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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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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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세

2.1 언어

소비에트의 언어 정책은 시기별로 차이가 많이 났는데, 크게 보면 초기의 민족어 평등 정책과 대(大)러시아 주의에 입각한 러시아어 동화 정책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소련의 초기 언어정책은 러시아 제국의 언어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1879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9~49세 사이 전체 인구들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구는 24%에 불과했다.[1] 특히 농촌과 비러시아계 민족들의 문맹률 문제는 더욱 심했는데, 농촌은 인구의 19%, 중앙아시아의 경우 남성의 10%, 여성의 3%만이 문맹을 벗어난 상태였다.

일반 대중에게 공산주의와 혁명의 당위를 설파하려면 당연히 문맹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프롤레티리아니 공산 혁명이니 하는 복잡한 개념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초창기의 언어 보급 정책의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소련의 국부인 레닌이었다. 레닌은 자신부터가 순수한 러시아계 혈통과는 거리가 멀었고 개별 민족의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레닌의 사상은 언어 정책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1918년~1920년은 비러시아 민족에 대한 언어 교육의 평등권이 확립된 시기이다. 레닌은 문맹 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언어 보급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어떤 언어도 국가 언어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선언하고,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는 평등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언어 보급 정책의 핵심은 물론 학교였다. 학교 일선에서 민족어의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소련 영토에 산재한 다양한 언어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대단히 막장스러운 상황이었다. 혁명이 일어난 시점에 단 13개 언어만이 문어(文語)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19개 언어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족어의 표준화 정책 및 보급은 성공적이어서 1934년에는 무려 104개의 민족언어로 교과서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소련의 민족정책을 일컬어 코레니자치야(коренизация)라고 한다. 코레니자치야는 '토착화', '현지화'라는 뜻. 코레니자치야는 그 이전의 대(大)러시아주의 성향의 러시아 제국의 민족정책에 반대되는 정책이었다.

문자 개혁 또한 활발히 진행되어서, 문자가 없는 민족들과 쓸 문자가 없어 자신들 종교의 문자인 아랍 문자를 쓰는 민족들에게는 슬라브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표기하기 힘든 문자인 키릴문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자를 언어에 맞게 변형하여 제공하고, 고유의 문어 전통이 확립된 지역에는 그들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키릴문자 대신 로마자를 보급한 이유는, 로마자가 익히기 쉽고 보다 국제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코민테른이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고... 또한 로마자의 보급이 꼭 민족어 존중의 측면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라서, 당시 아랍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이슬람계 민족과 몽골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민족들의 경우 이를 계기로 소비에트 영향권 바깥의 외부 세력과 결탁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기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정권의 문맹 퇴치 정책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1897년 당시 문자 해독률은 24%에 불과했지만 1959년이 되면 97.9%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정권은 일관되게 대러시아주의에 입각한 러시아어 동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왠지 국내에서는 카와이한 러시아빠인 스탈린이 만악의 원흉인 양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스탈린 이후 다른 서기장들의 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선 1920년대 말, '라티니자치야(Латинизация)'라는 이름으로 아랍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권(아제르바이잔어, 우즈베크어 등)에 라틴 문자를 보급하였고, 라틴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들도 1939년경이 되면 키릴문자로 죄다 전환시켜 버린다. 조지아어아르메니아어 같이 고유의 문어 전통이 있는 언어나 독일어, 이디시어 같은 언어에는 그렇게까지는 못 했지만 나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다른 지역에게는 그냥 키릴문자를 강요한다. 이런 식의 키릴 문자 강요는 상당수 민족언어에게 있어 언어학적인 장애를 일으켰는데, 비슬라브계 언어들의 경우 민족어의 음운구조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키릴 문자로 언어를 표기함으로써 언어 사용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했다.

1938년에는 비러시아계 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의무화 되었다. 사실 1938년 쯤이면 민족언어의 보급과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별개로, 이미 러시아어의 상층언어 지위가 공고해진 상태였으므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각 가정에게 민족어 교육을 의무화시키지 않고, 자녀에게 러시아와 민족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배울 수 있게하는 정책을 발효했다. 얼핏 생각하면 선택권을 주면 민족어 교육 면에서 좋을 것 같지만 비러시아계 민족들 또한 러시아어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어와 지방어가 병용되는 상황에서는 중앙권력이 강해질수록 중앙어 구사 능력이 계층의 척도가 되는 경향이 강하다. 더구나 소련처럼 중앙정부의 정책에 지방 공화국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고,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소련의 경제적 자원은 대부분 러시아에 있었다. 요컨대 러시아 민족이 주류로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소련 정부의 지배를 받는 이상 러시아어 구사 능력 없이는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2등 국민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을 받는 청소년들이나, 그 청소년의 부모세대로써는 당연히 러시아어 교육을 더 중시하게 된다. 그 대신, 이로 인한 전통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조부모세대는 오히려 민족어 교육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쉽지만, 교육 문제에서는 당연히 러시아어 구사자가 실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과거일제강점기일본어를 못 하던 조선인이나 현재 중국어를 못하는 몽골인, 위구르인 및 티베트인, 중국어를 못하고 대만어만 구사할 줄 알았던 과거의 중화민국 내성인과 같다고 보면 된다.

1968년에는 소련 교육과학 아카데미 산하에 민족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을 위한 연구소가 설립되어, 교과별 단어 수준 선정에서부터 교사 교육에 이르는 광범위한 러시아어 교육 및 교수법 연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75년에는 모든 중등학교 이상에서 러시아어를 선택과목으로 채택하고, 1979년에는 '최소화' 라는 슬로건 아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유치원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강력한 러시아어 사용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어를 버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학이나 언어 교육의 매개어는 여전히 민족어 비중이 높았고, 민족어 교육 시수도 그렇게 낮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60년대까지는 타타르카자흐, 우즈벡, 키르기즈 같은 투르크계를 주축으로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비동화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사회경제적 조건이 급변하기 시작하여 비동화그룹의 인구가 차츰 동화그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인 데이터를 살펴보자. 소련에서 생산하는 각종 통계는 전체주의 국가의 특성상 조작과 은폐가 심한 것으로 악명 높았고, 소련의 언어 상황을 담고 있는 인구 센서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원시 데이터로는 사실관계의 파악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Silver(1974b)는 인구 센서스 결과가 보여주는 모호성을 피하기 위해 비러시아계 민족의 언어 사용자를 네 가지의 배타적인 집단으로 분류하였다.

연도UMUBABAM
197051.036.73.19.2
197937.648.83.510.1
198910.159.04.321.3
19946.061.63.522.0

UM은 비동화 그룹으로 민족어만 사용, UB는 비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민족어를 제 1언어로, 러시아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B는 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러시아어를 제 1언어로 민족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M은 동화그룹으로 러시아어만을 사용한다. 표를 보면 알겠지만 70년대 이후 민족어만을 사용하는 비동화 그룹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는 동화그룹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련의 언어 정책은 소연방 붕괴 이후에도 구 소련 국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해당국의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만으로 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고, 정치적으로도 민족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인지라 한국의 친일파종북만큼이나 예민한 떡밥으로 남아있는 실정이다.[2]

2.2 종교

Christ_saviour_explosion.jpg
1931년, 소련 공산당에 의해 폭파당하는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좌 성당인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모습. 현재에는 1990년대에 러시아에 종교의 자유가 회복된 뒤 재건되었다.

소련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고, 종교란 종교는 모조리 극심한 탄압을 수도 없이 받았다는 인식이 세간에 퍼져 있는데, 이것은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대체로 사실이다. 레닌은 "을 말하는 자들은 어리석다"라고 말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다. 소련은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 정교회의 특권을 박탈하고 정교회 신부와 주교들을 앞장서 처형하고 기독교를 탄압했다. 공산당원들이 정교회 신앙을 조롱하기 위해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고[3]카잔 대성당같은 유서깊은 정교회성당들도 공산당 치하에서 무신론 박물관(!)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었다.

일단 이후에도 정교회는 비공식적으로 존속은 되었고[4] 헌법상으로도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었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입법의 주체인) 공산당에 의해 무시당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매우 많았을 뿐. 스탈린 시기 공산당은 1940년까지 4만명의 정교회 사제들 중 3만 6천명을 처형했고 신학교들은 모조리 폐쇄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사실상의 극심한 공산당 탄압 속에 2차대전 시기 잠시 탄압의 고삐를 풀어줄 때까지 절망적인 시련과 암흑기를 보내야 했다.

거기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종교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에는 종교인도 툭하면 굴라그에 잡혀가거나 죽는 일이 빈번했으며, 위의 사진처럼 교회나 성당이 공산당 주도로 파괴당하기도 하고, 국가적인 무신론은 홍보나 전파가 권장되면서 종교 포교는 불법으로 쳐서 잡아가는 등 심각한 차별이 만연했다. 따라서 출세나 좋은 배경을 원하는 국민들은 차별을 피하기 위해 종교인이 되기를 꺼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등[5] 소련에서 형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고 해서 탄압이 적었다고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다만 시기에 따라 종교 탄압의 강도의 차이는 있었는데, 레닌-스탈린 초기 시기까지는 종교에 대해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대조국전쟁 초반 소련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국가적 단합을 위해 잠시 러시아 정교회를 장려하기도 했다. 물론 정교회 이외에 개신교가톨릭 등 타 종파의 경우는 그런거 없었고[6] 목회자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을 감옥이나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괴롭히는 등 가혹한 핍박이 계속되었다.

스탈린 시대 이후에도 종교의 선교활동과 비종교인이 종교를 가지게 만드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었고, 정교회 부활예배에는 소련 사복경찰이 들어가 감시하기 일쑤였다. 기타 종교행사나 종교활동 역시 소련 당국에 의해서 강력하게 규제되었다. 세례성사 자체가 공산당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으로 간주되었으며, 소련 아이가 세례를 받게 되면 부모의 신상기록 카드에 불리한 기록이 올라가는 차별을 당했다.

또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스탈린 시기의 종교탄압 중지가 다시 간헐적인 종교탄압과 박해로 돌아가는 등 소련의 종교는 계속 시련을 겪다가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서서야 글라스노스트가 실시되면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 소련 말기의 종교 분포는 무신론 60%, 러시아 정교회 20%, 이슬람 10%. 개신교 7% 등. 물론 수치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과반 이상이 정교회 신자였다. 한 예로 소련 비밀경찰 KGB 간부였던 푸짜르블라디미르 푸틴은 사실 정교회 교인이었고 그 외 수많은 공산당 출신 정치인이 러시아 건국 이후 정교회 신자임을 어필하며 정교회 신앙을 회복시키는데 팔을 걷어 붙였다. 결국 소련 붕괴 후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당과 주류 기득권이 주도하여 러시아 정교회를 거의 준 국교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2.3 기타

  • 올림픽 스포츠에서 굉장히 선전했었는데 프랑스,영국,독일,중국이 각각 홈에서 1위 해본거 말고는 미국의 1위 자리를 뺏어본건 소련,독립국가연합뿐이었다. (6번,1번) 그리고 1991년에 해체한 소련의 기록이 체조 , 레슬링 , 역도 , 카누 , 배구 , 핸드볼에서 아직도 1위 기록을 하고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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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iser(1994), Lewis(1972)
  2. 이상 소비에트의 언어정책에 대한 내용은 《유승만, 소비에트 언어정책의 이론과 실제, 러시아연구 Vol.18 No.2》을 참고하였음.
  3. 그런데도 성인들의 유해가 수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고 발견되는 기적 때문에 공산당원들이 역으로 분노한 민중들에게 조리돌림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4. 러시아에 남아서 활동하던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로 망명해서 활동하던 러시아 정교회와 구분되어 "살아있는 교회"로 불렸다.
  5.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산권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6. 솔제니친의 명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에서 혹사당하는 동료가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