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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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江 健三郎 (おおえ けんざぶろう, Ōe Kenzaburō)

<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1993 - 다리오 포오에 겐자부로1995 - 셰이머스 히니

1 개요

일본소설가. 1935년 1월 31일생. 시코쿠 에히메 현의 우치코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도쿄대학 불문학(프랑스어)과 출신. 1958년 당시 23년 5개월의 연령에 아쿠타가와 상 수상이라는 상당한 경력이 있다.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자였고, 이 기록은 2003년까지 유지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인으로는 2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참고로 이때 시기상 아마도 아키히토 덴노가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수여하려고 했으나, 본인이 거부하였다. 이유는 전후 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1] 패기보소 후술된 정치성향을 보면 알겠지만 좌파성향이 강해 사회운동도 하고, 특히 원폭과 원전 전반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한다. 반전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2 작품

  • 만엔원년의 풋볼(1967, 해외 번안 제목은 Silent Cry)

'만엔원년'이란 제목 때문에 막부 말기의 일본을 다룬 소설…로 생각하기 쉽지만[2], 그렇지는 않다.

안보투쟁에 참가했다가 진압대에게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아 미쳐 버린 뒤 기괴한 몰골[3]로 자살한 친구를 부러워하며 폐인처럼 지내던 주인공 네도코로[4] 미쓰사부로는 안보투쟁에 참가했다가 전향한 인물의 대표로, 미국에서 참회극 공연(…)을 하던 동생 다카시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카시와 만난 미쓰사부로는 다카시의 권유로 (막부 말기) 만엔원년에 농민 봉기를 일으킨 (주인공의) 증조부 동생과 그를 진압한 증조부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고향 시골 마을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다카시는 자신을 증조부 동생과 동일시하며, 인근 조선인 부락 출신이었으나 지금은 시골 마을의 경제를 장악한 조선인, 일명 '슈퍼마켓 천황'[5]이 소유한 슈퍼마켓을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위해 마을 청년들을 모아 풋볼 연습을 빙자한 훈련을 시키기 시작하는데…

제목처럼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얽혀 들어가는 전개가 일품. 재일동포 문제도 다룬다. 주인공 친구부터 시작해서 알콜중독자인 주인공 아내,근친상간 이야기,처참하게 죽은 마을 처자 1과 관련 묘사 등등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 여럿 나오며, 이야기의 흐름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과 사건 자체의 의미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결말부의 충격적인 반전이[6] 인상적.

  • 치료탑, 치료탑 혹성(1990)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탑이 있는 혹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뤘다. 장남인 히카리가 자폐를 안고 태어나서, 평생을 힘들게 살았던 저자의 개인적인 고뇌가 표출되었다고 해피 SF 2호(비정기 발행 무크지)에서는 말한다(…). 이 일화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나왔다.

중년의 시점에서 자신의 친구 겸 처남과 작가 본인의 청소년기 시절을 회상하고 고뇌하는 소설. 역시 저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체험.[8]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

  • '나의 나무' 아래서

오에 겐자부로의 사상과 그 한계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집. 책 제목은 "사람마다 자신의 나무가 있으며, '나의 나무' 아래에서는 노인이 된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고향 지방의 전설에서 따 왔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의외로 '비교적' 쉽게 쓰여 있다. 그래도 꽤 어렵다.

  • 개인적 체험(1964)

한때 유망한 대학원생이었으나 술에 의지해 현실도피한 끝에 입시학원 강사로 전락한 주인공이, 막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 머리에 기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이 아이를 기를 것인지 아니면 '안락사'시킬 것인지에 대한 선택에 놓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야기. 이 작품 역시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정치적 성향

일반적인 정치 성향은 좌파이자 진보적 성향을 띈다고 알려져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자위대의 파병에 대해 '이라크에 대해서는 순수한 인도적 원조만 하면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2004년에는 헌법9조(평화헌법)를 지키기 위한 '9조의 회(모임)'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일본과 일본의 젊은 세대의 장래를 최대한으로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으며, 2012년 영토 문제의 악순환을 막자며 독도센카쿠 열도에 대해서는 과거에 일본이 침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 또한, 난징대학살에서 일본군의 잘못을 인정하는 등 일본의 우익세력과는 분명 사고방식이 다르다.

2014년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을 가짐으로써 20년만에 한국언론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때는 아베 신조의 행보를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했다. 아시아의 평화가 개별 국가의 번영보다 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단 말도 했다.

4 비판과 반론

박유하의 저서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9]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브로[10]가 한국에서 강연했을 때 한 청중이 힐난조로 물었다. "당신이 원폭 피해에 대해서 쓰는 일은 일본이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일이 아닌가? 일본이 원폭 투하를 당한 것은 당연한 일 아니었나?" 오에는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요... 그런데 한국인 피해자들도 그렇게 말할까요?"

사실 일제 시절의 만행을 논할 때 당시 군국주의 내각만 나빴고, 그 외 일본 국민들은 원폭에 희생당한 그저 단순한 피해자였을 뿐이었다고 인식하는 점은 전향적인 자세를 가진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상당수가 공유하는 한계점이긴 한데,[11]

애초 조선인 원폭 피해자가 공업도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그리 피해를 입은 이유는 물론 자발적 취직, 유학 등의 목적으로 일본에 간 사람도 있겠지만, 하시마 섬의 경우처럼 징용 때문에 억지로 끌려간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렇다면 조선인 원폭 피해자가 발생한 이유 역시 일본측에서 제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 물론 오에 겐자부로가 그런 의미에서 말을 하진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애초 질문의 속뜻을 잘못 이해한거 아닌가? 오에는 그 자체로 노벨상을 탄 저명인사이며 국내에서도 일본의 양심파로 알려져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좀 더 발언에 신중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 애초 침략 전쟁을 일으킨 추축국의 국민은 본인은 억울할지 몰라도 당시 폭정을 저지르던 해당 정부에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은 한에는 좀처럼 협력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맹점이 있긴 하다.

다만, 이 단락만 놓고 본다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관해서 최소한 오에의 경우 단순히 '피해자' 임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이 피해자라 한다면 그것은 국가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하는 한 개인으로서의 피해자' 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애초 오에가 원폭 피해에 신경을 많이 쓰는 이유는 그의 장남 히카리가 자폐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 오에 겐자부로는 애초부터 일제의 학살이나 위안부 등의 잔학 행위와 군국주의를 까면 깠지 결코 부정하진 않았다. 실제 오에는 1994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애매한 일본과 나' 라는 제목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연설에서 "일본이 특히 아시아인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이며 또한 "전쟁 중의 잔학행위를 책임져야 하며 위험스럽고 기괴한 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평화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고 강조한 적이 있다.#

게다가 원폭 비난은 일본내 좌파 입장에선 필연적인 문제라는 것이 현재로선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전후 자민당 정권은 미국의 전쟁범죄, 즉 원폭(+일본인 수용소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한 묵인과 국민들의 인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50년대부터 GHQ, 미국의 범죄를 용인하고 더 나아가 안보조약까지 맺은 자민당 정권에게 유, 무형의 탄압을 받아 온 공산당, 진보계열이 이후 전쟁에 희생당한 국민의 인권 문제를 들고 나왔고, 원폭의 배상처리 문제와 미국의 원폭 비난 또한 다이고후쿠류마루사건(비키니 수폭사건)에서의 미국과 일본정부의 배상 거부 등의 사례와 융합하여서 '원폭에 대한 반대=좌익'이라는 공식이 세워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당시 반미 운동의 한 재료로서 원자폭탄 피해에 대한 개개인의 인권문제를 드러낸 것이지, 일본인 모두가 피해자였다고 코스프레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로 위와 같이 '원폭의 부정=피해자 행세'라는 생각은 일본 내의 진보, 보수 문제, 역사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한국인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허나 결국 저 대담이 열린 곳도 한국이고, 저 질문의 화자도 한국인이다. 결국 피해국 국민과 가해국 국민의 대화라는 원론점에서 보면 저 상황은 오에 겐자브로의 대답이 아쉬운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다못해 오에 겐자부로가 '피해자 행세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원폭에 대한 반핵 운동의 일환이다. 나는 피해자 행세를 위해 반핵 운동을 이용할 의도가 없다.'라는 말만 했어도 그냥 끝날 일이었다.

이 문제를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마다가스카르 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당시 마다가스카르 독재 정권과 야합한 대우 로지스틱스의 마다가스카르 농지 구입 문제였다. 마다가스카르 현지에 간 한국인이 이를 비판하는 마다가스카르 사람에게 '글쎄요... 대우 로지스틱스 마다가스카르 지부에 고용된 마다가스카르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라고 대응했다고 해 보자. 이게 정상적인 대응인가? 가해자는 피해자 앞에서 말을 가려 하는게 먼저다. 그게 가장 기본적인 도덕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도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제 좋을대로 입장을 바꾸는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그리고 일본 좌파는 이를 비판하는 입장. 그런데도 이런 소리를 했다는 것은 하는 일이 어떻든, 출신성분이 어떻든 간에 한국인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먼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여 그것에 비판을 받는 것을 '한국인의 일본 좌파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발생한 오해'로 돌려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반론이라 할 수 있다.

그 외 일본의 학자인 니시오카 나가오[12]는 2차 대전 당시 오키나와인에 대한 오에 겐자부로의 인식을 대차게 까기도 했다. 언제? 류큐라는 오키나와에 대한 배경 이해 없이 그들을 일본인으로 포함시키는 오에의 논리를 왕창 깐 것. 참고로 오에는 과거 오키나와를 여행하고 '오키나와노트(1970)'라는 책을 쓴 적도 있을 정도로 오키나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저서 중 오키나와인들에 대한 인식이 맘에 안들었던 모양.(...)

5 트리비아

나이를 먹은 뒤로는 작품 활동보다는 에세이를 더 많이 쓴다. 당연하지만 일본 문학계에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다.

장남인 히카리가 자폐아로 알려져있다. 당연히 오에는 상심이 컸는데, 그런 고통을 나중에 소설 '치료탑' 과 '치료탑 혹성' 으로 표출하였단 말도 있다.

고토쿠 슈스이도 이 사람과 비교해 볼 만한 학자이다.

사실 작품들이 읽기에 수월한 편은 아니다. 스스로도 '악문'이라고 부를 정도다. 때문에 일본 문학계의 거성이 되고 노벨 문학상까지 받고 난 이후에도 '일본 사람들은 누구나 집에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한 권씩 사 두지만 정작 읽은 사람은 적다'(...)라는 말이 있기도 했다.

러시아의 스트루카츠키 형제에서 형인 아르카디 스트루카츠키(아베 코보의 '제4간빙기'를 번역한 바 있다)가 사망했을 때 러시아의 온화한 현자가, 우주로 갔다고 조의를 남기기도 했다.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해 "이 자리에는 노벨상을 이미 받았어야 하는데 못 받은 작가 한 사람과, 앞으로 받을 사람이 세 사람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때 '못 받은 작가 한 사람'은 르 클레지오(2008년 수상)였고, '앞으로 받을 사람 세 사람'은 오르한 파묵(2006년 수상)과 모옌(2012년 수상) 그리고 황석영이었다. 관련 기사. 다만 황석영의 경우 장소가 한국이고, 청중도 한국인인 상황에서 한국인 작가만 빼고(...) 언급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한다.[13] 오에는 친한파이고, 한국인에게 나쁜 말은 잘 안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황석영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예언가 등극물론 본인이 지적한 작가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수상한 지금도 충분히 예언자까지는 아니어도 안목있는 문호
  1. 재미있는 것은 "내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나 다음으로 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 밖에 없다"며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상 수상을 예언한 미시마 유키오는 극단적인 덴노주의자였다.
  2. 츠츠이 야스타카가 이 작품의 제목을 패러디해 만든 '만엔원년의 럭비'라는 단편이 있는데,거기서는 만엔원년에 일어난 사쿠라다문밖의 변을 배경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잃어버린 목을 두고 닌자들이 럭비 대결을 벌인다.물론 공은 이이의 머리다(...)
  3. 벌거벗은 채 머리와 얼굴을 빨간 페인트로 칠하고 검열삭제에 오이를 쑤셔 박은 채 목을 매달았다. '허벅지에는 생애 마지막 검열삭제가 묻어 있었다'라는 자비 없는 추가 묘사까지 있다!
  4. '네도코로'(根所)는 '네즈'로도 읽을 수 있는데,이를 이용해 주인공은 스스로를 '네즈미'(쥐)라 부른다.
  5. 조선인에게 천황이란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은, 자신들이 과거 깔보고 무시하던 조선인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란다. 훌륭한 정신승리법이다.
  6. 농민 봉기를 일으킨 증조부 동생은 증조부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마을에 퍼진 이야기였는데,미쓰사부로는 증조부 동생이 죽지 않고 혼자 도회지로 도망쳤음을 나타내는 증거를 얻게 된다. 그리고 진실은…
  7. 이 항목의 예전 버전에는 '체인지링'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지만, 서구 유럽의 설화에 나오는 존재의 올바른 표기는 영문 표기가 Changeling이므로 체인질링이 맞다. 체인질링 항목에도 이 항목으로 연결이 되어 있으므로 확인 사살.
  8. 자신의 불알친구이자 처남이었던 명감독 이타미 주조(1933~1997)의 자살 사건이다. 그는 본격 야쿠자 까는 영화 '민보의 여자'의 내용 때문에 야쿠자에게 심한 린치를 당했을 때도 '나는 굴하지 않는다. 영화로 자유를 가로지를 것이다'라고 선언한 그런 쿨가이였다. 하지만 언론의 불륜 의혹에는 버틸 수가 없었는지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9. 참고로 박유하 교수는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10. 박유하는 번역가라면서 오에 겐자부로를 저렇게 쓴다. 여기에 대해 말하자면 동아일보 1968년 4월 6일자 기사에 세계전후문학전집 출간 소개문에서 '오에 겐사브로'라고 표기 되어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는데(오래 된 책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본어 표기는 물론 한국어 맞춤법도 지금과는 다르게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 뒤집어 말하면 박유하의 번역 수준이 6, 70년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11. 실제로 데즈카 오사무카리야 테츠와 같이 평소부터 명백하게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에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작가들조차 원폭 이야기만 나오면 미국에 반감을 드러냈는데, 사실 일본인인 이상 자신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해서 이성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힘든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다. 특히 피해자 중 지인이라도 있었다면 더더욱.
  12. 이 사람은 1935년생인데 공교롭게도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다. 이른바 히키아게샤 출신.
  13. 황석영의 손님(2001년작)에 대해 "황석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유한 작가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호평한 점도 한몫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