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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소드 오프 샷건을 든 남자가 범인 중 한명인 사카구치 히로시.
사건이 벌어진 아사마 산장.
1 개요
あさま山荘事件
공식 명칭은 '연합적군 아사마 산장 사건'. 1972년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일본의 나가노 현에 위치한 '아사마 산장' 에서 연합적군(連合赤軍)[1]이 벌인 인질극.
사카구치 히로시를 비롯한 연합적군 멤버 5명이 아사마 산장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10일 동안 틀어박혀 경찰과 대치했는데 당시 인질은 무려 219시간 동안이나 감금되어 있었다.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 벌어진 인질사건으로서는 일본 최장시간 억류를 기록하였다.
2 발단
총기탈취 사건 등을 일으키고 도주중이었던 연합적군 멤버들은 군마현의 산악지대에 거점을 마련하고 계속 도피행각을 일삼았지만, 경찰의 수색이 시작된 데다 외부지원이 끊겨 조직 유지가 힘들어지고 거기에 더해져 1971년 연말부터는 내부분열 조짐까지 보여[2]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던 중 뉴스를 통해 경찰의 수색으로 거점들 일부가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위협을 느낀 연합적군 멤버들은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군마 현에 인접한 나가노 현으로 도피처를 옮기게 되었다.
당초에는 나가노 동부의 사쿠시(佐久市) 방면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빈약한 장비 등 여러 모로 악조건이 겹친 데다 악천후로 인해 산에서 조난을 당해 의도했던 방면이 아닌 카루이자와 쪽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신 별장지를 만나게 되고 그들의 은신처로 선택된 곳이 하필이면 사건이 일어난 아사마 산장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사마 산장 인근의 사츠키 산장에 잠입했으나 수색중이던 나가노 현 경찰 소속 1개 부대와 마주쳤다. 이윽고 연합적군 멤버들은 총을 난사하며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인근의 아사마 산장으로 도주, 관리인의 아내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했다.
주모자 사카구치 히로시의 당초 요구사항은 연합적군 최고간부 모리 츠네오 부부의 석방과 아사마 산장에 있던 멤버들의 도주로를 보장해줄 것이었다. 그러나 도주건은 멤버중 요시노 마사쿠니가 반대해서[3] 결국은 그대로 산장에 틀어박힌 채 아무 요구조건도 없이 히키코모리 농성체제로 돌입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산장 주위를 포위하는 한편 외부로부터의 송전차단을 시작으로 특수차량을 이용한 정찰 등을 강행하고 범인들을 지치게 만드는 전략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경찰측에서 터뜨린 병크가 있었는데 범인의 가족을 이용해 설득에 나섰던 것이다. 실제로 인질극 사태에서 범인의 가족, 특히 부모에게 설득을 맡기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통해 범인의 자수나 여자나 노인, 아이 등 일부 인질의 해방을 이끌어 내는 경우도 제법 되지만 이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대상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통해 이러한 수단이 역효과를 볼 가능성이 없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 경찰측은 프로파일링 따윈 쿨하게 생략하고 막무가내로 가족을 투입했다.사실 이 시대는 프로파일링? 그거 그냥 탁상공론아님?의 수준으로 취급 당하던 시절이다.[4]
당시 경찰은 범인들의 모친을 현장으로 불러와 그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당시 모친들의 호소가 얼마나 절절했던지 현장에 있던 기동대원들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범인들은 이에 대해 부모자식간의 정을 이용해먹었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설득은커녕 오히려 역효과가 터져 그들의 신경만 더 건드려놓은 꼴이 된 바람에 범인들은 자신들의 모친에게까지 발포를 하게 된다.
결국 설득조차도 먹히지 않자 최후의 방법으로 산장 벽과 지붕을 부수고 정면돌파로 진압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참고로 이 사건에서 웬 정신줄 놓은 민간인 하나가 인질을 대신 하겠다며 무작정 산장 안으로 바구니를 들고[5] 들어갔는데 범인 중 한 명인 요시노 마사쿠니가 "ㅅㅂ 빨리 안 돌아가면 갈길 거임" 하고 소리지르고 있는 사이 경찰 쪽을 향해 윙크를 날리는 바람에 사카구치 히로시가 경찰인 줄 알고 오해해서 그대로 그 민간인 뒤쪽 머리통에 38 스페셜탄을 쐈다 [6] 그 민간인은 머리에 총알을 맞고도 머리 안에 총알이 박힌 채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멀쩡하게 아프다며 징징댔다가 나중에 수술할 때 결국 사망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경찰 경계선을 뚫고 유유히 산장으로 잠입 했다가 저 꼴을 당했으며, 이전에 마약 때문에 경찰에 끌려가서 고초를 치룬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아무튼 그 때문에 경찰은 당연히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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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적군파에 의해 사용된 엽총들.
경찰의 강행돌파에 대해 범인측은 5연발총[7] 22구경 라이플, 12게이지 O/U형[8] 더블 배럴 샷건,[9] 38구경 권총 등 총기로 저항했고 이 와중에 상호간 총격전으로 인해 경찰 기동대원 일부가 부상을 입거나 순직하고 작전에 동원된 대형 크레인에 기기 이상이 생기는 등 작전은 난항을 겪었으나 장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범인들은 전원 검거되었다.[10]
3 돌입 작전
건물철거용 철구를 장착한 크레인과 살수차가 동원되었고 기동대가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벽을 부수고 돌파구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 크레인이 철구로 몇 번 후려치기도 전에 고장이 나서 멈춰버리는 바람에 돌입 작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거듭되는 돌입시도 도중 진두지휘하던 2명의 기동대원이 총을 맞고 병원으로 이송 도중 순직하고 말았다.[11] 이때 돌입을 맡은 기동대는 일체의 보호장구와 진압용 방패, 곤봉과 가스총 등 비살상 무기와 콜트 M1911, 뉴 남부 M60 권총을 장비했다. 듀랄루민으로 만든 진압 방패는 한 장으로는 총알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2장을 겹쳤다.
마지막 돌입작전 도중 적군파의 총격이 너무 심하자 결국 경찰 지휘부로부터 생포를 포기, 산장에 돌입한 제7기동대에게 총기사용 허가가 떨어졌지만 혼란이 심해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3차례에 걸친 돌입시도 끝에 살수차의 고압살수로 산장의 벽을 부수고 돌입해 전원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인질도 무사히 구출되었다.
범인들은 신원이 까발려지는 걸 막겠다며 2월 21일부터 코드명을 쓰기 시작했다. 사카구치 히로시는 "아사마", 반도 쿠니오는 "타테야마", 요시노 마사쿠니는 "후지산", 가토 형제는 "아카기(형)" 와 "기리시마(동생)". 다 소용 없는 짓이었지만 또 체포되어 현관으로 끌려나올 때 기자들과 기동대원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은 건 당연지사였다.
3.1 경찰측 사상자
- 제2기동대 대장 우치다 나오타카 경시 순직, 이후 2계급 특진하여 경시장으로 승진.[12]
- 지원차량 반장 다카미 시게미츠 경부 순직, 이후 2계급 특진하여 경시정으로 승진.[13]
- 제2기동대 4중대장 소게츠 카미하라 경부보, 안면에 산탄을 맞고 중상.[14]
4 결과
경찰의 돌파작전 상황은 전국각지에 생중계되어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었고 당일 시청률이 조사 개시 이래로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집계된 시청률은 NHK 포함 시청률이 무려 89.7%라는 기록을 세웠고 같은 날 1시간에 걸쳐 방송된 뉴스 특보는 평균 시청률 50.8%로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뉴스 특보 시청률로는 일본 최고기록을 유지하고 있다.[15]
또한 이걸로 사실상 일본의 학생운동 세력, 아니 일본의 진보세력 혹은 좌파가 사실상 몰락을 한거나 다름이없다. 한때는 일본 공산당이 주요 정당이었던 시절도 있고, [16]1960년 미일 안보조약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안보투쟁이 일어났던 적도 있으며, 학생운동 계열 신좌익파 들이 사회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60년대 후반에는 전학공투회의 같은 학생 운동조직이 아주 전국적으로 확산될정도로 엄청 활발하였지만, 우치게바 같은 내부투쟁이랑 점차 극좌적으로 변해 시민들에게 비판을 받았고, 결국 이 사건으로 완전히 죽어버렸다
사건 이후 아사마 산장은 수리 후 영업을 재개했다. 사건 후 약 10년 동안은 사건현장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거의 잊혀진 곳이 되었지만 건물은 아직도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운영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건물 외관이 깨끗한 것을 보아서는 관리는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5 문화적 영향
2002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 야쿠쇼 코지 주연의 「돌입하라! 아사마 산장 사건(突入せよ! あさま山荘事件)」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단 다이 하드 시리즈나 레인보우 식스를 떠올리지는 말자. 당시 사건 진압에 참여한 경시청 간부로써 지금은 일본에서 유명한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사 아츠유키[17]의 저서를 각색한 영화로 경찰측의 고군분투, 그리고 온갖 뻘짓과 삽질 을 주내용으로 다룬 영화다. 일부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바뀌어서 나오니 영화 보기 전에 숙지해두자. 경찰 입장에만 치중해서 그런지 연합적군 멤버들은 맨 마지막 돌입부분에서나 얼굴이 나온다. 아니 애초에 목소리도 없다 그냥 엽총으로 총질만 한다. 안습. 더 절망적이게도 영화 자체가 등장하는 총기류도 확인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촬영을 해놨다 [18]
겟타로보 코믹스판에서 진 하야토가 과격 학생운동 리더로 등장하며 빠지려고 하는 멤버 2명을 아이언 클로+얼굴찢죽 하는 장면도 이 사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 나오는 과격 혁명운동집단 "여명" 과 그들이 일으킨 모토스 호수 총격전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쓰르라미 울 적에 DS판 4권 신미오츠쿠시편의 키워드 중 하나인 시라카바 산장 농성 사건은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일본의 좌파감독이기도 한 와카마츠 코지 감독은 2008년에 「실록 연합적군(実録 連合赤軍)」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 상황을 다루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 부분 진출작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오로지 경찰의 관점에서만 기술되어있던 것에 비해 연합적군측 관점, "왜 그렇게 되어야 했는지" 에 대한 후술, 구성원들의 인간적인 고뇌 등을 다룬 수작으로 평가된다. 여담으로 와카마츠 코지 감독 본인부터가 신좌파 운동에 관계된 사람이었다. 적군파 멤버들과는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고 1971년에는 아예 세계혁명선언이라는 영화를 찍어서 적군파의 해외 무력투쟁이나 국제 무력투쟁, 반일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당시 연합적군 리더 부부 모리 츠네오[19], 나가타 히로코[20] 커플의 여러 가지 병크(대표적으로 연합적군 사건)도 감상(?)할 수 있다.
방탄도 안되는 진압방패를 두 장 겹쳤다는 일화가 비교적 밀덕 사이에서 유명하다. 안습하고도 어설픈 당시 일본 경찰의 진압행태를 꼬집는 이야기로 쓰인다.
이 사건을 진압하러 온 경찰들이 컵라면을 먹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컵라면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자세한 내막은 컵라면 항목 참조.
그리고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고 헝클어진 머리로 경찰에 연행되는 적군파 구성원들의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이후 불량문화의 융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실은 며칠씩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한 냄새가 풀풀 풍겼다고 하지만 냄새는 화면 너머로 안 전해지니까...
또한 아사마 산장 사건에 대한 경찰측 대응의 난맥상은 이후 일본 정부, 특히 경찰 조직의 관료제적 경직의 대표적 사례로 정말 두고두고 까였다. 서브컬쳐계에서도 다나카 요시키 같은 이들이 깐 적 있다. 경시청(실질적으로는 일본 경찰 본부 구실을 하지만 법적으로는 도쿄지방의 경찰조직에 불과하다)이 현경에 대한 지휘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지 문제에서 시작되어 직위상 동격인 지휘관이 여럿 있을 때 누가 최고권한을 행사하느냐에 대한 갈등으로 발전했고 결국 이 때문에 「캐리어는 앉을 자리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자조적 농담이 나왔을 정도였다. 악명 높은 고위직 원탁회의[21]와 직급별 동심원[22]의 풍경 같은 경우 수많은 작가들이 다뤄서 이젠 농담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실제 이 사건 대책회의 당시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직위, 직급이나 직책상 우열을 판단하기 힘든 동급 지휘자가 여럿 있을 경우 일단 임관시기를 따지고 그것마저 같으면 정치력 투쟁을 시작한다는 전통이 여기에서 탄생했다! 물론 이런 갈등이 하급조직으로 번지지 않을 리가 없으므로 회의가 난항을 겪는 동안 컵라면에 붓는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현경 소속 급수차가 경시청 기동대에게 급수를 거부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애초에 돌입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관료적 경직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모 AV 감독이 FA HISTORICA 시리즈로 이 사건을 패러디한 영상물을 찍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