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1 王道

맹자가 주장한 이상적인 정치형태.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한다는 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1]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이다. 굳이 현대적으로 풀이하자면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백성을 이롭게하는 통치'이다. 간혹 왕도를 단순히 인과 덕에만 치중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맹자는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이를 장사지내는데 유감이 없게 하는게 왕도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즉 제 아무리 정의로운 정치를 펼친다하더라도 민생을 피폐하게 하면 왕도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맹자의 사상중에서 '왕도'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사상들과 비교하더라도 통치자의 정의로움을 굉장히 강조한것은 사실이다. 위나라 혜왕에게 초빙받고 왕이 자기나라에 이익이 되는 말을 해달라고 하자, "왕게서는 오직 어짊과 의로움만을 말씀하실 것이지, 하필 이익을 말씀하시나이까"라고 대답하고 민심을 저버리는 왕은 갈아치워야 한다고 주장한게 맹자다.
왕도에 대비되는 것은 페도패도(覇道). 이 왕도와 패도를 필요에 따라 동시에 구사하는 군주들도 존재했는데 이런 정치술을 왕패병용(王覇併用)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초장왕이나 당태종을 들 수 있고 한국사 같은 경우는 조선태종이 대표적이다.[2]

그래도 仁으로써 다스린다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간단히 삼국지의 유비를 생각하면 답이 바로 나온다.

패도정치의 인물을 찾아보자면 대표적으로 전국시대 국가의 군주들이 있다. 왕도가 仁으로써 다스리면 패도는 다 필요없고 힘이면 된다는 형식이다.

맹자에 따르면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참되게 복종시키는 것이 바로 임금된 자의 도리라고 했다.

위의 개념과는 별개로, 왕도에는 '어떤 어려운 일을 해 나가기 위한 쉬운 방법이나 지름길'이라는 뜻도 있다.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이 그리스의 학자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묻자 유클리드가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서양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유클리드가 언급한 왕도(Royal Road)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만든 도로를 가리키는 것이다. 페르시아는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사르디스에서 수도인 수사에 이르는 일종의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요소마다 역참과 수비대를 갖추어 당시 도보 여행으로 90일 걸리던 거리를 파발마로 7일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클리드는 학문을 하는 데에는 이처럼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3]

1.1 로얄로드

해당 항목 참조.

1.2 王道 プロレス

미사와 미츠하루 생전 전일본 프로레슬링프로레슬링 NOAH가 주창한 프로레슬링의 철학.

왕도...긴 하지만 프로레슬링을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몸과 몸을 부딪히는 투기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듯한 과격한 슬램 주고받기, 처절한 난타 공방전등 80년대 이전 스타일의 프로레슬링을 지향하는 일종의 복고주의.

이때문에 미사와시절 전일본과 NOAH는 심심하면 수직낙하기가 터지고 설붕식,단층식,나락식 낙하기가 난무하는 무시무시한 단체가 되었다. 하드코어가 아닌 순수한 프로레슬링 단체로썬 가장 과격한 스타일.

2 王都

왕도(王都). 즉 왕이 있는 도읍을 말한다. 수도(首都)와는 거의 의미적으로 상통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팔츠를 참조.

자체적으로 신분제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다, 군주들이 별다른 힘을 가지지 못하는 현대에 들어선 그다지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서브컬처, 특히 일본에서 유래한 작품들에서 이따금 등장하기도 한다.

3 동진의 재상

王導

276~339

낭야군 임기현 사람으로 는 무홍(茂弘),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조야에서 중보(仲父)라 불렀으며 동각좨주(東閣祭酒)를 지냈다. 서진(西晉) 말 낭야왕 사마예의 안동사마(安東司馬)가 되었으며 군사적 전략 수립에 참여했다. 사마예에게 권해 건강(建康)으로 근거지를 옮기도록 했고 낙양(洛陽)이 무너지자 남북의 사족들을 연합시켜 사마예를 옹립해 동진 왕조를 건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승상(丞相)이 되었으며 나중에 사촌형 왕돈이 병권을 장악하자 장강 상류를 지켰는데 족인들이 많이 요직에 올랐다. 사실 사마예는 왕도의 도움을 많이 받아 옥좌에 같이 앉자고 제안한 적도 있어 왕씨와 마씨가 천하를 가졌다.(王與馬 共天下)라는 말이 나왔다.

명제 사마소(司馬紹)가 즉위하자 유조를 받들어 정치를 보좌했다. 사도(司徒)로 옮겼으며 시흥군공(始興郡公)에 봉해졌다. 승상으로 봉해진 후 국사를 논하다가 서진의 문제 사마소(司馬昭)가 조위 황제 조모를 시해하고 천하를 장악했다는 대목을 얘기하자 사마소는 책상에 얼굴을 묻으며 부끄러워했다. 왕돈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했으며 사마소는 왕도의 공을 보아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왕도를 처벌하지 않았다. 어린 성제 사마연이 즉위하자 유량(庾亮)과 함께 보필했는데 함화(咸和) 2년(327년), 역양내사 소준(蘇峻)이 반란을 일으키고 건강에 입성해 사마연을 가두고 권력을 장악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소준은 왕도를 존경하여 일체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 반란이 평정된 후 왕도는 다시 승상에 올랐으며 사마예, 사마소, 사마연까지 3대에 걸쳐 승상을 지내면서 동진 왕조의 강남 통치를 공고하게 다지고 왕씨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4 삼국지의 인물들

왕도(삼국지) 항목 참조.

5 KBS 대하드라마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왕도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1991년에 방영된 KBS의 전 대하사극. 김영철의 주연작이다.
  1. 가장 좋은(王) 도(道)
  2. 태종 이방원은 '패도정치의 전형'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조선을 반석에 올리기 위해 한 개혁정치들이나 부국강병책들에서는 오히려 왕도정치의 면모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태종 본인이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성리학을 배우고 성장했으며 궁극적인 이상도 '강력한 왕권 아래 유학의 이상이 실현되는 나라'를 꿈꾼 인물이다.
  3. "기하학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번역했으면 더 의미가 쉽게 와닿았겠지만 처음에 왕도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이대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