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日本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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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민족(日本の民族) | |||||||
주요 민족 | 비주류 민족 | 사라진 민족 | |||||
야마토 민족 (大和) | 류큐인 (琉球) | 아이누 인 (アイヌ) | 재일 외국인(在日) | 구마소 (熊襲) | 에조 (蝦夷) | 하야토 (隼人) | |
재일 한국인 (在日朝鮮) | 재일 중국인 (在日中国) |
1 개요
한국이나 중국에서 나타났던 오랑캐 관념과 비슷하다. 시대에 따라 에미시(毛人), 에비스라고도 표기. 오늘날에야 일본인이 모두 야마토 민족이라고 하지만 오늘날에도 류큐인과 아이누, 극소수지만 니브흐족(길랴크족), 윌타족(오로크족), 오로치족[2]까지 소수민족으로 남아 있다. 이주민인 재일 중국인과 재일 한국인이 존재하며 이외에도 소수민족도 아닌데 차별당하는(...) 부라쿠민도 있다.
일본의 역사는 주로 간사이(관서)에서 출발하여 점차 확대되는 형국인데 칸토(관동) 지방은 오랫동안 이민족의 영역이었고 점차 일본에 편입되고 동화되었다. 에조 말고도 하야토(隼人)라고 규슈 남부에 살던 민족이 있기도 했다. 일본이 확장되면서 동화되었다. 구마소(熊襲)란 규슈 남부의 민족도 있었는데 일본에 동화되었다. 이들이 동화된 뒤 서남쪽으로 행진도 멈췄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 류큐 왕국을 병합하였다.
2 고대
5세기에 이미 이들의 소왕국들을 복속시켰다는 언급이 나온다. 왜5왕 가운데 한 명인 무(武)[3]가 478년에 유송에 보낸 국서에서 "동쪽으로 모인(毛人)의 나라 55개를 정복하고, 서쪽으로 66국을 항복시키고, 바다 건너 북쪽으로 95개 나라를 병합하였습니다."[4]라고 한 것인데, 여기서 등장하는 모인이 에조로 알려져 있다. 사이메이 덴노 때에 견당사로 당에 갔던 이키노무라치 하카토코가 에미시인 두 명을 데려가 고종 앞에 보여주었다는(인간전시) 기록이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데, 야마토 조정과의 거리가 가깝냐 머냐에 따라 니키에미시(熟蝦夷), 아라에미시(荒蝦夷), 쓰가루(津輕)로 분류해 고종에게 소개했다. 에미시들을 견당사에 딸려 보낸 것은 과거 수에 보낸 국서에서 "해 뜨는 동쪽의 천자가 해 지는 서쪽의 천자에게 글을 보내니" 운운한 것처럼 당에 대해서도 왜가 주변 이민족인 에미시를 번속국으로 거느린 나름 '제국'으로써의 모습을 당에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즉 막부의 지휘자 쇼군이 원래 역할은 바로 이들과 싸우던 군부의 지휘관이었고 임시직이었으나 덴노를 바지사장으로 삼고 대신 일본을 통치했다. 이외에도 일본제국 해군의 진수부(鎭守府)는 고중세에 에조 통어를 위한 관부였으며 진수부의 지휘관인 진수부장군(鎭守府將軍) 역시 중요한 직책이었다. 장군직이 임시직인데도 일본의 통치자까지 오른 것을 볼 때 이 직위에 상당한 권한이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볼 때 일본사에서 에조와의 싸움이 고대와 중세에 중요했던 것이다.
발해에서 동해를 거쳐 일본으로 오던 사신들이 하필 항로를 잘못 들어 그만 에미시의 땅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에미시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일본측 기록에는 심심찮게 등장한다.
9세기 경에 이르면 동북부의 끝자락인 이와테와 아키타까지 야마토 정권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에조는 에조 부족장 출신인 아베(安倍)씨, 키요하라(淸原)씨, 북방(부) 후지와라(藤原)(통칭 오슈 후지와라)씨들같이 일본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이후 복속된 에조들은 일본에 동화되어 야마토 민족, 즉 일본인이 되었다.
3 중세
센고쿠 시대에 들어서 일본 본토의 에조들은 모두 일본에 흡수되고 에조의 본거지로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 사할린이 남게 된다. 북해도의 남쪽 끝까지 타케다[5] 가문이 진출했고, 이후 에도 시대까지 에조치(蝦夷地)는 남쪽 일부를 제외한 홋카이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츠마에 번은 에조와 일본의 교역으로 먹고 살았다.
4 근현대
1771년 헝가리의 범죄자이자 탐험가인 베뇨브스키가 캄차카 반도에서 일본에 표류, '편지 사건'을 일으켜 에조에 러시아가 정박하고 있고 일본을 위협하고 있다는 소문이 일본 전국에 나돌았다. 그러자 몇몇 난학자들은 삼국통람도설 등의 책을 써 러시아 제국의 위험성에 대해 알렸고 이에 막부는 에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막부 말기, 막부 당국은 에조를 마츠마에 번 관할에서 중앙정부 직할로 바꾸게 되었고,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 정부는 에조치로 불리던 땅 전체를 홋카이도로, 북에조치를 카라후토로 바꾸었다. 이 시절의 에조는 아이누를 가리키는 말로 고정이 되었고 홋카이도에 잠시 세워진 에조 공화국도 있기도 했다.
5 문화적 영향
에조(에미시)는 일본의 문화에도 크나큰 영향을 주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무라이(갑옷입고 칼차고 말타는)도 원래는 에미시들 특유의 것이었는데 나중에 일본이 받아들였다.[6] 이때는 도호쿠 지방 국경선 너머로 준동하는 원주민인 에미시들과 조정간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로 당시 일본 동북부는 에미시라 불리는 이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때 에미시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기동력을 갖춰 전쟁을 했고 이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동전을 바탕으로 싸움에 능숙한 민족으로 이름이 높았다. 일본 조정은 수차례에 걸쳐 이들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고 에미시들이 귀순하면서 이들을 군역에 동원한다. 이 귀순 에미시를 부수(浮囚)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통괄하던 각 지역의 수장들은 싸움의 능한 이들의 전법을 배워 자신들의 장비를 개량하게 되며, 이때 사용한 타치는 칼날의 휨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손잡이는 휘어 있으며, 이 스타일을 토대로 에미시의 도검인 와라비테타치와의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7] 이것을 일본의 무사들이 도입했으며 마상전투에 걸맞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형 일본도 타치(太刀)에 해당된다. 말을 타고 오오요로이(大鎧)를 입고 활을 쏘는 초창기 사무라이의 모습은 에미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후 사무라이가 일본을 통치하는 지배계급이 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일본 역사에 에조의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은 셈.
에미시는 털 모(毛)를 한자로 쓰는데 그 때문에 일본에서 야만인하면 '털이 잔뜩 난 사람'이란 느낌이 있다. 정작 에미시의 혈통 자체는 현존하는 북방의 아이누를 빼면 일본인의 혈통에 흡수됐을 것이지만.- ↑ 일본인들 입장에선 이민족.
- ↑ 이들은 사할린과 연해주에도 일부 거주중.
- ↑ 유랴쿠 덴노로 비정된다.
- ↑ 마지막 구절에 대해서는 임나일본부설과도 연결되는 문제점이 있다. 해당 국서 자체는 왜가 자신들의 활약상을 중국 왕조 앞에 상대적으로
뻥친과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 - ↑ 이후 가키자키(蠣崎), 마츠마에(松前)로 가문의 이름이 바뀌었다. 코에이에서 제작한 게임인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도 등장하며, 삼국지 시리즈의 공손씨나 맹획네 남만처럼 변방 세력으로써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
- ↑ 실제로 교토 조정이 있는 기나이 지역에서는 간토 사람들을 가리켜 아즈마에비스(東夷)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동이라는 뜻이지만 이 단어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로 알려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미묘하다. 다만 이 단어는 가고시마 사람들을 사쓰마하야토(薩摩隼人)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다분한 지역차별적 뉘앙스가 깔려 있는 단어이다.
- ↑ 와라비테타치는 50cm 정도의 짧은 칼날에 휨은 없지만 손잡이가 끝으로 갈수록 급격히 좁아지므로 실제로 쥐면 칼날의 방향이 비스듬해져 곡도와 비슷한 효과를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