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 개요

1909년 10월 26일[1] 중국 하얼빈하얼빈역에서, 한국의 의사(義士) 안중근일본의 정치가이자 추밀원 의장, 색욕마인이토 히로부미[2] 저격한 사건.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의거, 혁명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는 저격사건, 암살사건이라 칭하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는 사건이다.

2 상세

1905년 초대 조선통감부 통감을 지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러시아와의 철도 문제 및 러일간의 경제 현안, 러일전쟁의 뒷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재상인 코코흐체프와 양자간 회담을 갖기로 하고 중국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하고 회담을 위해 러시아 측에서 특별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하얼빈은 당시 러시아의 조계지인 청나라의 도시였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전 후 조계지인 하얼빈을 포함해 만주에서의 권리만 지키기로 하고 러일 협약을 1907년 체결, 조선은 일본이 먹는 것을 묵인했다.[3]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던 한국의 청년 안중근도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며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기차역에서 검문을 받을 때 일본인이라 위장하고 기차역에 입장하였다. (서양인들은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들도 한국인과 일본인을 외모로 구별하는 게 힘들다. 유전적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러시아인, 중국인[4]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군 헌병 및 청나라 군인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히로부미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을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 국기일장기를 흔들며 양국 수뇌를 환영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백발의 늙어보이는 남자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임을 인식하였다. 이에 품 속에 있는 권총[5]을 준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헌병들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그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몸을 관통하였고, 안중근계속해서 2~3발을 추가로 발포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지고, 안중근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나온 일부 일행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혔다.

안중근은 즉시 청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러시아어까레야 우라, 까레야 우라!(한국 만세)를 외치며 만세를 외쳤다. 못 알아들을까봐 러시아 어로 말하는 친절함.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기차에 호송되어 총탄을 맞은 직후 의식을 잃고 기차로 옮겨진 뒤 바로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진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이를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청나라에 있던 일본 경찰 영사는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겨 버린다.

3 과정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은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을 방문하여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간 경제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아내어, 거사 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하였다. 1박을 머문 끝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재러시아 한국인 조도선을 만나서 거사에 동의하였다. 그 중 기차들이 중간에 정차하게 되어서 쉬어간다는 '차이자거우(蔡家具)역' 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거사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열차도 차이자거우역에 정차한다는 예상이 나오자, 세 사람은 차이자거우로 향하여 기차역 객사(客舍)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철도들의 분기점인[6], 차이자거우 역은 경비가 삼엄해 객사에서 나가 의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데다가 러시아 헌병들이 숙소 문을 잠가버려 탈출도 불가능했다.다행히 당초에 차이자거우에 왔었던 안중근하얼빈 거사를 위해 우덕순, 조도선에게 차이자거우 거사를 분담하며 자신은 이미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던 상태였다. 만약 이 때 안중근마저 객사에 갇혔다면 하얼빈 거사도 실패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도 무사히 경제회담을 마치고 일본으로 살아서 귀국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이 거사 실패 후 우덕순, 조도선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성공 이후 차이자거우역 객사에서 러시아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차이자거우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안중근하얼빈으로 건너가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와의 운명을 결정할 거사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4 결과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총탄에 맞아 죽었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 후 청나라 수도인 베이징이 아니라 일본의 점령지인 뤼순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가 재판을 받게 된 후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서[7] 1910년 3월 26일 순국하게 되었다. [8]

거사 이후 하얼빈역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곳에 화살표 모양의 타일을 설치 해 놨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점에는 마름모 모양의 타일을 설치 해 두어 당시의 일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통령의 기념비 설치 제안에 일본이 반발하자 아예 기념관을 건설해주시는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었다

5 의미

한국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나라를 잃게 된 슬픔 속에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조약의 원조격이자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라는 원흉을 한국인 안중근이 저격함으로서 민족의 정의와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또한 동시에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침략행위를 막아내려는 안중근의 투지와 의지를 알리기도 한 사건이었다.

1년 후 대세가 일본쪽으로 기울어져 1910년 한일병합이 되었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라를 지키고 구하기 위해 수많은 의병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어 일제와 맞서기도 하였고 안중근 정신을 계승하여 이재명이 매국노 이완용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안명근이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제거하기 위해 압록강 의거를 일으키려 한 적도 있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의거가 시도되거나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의거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갔음에도 안중근 연구회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특히 놀라운 건 뤼순 감옥의 일본 헌병들까지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일본인임이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 그리고 남만주철도 이사였던 다나카 쇼지로[9]는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이 안중근 의사라고 했을 정도다.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진지하게 연구되고는 하며 이는 아직까지 일본의 지식인들이 그렇게까지 우경화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1. 이 의거가 일어나고 70년 후,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난다.
  2.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문제가 많았던 인물로 일본 내에선 그를 기리는 신사도 없을 정도다!
  3. 허나 1917년 소련이 건국된 후 소련은 제국주의자들끼리 합의라며 이를 무효라고 선언하며 만주는 중화민국의 땅이라고 확인해주어 하얼빈을 비롯한 만주 전체를 중국에 반환했고, 일본 역시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먹어버린다. 그리고는 소련과 할힌골 전투 및 장고봉 전투 등의 국지전을 일으키며 군사충돌을 벌인다. 물론 러일전쟁과 달리 이번에는 된통 깨지고 1945년의 8월 폭풍 작전에서는 말 그대로 제대로 깨져 버려 그나마 갖고 있던 사할린 남부 및 쿠릴 열도와 조선 북부, 만주, 몽골 등을 모두 잃어 버리고 후퇴한다.
  4. 사실 중국인이 제일 많았다. 비록 러시아의 조계지이긴 했어도 엄연히 청나라 영토였기 때문이다.
  5. FN M1900 자동권총을 사용하였다. 리볼버(육혈포)는 소지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
  6. 지방에 위치한 시골 역이었던지라 규모가 작아 경비 인력이 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7. 이것은 일본의 청나라 주재 경찰영사가 일본으로 신병을 넘겼기 때문이다. 원래는 베이징을 거쳐 러시아의 모스크바나 이르쿠츠크로 넘겨야 했었다. 러시아 조차지이기 때문.
  8. 흔히 알려져 있는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는 순국일이 아니라 사형선고일이다.
  9.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