카요노 모치'라는 작은 떡을 나눠 먹었는데 연을 끊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씹지 않고 먹었다고 한다. 그럼 죽을 텐데[13]

3 나무 위키에 등재된 헤이안 시대 인물

4 대중문화 속의 헤이안 시대

판타지나 에로게에 딱 맞는 설정이라(?) 그런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들이 꽤 있다. 특히 음양사가 나오는 퇴마물이나 요시츠네가 나오는 겐페이 전쟁이 나온다면 이 시대가 배경이다.

퇴마물 쪽에서는 아베노 세이메이나 미나모토노 요리미츠의 요괴퇴치담이 주된 소재이고, 전쟁물 쪽으로 보면 겐지와 헤이케의 건곤일척 승부를 다룬 겐페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14] 또한 당대 여성이 이 시대를 묘사한 문학작품이 많기 때문인지, 순정만화나 여성향에서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수라의 각에 나온 작가 후기에 의하면, 전국시대, 에도시대 말기[15]와 함께 일본의 3대 로망의 시대(?)라고 한다. 실제로 저 세 시대는 함께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가장 많이 배경으로 쓰이는 시대이다.

4.1 헤이안 시대에 쓰인 작품

(국내 출판 기준)

  • 겐지모노가타리
  • 마쿠라노소시
  • 타케토리모노가타리
  • 카게로 닛키[16]: "하루살이 일기"라는 뜻으로, 섭관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또 다른 부인이 가네이에와의 결혼생활에 관해 쓴 일기. 저자는 미치츠나노하하, 말그대로 "미치츠나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리고 가네이에를 대차게 깠다
  • 미도칸파쿠기(御堂関白記) : 헤이안 중기 권력자로서 딸 넷을 덴노에게 시집보내 세 명의 외손자를 덴노로 올렸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20여년간 썼던 일기이다. 당시의 정치와 언어, 귀족의 생활모습에 대한 중요 자료로 인정받는 기록으로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호죠지셋쇼기(法成寺摂政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며 대표적 이름인 미도칸파쿠기도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미치나가는 칸파쿠에 오르지는 않았다.
  • 오치쿠보 모노가타리 : 헤이안 판 신데렐라.
  • 헤이케모노가타리 : 완성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지만 내용은 헤이안 시대 막바지의 겐페이 전쟁이 소재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승리보다도 동생 요시츠네나 타이라 일족의 몰락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는, 그야말로 판관편애의 전형.[17]

4.2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모계가 백제의 도래인 출신.
  2. 통일신라발해가 대치하던 무렵.
  3. 흥미로운 건 원성왕 때 신라는 하대에, 발해 역시 초기 혼란기에 접어든 직후 다시 발전을 시작한다. 또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정권이 들어가는 시기도 1170년으로 일본의 군사정권 성립과 정확히 겹친다(그 앞의 타이라씨까지 포함해서). 그러므로 1. 당과 신라로 대변되는 기존 율령제가 무너진 시대에 그 외곽에서 발해와 헤이안 시대가 번성을 시작하고, 2. 다시 율령체계가 아예 붕괴됨에 따라 빚어진 혼란기에 셋칸시대가 무르익고, 3. 고려의 번영이 시작될 때 중흥이 시작되었으며, 4.북송과 고려의 문벌체제가 망하는 정권교체기에 헤이안 시대 역시 끝났다고 보면 대강 시대적 맥락이 맞는다.
  4. 이때의 반란으로 (뒤에 쇼군의 유래가 되는) 700년대의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이 잠시 940년에 부활하기도 했다. 이 때의 쇼군은 후지와라노 다다부미藤原忠文.
  5. 라고 편의상 표기 하지만 원래 혼슈는 에미시들의 땅이었고 일본이 침입자 입장이다. 영국에서 이주민인 앵글로색슨족과 원주민인 켈트족의 입장을 생각하면 된다 게다가 에미시는 일본인들 입장에서 뭉뚱그려 부르는 명칭일 뿐이고 이들이 단일 문화권이었는지도 불명확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무라이(갑옷입고 칼차고 말타는)도 원래는 에미시들 특유의 것 이었는데 나중에 일본이 받아들였다.현재 로마 양식으로 알려진 건축양식, 또는 의복문화가 원래는 원주민인 에트루리아인의 것이었는데 나중에 로마인들이 따라한것과 같다
  6. 태상천황太上天皇(다이조텐노)의 약어. 사실상 "죠-코"라고 읽는다.
  7. 사실 증손자가 아닌 시라카와 덴노의 사생아였다는 이야기가 당대 기록으로 있다. 이렇게 되면 스토쿠는 나이는 16살 어리지만 사실상 도바의 어린 숙부뻘이 된다. 물론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8. 호우오우(호-오-)法皇, 출가한 조우고(상황). 공교롭게도 교황을 일본은 로마 법황이라고 한다.
  9. 하지만 실상은 열흘간의 소규모 싸움에 불과했다. 졸지에 수괴가 된 스토쿠는 당시에도 실권이 없었고, 난의 정황도 몰라 아들 시게히토도 놔두고 도망갈만큼 허둥거렸다. 되려 이 사건은 반도바 성향 무사들의 우발적인 사건에 가까웠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반대파를 일소하려는 덴노와 그 측근 신제이 등의 술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10. 이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인데 실제 미치나가는 칸파쿠(関白)가 된 적이 없다.
  11. 옛날 일본 초상화 속에서 남성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그것. 일본어로는 칸무리라고 한다.
  12. 여성이 여러 남자에게 편지를 받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여자가 집 밖으로 나가기 힘든 문화였다.
  13. 이것 때문에 헤이안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씹지 않고 먹었는지 사소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근데 실제 크기를 보면 바둑돌보다 조금 큰 정도로, 입안에서 조금 우물거리면 삼킬 수는 있는 크기다. 씹지 않고 녹여먹었나보지
  14. 이렇게 일본 역사와 관련된 게임들은 한국의 게이머가 플레이하기에는 일본 게이머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창작물에서 일본 역사를 모르면 캐릭터가 왜 이런 드립을 치거나 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15. 메이지 유신 전후의 신센구미 등이 활약하던 시대. 통칭 막말(幕末).
  16. 국내 출판명은 청령일기
  17. 애당초 판관편애라는 말 자체의 유래가 바로 미나모토 요시츠네에게서 나온 말이다.
  18. 주인공들이 복도에 널린 잡다한 물건을 피하거나 치우지도 못하고 지나갈 수 없다고만 하여 국내에서는 물의(?)를 빚은 적 있다. 시나 편지를 쓰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헤이안 히메의 습성을 감안하면 고증일지도 모르겠으나, 우선 그녀들은 음양사의 딸들로서 히메가 아니다(...)
  19. 오토기도 그렇고 프롬소프트웨어에서 나온 작품들에선 세이메이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있다.
  20. 1~3 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