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조 사건

1 개요

1997년 김정일 정권 초기에 일어난 대숙청 사건. 8월 종파사건의 리메이크격인 사건이자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숙청 가운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만 무려 2만 5000명이다. 홍무제? 아울러 이 사건은 김정일의 각본, 감독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면서 김정일 자신이 권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패륜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김정일 자신의 인간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심화조'라는 말은 이 숙청사건에 이용된 이른바 "북한특수감찰반"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2 사건의 발단

1994년 김일성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뒤를 잇게 된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첫번째는 바로 권력 주위에 아직도 남아있는 김일성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것과 둘째로는 흉흉해지기 시작한 민심을 다른데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미 1974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밀회의 결정에 의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인된 이후에[1] 계속 지도자수업을 받아온 김정일이지만 권력세습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의 지도자 세습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는 어디나 존재했었는데 특히 김성애와 그녀의 자녀들이었다. 계모 김성애에 대한 원한이 깊었던 그에게 이복형제 김평일의 존재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아울러 김일성과 흡사한 외모를 지닌 김평일에 대한 지지도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2] 더구나 러시아 출생이었던 그와는 달리 김평일은 국내 출신이었던 까닭에 소위 "백두혈통"에 대해 이의가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 큰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바로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는 달리 군의 지지도가 약했다는 것이다. 아버지 김일성이야 "항일 유격" 활동이라는 간판이 있었기에 군의 지지도를 쉽게 얻을 수 있었고. 이복형제 김평일 역시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직후 북한의 대학생들로 하여금 군입대를 독촉하고 여기에 자신 역시 직접 자원해 인민군에 입대함으로서 군의 신뢰를 높이 산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정일은 군과 관련된 어떤 활동도 했다는 기록이 없었기에 이것은 크나큰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일설에는 판문점도끼만행 사건 당시 김평일의 활동에 자극받아 김정일이 문화예술활동에 나선 것 처럼 서술되있었으나 이것은 선후관계가 바뀐 것이다. 김정일이 피바다가극단 등을 지도해서 혁명가극을 만든 것은 1970년대 초반으로 이것으로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원로그룹의 지지를 획득해서 1974년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당시 김정일의 경쟁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였다. 판문점도끼만행 사건은 2년뒤인 1976년에 일어났다. 다만 당시에는 김정일이 군부에 대한 영향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고, 김평일의 활동에 불안감을 느꼈을 가능성은 있다. 김정일이 군을 완전히 틀어쥔건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 직책을 획득한 이후이다. 이때 사실상 권력세습 작업은 끝났다. 김정일은 1960년대말부터 조선로동당 문화예술부장 겸 선전선동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피바다', '꽃파는 처녀'와 같은 김일성 세대의 항일유격투쟁 업적을 찬양하는 작품들을 영화화 하거나 또는 연극무대에 올리면서 김일성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것이 김영주와의 후계자 경쟁에서 승리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1980년대 들어 김일성을 "수령님의 건강과 여생을 위하여"라는 명목으로 김일성을 슬금슬금 권력 밖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정책을 수립, 지시하게 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슬슬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의 지도력에 상당한 결점이 있음이 발견된 것이다. 김일성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의견이라도 들어줄 줄 아는 아량이 있었던 반면 김정일은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되고 집행되어야만 되는 독단주의자였다. 실례로 북한과 대만 군사과학자 상호협력에 관한 안건을 토의하던 협의회 중 당시 정무원 총리였던 강성산이 "이러한 중요의제는 일단 수령님께 보고를 드리고 비준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의견을 내자 "안 그래도 몸이 불편하신 수령님께 그런것을 보고드려 부담을 드릴 필요가 있겠나"며 묵살해 버렸다고 한다. 대만과의 교류는 중국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만큼 신중함이 요구되는 중요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이렇게 독단적으로 밀어부친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진행한 정책들이 모두 시행착오 내지는 실패로 결과가 나타나자 권력의 중요 요직을 맡고 있던 김일성의 측근들이 목숨의 위태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비밀리에 이러한 과실을 김일성에게 보고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본질을 알고 난 김일성은 대노하고서는 "지금부터 모든 중요 안건은 당 지도부를 거치는 일 없이 내게 직접 보고하라!"라고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여기에 사소한 가정문제를 갖고 있던 강성산 정무원 총리를 눈에 가시같이 여기던 김정일이 가정혁명화로 크게 부각시켜 해임시켜버리자 노한 김일성이 "당 총비서로서 당 조직비서에게 당적경고를 준다"고 한 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던지 "어떻게 자신의 친인척도 가리지 않는가?!"라면서 노발대발했을 정도였다. 근데 자네 손자고모부도 총으로 쏴죽였다네…

게다가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타나기 시작한 고난의 행군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인구 17만의 김책시에서 하루에 200명의 노동자가 굶어 죽는 정도였는데다, 그나마 주민을 연명시키던 동시에 주민통제의 핵심인 배급제마저 붕괴되면서 아사자는 수십만에 이르는 상황까지 일어난다. 소위 고난의 행군이 절정이던 1998년에 가면 평양을 제외한 전국의 배급이 끊기게 된다. 황해제철소 농성 투쟁도 이미 '심화조'의 숙청이 한참 진행되던 1998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제철소 노동자들에 대한 배급이 장기간 끊기고 다들 굶어죽기 직전 상황이 되자, 간부들이 임의로 자재를 내다 팔아서 식량을 마련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자구책을 마련한 것인데, 북한 정권은 국유재산을 마음대로 빼돌린 범죄행위라면서 법대로 한다면서 간부들에 대한 일제처형을 지시했고, 여기에 노동자들이 "다 굶어죽을 판이라 어쩔 수 없었다!"면서 반발해서 농성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인민무력부 탱크부대가 노동자들을 무참히 깔아뭉개는 것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 이러면서 여러가지 민심이반의 조짐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김정일은 사상무장을 더 강화함과 동시에 이 난국을 타개할 묘책을 짜내기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묘책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제공받게 된다.

3 채문덕

채문덕은 김정일과 동시대에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 평양시 안전국장, 즉 한국으로 치면 서울지방경찰청장까지 오를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런데 1992년 당시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였던 문성술과 평양시 당 책임비서였던 서윤석이 채문덕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채문덕이 김정일의 위세를 믿고 "안하무인적으로 경거망동하고 있다"며 공격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채문덕은 평안남도 북창군으로 쫓겨가고 득장 분주소장, 즉 한국의 파출소장으로까지 격하되고 말았다.

그러나 채문덕은 장성택의 후원으로 1995년 중앙정계로 복귀하고, 이듬해 1996년에는 장성택의 형 장성우가 맡고있던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이라는 핵심보직을 꿰차게 된다.[3] 김정일을 통해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에 임명된 채문덕은 그 자리에서 김정일에게서 한 가지 지시를 받게되는데 "우리 가문을 착취한 최지주라는 자가 있는데 그의 아들은 남조선으로 달아나 장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또다른 가족들과 자손들은 북조선에서 아직도 출신을 속인 채 살고 있지만 잡아내지 못했고, 아울러 6.25전쟁에서 남조선에서 활약한 서북청년단의 잔당들이 지금도 북조선에 남아있으니 이들을 반드시 잡아내어 숙청시키라."라는 내용의 지시였다. 표면상으로는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철두철미하게 박멸시킨다는 본심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김정일은 채문덕에게 심화조라는 조직을 만들라는 지령을 내리고 이 심화조로 하여금 북한 전국의 모든 간부들을 '재검토' 즉 자세히 재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1995년말에 평양 룡성구역에서 생긴 대수롭지 않은 한 사건이 이 엄청난 숙청극의 서곡을 올리게 된다. 당시 룡성구역 안전부 주민등록과의 안전원 박 모라는 인물이 룡성구역 행정위원장을 "간첩"으로 신고한 것이다. 박 모씨에 따르면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주민등록 자료를 보던 중 행정위원장이 미군 첩보기관에서 훈련을 받은 뒤 6.25 전쟁때 남조선을 통해 침투한 간첩이었다는 내용이었는데 나중에 이 신고는 허위로 밝혀져 박 모씨는 간부 모함죄에 걸려 되려 자신이 불명예 제대를 당하고 심지어 량강도 백암군으로 추방까지 당했다. 그러던 중 TV 뉴스를 통해 미국산 무기와 수류탄, 총탄이 룡추동 뒷산에서 발견된 사실이 보도되면서 행정위원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발표와 함께 행정위원이 총살됨으로 말미암아 상황이 반전이 된다. 그 박 모씨라는 사람은 신분이 회복됨은 물론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게된다.

4 서관히와 숙청

1997년 초에 사회안전성 본부에 중앙상무조가 설치되고 채문덕이 책임자로 오른다. '전국 모든 도, 시, 군 안전부에 심화조를 설치하고 간부들의 경력을 검증하라'는 지시가 김정일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그리고 그 첫 희생자는 바로 당시 중앙당의 농업 담당 비서였던 서관히라는 인물이었다.

서관히는 이 당시 김정일이 비료를 사오라고 내린 300만 달러를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교화생활 중이었는데 심화조는 서관히를 다시 불러내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의 사회안전성 예심국 구류장 안에서 모진 고문을 가한다.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한 서관히는 '자신이 서북청년단 잔당이고, 북한 사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비료값을 횡령했다'는 거짓자백을 한다. 여기에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이미 타계한 김만금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으며, 황해남도 당 책임비서 피창린, 개성시 당 책임비서 김기선, 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규 역시 서북청년당 잔당이란 자백이 나왔으며 채문덕을 몰락시켰던 두 인물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 문성술과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 서윤석 역시 서북청년단 잔당이었다는 진술이 나왔던 것이다.

처형은 즉시 시작되어 위에 거론된 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혁명열사에 안장된 김만금 역시 묘소에서 파내어져 시신의 머리에 총격이 가해졌다. 한 마디로 부관참시 당한 것이다.

림형규, 피창린, 김기선 등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백을 하고 총살형을 당했다. 반면 문성술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안전부 구류장에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심화조는 문성술에 설사약을 먹이고 3일 동안 물 한 모금 조차 마시지 못하게 했다. 결국 문성술은 그렇게 사망했으며 서윤석은 생존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되었다. 처형당한 간부들의 유족들은 사회안전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던 18호 관리소로 옮겨졌다.

서관히도 공개처형당했는데, 그의 애인으로 알려졌던 생물학자 백설희에게도 그 불똥이 튀었는지 탈북자 신동혁개천 수용소에 수용되었을 때 그녀를 봤다고 첫 책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물론 신동혁은 그녀가 누군지는 몰랐고, 그냥 당시 수감자들 중 작업반장이었던 그의 말을 더럽게 안 듣는 떽떽거리기나 하는 노망난 할망구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가 남한으로 와서야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고. 단 신동혁의 개천 수용소 생활에 대한 증언은 상당 부분 과장되었던 것임이 후에 밝혀져서 백설희에 대한 증언의 신빙성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다.

5 광란과 공포

이 사건에 대한 당시의 북한 풍경은 한 마디로 "광풍" 그 자체였다. 룡성구역에 거주하는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서북청년단 특공대원들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이 논리가 참 단순무식한 것이 6.25 때 북으로 왔으니 지금으로 치면 70대를 넘었을 것이라는 계산법이었다. 그들도 고문을 당하고 자백을 하고 그리고 총살당했다. 이렇게 자그마치 2년 동안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2만명이었다. 어떻게나 많은 사람들이 잡혀들어왔던지 아예 관리소를 새로 지어야 했을 정도였다. 평양의 중앙기관 간부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2년동안 찍소리 못하고 살아야 했다. 참고로 김일성 일가를 착취했다고 알려진 최지주의 남은 일가에 대한 제거 역시 집행되어져 모든 일족이 총살형을 당했다. 정말 심하죠

6 반전

김정일은 자신의 목표가 모두 이루어지자 채문덕과 집행간부들에게 영웅칭호를 내렸고 참모장 황진택에게는 김일성훈장까지 수여한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불순분자 색출을 하도록 격려했다.

이렇게 광적인 열풍이 계속되어가는 듯 하던 심화조 사건은 일부 평양 간부들과 주민들이 던진 "만일 김정일에게 충성을 바친 간부들과 주민들이 다 간첩이라면 그동안 북조선이 어떻게 유지가 됐을 수 있었겠는가?"란 질문에 의해 반전을 맞는다.[4] 이러한 의문이 제기되자 김정일은 "토사구팽"을 시전하는데 "국가안전보위부보위사령부가 공동으로 사회안전성을 조사하라"란 명령을 내린 것이다.

결국 이렇게 시작된 심화조에 대한 조사는 결국 채문덕이 개인적인 원한을 이 사건에 이용했다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심화조의 궤멸이 시작되었다. 2000년 초에 시작된 심화조 조사를 통해 7월에 채문덕이 처형당했고 9월에는 나머지 심화조 단원들이 전격 체포되었고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과 일부 간부에게는 최고 20년에 이르는 징역형이, 영웅에서 역적으로 되는 건 한순간.. 심화조 세포조직을 책임졌던 각 도, 시의 안전부장과 정치부장은 10년형, 심화조 사업에서 앞장서 극악무도한 고문방법을 맡았던 예심원과 고문전문가 수백명에게는 무기징역형이 내려졌고 전국의 안전원 6000명도 중형 내지는 철직, (해임) 추방되었다. 그리고 김정일의 지시로 사회안전성이 인민안전성으로 개칭된다. 이것도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게 개칭의 이유가 "인민들에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기 위함."이란 것.

7 후유증

김정일은 자신이 직접 억울하게 당한 희생자의 누명을 벗겨준다는 명목으로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있던 심화조 피해자들을 최고사령관 훈령으로 석방시켰다. 그러나 이미 커다란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조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된 것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피해자들이 정신질환을 앓거나 중병에 걸렸으며, 이미 피해자들이 살았던 예전의 거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지 오래되었기에 집단거처와 쌀과 기름이 제공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피해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것은 가족들과의 이별과 가정의 붕괴였다. 기혼자들의 경우 배우자들이 이혼하여 재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5] 피창린의 경우는 아들 3형제가 맞아죽은 비극을 당해야 했다. 서윤석은 너무나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나머지 봉화 진료소에 입원중인데 간호원이 주사를 들고 다가서면 "선생님, 제발 주사는 놓지 말아 주십쇼, 다 실토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신이상이 되버렸다.

8 평가

이 사건은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진행시킨 숙청이었지만 너무나도 혹독하고 잔인하게 진행됐다. 아울러 김정일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치 않고 해낼 수 있는 악귀라는 점을 다시금 나타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장성택채문덕 역시 이 사건과 관련,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이들이 실질적인 집행자들이었던데다 이들의 권력욕과 출세욕 역시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였다. 북한은 물론 한국 현대사의 흑역사. 4.3 사건에 비견되기도 한다. 다만 4.3 사건은 남로당의 무장봉기와 그 진압과정에서 촉발된 이념갈등에 의한 보복성 양민학살사건인데 반해 이 사건은 독재자의 권력욕에 의해 벌어진 전국구급 대숙청이라는 점에서 현저한 차이점이 보인다. 사건의 성격은 차라리 문화대혁명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주성하 기자는 심화조 사건에 깊게 개입한 장성택이 처형된 것을 자업자득이라고 싸늘하게 촌평했다. 본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본인도 같은 꼴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
  1. 다만 공식적인 발표는 1980년이었다. 1974년부터 1980년까지는 김정일이 후계자라는 사실은 감추고 대신 북한 정권과 언론은 '당중앙'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당중앙의 영도하에 어쩌구 저쩌구~" 당시 한국에선 '당중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추측이 분분했다.
  2. 여담으로 김일성은 김평일이 태어났을 때 "우리 집안에 장군감이 났다"면서 좋아했다고 한다.
  3. 장성우는 평양방어사령부 3군단장으로 영전해간다.
  4. 덧붙이자면 진작에 이 반문을 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분위기에서 말 꺼내기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근데 저 질문을 하고서도 김정일이 "어디서 이런 망발을"하면서 숙청했다는 얘기가 없는 것으로 봐선 진작에 저런식으로 이의를 제기했어도 됐을 법 싶은데... "아이고~ 질문 참 빨리도 한다" 이 말밖에는...
  5. 물론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한 이혼이였다. 이들 역시 이혼을 거부했다면 수용소행을 피할 수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