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란을 지칭하는 명칭 'Persia'에 대해서는 페르시아 문서를, 사산조의 페르시아 제국에 대해서는 사산 왕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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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haemenid Empire / Ακεμενιδαι Περσια 다리우스 1세 시대의 영토 |
키루스 2세의 군기(軍旗) |
1 개요
세계 최초의 대제국
처음으로 3개의 대륙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속령으로 삼은 제국
B.C. 559년부터 B.C. 330년까지 229년간 통치한 이란의 고대 왕조.
이란어로는 하카마니시야(Hakhamanishiya)라고 한다. 현대 이란의 시조가 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다리우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이모탈 등으로 유명하다. 흔히 페르시아라면 이 왕조가 가장 많이 떠오른다.
페르시아 제국의 인구수는 보통 다 그렇듯이 학자마다 달라서 1천만부터 8천만까지 나뉜다. [1] 여기서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더의 제국(3500만)보다 약간 넓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지 않을까 싶다.
2 역사
왕조의 명칭이기도 한 아케메네스는 이 왕조의 창시자로서 그는에티오피아 여왕 안드로메다와 그리스의 영웅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며 제우스의 손자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그리스 작가들의 창작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며 다리우스 왕의 대에 이르러 창작된 내용이라고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2]
서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이집트, 소아시아까지 영토가 이르렀던 대제국. 왕조의 최초 발상지는 이란 서남부의 '파르사' 지방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가 말하는 '페르시아'가 되었다. 상세한 내용은 페르시아 항목을 참조하자.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기록에 파르스 지방의 부족이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부터 부족사회를 이루었다고 추정된다. 같은 이란계인 메디아가 신 바빌로니아외 손잡고 아시리아를 무너뜨린 후에는 메디아의 지배를 받았지만,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를 홀라당 삼켜버렸다. 이어 신바빌로니아, 리디아를 정복하고 팔레스타인까지 차지하며 사실상 오리엔트 최강국으로 급부상한다.
이후 캄비세스 2세가 오리엔트의 마지막 강국 이집트 제26왕조의 프삼티크 3세를 사로잡고 정복했지만 말년에 정신병 때문에 통치가 엉망이 되었고 이집트에서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죽는 바람에 정치적 분쟁과 반란이 연달아 터지며 큰 혼란이 일었다. 그러나 키루스 2세의 사위 다리우스 1세[3]가 등장해 혼란을 수습하고 페르시아는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며 제국으로 완성된다. 판도상 그리스 북쪽의 마케도니아를 정복했고 흑해지역과 인도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정치적으로는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중심으로 행정망, 교통망을 구축하고 관료제도를 정비해 황권을 크게 강화했다. 이 시기의 페르시아는 말 그대로 오리엔트를 넘어 세계 최강국으로 꼽아도 지나치지 않는다. 당시 오리엔트 지역과 함께 문명의 한 축을 구성한 중국과 인도 지역은 각각 춘추전국시대,'16국 시대'라 하여 소국들로 분열된 혼란기였기 때문.
아테네의 지원으로 소아시아에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나자, 보복으로 그리스를 침공하여 1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참패하고 만다. 다리우스 대제 이후 크세르크세스 1세가 대군[4]을 일으켜 재침.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다인종의 대군으로 인한 통솔문제[5], 보급문제, 바빌로니아에서의 반란과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로 주력은 퇴각. 플라타이아이에서 잔존병력이 대패하며 페르시아 전쟁은 끝을 맺는다.
그 후에도 그리스와 27년간 티격태격하며 대립하다 기원전 460년 아테네의 이집트 침공이 대패로 끝나면서 양국의 대립은 종식된다.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어 그리스의 대부분의 도시국가의 연합체제로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형국이 되었으나, 페르시아는 아테네에게 불만을 품은 스파르타를 뒤에서 부추기고 지원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키게 하여 아테네를 몰락시켰다. 그리고 사분오열된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을 뒤에서 조종하여 이익을 챙기는 듯했으나...
그러나 말년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당하고 아르타바누스는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를 옹립해 꼭두각시로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성인이 되고나서 아르타바누스를 죽여서 왕권을 되찾고 이집트와 박트리아 등의 난을 평정하였다. BC 448년에는 칼리아스 화약을 성립시켜 아테네와의 화평에 힘썼다. 그의 치세에는 헤로도토스와 데모크리토스가 당시의 제국을 여행하여 그 지식을 그리스인에게 전하고 또한 그리스 미술의 양식을 동방으로 전하기도 하여 동서 문화교류로 왕의 치세는 고대 페르시아제국 융성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기였다. 그러나 BC 448년 키프로스섬 앞바다에서 키몬이 거느리는 아테네 해군에 패하여 트라키아 등지에서 세력을 상실하여 그 이후에 고대 페르시아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였다. 참고로 그는 오른팔이 왼팔보다 길어 '롱기마누스(긴 팔)'라는 별명이 있다. 거기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말년에 그의 아들 소그디아노스에게 암살당했는데 소그디아노스가 즉위했으나, 머지 않아 그의 이복동생이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서자 다리우스 2세가 소그디아노스를 죽이고 즉위했다.콩가루 집안 하지만 정복지에는 반란이 빈발했고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병사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는 쿠낙사 전투가 있었는데 이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이자 소아시아 총독이던 키루스 왕자가 형의 제위를 뺏으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전투로 이 때 키루스 왕자는 적국 그리스에서 1만명의 팔랑크스를 모집할 정도였다. 이들 그리스인 팔랑크스가 패전 후 귀국하는 이야기가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로 남아있다. 대 그리스 정책으로는 융화정책으로 좋은 성과를 얻었으나, 후일 이집트를 비롯 서방 여러 주 태수들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렸다. 여담이지만 후일 파르티아의 미트라다데스 2세가 그를 파르티아 왕가의 선조로 모셨다.
BC 404년 이집트는 제26왕조의 후예였던 아미르타이오스의 영도하에 독립에 성공함으로써 제28왕조가 세워졌다. 아미르타이오스는 프삼티크 3세의 아들인 이나로스와 함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절 때부터 대항한 반란 지도자였다. 이처럼 애초에 이집트는 제26왕조가 멸망한 후 페르시아에 대한 반감이 크다보니 프삼티크 3세의 자손들은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지속하였다.[6]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시절 반란은 극에 달했고 페르시아 내부의 내란 때문에 이미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즉위했다. 그는 이집트와 내통한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시돈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이집트도 공격하여 BC 341 제30왕조의 넥타네보 2세를 추방하고 멸망시켜 이집트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하지만 잇딴 제위 다툼과 넓은 영토로 인해 발생하는 소수민족 문제, 지방 총독의 반란[7] 등 내분으로 아케메네스 왕조는 나날이 쇠약해졌다. 특히 말기가 되자 마치 중국의 한, 당, 명처럼 환관의 발호가 심해졌다. 환관 우두머리인 바고아스는 실권을 쥐기 위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독살하고 그의 아들 아르세스를 꼭두각시 황제로 삼았다. 하지만 아르세스가 그를 제거하고 친정하려 하자 알아차리고 아르세스까지 살해하여 방계 황족인 다리우스 3세를 옹립하였다. 다리우스 3세의 아버지 아르사메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조카였으므로 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사촌이었다. 더불어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딸이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여동생 시시감비스였다. 다리우스 3세는 꼭두각시가 딜 생각이 없었기에 조용히 힘을 길러 바고아스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으나, 조고가 생각난다 막 바고아스를 처단하고 내분을 수습할 찰나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입을 받았다.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연달아 패전을 거듭하며 쫒겨다니던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에서 사트라프였던 베수스에게 피살당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라서 후계가자 없었다. 그래서 베수스는 스스로 왕으로 즉위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라고 칭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없었고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모든 영토가 모두 그에게 정복당하면서 멸망했다.
만화,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나는 관대하다" 라고 하는데 실제로 페르시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했던 아시리아나 신 바빌로니아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대한 이민족 정책[8]과 잘 짜여진 법령 체제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과 존속의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에서 널리 신봉된 조로아스터교는 후대 선악신앙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종교이기도 하다. 특히 기독교 등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후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국교로 지정된다.
그리스인들에게 사치스럽고 겁쟁이[9]라고 까였지만 페르시아인들은 화려하고 쾌활하며 상무적인 민족이었다.
세계 최초의 다민족 국가(제국)였던 아시리아는 폭압적인 통치 때문에 타민족들의 분노를 사서 멸망하였다. 하지만 세계에서 두번째로 다민족 국가를 건립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관용을 중시해서 다양한 민족들의 포섭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아시리아보다 오래 갔다. 그래서 후에 등장한 다민족 국가들의 성공적인 롤모델로 평가된다.
3 역대 통치자(샤한샤)
순서 | 이름 | 재위기간 | 특이사항 |
초대 | 아케메네스 | BC 680~BC 655 | 왕조의 시조 |
2대 | 테이스페스 | BC 655~BC 640 | |
3대 | 키루스 1세 | BC 640~BC 580 | |
4대 | 캄비세스 1세 | BC 580~BC 559 | |
5대 | 키루스 2세 | BC 559~BC 530 | 페르시아 제국의 건국자, 키루스 대왕, 메시아[10] |
6대 | 캄비세스 2세 | BC 530~BC 522 | [11] |
7대 | 다리우스 1세 | BC 522~BC 486 | |
8대 | 크세르크세스 1세 | BC 486~BC 465 | |
9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 BC 465~BC 424 | |
10대 | 크세르크세스 2세 | BC 424 | |
11대 | 소그디아누스 | BC 424~BC 423 | |
12대 | 다리우스 2세 | BC 423~BC 404 | [12] |
13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 BC 404~BC 358 | |
14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 BC 358~BC 338 | [13] |
15대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 | BC 338~BC 336 | |
16대 | 다리우스 3세 | BC 336~BC 330 |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
- ↑ While estimates for the Achaemenid Empire range from 10–80+ million. Prevas (2009, p. 14) estimates 10. Langer (2001, p. 40) estimates around 16. McEvedy and Jones (1978, p. 125) estimates 13.5. Strauss (2004, p. 37) estimates about 20. Ward (2009, p. 16) estimates at 20. Aperghis (2007, p. 311) estimates 32. Scheidel (2009, p. 99) estimates 35. Zeinert (1996, p. 32) estimates 40. Rawlinson and Schauffler (1898, p. 270) estimates possibly 50. Astor (1899, p. 56) estimates almost 50. Lissner (1961, p. 111) estimates probably 50. Milns (1968, p. 51) estimates some 50. Hershlag (1980, p. 140) estimates nearly 50. Daniel (2001, p. 41) estimates at 50. Meyer and Andreades (2004, p. 58) estimates to 50. Pollack (2004, p. 7) estimates about 50. Jones (2004, p. 8) estimates over 50. Safire (2007, p. 627) estimates in 50. Dougherty (2009, p. 6) estimates about 70. Richard (2008, p. 34) estimates nearly 70. Mitchell (2004, p. 16) estimates over 70. Hanson (2001, p. 32) estimates almost 75. West (1913, p. 85) estimates about 75. Zenos (1889, p. 2) estimates exactly 75. Cowley (1999 and 2001, p. 17) estimates possibly 80. Cook (1904, p. 277) estimates exactly 80.
- ↑ 애초에 헤르도토스의 착각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 ↑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와 결혼했다.
- ↑ 헤로도토스는 수륙 500만이라 서술한다. 하지만 현대의 추측으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만을 넘지 않으며 17만으로 추정된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이었음을 기억하자.
- ↑ 문화도 틀린데다 언어까지 달라 통역을 쓸 정도니 통솔이 될수가 없었다.
- ↑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는 파라오를 칭했는데 이 시기를 제27왕조라고 한다. 이 왕조는 이집트가 독립에 성공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때까지 지속되었다.
- ↑ 제위 다툼이 심해지다보니 지방 총독들에 대한 통제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 ↑ 특히 피지배민족의 종교적 자유 같은 면
- ↑ 바지를 입었다고 우습게 봤다고 한다.-_-
그리스 하의는 팬티가 아니니까 부끄럽지 않은걸 - ↑ 메디아는 BC 550년, 리디아는 BC 547년, 바빌론은 BC 539년에 정복했다. 실질적인 초대 군주는 바로 이 키루스 대왕이다.
- ↑ BC 525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 시점부터 샤한샤가 파라오를 겸직한다.
- ↑ 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인 BC 404년, 이집트가 독립하면서 파라오 겸임도 끊어졌는데, BC 525년부터 BC 404년의 이 시기가 이집트 27왕조이며 페르시아의 1차 정복시대이다.
- ↑ BC 343년 이집트를 재정복했다. 그래서 BC 343년부터 BC 332년은 페르시아의 2차 정복시대로도 불리며, 이집트 31왕조로도 불린다. 그리고 이집트 32왕조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인 셈이니 BC 343년 시점에서 이미 이집트의 자주성은 사라져버린 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