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항목 : 학생운동
목차
全学共闘会議 (ぜんがくきょうとうかいぎ, 젠가쿠쿄토카이기)
약칭 전공투(全共闘. ぜんきょうとう.)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連帯を求めて孤立を恐れず) - 당시 전공투의 슬로건.[1]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 -요도호 사건의 적군파 간부 타미야 타카마로[2]
1 개요
일본에 있었던 대학생 운동권 단체들의 연합조직. 일명 전공투. 전국공산주의투쟁단체가 아니다!
1960년대 일본의 반정부투쟁 시기에 일본 내의 여러 대학들의 단체들이 학교별로 모여 구성한 학생운동조직이다. 각 대학별로 전공투가 구성되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도쿄대학과 일본대학의 전공투였다. 동대전공투는 "대학해체" 및 "자기부정"을 슬로건으로 투쟁했다. 소위 말하는 "실력투쟁"으로 가두 폭력시위를 벌였고, 이전의 학생시위와는 다르게 과격한 폭력투쟁을 일삼았다. 특정 당파나 정치집단이 자신들의 정강과 사상을 내세우는 조직운동이라기 보다는, 대중운동의 성격이 더 크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렇기에 전공투는 각 학교마다 다른 방식을 보이기도 하고, 하나의 방식으로 정형화 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2 역사
2.1 전공투 이전
1960년대, 일본은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한 나라 중 하나였다.[3] 1960년대 초반 미일상호안보조약에서 일본의 주권 침해, 평화헌법 위배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지식인/학생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60년대 초반 일본은 소위 말하는 안보투쟁의 나날을 보내기 시작하고, 국회에 돌입하던 학생들 중 사상자가 나오고, 때로는 야쿠자로 추정되는 극우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받기도 하는 등, 학생사회는 흉흉해지기 시작한다.[4]
이런 와중에 일본의 대학 자치기구(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5]은 안보투쟁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게 된다. 이 전학련세대를 얼추 60년대 초반~중반으로 이야기 한다. 전학련은 당시 강력한 조직체가 없던 학생운동 사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되고, 중심부에 사회당 청년/학생 기구, 신좌파 학생기구, 공산주의자동맹 등 여러모습의 인물들이 섞여있는 순진한(나쁘게 말하면 단순히 투쟁만 일삼는) 학생기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전학련의 구성원 대부분이 어떠한 뚜렷한 지향점을 지녔다기 보다는, 정치단체 산하의 집합체로의 성격이 강했고,[6][7] 헤게모니 싸움으로 인해 내부 투쟁이 심했으며, 결과적으로 좌익 학생들이 조직을 장악하게 된 뒤, 어느 조직보다도 수직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으로 변화하기에 이르른다.[8] 그리고 사실 전학련은 일본의 좌파 정당이나 정치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있는 경우가 많았고, 투쟁 방식도 피켓 시위나 수업 거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별로 효력이 없었다. 결국 전학련의 수직적이고 군사조직적 구조는[9] 학생운동 전반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고, 마침 당시 서양에서 불어온 자유주의적 평등주의적/탈권위적 관[10]의 여파로 인해, 새로운 학생 연합체의 생성을 필요로 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생긴 것이 바로 전공투이다.
2.2 등장
1968년, 도쿄 국세국(일본 국세청의 도쿄 지국)에 의해 일본대학에서 22억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용도가 불분명한 금액이 발견된다. 이는 대학 당국의 부정 회계로 인해 축적된 금액이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고, 5월 23일, 최초의 시위가 벌어진다. 통칭 "200미터 데모"라고 불리는 것이 벌어진다.
당시 학교당국은 물리적 및 비물리적인 방법으로 학생 시위를 탄압했다. 대자보 뜯어가는건 기본이고 학생운동에 우익학생단체나 각 단과대 응원단, 체육회[11] 학생들을 동원하여 폭행을 일삼은것. 이러한 방법은 196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체육회 학생들로 막을 수 없는 수준으로 학생들 숫자가 불어났고, 결국 학교 당국은 학교 건물 셔터를 내려버린 뒤 학생들을 위협하여 정문 밖으로 학생들을 몰아내 버린다(...). 결국 2,000명 가량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대열을 이루어서 스크럼데모와 프랑스데모[12]를 하게 된다. 이 때는 본부의 응원단 학생들까지도 가담(!)하여 대학 직원들과 체육회 학생들을 막는 경비대로 자처하며 참가했다. 4일 뒤인 27일, 일본대학에서 아키타 에이지를 의장으로 하는 "일본대학 전학공투회의"가 결성된다.[13] 결국 일대전공투는 학생과 대학 당국의 단체 협상인 "대중단교(대중단체교섭)"을 요구하게 되고, 이 와중에 체육회 학생들이 일본도를 들고 난입한다. 유혈사태를 진압하려 나타난 경찰 기동대가 잡으라는 폭력학생은 안잡고 전공투 학생들만 우루루 패서 잡아가는 병크를 일으켜서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된다(...).[14] 이로 인해 법학부, 경제학부, 문리학부, 상학부, 예술학부, 공학부 등이 차례로 바리케이트 봉쇄에 들어간다. 참고
도쿄대학에서는 의학부에서 인턴제도 폐지와 등록의 제도 설치에 반발하여 분쟁이 일어났는데, 학생들은 의학부 전공투를 결성하고 1968년 1월 무기한 스트라이크(학생에 의한 대학 파업, 농성)를 선언하게 된다. 그런데 1달 뒤 학교 직원들과 실랑이가 벌어지다가 학교 간부 몇명을 감금한 것이 문제가 되어 17명의 학생들이 제명 처분을 받게 된다. 문제는 이들 중 현장에 없던 학생까지도 제명되면서 요주의 학생을 고의로 처분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게 된 것. 그러나 학교 당국은 처분을 취소하지 않았고, 상황은 악화된다. 결국 학생들은 6월에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게 되는데, 문제는 여기서 대학측은 경찰 기동대를 출동시키는 강경책을 썼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의학부를 넘어서 모든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공분을 사게 되고, 결국 전공투가 각 학부로 확대되고 신좌익 분파가 합류하여 야마모토 요시타카를 의장으로 하는 동대전공투가 결성된다.
이러한 사건들은 타 대학에도 바리케이트 봉쇄 및 스트라이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결과를 낳는다.
2.3 전개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학생 단체들의 연합체"를 모토로 했기 때문에, 최대의 장점은 각 단체간 소통이 원활했다는 것이다. 전학련 시대처럼 중앙회의에서 결정난 것을 불복할 수 없는 단점도 없었고, 얼마든지 이의가 있으면 집회에 참가하여 단체단위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매력으로 인해 기존 학생운동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학생운동 그룹의 학생들도 가담하는 경우가 생겼다.[15] 일본에서 "나도 젊었을때 학생운동 좀 했었지"하는 아저씨/할아버지들 이야기가 대부분 이때 이야기다. 이로인해 정치적 스탠스는 한국의 386세대와 흡사하다는 평가를 듣는다.[16][17]
또한 전공투는 이전의 학생운동의 소극적이고 타협적인 방식과는 다르게, 바리케이드 봉쇄라는 강력한 방식을 도입했다. 본관 건물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해버리고 강사 및 직원의 출입을 막아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 또한 사상적으로도 "대학해체"나 "자기부정"이라는 이야기로, 현대 산업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대안을 고민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쉽게 말하자면 그때까지 학생은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었고,[18] 정치 단체나 정당에서도 학생은 그다지 중요한 계층이 아니라고 평가했는데, 이들이 물리적이든 비물리적이든 직접행동에 나선 것.
초기에는 앞서 말했 듯 그 특유의 자유로움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학생 사회 내에서도 드디어 제대로 된 단체가 나왔다라는 평가였고, 심지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일본 대학들의 운영진에서도 이제 우리가 이야기를 좀 들을 시점이 온것 아니냐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중심부를 차지하려는 몇몇 단체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인해 점점 한쪽으로 치우친 의제만이 오르기 시작했고,[19][20] 이로 인해 논 포리(비정치성향) 학생들이 대거 빠져나가게 되고, "강력한 투쟁의 중심세력 건설"이라는 모토로 결집을 유도하고 수직적인 구조를 다시 도입하게 되자 논 섹트 학생들까지 빠져나가게 되고, 결국 다시 몇년전의 전학련[21]이 되어버린다(...) 결국 과격파로 불리는 집단만 남은것. 아니 그때보다 더 강력한 무장을 통해 더 답이 없게 된다(...)
전공투가 그 정점에 도달했던 1968~1970년도에는 한번 움직이면 공성전을 벌일 수 있는 단체로 유명했다. 가끔 1960년대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1968년 10월 1일의 국제반전데이에 벌어진 신주쿠 소란사건도 이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국제 반전데이 집회에 전공투를 비롯, 심지어 비 정치적인 학생들까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싶어서 나왔다가 시위군중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것. 경찰은 이 때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위수령을 발동하고 시위대에게 심야소란죄를 적용했다. 쉽게 말해 도쿄 중심가가 일시적으로 경찰 계엄령 상태에 돌입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 신주쿠 소란사건 당시 출동한 경찰 기동대원들 중에서 성우로 유명한 와카모토 노리오가 있었다.
당시 신주쿠 소란사건의 영상. ㅎㄷㄷ
앞서 말했듯 전공투의 장점은 각 연합체간의 원활한 소통이었는데, 바꿔 말하자면 이게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었다. 바로 확실히 정해진 사령탑이 없다라는 것. 이게 유사시에 큰 위기가 닥쳤을때는 오합지졸끼리의 이합집산만을 거듭하는 결과를 낳게 되어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전공투 내부에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 파악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아무나 단체를 만들고 대충 이름을 그럴싸하게 지어서 "우리도 전공투 일원"이라고 하면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22] 심지어 1968년 이후 전공투 운동방식은 고등학생과 재수생들까지 퍼져서 고등학교 전공투와 전국 재수생 공투 회의까지 결성된다.[23][24]
2.4 결말
일단은 공동의 목표를 목적으로 한 "공투회의" 였지만, 동상이몽 내지는 오월동주라 부를 만큼 내부 노선차이가 심했다. 대중집회가 열린다 해도 각 파벌의 차이 때문에 무슨 그룹은 참여를 안하거나, 심지어 무슨 그룹은 경찰쪽으로 상대 파벌을 유도하는 등 그야말로 개판인 경우가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공투회의 자체가 집단간의 연합체이다 보니 공투회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계속된다. 그에 따라 몇몇 학교의 전공투들은 그대로 혁마루, 중핵파의 산하단체로 변질되는등 엉망진창인 경우도 생긴다. 게다가 정말 중요한 순간에 특정 파벌이 이탈하는 경우도 생겼다. 대표적으로 도쿄 야스다 강당 투쟁때, 중핵파, 사청동 해방파등의 파벌들은 전원옥쇄이거 군국주의 시대의 단어 아니냐를 결의했는데, 카쿠마루파(혁마루파)는 "전력보존"을 이유로 유유히 농성장을 줄지어 빠져나갔다(...). 이들이 퇴각할때 나머지 파벌이 쌍욕을 퍼부은 것은 안봐도 비디오.
결국 전공투는 끊임없는 내부 투쟁(우치게바(内ゲバ)[25]라고 한다)[26]을 거듭하면서 세력이 점점 와해되고, 중심부도 해체된다. 일부 집단들은 살인도 서슴치 않는 과격 폭력투쟁/무장투쟁으로 전환하는 병크를 선보이기도 한다. [27]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적군파로 불리는 일본 연합적군이다. 연합 전 적군파와 혁명좌파(게이힌 안보공투) 로 각자 따로 놀 때도 총포점 강도 및 그 엽총을 이용한 무장강도 등 싹수가 노랬으며 연합 이후로는 무단으로 캠프를 이탈한 멤버를 배신자랍시고 살해 이 쯤 되면 진짜 야쿠자랑 다를 게 없다 총괄이랍시고 애먼 트집 잡아 서로 인민재판하고 죽이는 등 아주 가지가지 했다.[28] 종종 이러한 과격파나 가두투쟁만을 중시하는 삼파전학련을 전공투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서, "전공투는 과격투쟁을 일삼다가 검거되었다"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공투는 연합적군이 검거되기 전에 이미 거의 와해상태였다(...).[29] 사실상 1969년 말쯤 되면 전공투는 중핵파, 사학동, 공학동 등 8개의 신좌익 당파가 장악한 "실질적인 당파 공투" 내지는 "캄파니아 조직"[30]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전공투가 남은 학교는 꽤 있었지만, 앞서 말했 듯 전공투는 단체간의 연합체였으므로 소멸의 시점은 각 전공투마다 차이가 있다. 일단 동경대와 일본대 전공투는 1969년 9월 5일 전국 전공투대회때 동대 전공투 회장 야마모토 요시타카와 일대 전공투 회장 아키타 에이지가[31] 검거된 이후 급속도로 쇠퇴해서 소멸했다.
게다가 계속되는 대학 내 분쟁에 대한 대책으로, 유사시 교육부 명령으로 대학 전체의 업무를 중단시킬 수 있는 "대학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국회가 통과시켰다. 이렇게 되자 대학 내부의 문제를 내부에서 자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대학 자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대학 구성원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속으로는 어떻게 자치적으로 문제를 잘 해결하길 바란듯 결국 1969년 9월부터는 대부분의 학교에 경찰 기동대가 출동하게 되고 대부분의 바리케이드 봉쇄는 해제된다.
2.5 이후
삼파전학련의 내부 세력간 투쟁이 잘 드러나있는 영상. 잘 하는 짓이다... 홍위병이 따로없다.
전공투가 거의 와해단계를 밟아가고 있던 1970년대에는 주로 나리타 공항건설 반대투쟁에 공성전을 담당하러 출전하기도 했다. 허나 이 시기에는 이제 거의 다 망해가는 단계였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이 연대했을 뿐, 오히려 전학련세력이나 과격세력(중핵파 등)이 활발하게 연대했다. 애초부터 전공투는 학생 기구였고, 학생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1970년도 이후 전공투라고 불릴 만한 조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공투 자체가 각 정파나 집단의 "공동투쟁 위원회"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더이상 모여서 할 일이 없던것. 1980~90년대의 일본 학생운동은 환경운동/시민운동이 중심이었고, 과격한 투쟁은 가뭄에 콩나듯 보일락 말락한 수준이다.
참고로 일본 과격파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투쟁. 국가의 일방적인 토지수용에 따른 지역 농민들과의 분쟁이 시발점이었다. 여기에 삼파전학련/전공투/사회단체/환경단체/반전단체 등이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공성전이 개시된다. 언뜻 보면 반지의 제왕 3편
2008년, 일본에서 열린 일본대학 전공투 회고 사진전 영상. 일본에서도 전공투는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렸다.
전공투의 이상이 좌절된 이후, 이들 전공투 세대가 서브컬쳐 계열을 이끌었다는 분석도 있다. #
한편 중핵파 등 일부 과격파로 분류되는 극좌 계열 세력들은 미약하게나마 현재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긴 한 듯. 2014년에 교토대학의 중핵파 계열 조직 소속 학생들이 경찰 폭행 혐의로 기숙사 압수수색 크리가 터졌다는 뉴스가 떴다. 이 신문 보도에 의하면 대학을 거점 삼아서 학생 자치회 예산을 돈줄 삼는다 하며, 새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은 격차 사회에 대한 좌절이나 지적 호기심으로 인하여 들어온다고.... 그래도 요즘은 시대가 험해 감시도 강해졌으니 어지간히 독한 극좌 사상가가 아닌 이상 살인이나 폭탄 테러처럼 막나가는 짓거리는 못할 듯 어떤 대학은 월례 행사로 총장실 점거를 한다고 한다(항목이 기억나는 사람은 추가바람)
3 구성 및 성향
직접민주주의에 의거해 조직이 운영되며, 개개의 주체가 주체적으로 결의하고 책임지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처음에는 대학 내 여건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이것이 스케일이 커지면서 개별적 대학분쟁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 말에는 반정부투쟁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다.
당시 전공투는 대학 내부에서 어떠한 정파에 가담하지 않는 비 정치적인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구성 된 것부터, 일본 공산주의자 동맹(분트)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의 영향력 하에 있는 것 등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각기 다른 정파가 연합한 공동 투쟁 회의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분트와 혁공동에 관해서는 신좌파 항목 참조.
일 년 사이에 국립대학 75개 중 68개교가, 공립대학 34개 중 18개교가, 사립대학 270개 중 79개교가 가담했다.[32]
4 특징
튀는독특한 시위 모습으로 유명하다. 흔히 한총련의 시위가 과격하다고 말하지만 전공투의 시위와 비교하면 정말 저리가라다.[33] 주로 쇠파이프를 무기로 사용하며, 모든 구성원이 눈에 띄지 않는 청바지나 간편한 셔츠 차림을 하고 있어서 언뜻 보기엔 제복처럼 보인다.(...)[34] 여기에다 머리에는 방어를 위해 공사장 헬멧을 착용한다. 더불어서 선글라스와 마스크도 착용한다. 조직적으로 돌격하며 심지어 공성 망치(!)로 저지선을 뚫는다. 이 정도면 거의 시위 전문 전투종족이다.
사실상 극좌 성향이다. 보수대연합으로 탄생한 집권 자유민주당(일본)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정당에서 출발한 제1야당 사회당(일본), 심지어 당강령에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표기한 일본 공산당까지 보수 정당으로 규정할[35] 정도였다. 이러니 운동이 될 리가 없지...[36][37] 이들을 가리키는 '신좌익'이라는 말도 일공, 즉 구좌익(사회당, 공산당) 세력에 대비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런 경향을 바탕으로 우파, 민청(일본 공산당 학생위원회), 기동대, 언론을 적으로 삼았다. 역시 전투종족
일본의 1960년대 서브컬쳐를 다룬 작품들을 보면 이러한 전공투의 특징에 대한 깨알같은 패러디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도 그럴것이, 전공투 자체가 자기들만의 이러한 패션 코드(...)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벌별로 바리에이션이 엄청 많다. 예를 들자면, 중핵파는 흰색 헬멧에 '중핵'이라고 쓰여있었으며, 중핵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줄여서 혁마루파. 일본어로는 카쿠마루革マル派.)는 붉은 헬멧에 "Z"를 새겼다(흰 헬멧에 붉은줄에 Z를 새긴 바리에이션도 존재하는듯 하다). 그리고 당시 사회당의 하부조직이었던 "사회주의 청년 동맹"의 분파 "사청동해방파"는 파란 헬멧에 "반제학평(반제국주의 학생평의회)"라고 쓰여있었다. 심지어 검은 헬멧을 착용한 아나키스트들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어쨌거나 깨알같은 패러디 떡밥이 많이 존재하는 단체다...
그리고 특히 전공투 내에서도 극렬 과격파였던 여러 조직들(혁마루파, 중핵파, 적군파 기타 등등)이 테러나 내분 등의 살인 행각 등 아주 거하게 똥을 싸 주신 덕인지(...) 일본 창작물에선 가끔 저런 전공투 패션의 테러리스트(...)가 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특유의 튜닝한 공사장 헬멧을 쓰고 점퍼에 청바지 혹은 작업복 상하의를 걸친 것까지는 같지만 거기에 총기가 추가된 식. 아무리 봐도 공사장 헬멧은 실제 총격전에서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하등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그냥 아이덴티티니까 그려러니 하자게임 세이기노 히로, SIMPLE 2000 시리즈 중 하나인 THE 일본특수부대 ~흉악범죄 열도 24시~~(THE 日本特殊部隊~凶悪犯罪列島24時~), 그리고 정식 게임은 아니지만 배틀필드 1942의 일본 유명 MOD인 방위대MOD 등.
5 야스다 사건
야스다 강당의 현재 모습. 정면부가 그을린게 보이는데 이게 격렬했던 시위의 유일한 흔적이다.
1969년, 전공투가 도쿄대학의 야스다강당을 점거하고 이를 경시청이 봉쇄해제한 사건이다. 1960년대, 도쿄대 의학부 학생들의 등록의 제도 반대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것이 격화되어, 1968년 3월 12일에는 의학부 총합중앙관이, 3월 27일에는 야스다 강당이 일시에 점거됐다.[38] 6월 15일에 의학부 학생이 다시 점거하였다. 이에 대학 당국은 경찰력을 동원해서 이를 배제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학생들의 반발이 커졌다. 그리고 7월 2일에 야스다 강당은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었다. 이에 쫄아버린대학 당국은 사건을 해결하고자 했지만, 이는 학생의 반발을 불러와 도쿄대학의 모든 학부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건물들이 봉쇄됐다. 그리고 11월에는 총장 이하 전 학부장이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11월 22일에는 바리케이드 봉쇄를 두고 전공투 계열과 민청 계열이 서로 대립하였고 그 패싸움결과 바리케이드 봉쇄는 중지되었다. 일각에서는 민청 계열에 패배했다기보다는, 민청 계열과 충돌하더라도 강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붕괴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대학 당국은 1969년 1월 10일 민청계와 함께 학원 정상화와 분쟁 수습을 결의하고 말 안듣는 전공투를 몰아내기 위해 결국 1월 16일에 정식으로 경시청에 기동대에 의한 진압을 요청하였다.
1월 18일 오전 7시부터 의학부 바리케이드를 시작으로 의학부, 공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등의 각 학부의 시설들의 바리케이드를 차례대로 봉쇄 해제시키고 야스다강당을 포위했다. 오후 1시경에 야스다 강당의 본격적인 봉쇄 해제가 시작되어 1월 19일 오후 5시 46분에 옥상에 있는 학생들을 검거함으로써 봉쇄 해제가 완료되었다.
격렬했던 시위 모습을 촬영한 영상.
이 일 때문에 신입생을 뽑을 정신도 없었던 도쿄대학은 1969년 신입생, 즉 69학번을 뽑지 않았다. 그래서 도쿄대에는 69학번이 없고 그 자원들은 거의 다 교토대로 입학하는데, 덕분에 "교토대 69학번"은 대학 설립 이후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농담이 나왔고 실제로도 인정받는다고 한다(…) 68혁명의 뜻하지 않은 결말
이후 야스다 강당은 20년 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니 흠좀무.[39] 1988년부터 보수 공사를 시작해 1990년부터는 학생 단체 등에 의한 연주회에 사용할 수 있게 되고,이듬 해인 1991년에는 졸업식 등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1994년에 보수 공사가 완전히 끝나고 일반 공개되었다. 다만 정면부를 그을린 채로 그대로 둔 것은 예전에 치열한 시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둔 것인 듯.
일본에서 당시의 사건을 재연해서 만든 드라마. #1편 #2편 당시의 영상과 재연 영상이 섞여있다. 2편을 보다보면 화염방사기까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6 미시마 유키오와의 대담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 학생들과의 대담 당시 영상. 링크
전공투는 한편으로는 미시마 유키오와 일대 논전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9년 5월 13일 1천여 명의 전공투 학생들과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대학 900번 강의실(속칭 '야스다 강당')에서 일대 논전을 벌인다. 극우와 극좌끼리 하는 거라 분위기가 험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시종일관 유쾌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였다.[40][41] 양쪽은 자아와 육체라는 주제에서부터 덴노의 역사적 존재에 이르기까지 철학과 역사를 두루 포괄하는 등 참으로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일단 양 쪽 모두 기성 체제에 대한 염증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었고, 기존 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폭력의 불가피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다.
토론 내내 서로 각자의 가치를 역설하고 또 다시 그것을 까는데 주력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 간에 회유의 의미가 담간 말이 많이 오고 갔다. 가령, 미시마 유키오의 경우,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말했다. 이에 전공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리케이드 속으로 들어오면 되잖아?"라고 회답했다.[42]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는 "나는 제군들의 열정을 믿습니다"라고 나름 덕담(?)을 건내면서도 결국 "지금 제안은 아주 묘한 꼬드김이라 아주 유혹적이지만, 나는 공투(공동투쟁)을 거부합니다."라는 말로 토론을 마무리한다.
이 때의 토론집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있다. 제목은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당시 토론 내용+토론 이후 미시마 유키 오와 토론 학생들의 보론 소논문+당시 토론 주도 학생들이었던 인물 몇 명이 모여 그 때 토론의 평가와 현재의 의미 등등을 논하는 대담이 담긴 다소 현학적인 책이다(...) 그렇지만 굉장히 알찬 책으로 전공투에 대해 알고싶다면 일독을 추천한다.
그리고 1년 후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는 자위대 본부를 점거하고 할복자살했다.(미시마 사건)
일각에서는 이 대담에서 이미 미시마의 자결이 예견됐다고 본다. 다음은 미시마가 토론 도중에 했던 발언이다.
"내가 행동을 벌일 때는 결국 제군과 똑같이 비합법적으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합법적으로, 결투의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니까, 경찰들한테 잡혀가기 전에 자결이든 뭐든지 해서 죽어버릴겁니다."
7 참고
-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 문학 작품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소설에는 이 시기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 영화 도쿄 전쟁 전후 비사
- 영화 실록 연합적군
- 만화 메두사 - 카와구치 카이지 작. 초반에 야스다 강당 투쟁을 모티브로 한 내용, 전공투와 민청(만화에서는 "민개파")의 대립 등이 나온다. 신주쿠 소란사건은 거의 그대로 나온다.
- 소설 남쪽으로 튀어 - 오쿠다 히데오 작. 주인공의 아버지가 전직 전공투이며, 1권에서는 그 아버지의 후배격인 아저씨가 등장한다(이쪽은 여전히 현역(!)). 친절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웃으면서 주인공을 괴롭히던 일진을 어루만져서 뼈를 부러 뜨리거나(!!!) 반대 분파의 간부를 응징하기 위해 섬광탄(!!!)까지 구해다가 까 넣고 돌입해서는 쇠파이프로 후려치는 무서운 사람(...).[43]
- 애니메이션 인랑 - 설정으로는 전공투와는 무관하지만, 사실상 도심 게릴라와 경찰 부대의 싸움은 각본을 써준 오시이 마모루가 기억하는 전공투와 경찰의 대립을 극단적으로 상상한 것에 가깝다. 아예 작중에 등장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이름부터가 전공투 분파를 의미하던 단어인 "섹트"다.
-
게임 세이기노 히로- 공항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가공의 테러집단 "폭탄혁명연합" 이 설정이며 옷차림이며 완전히 전공투 집단이 적군파마냥 대놓고 막나간 버전(...)스럽다.코나미 내부에 전공투 시절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는 듯이쪽은 위에서 묘사한 전공투의 옷차림(특유의 헬멧에 점퍼와 청바지, 플러스로 가슴에 두르고 있는 폭혁련 단국분쇄(爆革連 斷国粉碎), 완전분쇄 봉기(完全粉碎 蜂起)같은 슬로건이 쓰여진 천)을 하고 테러리스트 짓을 한다.현실에선 만만한 총포점이나 털어서 엽총 정도나 들고 설치던 놈들이 여기선 완전히 중무장했다 - 게임 배틀필드 1942의 일본 유명 MOD인 "방위대 MOD(FHDF)" 에서 "침략자" 세력 중 하나로 전공투 내의 과격파 조직들(파벌 이름은 혁마루파, 헬멧은 적군파 및 중핵파)을 오마주한 "붉은 바람(赤い風)" 이라는 조직이 등장한다. 설정상으로는 학생운동조직 내 소수의 울트라 과격파라는데, 소수 치고는 엽총은 물론 일본군 무기(그것도 남부 권총에 수류탄)도 모자라서 입수 루트는 또 어떻게 구했는지 군용 기관단총에 저격총까지 밀수해다가 쓴다. (멀티 전용 맵에 숨겨짐) 하긴 이 MOD의 일본은 적화통일된 한반도(...)의 조선인민군이
그리고 X성인에 쇼커까지일본 본토를 레이드 올 정도로 개판이니....저기서 더 개판이 되면 어쩌자고 것보다 지구방위대 미군은 뭘 하길래 자위대만 혼자 국방 담당하나 - 닌자 슬레이어에 등장하는 극좌파 닌자 조직 "잇키 우치코와시"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특히 공사장 헬멧을 뒤집어 쓴 닌자 의상은....
- 영 블랙잭의 마지막화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 하츠노 세이의 하루치카시리즈 2권인 <첫사랑 소믈리에>에서 세리자와 나오코 의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인용된다.
8 관련 인물/항목
- ↑ 일본의 시인이자 평론가 타니가와 간의 글에서 인용한 것. 도쿄 야스다 강당 점거농성 당시 강당 벽에 쓰여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충 해석하자면, "많은 사람과 함께 연대함을 요청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뜻대로 전진할 것을 겁내지 말자."정도. 개인의 자립성, 주체성을 중시하고 기성 조직에 의한 통제를 극복하고자 한 조직원리와 행동원리를 표현한 문장으로, 전공투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확신을 동시에 표현한 명문장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고립됐지... - ↑ 요도호 사건이란, 1970년 3월 31일, 일본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赤軍派)의 간부 다미야 다카마로(田宮高磨)를 포함한 9명의 적군(赤軍)병사들이 요도호 하이재킹(공중납치)를 일으켜 일본의 국민들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을 가리킨다. 여기서 적군파 대부분은 전공투 출신이기도 하다.
- ↑ 오히려 노동운동은 1950년대 강력한 투쟁이 좌절되고 기성사회에서의 합법투쟁노선으로 갈아 타면서 잠잠한 국면을 맞이했다
- ↑ 게다가 일본 경시청 공안관계자들이 사실상 일제시대 고등계의 악습을 그대로 답습했다. 아니,아예 일제공안조직들이 그대로 현대일본 공안이 되었다. 공안항목을 참조하자. 이러한 문제점이 정세에 대한 심각한 오판을 초래해서, 결국 학생소요를 긁어 부스럼으로 만드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는 해석도 있다(...)
- ↑ 전공투가 완전 와해된 반면 이들은 아직 조직이 살아있다!
- ↑ 사실상 전학련은 일본공산당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며, 1950년대를 지나면서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공산주의자동맹이라는 신좌파가 주류가 되지만, 1960년 안보투쟁 이후 지리멸렬한 투쟁을 통해 힘을 잃는다. 결국 1960년대 중반, 대부분의 대학 학생 자치회는 민청계(일본공산당 학생계)가 장악하게 된다. 나머지는 사청동 해방파, 공산주의자동맹 등등 여러 계파가 따로 전학련을 조직한다. 사실상 분열된 것.
- ↑ 이러한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지금도 민청계 전학련을 제외한 집단은 "전학련(OO위원장)"같은 식으로 자신의 계파를 표시한다. 현재는 서로서로 자신들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족발집도 아니고 원조 따지나 - ↑ 만화 시마과장에서도 종종 전학련 출신의 권위주의적 상사에게 갈굼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 ↑ 쉽게 말해 전학련까지만 해도 스탈린주의적인 위계질서 정연한 일국사회주의를 긍정하는 분위기가 많았다.
- ↑ 정확하게 전공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8년은 전세계적으로 68운동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는 워낙에 정보가 차단되어 있어서, 이 영향을 거의 못받은 편이다.
- ↑ 학내 체육계 동아리. 일본에서는 학교별 체육회가 활성화되어 있는데, 서열이 강하고 강압적이며 군대문화적인 집단으로 대개 알려져있다.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이었는데, 종종 다른 학생회를 구타하는 경우가 있었다. 실제로 1960년대 내내 이러한 체육회계 학생들의 행동이 문제가 된 사례가 적지않게 있다. 참조
- ↑ 스크럼을 짜지 않고 팔을 넓게 벌리고 손을 맞잡고 도로를 점거하여 행진하는 시위. 1960년대 안보투쟁 당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적은 인원으로 도로 점거를 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제갈공명?아니 근데 프랑스랑 별 상관이 없는거 같은데당시의 사진. - ↑ 이러한 사건들의 배경에는 당시 상당히 열악했던 일본대학의 상황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전후 베이비붐으로 인해 학생수가 급증했고,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일본대학은 10년새에 정원을 3배로 늘려버린다. 1955년 당시 3만명이었던 정원이 1968년에는 8만명으로 뻥튀기된것. 그러나 학내 시설이나 교직원 수는 제자리걸음 수준이었고, 이에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했다고 한다.
- ↑ 참으로 코메디같았던게, 이 당시 전공투 학생들은 "경찰이 폭력배들을 잡으러 왔구나"하고 박수를 쳤다고 한다...
- ↑ 이를 일본에서는 논 섹트(non-sect)라고 불렀다. 아무런 분파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 심지어 전공투의 인기가 초 절정에 올랐던 시점에는 이보다 더 비정치적인 논 포리(non-political의 일본식 조어) 학생들도 가담하게 된다.
- ↑ 반면 일각에서는 전학련/전공투를 전대협/한총련에 비유하기도 한다. 전자가 학생시대에만 빡세게 운동하고, 졸업 후에는 대기업의 요직을 거치거나 기성정당의 정치인으로 거듭났다는 점, 후자는 급진주의적 과격투쟁을 일삼다가 망했어요가 됐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는 하는데... 전공투가 전학련의 수직적 질서나 기존 학생운동내의 고루한 습관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나왔다는 점에 비하면 뭐... 뭐 사실 전대협과 한총련은 차이가 별로 없기는 하다(...)
- ↑ 한국의 학생운동은 이들 중 중핵파/해방파(가장 전투조직에 가깝고 가두투쟁에 특화되었던 조직들. 중핵파가 직접행동주의로 가장 악명이 높았다)의 영향이 컸다. 다만 직접적이라기보다는 좀 간접적인데, 특히 NL의 사회주의 서적의 루트가 주로 조총련이고 일본을 거쳐서 북한으로 넘어가기도 하는 등 일본이 중간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더구나 교련을 받는 등 당시의 군사적 분위기도 더해져서 학생운동 자체의 보수화에 아주 크나큰 공헌을 했다.
못된 것만 배웠다덕분에 학생운동 단체라는 것이 군대조직 뺨치게 위계질서가 강하고 상명하복에 성차별 등 좌익 맞냐 싶은 조직으로 태어났다. 이걸 68운동과 비교해보자. - ↑ 잘 알려졌다시피 전통적인 좌파 사상에 의하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기층민중, 다시 말해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하부 계층인데, 학생은 이러한 계층에 속하지 않는다. 잘 봐줘봤자 부르주아로 진입을 앞두고 있는 인텔리겐치아인데, 이들이 자기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자본주의 재생산의 메카니즘에서 뛰어나오자고 한 것이다!
- ↑ 당시 학생운동 사회에서는 국제연대/협력이 중요한 모토였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반대라든가 하는 의제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점점 극좌주의적 구호들(사회주의 국가 건설, 무장투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 ↑ 일본은 극좌부터 극우까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를 취사선택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한국보다는 사상에 대한 맹종이 덜 심했다고 한다.
- ↑ 전학련 자체는 1960년대 초반 이후 신좌파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약칭 혁공동)의 산하 조직 일본 마르크스주의 학생동맹이 장악했고, 혁공동은 국제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따르고 있었다. 이 중심부를 이루고 있던 파벌이 일명 "중핵파"인데, 이들은 사회주의 학생동맹(사학동), 사회주의 청년동맹(사청동)과 함께 "3파 전학련"을 결성하게 되고 196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대부분을 장식한다. 이런 자들이 전공투 성립 이후 전공투운동에 끼어들게 되면서 막장으로 흐르고 결국 도로전학련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 ↑ 영화 박치기에 나오는 장면 중, 주인공들이 아무 대학이나 가서 "우리는 아리랑 해방전선이라고 하는데 투쟁기금이 필요한데 쇠파이프랑 각목 좀 사주셈"이라면서 학생운동가들에게 쇠파이프를 파는 장면은 바로 이런것에 기인한 것이다...
- ↑ 물론 비슷한 시기에 오사카부 고교생 연합이나 반전 고교생 협의회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공산주의자 동맹(일본)이나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일본)같은 신좌익 파벌의 고교생 조직이었지 전공투는 아니었다.
- ↑ 당시 고등학교에서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전공투들이 결성되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69(소설)에 나오는 것 처럼 허무맹랑한 경우도 있었고, 고교생 학생 운동의 주축이 되었던 경우도 있다.류이치 사카모토가 신주쿠 고등학교 재학시절 신주쿠고교 전공투에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 ↑ 내부 + Gewalt(독일어 : 폭력, 폭행)
- ↑ 한국과 달리, 일본은 다양한 사상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도 엄청나게 다양하게 공개적/비공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리지날 스탈린주의를 이야기 하는 분파, 트로츠키주의 중 직접행동/도시게릴라 전술을 전략으로 삼은 곳(중핵파), 역시 트로츠키주의지만 대중운동 및 사상교양을 주 전략으로 삼은 곳(혁마루파), 아나키스트들(흑색분트), 모택동주의자들(일본공산당 내 혁명좌파나 연합적군 일부), 등등등등 정말 많은 분파가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어중이떠중이단체들이 사회변혁의 역량을 집중시킬 필요를 느껴서 결집한 움직임이 전공투인데, 이 내부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싸운 것. 그런데 문제는 이들은 실제로 상대 파벌을 납치, 살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때 사용한 무기들 사진. 일본도와 식칼에 주목.당시 중핵파에 의해 살해당한 혁마루(카쿠마루)파 멤버들의 사진. 이런 병림픽이 계속되자 대중은 완전히 외면하게 된다. - ↑ 예를 들자면 카미아카츠카 파출소 습격사건이(적군파 항목 참조.) 실패로 돌아 갔을 때, 경찰 간부가 이들을 사살한 경찰의 행동은 정당방위라고 발언했다는 이유로 그 경찰 간부 집에 폭탄을 보내 아내를 살해한 미친 짓을 벌이기도 했고, 1971년에는 왠 적위군이라는 듣보잡 집단이 이름 알리겠다고(...)자위대 기지에 침투해서 자위대원을 식칼로 살해한 사건까지 터졌다.
- ↑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마지막 연합적군 세력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사라졌다. 현재 남은
찌꺼기잔존세력은 지하에 숨어 작은 규모의 테러 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며(일본 공안당국의 감시 + 일본 내의 여론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 한다), 일부는 북한으로 망명하여 주체사상의 추종자가 되었다. 안습. - ↑ 전공투는 각 대학의 각 주요당파의 연합체에 일반학생에 다수 참가한 형태로, 특정한 사상이나 조직,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과의 전개, 형태와 평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가두 투쟁을 행했던 삼파전학련이나, 그것을 지도했던 공산주의자동맹,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신좌파의 여러 당파와의 관계도 활자화된 기록이 중심이다. 또한 삼파전학련과 전공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당사자도 존재한다.
- ↑ 캠페인의 러시아식 발음. 사회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운동. 북한에서도 캠페인 대신 깜파니아라는 단어를 쓴다.
- ↑ 각각 전국 전공투의 의장과 부의장을 맡고 있었다.
- ↑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 전국 대학의 8할이 전공투에 의해 투쟁상태에 있었다.
- ↑ 아래의 주 16번에도 써 있지만, 한국의 학생운동은 중핵파/해방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 단체들은 아예 가두투쟁 전문이라 불릴 정도로 거의 도시 게릴라 수준이다.
- ↑ 이는 한국의 8,90년대 운동권들도 공통된 사항이었다. 가두 투쟁에 쉬운 복장이자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쉬운 복장이기 때문이다.
- ↑ 실제로 일본공산당 청년조직인 민청은 야스다 강당 점거농성 당시 학생들에게 "점거를 풀으라
(그리고 당의 영도를 받으라)"라며 학교측에 붙었다. 이 뭐... - ↑ 참고로 한국에서는 1998년 창당한 청년진보당과 그 후신인 사회당이 당시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이 주도한 민주노동당을 보수정당이라고 공격하면서 어떠한 선거연대나 공동투쟁도 하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했던 PD계(평등파)가 더 이상 세력확장을 하지 못하고 조직적으로 입당한 NL주사파들한테 머릿수에 밀려 사실상 당을 빼앗긴 이유 중 하나는 사회당같은 범좌파그룹들이 이들을 외면한 것이다. 이들은 2015년 현재 노동당으로 존재하고 있다.
- ↑ 사회당의 영향을 받은 전국학생회협의회(약칭:전학협)도 이런 경향이 강해서 매년 범좌파학생운동의 공동주도로 이루어지던 430투쟁대회가 2개로 쪼개진 경우도 생겼다.
- ↑ 이일로 다음 날로 예정된 졸업식이 중지됐다.'안습'
- ↑ 다만 일부 학생부 사무실이나 강당 지하의 구내식당 등은 계속 운영되었다고 한다.
- ↑ 이런 분위기는 2시간 30분 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 ↑ 또한, 미시마 유키오도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로, 어쩌고 보면 선후배 간의, 그것도 둘 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동질감을 공유하는 선후배였기에 더욱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 ↑ 사실 미시마 유키오와 도쿄대 전공투 사이의 가장 큰 갭은 천황제가 아니라 국제주의였다. 당시 절대적인 실존적 행동을 믿는 방식은 미시마 유키오나 전공투 구성원들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미시마는 우익답게 "민족적 자존을 잃어서는 안되고 외세의 영향력은 믿을게 못 된다"는 입장이었지만, 전공투는 국제사회의 혁명적 연대를 믿었다.
- ↑ 근데 이 아저씨 많이 불쌍하다. 지로를 괴롭힌 일진을 응징하는 건 물론 개인적인 일이었지만 섬광탄과 쇠파이프는 자신이 속해있는 분파의 보스가 세력다툼을 위해서 경쟁 분파에 테러를 가하라 지시한 거였다.
- ↑ 정확히 전공투는 아니었지만 전공투 시대에 논 섹트 래디컬 그룹의 리더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