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6세

교황명바오로 6세 (Paulus VI)
세속명조반니 바티스타 엔리코 안토니오 마리아 몬티니
(Giovanni Battista Enrico Antonio Maria Montini)
출생지이탈리아 콘체시오
사망지이탈리아 카스텔 간돌포
생몰년도1897년 9월 26일 ~ 1978년 8월 6일 (80세)
재위기간1963년 6월 21일 ~ 1978년 8월 6일 (15년 46일)
대관미사1963년 6월 30일[1]
장례미사1978년 8월 12일
시복식2014년 10월 19일, 교황 프란치스코
축일9월 26일[2]
라틴어Beatus Paulus PP. VI
이탈리아어Beato Papa Paolo VI
스페인어Beato Papa Pablo VI
영어Blessed Pope Paul VI
독일어Papst Paul VI
프랑스어Pape Paul VI
그리스어Πάπας Παύλος ΣΤ΄


역대 교황
261대 요한 23세262대 바오로 6세263대 요한 바오로 1세

교황 선출 이후 첫 번째 강복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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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의 문장

1 개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62대 교황. 사목표어는 'Cum Ipso in Monte(동산에서 그 분과 함께)'.

소심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교황이었던 요한 23세가 후에 자신의 후임자가 되는 그에게 '우리 시대의 위대한 햄릿'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였다. 성직자 생활의 대부분을 바티칸에서 보냈다.


2 안습의 주교 시절

비오 12세 시절에는 상당히 불우했다. 무엇보다 비오 12세,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 스펠만 추기경[3]등 당시 바티칸 정계의 보수파이자 실권자였던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미움을 사는 바람에(...) 여러가지로 힘든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한 예로 몬티니 주교는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와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기막히게도 몬티니 '주교'가 일개 '수녀'인 파스칼리나에게 갈굼을 당하는 관계였다. 가톨릭의 보수적인 상하관계상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 파스칼리나 수녀는 교황을 등에 업고 있는 데다가 괄괄하고 깐깐한 성격에 워킹머신이라 불릴 만큼 빠르고 완벽한 일처리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몬티니 주교는 정반대로 소심한 성품에 느긋한 일처리(...) 스타일이었는지라 파스칼리나 수녀에게 참 많이도 갈굼당했다고 한다. 비오 12세도 그런 몬티니 주교를 답답하게 여겨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님에게 ABC부터 다시 배워오라"는 폭언까지 퍼부었다. 또한 비오 12세는 몬티니 주교를 "가톨릭을 뒤엎을 사람"으로 보고 위험하게 여겨 견제도 많이 받았다. 결국 엎은 건 바로 후임자와 이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몬티니 주교는 1955년에 밀라노 대주교로 전근되었는데, 당시 밀라노 대주교는 교황의 자리와는 가장 먼 곳에 위치한 대주교 취급을 받는 한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받으면 자동적으로 추기경으로도 서임받음이 관례였음에도 불구하고, 몬티니 대주교는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당선된 뒤인 1958년에야 비로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가 농간을 부려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교황이 된 후에 전임 교황도 못 했던 파스칼리나 수녀와의 화해를 성사시켰으며, 그녀의 자선사업을 지원해주기까지 했으니 실로 대인배가 아닐 수 없다.

성격이 소심하지만 특유의 매력과 카리스마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한 23세 또한 예상하기를, 자기가 죽은 뒤에 콘클라베에서 몬티니 추기경에게 표가 모여 교황으로 당선되리라 하였고, 요한 23세의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3 재위기간

3.1 교황 즉위

밀라노 대주교로 재직하던 1963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 바오로 6세가 처음 한 일은 요한 23세가 사망함으로써 중지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속개하라 명한 것이다. 이후 공의회가 폐막하자, 바오로 6세는 남은 재위기간 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기존의 트리엔트 미사를 대체한 자국어 미사 봉헌을 허용하여, 가톨릭 교회의 으뜸 전례인 미사에 손님으로 머물렀던 평신도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낸 것은 매우 훌륭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자국어 미사를 보편화 하기 위하여 교서 Novus Ordo(노부스 오르도)를 반포, 트리엔트 미사를 거행하려면 사도좌 또는 교구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는 2007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자의교서 <교황들(SUMMORUM PONTIFICUM)>이 반포되면서, 이제 신자들의 요청을 받을 경우 적법한 사제라면 모두 드릴 수 있도록 또 한 번 바뀌었다.

이때 영국 가톨릭 교회에서 반발이 일어났는데, 성공회의 탄압 속에서 트리엔트 미사는 국가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영국 가톨릭 교회의 상징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트리엔트 미사의 유지를 위해 영국의 가톨릭 저명인사들은 교황에게 전통 미사를 유지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시큰둥한 반응으로 청원서를 읽어 내려가던 교황은 서명자 중에 영국 탐정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름을 발견하고, "아, 애거서 크리스티!"라고 갑자기 외치더니 특전을 허가하는 교서에 서명을 했다고... 이건 그가 그녀의 추리소설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1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의 가톨릭 교구에서 트리엔트 미사가 예외적으로 실시될 수 있도록 특별히 내려진 이 특전을 애거서 크리스티 특전(特典)이라고 한다. 흠좀무. 그런데 정작 애거서 크리스티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다(…).


3.2 교회 개혁


김수환 스테파노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1969년, 바오로 6세 때다. 후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67년에, 그 다음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77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콘클라베에 참여해 교황에 피선될 수 있는 추기경의 연령을 80세 미만으로 제한한 것도 교황의 지시였다. 또한 귀족 근위대와 팔라딘을 해체시킨 것도 그의 업적이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을 참고.

1963년에는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남부를 분할하여 수원교구를 설정, 윤공희 빅토리노 신부를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했다. 1965년에는 원주교구, 1966년에는 마산교구, 1969년에는 안동교구, 1977년에는 제주교구를 설정했다.

3.3 순례자 교황

바오로 6세는 재위기간 동안 장거리 여행으로 외국을 순방하며 정력적으로 사목 활동에 전념해 '순례자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2대 뒤에 즉위한 교황이 이 기록을 가뿐하게 갈아치웠다(…). 교황은 예루살렘, 인도 공화국, 콜롬비아, 포르투갈, 프랑스, 필리핀 등지를 찾았으며 1965년에는 역대 교황 가운데서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교황이 필리핀을 방문할 때 우리나라에도 와주실 것을 청했지만, 바오로 6세는 남북간의 첨예한 대립 때문에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며 고사했다고 한다.


3.4 생명 수호에 힘쓰다

1968년 7월 25일에 교황의 상당히 유명한 회칙 중 하나인 '인간 생명(Humanae vitae)'을 발표했다. 이 회칙은 사회적으로 비중있게 다뤄지기 시작한 산아제한 등의 문제에 대한 것으로, 인공적인 산아제한과 피임은 반생명적인 것이며 낙태는 야만적인 살인행위임을 주장하는 가톨릭 교회의 기존의 가르침을 고수하였다. 이 회칙이 반포되자마자 가톨릭 교회 안팎으로 비난여론이 들끓은 건 당연지사. 당시 반대론자들은 전근대적인 발상이라며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런데 산아제한 정책을 펴던 선진국들이 이제와서 다시 출산장려 정책을 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걸 보면, 교황이 정말로 상당한 혜안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맬서스 트랩' 자체가 병맛 이론이었지만.)

언론계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그의 시복식과 세계 주교 시노드 임시총회 전까지만도 언론은 그를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인물'로 묘사해왔는데, 시노드 이후에는 동성애 • 이혼 인정 여론에 편승해서[4] '교회 개혁에 앞장선 진보주의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바오로 6세가 교회개혁에 힘쓴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교리 등을 바꾸려 한 것은 아니었고[5], 오히려 윤리 도덕면에서는 전형적인 가톨릭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하여 세속 여론의 질타를 받기까지 한 인물인데, 이제와서는 되려 언론에서 개혁가로서의 면모만 부각시키니 아이러니. 물론 이러한 부분은 요한 바오로 2세 같은 인물의 경우에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4 선종

교황과 루치아니 추기경교황과 보이티와 추기경라칭거 추기경과 교황

1978년 3월 16일, 바오로 6세의 절친한 친구이며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정치가 알도 모로가 붉은 여단에 납치당했다. 모로는 교황이 나서서 구해주기를 호소했고, 이에 바오로 6세는 모로를 조건 없이 석방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붉은 여단 앞으로 보냈다. 테러분자에게 저자세로 나갔다는[6] 일부의 비난을 무릅쓴 교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로는 5월 9일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으며, 80살의 고령이라 건강이 좋지 못했던 교황은 친구를 잃은 정신적 충격으로 더욱 쇠약해졌다.

8월 6일, 카스텔 간돌포의 여름 별궁에서 주님 변모 축일 전례를 집전하던 교황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으며, 15년 뒤인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하느님의 종[7]으로 선포했다.

바오로 6세의 시신바오로 6세의 무덤



시복 선언 후 부른 성가 <Iubilate Deo, Cantate Domino>(하느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 [#]

2014년 5월, 오는 10월 19일에 바오로 6세가 복자(福者)로 시복될 예정이라고 교황청이 밝혔다.[#] 그리고 19일에 세계 주교 시노드 임시 총회 폐막과 함께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1. 교황관을 착용한 마지막 대관미사로, 후임자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관을 사용하지 않는 즉위미사로 대체했다.
  2. 복자이며 교황이었기 때문에 교회법에 따라 공적인 축일은 로마 교구에서만 지낼 수 있다.
  3. 당시 미국추기경으로서 일명 미국의 교황으로 불릴 만큼 미국 가톨릭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오 12세의 신임을 바탕으로 바티칸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말년에 여러가지 좋지 못한 행보를 보이다 결국 금전 스캔들에 휘말려 은퇴했다.
  4. 알다시피 시노드 동안 동성애를 수용하느냐 마느냐 등의 문제로 시끌벅적했다.
  5. 그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그런 오해를 흔히 받는다.
  6. 실제로 바오로 6세가 쓴 편지 내용을 보면 "무릎을 꿇고 비오니 제발 모로를 석방해 주십시오" 라는 대목이 있을 만큼 정말 필설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보냈다. 이런 교황의 뜻을 무시한 붉은 여단은 결국 공권력의 철퇴를 맞고 몰락한다.
  7. 시성 절차의 첫 번째 단계. 후보자를 시성해 달라고 교황청 시성성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접수되면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린다. 하느님의 종 → 복자성인의 순서를 밟는다. 구 교회법에서는 복자 전에 '가경자' 단계가 있었으나 폐지했다. 다만 구 교회법에서 가경자 단계까지 올라갔으나 아직 복자품에 오르지 못한 이들을 여전히 가경자로 부르기도 한다. 몇몇 단체들이 복자 이전 하느님의 종들을 가경자로 부르기도 하나 공식적인 호칭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