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브로시오

라틴어: Sanctus Ambrosius
이탈리아어: Sant'Ambrogio
영어: Saint Ambrose

서방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

생몰년도 : 330 ~394년
암브로시오예로니모아우구스티노대 그레고리오

1 개요

330년 경 출생 ~ 394년 4월 4일 선종.

서방 교회 4대 교부 중의 한 사람이며 교회학자. 풀네임은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이며, 한국 가톨릭에서는 암브로시오 주교라고 한다. 법률가이자 밀라노의 주교였으며 동방에 비해 그 세와 교리, 전례와 성직 분야에서 미숙했던 서방 교회의 대대적인 개혁을 이룩했고 아리우스파와 대립했던 인물 중 하나. 가톨릭의 축일은 12월 7일이며, 성공회의 축일은 4월 4일이다.

암브로시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불멸'을 뜻한다. (암브로시우스, 암브로시아 참조.) 양봉업자와 양초 제작자의 수호성인이며, 상징물은 꿀벌과 꿀통. 미술 작품 내에서 그는 목장을 든 주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꿀벌들을 거느리는 모습으로도 나타나나, 승마용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타는 모습여왕님으로 묘사될 때도 있다.

2 일생

2.1 성직자가 되기까지

암브로시오는 330년 경에 독일 트리어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는 갈리아의 최고위 지방장관(프라이펙투스 프라토리오)직까지 지냈다고 한다. 그에게는 형제자매가 둘 있는데, 그들 중 '마르첼리나'라는 여동생은 후에 수녀가 되어 고행으로 수도생활을 했으며 오빠처럼 성인이 되었다. 축일은 7월 17일.

비록 그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지만, 암브로시오는 그의 아버지의 커리어를 따라 엘리트 행정관의 길을 걸어갔다. 로마에서 수사학과 법학, 문학을 공부하고 북부 이탈리아 일대의 행정직을 거친 후 발렌시아누스 1세 시절(374년)에 밀라노의 집정관으로 부임한다.

밀라노 집정관으로 근무하면서 그는 밀라노 주교의 임명을 두고 다투던 아타나시오파[1]아리우스파의 중재를 맡았는데, 뛰어난 화술과 정치력을 발휘해 협상을 잘 이끌어 나갔다. 그래도 양파의 대립이 심해서 결정은 나지 않고 있었는데, 협상장에서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하는 반응이 나와버렸다.

이때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인이긴 했으나 교리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세례받지도 않았으며 딱히 성직자로 교육받은 적도 없었다. 따라서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모시자는 주장이 나오자 "나는 사제가 아닌데 무슨 수로 주교가 됨?"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거기다 로마 제국의 고위 행정관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명 없이는 함부로 성직자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라노의 그리스도교계, 특히 아타나시오 파가 열성적으로 그를 설득하자 그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 칩거하면서 마악 즉위한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서신을 보내서 처우를 결정해 달라고 청했고, 황제의 허가가 떨어지자 그는 행정관 직을 포기하고 세례를 받은 후 1주일 만에 주교직에 오른다. 따지고보면 뜬금포 낙하산이었던 셈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대략 이런 식으로 기록이 전해내려온다.

오랜 뒤에 밀라노 시가 주교 선출을 앞두고 있을 때 그(암브로시오)는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 간에 유혈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 유지에 힘쓰고 있었다. 그가 교회 복도를 걸어 내려가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선출하세요!!"하고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세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므로 그 직위에 부적합하다고 거절했으나, 회중은 1주일만에 그에게 세례를 주고 주교좌에 앉혔다.
-롤란드 베인턴, '세계교회사'

2.2 밀라노의 주교

주교가 된 암브로시오는 성 심플리치아노(축일 8월 16일)를 가정교사로 모시고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엄격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받은 엘리트 교육의 결과 그는 연설에 능통했으며 제국 내의 여러 언어, 특히 그리스어에 능숙했고 그렇기에 동방 일대의 유명한 설교사들, 신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문적 지식을 쌓아갈 수 있었다. 그는 특히 구약 성경을 연구하여 주석을 달고 설교하곤 했으며 사실상 서방 교회에 동방의 신학과 논쟁 기술 등을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전례 측면에서 미숙했던 서방 교회에도 동방 교회의 전례 양식과 기법을 도입하였는데, 그가 제정한 전례 양식을 암브로시오 전례라고 한다. 지금도 그가 주교로 사목하던 밀라노 교구에서는 암브로시오 전례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그의 연설 능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고 하며, 이에 감명받고 기독교에 투신한 인물이 성 아우구스티노이다.

또한 그는 교회의 사회 봉사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이는 그가 민중의 지지를 받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에 교회를 적극 개방하는 등 사회 봉사 활동에도 노력하였다.

2.3 동서 로마 내전의 사이에서

이후 그는 단순히 서방 교회의 유력한 주교 수준을 넘어서 로마제국 전역 기독교 사회의 최고유력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사실상 로마 주교, 즉 교황보다도 그 영향력이 더욱 강성했는데, 이는 단순히 그를 추종하는 신자들의 규모 뿐만이 아니라[2] 엘리트 공직자 교육을 받으면서 키워 온, 어떻게 어디에 개입해야 하는지를 꿰뚫어보는 그의 정치적 식견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 마디로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의 영향력이 최고 수준에 다다랐던 것.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사죄를 받은 일이다. 390년, 테살로니카(테살로니키)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황제 및 황후의 초상화를 흙탕물 속에 빠뜨려 모욕을 가한 사건이 일어나자, 분노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군대를 보내 약 7천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했다(테살로니카 학살).

암브로시오는 즉시 서한을 보내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해 공식적으로 참회할 것과 당분간 교회 출입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황제가 이를 묵살하고 부활절에 측근들과 함께 교회로 행차하자 암브로시오는 교회의 문 앞에 서서 황제가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저지했다. 그리고 성탄절 날에 다시 교회로 찾아온 테오도시우스 1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교회 문 앞에서 테살로니카 학살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였다.

결국 황제는 이에 굴복하고 그 일에 대해 사죄하였으며, 암브로시오는 가벼운 보속 이후 교회 출입을 허가하였다. 이 보속의 내용이 뭐였던고 하니, 황제를 상징하는 장식물과 옷을 다 벗고 일반 평복을 입고 주교 앞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다신교 시절의 로마에선 상상도 하지 못햇던 일이었다.

이는 암브로시오의 강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교회의 권위가 황제의 권위보다 더 빛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다. 실제로 몇 년 뒤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대로 황제에게 박살나서 추방당했다. 황제는 물론 이론적으로 교황 아래의 신도였지만 물적 힘과 권위 측면에서는 황제가 더 강했으며, 심지어 암브로시오는 이 당시 교황도 아닌 유력한 주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브로시오가 이런 성공을 거둔 것은 그가 탁월한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하고 있다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받는 민중의 지지가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의 인맥, 그리고 그의 상황 파악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거두고 교회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위상은 황제의 사과를 받음으로써 한층 더 올라갔다. 이는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큰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암브로시오는 이를 적절히 활용할 능력이 있었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하였다. 그 혐의는 갈리아 방위를 맡겼던 아르보가스테스 장군에게 돌아갔으나 어디까지나 정황 증거 수준이었고, 자살한 것으로 여겨 장례식이 치뤄졌다. 그런데 암브로시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추모하는 주례를 맡아 발렌티니아누스를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의 전형으로 묘사하면서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갔다는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리상 자살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는 천국으로 똑바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이는 황제가 살해당했다는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이었고 사실상 서로마의 실권자였던 아르보가스테스에 반대한다는 의사표명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아르보가스테스 반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아르보가스테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는 아르보가스테스 반란 진압 후 가담자들에게 자비를 배풀 것을 청원하기도 했는데, 아르보가스테스가 다신교 우대 정책을 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2.4 대제의 사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395년에 사망했을때, 암브로시오는 심마쿠스, 스틸리코와 함께 테오도시우스의 임종을 지키고 유조를 들은 몇 안되는 인물이었으며 대제의 장례식 주례를 서기도 하였다.

이후 동서로마가 최종적으로 분열하자 암브로시오는 스틸리코의 편에 서서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스틸리코를 후견인으로 세운 것은 맡긴 것은 서로마 뿐만이 아니라 동로마도 포함된다는 주장을 하여 독자적인 행보를 시도한 동로마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암브로시오는 397년 4월 4일 성 토요일[3]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전에 "오!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는지! 아!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치 마시고 저를 거절치 마옵소서."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 암브로시오의 유해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3 그 외

그가 태어났을 때에 꿀벌 무리가 그의 얼굴로 날라와서 꿀 한 방울씩을 남기고 떠나갔다는 전설이 있다. 이는 그가 성인으로 인정을 때 기적 중 하나로 인정받았는데, 그가 성인으로 인정받은 게 중세라는 점을 감안하도록 하자.

설교할 때 독신의 가치를 너무 강조하여 귀족 가문의 처녀들 중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맹세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귀족 가문에서 딸들이 그의 설교를 듣지 못하게 집에 가두는(...) 일이 발생할 정도로 달변이었다고 한다.

  1. 후의 가톨릭정교회의 전신격이다.
  2. 그의 연설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를 따르는 빠돌이신자의 수는 많긴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따르는 인물은 많았다.
  3. 부활절 하루 전날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