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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昌源 / Sin Chang-won
파일:Attachment/신창원/신창원.jpg | |
이름 | 신창원(申昌源) |
출생 | 1967년 5월 28일 |
출생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
신체 | 174cm, 67kg, O형 |
가족 | 5남매 중 넷째 |
1 개요
대한민국의 범죄자로 1967년 5월 28일,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하신리에서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린 신창원에게는 지독한 가난도 고통이었지만 어머니가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신창원을 때렸고 나중에는 새어머니까지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신창원의 동생이 아픈데도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학교 생활에도 별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신창원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출을 시작, 중학교에 진학한 지 석달 만에 퇴학당했다.
그가 범죄자가 된 계기는 그의 저서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으로 부터 "돈 없으면 어서 꺼져."[1] 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마가 태어났음을 느끼고 어둠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좀도둑질을 하게 되었는데 물론 여기까지는 그래도 신창원을 범죄자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정환경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었으며, 어려운 살림살이 때문에 남의 밭과 가게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기 시작한 게 도둑인생의 시작이었다. 발이 빨라 도망치면 아무도 못 잡았다고 동네사람들은 전한다. 또 무작정 멀리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서 추적자의 동향을 살피곤 했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닭 서리, 수박 서리를 하다 경찰서에 끌려간 것이 열네 살 때였다. 그 일을 계기로 그의 범죄는 나날이 대담해졌으며, 교도소가 범죄 학교란 말이 있듯 그는 감옥에 한 번씩 갔다 올 때마다 더욱 강인한 범죄인이 되었다.
신창원은 어려서부터 싸움을 잘 했다.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했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성격이었다. 권투를 배워 그는 건달이 되었고, 걸핏하면 남의 싸움에 끼여들었다. 그러다 한 번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한 일이 있었는데, 합의금으로 줄 돈이 없어 후배들과 함께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행인의 돈을 털기로 했다. 흉악범은 아니지만 주로 부자들의 집만 골라서 털고 다녔다. 적어도 누구를 직접적으로 때리거나 살해하지는 않았으며, 부자집의 경우 억단위로 터는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신창원의 아버지라는 자가 아이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답시고 경찰관들도 훈방조치한 신창원을 기어이 다시 끌고 와서 소년원에 잡아넣고야 말았다. 아버지의 의도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렇게 된 직후의 신창원의 인생은 파멸했다.
2 탈옥 사건
1989년 3월 28일에 서울에서 후배 4명과 절도를 하다 공범1 김양훈이 집주인을 살해하면서 강도치사죄로 무기징역을 받고, 이미 전과가 너무 많았기에 청송제2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중, 1997년 1월 탈옥을 저질렀다. 노역작업 도중 손에 넣은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무려 4개월간 하루 20분씩 화장실 쇠창살을 몰래 조금씩 그어 마침내 지름 1.5cm의 쇠창살 2개를 끊었고, 감방을 빠져나와서 외벽 환기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끊은 쇠창살로 20m 가량 떨어진 교도소내 교회 신축공사장 철담장 밑의 언 땅을 폭 53cm 깊이 20cm 가량 파내어 공사장으로 들어간 후 공사장에서 주운 밧줄을 타고 외부로 통하는 공사장 펜스를 넘어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빠져나가는 데에는 1시간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사전에 동료 죄수들을 포섭했다거나 심지어 교도소의 묵인까지 제기될 정도로 신출귀몰한 탈출이었다. 이 탈옥을 위해 15kg을 감량하였고 감시를 피하기 위해 평소 오랜시간 모범수로 지냈다고 한다. 교도소를 빠져 나간 신창원은 500m 떨어진 화훼 농가로 침입하여 옷을 훔쳐입고 자전거를 훔쳐 4km를 달려 큰길(구포사거리)까지 간 뒤, 택시를 타고 서울로 잠입했다.
그 뒤 2년 6개월간 4만여km 의 거리의 도주를 계속하였으며, 도주를 다니는 동안 빈집들을 털며 훔친 현금으로 생활을 하였고 이동 수단도 훔친 차를 이용하였다. 그렇게 도망다니는 동안 잡힐 듯 하면서도 체포 직전에 경찰의 추격을 따돌린 것만 무려 6번이었다. 연인원 97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전국 6개 지역 지방 경찰청에 수사본부가 설치되는 등,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주행각을 벌였다. 그 중 유독 충청남도 천안시 근처에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천안 시내 이곳저곳 마다 경찰병력이 배치되고 차량 검문이 실시되는 등 천안사람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다. 천안 이외에도 지나간 곳이 많아 곳곳마다 해당 지역 경찰서 높으신 분들의 목이 날아갔다. 오관참육장?
특히, 신창원의 담당 형사인 원종렬 경장은 원래 경사였는데 신창원 때문에 경장으로 강등을 당하는가 하면 신창원을 잡기 위해서 밤을 새워가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등 신창원으로 인해서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전국의 모든 경찰들이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경찰의 진급적체를 해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때 진급한 김석기 등이 나중에 경찰청장까지 승진하게 된다. 경찰이 쏜 총[2]에 맞고도 도주하고 살아남았는데다가 쥐를 잡아먹으면서 박스 안에서 일주일을 넘게 버텨내기도 했다고 한다. 베어 그릴스?
신창원 곁에는 늘 여자가 있었다. 당시 신창원은 전북 익산시 은하수카페 종업원 김모양과 동거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6월 29일 김양은 순천에 내려가 대주파크빌을 계약하고 다음날부터 곧장 살림을 시작했다. 신창원은 이 때 김양에게 돈다발을 보여주다 갑자기 "나를 배신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7월16일 신창원이 검거되자, 김양은 이러한 사정을 털어놓으며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빼앗지 말아달라."라고 경찰에 사정했다. 김양에게 중요한 것은 신창원과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던 것이다. 다만, 김양도 범죄자를 숨기는 것에 대한 공범으로 처벌받았을 확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결국, 신창원은 자신을 숨겨줄 여자가 필요했고 여자는 돈이 필요해서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 '신창원의 여복'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999년 7월 16일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대주파크빌 104동 205호에서 가스 수리공 김영군씨(군 하사관출신, 추후 경찰특채)의 신고로 검거되었다.당시 신고전화의 내용 당시 뉴스영상 신고자 김영군씨는 당시 우연히 의뢰받은 이집을 수리하다가 신창원을 보았는데 신창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으며, 경찰에 신고후 신창원을 신고하고 심지어 부동산에 들어가서 그 집이 여자의 명의로 된건지 확인까지했다고 한다. 김영군씨는 이 일로 자신의 오랜꿈이였으나 매번 떨어졌던 경찰이 되었다고 한다.[3]
이 사건 덕에 그는 방송을 타며 전국구급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현상금이 5천만원이 넘어갔다. 이는 당시 정부수립 이래 사상 최고액 현상금으로, 2011년까지 매 년마다 산불을 일으킨 방화범 일명 '봉대산 불다람쥐'에 현상금 3억원이 걸릴 때까지 갱신되지 않았다. [4][5] 그리고 신고한 수리공 김영군은 경찰관으로 특채되었다.#
174cm의 키에 미남형으로 그가 검거될 당시 입었던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의 티셔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저 딱 달라붙는 티셔츠가 '신창원 티셔츠'라며 유행하기도(...)
검거된 뒤 징역 22년 6개월이 추가되었고 그는 흉악범을 가둬두는 청송교도소의 2.6제곱미터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청송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신창원은 공부를 시작해 2004년 고입, 대입검정고시에 연이어 합격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탈옥사건 이후로는 모범수로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2010년 6월에 강력범을 수감하는 청송 2교도소에서 일반 교도소인 제1교도소로 이감되었다고 하며, 상담사 자격증을 목표로 감옥 내에서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고 한다. 2011년 시점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학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감옥에서 주고받은 편지들을 보면 매우 논리적이고 지적인 문장과 내용이 인상적이다. #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대략 12년에서 14년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창원 탈주 사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선두주자는 표창원으로서 그의 요지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신창원이 잘못한 건 맞는데 법원이 처벌을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면 되나?' 그 조두순도 12년 형밖에 못받았는데 도망 좀 잘쳤다는 이유로 22년 6개월 형이 타당하냐는 주장이다.#
신창원이 도망을 잘 친건 무능한 경찰이 각잡고 반성할 일인데도 그들이 반성하는 대신[6] 신창원에게 엄벌을 한다는 것은 '도망을 잘 친 니가 나빠'라며 책임을 전가하는 꼴 아니냐는 이야기이다. 한번쯤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표창원은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은 신창원과 어릴적 자라온 환경이 비슷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관심가져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한사람은 경찰이 되고, 다른 한사람은 범죄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3 그 외
탈옥 당시 신창원에게 우호적인 혹은 대리만족을 요구하는 여론이 신창원 신드롬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박인권이 신창원 만화를 그려서 멀쩡한 사람 여럿 신창원 흉내낸다고 인생 망치게 했다. 신창원은 자기 미화하는 만화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했다고 한다(원문은 더 살벌하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다른 관점에 보면 한편으로는 미화일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박인권이 그린 신창원 만화는 여론에서 단순하게 일색하는 탈주범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의 유년기 시절부터 검거되기 직전까지의 그의 인생을 자세하게 그려놓았다. 때문에 그의 자신의 홀대하는 아버지와 새어머니, 돈이 없어 방황하는 그의 성장기가 담겨있고 독자들은 그의 범죄행위가 단순히 그의 잘못만이 아닌 환경과 주변사람들의 잘못도 있다는 동정심을 유발시킨다. 더욱이 아무리 악인을 소재로 한다하더라도 작품의 주인공은 주인공 보정이라는 특수한 요소가 들어갈수 밖에 없고 아마 박인권 작가 본인도 신창원의 범죄행위를 적나라하게 그렸다고 할지라도 만화 중간중간마다 빠지지않는 그의 인간적인, 사람을 동정하고 인간미를 좋아하는 모습을 단순하게 변명거리로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박인권은 만화 속 문구에 "신창원은 결국 범죄자이고 그는 검거되야할 사람이다."라고 굳게 명시하고 있다. 이런 문구의 의미는 역시 원인은 어찌됐든 범죄자는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것. 그가 다른 이유로 면죄부를 받아야할 인물로 미화할 생각은 없다고 보는것. 결국 정리하자면 만화 자체가 어느정도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으나 그것은 만화가 그의 인생을 자세하게 담으면서 그의 어려웠던 환경이 범죄자가 되게 만든 요인임을 보여줄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것이지 그런 것 마저 범죄자를 미화한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처사일듯 하다.
그리고, 다른 범죄자들이 피해자들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내가 신창원이다!"라고 허세를 부리다가 경찰에 잡히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현실은 가중처벌 되기 딱 좋다.
신창원의 탈옥을 소재로 한 부루마블같은 보드게임이 나왔는데 쓸데없이 고퀄리티다(...).
리즈시절 막갤에서 난데없이 신창원의 이름을 네이버 검색순위 1위로 올려놓는 검색순위 조작을 한 적이 있다. 전국구급 낚시로 사람들은 당시 신창원이 또 뭔가 저질렀나 의아해했다고 한다.
법을 공부해서 국가와 교도소장을 상대로 4건의 소송을 제기했는데 승소했다.
당연하지만 신창원역과는 관련 없다(...).
4 자살시도
2011년 8월 18일 감방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 원인은 한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고 한다. 사실 신창원은 복역 초기엔 자신에게 신경쓰지 않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으나 다시 감옥에 들어간 뒤로 그를 찾아온 건 아버지뿐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위중했으나 얼마 후 의식을 회복했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보도가 이어졌지만, 늦게 발견된 탓에 뇌손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2011년 8월 22일, 그가 1월달에 한국의 교도행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낸 편지를 문성호 자치경찰연구소장에게 보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참고 문 소장은 이 때문인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장기수에 대한 절망적인 수용 실태 때문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신창원의 편지
5 참고자료
- 당시의 기사 :
- 국가기록원 : #
- 호산나 신문 칼럼 : 탈옥수 신창원을 교회에서 밀어낸 것은?#
- 신창원 기부 기사
- 경찰 측에 의하면 신창원에게 털린 부유층들의 신고는 0건이라고 한다. 도난된 현금이 검은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 잠복근무을 하던 경찰관이 신창원의 동거녀를 성폭행하여 파문이 났다.#
- 신창원 검거실패로 징계받은 경찰은 29명, 총경이상만 10명이었다고 한다.
- ↑ 물론 1952년부터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었으므로 신창원 보다 훨씬 윗 세대들도 초등학교 때는 학비를 내지는 않았기에 수업료(월사금)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수업료가 없음에도 학교 자체적으로 육성회비, 운영회비, 어머니회비 등의 온갖 명목을 만들어 소액이나마 강제로 걷는 금액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런 금액이라 여겨진다. 21세기에 인권존중 받으며 초중등 교육을 마친 세대들이 보기에는 "세상에 그런 교사가 어딨냐?" 라며 믿지 못하고 그냥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만 해도 어디에 쓰이는 지 알 수도 없는 이러한 잡다한 납입금을 안 냈다는 이유로 교실 앞에 불러세워 놓고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안 내면 졸업 못한다' 식으로 으름장을 놓은 온건한 타입부터 두들겨 패는 강경한 타입의 교사들이 즐비했었다. 한국만화 검정 고무신에도 비슷한 장면을 볼수있다. 6.25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한 소설 "흰종이 수염"에서도 사친회비를 안냈다는 이유로 책보를 빼았고 부모님 모셔오라고 했다는 장면이 있다. 이래서 교사를 뽑을 때는 인성도 같이 봐야 한다.
- ↑ 원종렬 경장이 쏜 총이라고 한다.
- ↑ 당시 SBS에서 카드캡터 체리 1기 7화를 방영하다가 이 소식을 속보로 보도하면서 해당 분량의 대부분이 방송되지 못 하는 참사가 벌어졌다고.
아이러니하게도 7화 에피소드 제목은 체리 그림도둑 되다.이후 sbs에서 재방송을 안 해줘서 미방영판으로 남았으나, 다른 채널에서 재방송을 해줘서 미방영판 신세는 탈출했다. - ↑ 참고로 이 사람은 2011년 3월 검거되었다.
- ↑ 그리고 2014년, 유병언이 현상금 5억원으로 기록을 또 깬다(...).
- ↑ 알다시피 신창원 도주 중 처벌받은 경찰은 서른명도 넘었지만 검거 후엔 경찰의 무능함에 대한 자성 및 시스템적 개선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냥 자축하며 끝냈을 뿐. 어찌보면 애꿎은 현장 책임자들만 총대매고 혼난 것이다.
- ↑ 후배 공범 4명은 4월 1일에 체포됐지만, 신창원은 총상을 입고 도주한 뒤 나중에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