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林巨正 혹은 林巪正

( 1504년? ~ 음력 1562년 1월 3일 )

1 개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도적.

조선 시대에도 도적은 많았으나 임꺽정처럼 수차례 관군과 맞붙어 싸워 이겼을 뿐만 아니라 거의 한 나라를 뒤집어 엎을 정도로 활약했던 도적은 전무후무하다.

한글로는 임정이라 불리지만 한자표기는 林正이라 표기한다. 후술하겠지만, 巨(거) 밑에 'ㄱ'을 붙여 巪(걱)이라고 쓰기도 한다.[1] 조선왕조실록에서는 '林巨叱正(임거질정)'으로 나타나는데, 叱(질)은 사이시옷을 나타내는 표기로, 이를 적용하면 '임것정' 또는 '임껏정'이 된다. 실제로 실록의 원문을 보면 '林 巨叱 正'과 같은 식으로 巨叱을 의도적으로 붙여 쓴 표기가 상당수 발견되는데, '㖚(붓[2])', '唟(것[3])' 등과 동일한 방식을 적용해서 읽으라는 의미인 듯. 실록은 세로쓰기이므로, 巨叱 역시 㖚, 唟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2 초기 생애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출신이었으며,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명확한 원인이나 시기는 알기 힘들지만 아마도 백정의 신분으로 겪는 차별과 혼란스러웠던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임꺽정이 도적으로 활동하던 무대가 되었던 명종 대에는 명종의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그 동생인 윤원형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러워지고 관리들이 부패하여 민생이 어려워졌던 시기였다.

임꺽정은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 틈을 타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평분자들을 선동하여 황해도 및 함경도를 중심으로 각지의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며 종횡무진하였다. 이때 그 악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임꺽정이 한 고을에 나타났다 하면 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길을 나서기를 두려워하여 교통이 끊어질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흔히 을묘왜변 당시에 군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정 신분 때문에 차별당한 것이 도적일을 하게 된 주원인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사실이 아니다.

3 전성기

이후 1559년부터는 제법 세력이 커져서 황해도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를 살해하고 그 재물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본격적인 의적 행위를 벌였다. 덕분에 백성들과 아전들이 임꺽정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임꺽정의 무리들과 내응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들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을 숨겨주기도 하였으며, 관아에서 병력을 내보내면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들마저도 죽임을 당하였다.

제법 큰 세력에다가 백성들의 지지까지 얻게 된 임꺽정 패거리는 점차 대담해져서 여러 지역에 신출귀몰 출몰하여 조선 전역을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들은 곧 세력 범위를 넓혀 개성에 나타나는가 하면 1560년에 서울에까지 출몰하였다. 게다가 관가에 일당들이나 그 가족들이 잡히면 관가로 쳐들어가서 건물을 때려 부수고(...) 붙잡힌 일당들을 구출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말다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임꺽정과 그 도적떼는 더이상 일개 도적떼가 아닌 반체제적 세력(반란군)으로 간주되었으며, 조정에서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보내 평산에 집결한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꺽정은 되려 관군을 무찌르고 군관을 살해하였으며 군마를 약탈해갔다.

결국은 임금인 명종이 직접 어명을 내려서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의 5도에 대장을 정하여 임꺽정을 잡도록 하였다. 또한 모든 관청에 명을 내려 자잘한 업무는 모두 쉬게 하고 임꺽정을 잡는데에 주력하라고 명할 정도로 임꺽정의 악명은 자자했다.

4 최후

그러나 임꺽정은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3년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다. 조정의 독촉을 받던 장수들과 포상을 노리던 고을 수령들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엉뚱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 임꺽정과 한패라 하여 벌주고 고문하다가 사람 잡는 일도 여럿 있었다. 또한 이렇게 허위사실로 함부로 백성을 죽이거나 허위보고를 올리는 이들도 파직당하거나 유배당하는 등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런 난리통 중에 1560년 12월, 임꺽정의 참모였던 도적 서림이 붙잡혔다. 임꺽정과 도적떼의 사정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었던 서림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임꺽정을 추격하였고 차츰 도적떼들을 토벌하는데 성공한다.

1562년에 임꺽정은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 등의 토벌군들에게 포위당한다. 탈출할 길이 없어지자 임꺽정은 토벌군 복색으로 변장한 후 꾀병을 부리면서 은근슬쩍 뒤로 빠질려고 했는데 토벌군 병졸들이 이를 수상히 여겼고 때마침 서림이 임꺽정을 알아보고 토벌군에게 알리는 바람에 들켜 급히 도주하였고 추격하는 토벌대가 화살을 난사하였다. 임꺽정은 결국 여러대의 화살에 맞은 후 "내가 이렇게 된건 모두 서림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니가 어찌 관군에 투항할 수 있느냐?" 라고 서림을 질책한 후 사망하였다. 다만 이 내용은 야사인 <기재잡기>에 실린 내용이고 실록에는 없다.

백과사전 등에서는 임꺽정이 사로잡힌후 15일 후에 참형에 처해졌다고 하지만 실록에는 그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명종 17년 1월 17일 형조에서 "도적의 괴수는 이미 처단하였습니다..." 라고 아뢴 기록이 있어 임꺽정이 체포 이후 처형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5 평가

도적 두목 치고는 용맹함이 상당해서 추격해온 관군과 직접 맞부딪혀서 무찌른 일도 있었고, 계략을 짜내 관군을 엿먹인 일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눈덮인 산에서 관군들에게 쫓기게 되자 일부러 신발을 거꾸로 신어서 발자국을 남겨 되려 도적떼를 쫓던 관군들이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게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의 그저 그런 무식한 도적떼와는 달리 전투력이 상당하고 교활한 편이었다. 게다가 리더쉽과 카리스마도 상당했는지 상인이나 농민, 백정 등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임꺽정의 휘하로 몰려들어 도적이 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적을 고변하는 자는 배를 갈라 버리는 무시무시한 협박도 했다하니 역시 도적은 도적.

당대의 명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일단 임꺽정을 가리켜 희대의 흉악범 정도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임꺽정과 같은 도적이 나타나 날뛸 수 있었던 것도 다 나라가 혼란하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5]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간단히 말해서 '윗놈들이 잘만 했으면 이런 난리도 나지 않을 것이다.' 정도로, 당시 문정왕후윤원형의 손아귀에 놀아나던 조정이 얼마나 막장스러웠는지 가히 짐작할만 하다.

또한 흉악범이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천민치고는 나름대로 능력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오합지졸 도적 무리를 이끌면서도 관군을 발라 버렸고, 몇년동안 잡히지도 않으면서 전국을 휘저으며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만 봐도 범상치않은 도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민간 설화에서는 의적으로 많이 묘사되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비록 당대에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지만 이는 그저 임꺽정이 평소에 꼴보기 싫던 탐관오리와 부자들을 박살내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을 뿐이다. 실제로는 도적들이 다 그렇듯이 백성들이나 행인들도 약탈 대상이었다.(...) 다만 실제로 임꺽정이 의적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며, 초창기에 자주 하던 민가 약탈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행위에 호응해주는 백성들을 인식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6 그 외

홍길동, 장길산과 함게 조선조 3대 도적으로 꼽히며, 임꺽정 설화를 기초로 해서 벽초 홍명희 씨가 지은 대하장편 역사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임꺽정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의 아내가 붙잡혀 관아의 노비가 되는 일도 있었다. 임꺽정은 아내가 노비로 일하고 있는 곳을 습격하여 구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또한 임꺽정에게는 가도치라는 형이 있어 함께 도적질을 하고 다녔는데, 관리들은 임꺽정을 잡아 포상을 받고 싶었던 욕심이 컸던 나머지 가도치를 사로잡은 후에 고문을 가해서 스스로를 임꺽정이라고 자백하게 만들고는 '임꺽정을 잡았다'라며 그를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가도치는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상경하자마자 죽는 바람에 정말 모두가 속아넘어갈 뻔 했지만 가도치와 대질한 서림의 증언으로 인해 속임수였음이 탄로나면서 파직당하였다.

또한 어찌 보면 조선판 갱스터물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밑바닥 인생이 세상에 울분을 토하고, 무예에 출중한 의형제들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다가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사망하는, 아주 완벽한 고전 갱스터물과 같은 삶을 살았다.

더불어 이름이 꺽정인데, 한자로 표기가 어려워 클 巨에 밑에 ㄱ을 붙여 巪이라는 새 문자를 만들어 표기했다고도 한다. 여튼 巪은 사람이름 걱으로 매우 잉여한 한자지만 임꺽정 덕분에 잉여한자치곤 꽤 인지도가 있는편. 매우 초급적인 한자에 조어 방식도 매우 쉬워서 외우기도 매우 쉽다.

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7 관련작품

7.1 소설류

사실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홍명희의 임꺽정 이외에도 많다. 홍명희의 작품이 금서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김용제의 임꺽정(1961), 허문녕의 거도 임꺽정(1961) 같은 소설이 나왔던 것이다.

최인욱의 임꺽정은 1962년에서 1965년 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소설의 연재가 끝나자 서울신문의 판매부수가 2만부나 떨어졌을 정도로 당대의 인기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명희작 임꺽정의 봉인이 해제되자 마자 이런 작품들이 모조리 쓸려나가서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려운 것을 생각해보면 홍명희의 임꺽정의 파괴력이 대단하다는걸 알 수 있다.

7.2 장편소설 임꺽정

벽초 홍명희의 장편 소설. 1928년 11월 21일부터 1939년 3월 11일까지 〈조선일보〉에 발표되고, 이어 1940년 〈조광〉 10월호에도 발표되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봉단(鳳丹)편·피장(皮匠)편·양반편·의형제편·화적편 등 5편으로 나뉘어 있다.

저작자 자신이 영웅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는지, 작중 초반은 임꺽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연재 초기당시 독자들의 항의가 많기도 하였다.

벽초 홍명희가 월북을 한 관계로,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흥미진진한 내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은밀히 복사해서 돌려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홍명희가 임꺽정을 신문에 연재할 때의 인기는 매우 대단해서, 신간회 활동을 빌미로 홍명희가 수감당해 연재가 중단되자 소설을 연재하게 해달라는 편지가 총독부에 빗발치듯 몰려왔다. 결국 홍명희는 감옥 안에서 연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 관원들도 이 소설에 푹 빠져서 홍명희가 쓴 원고를 조선일보 측에 보내기 전에 돌려 가며 읽었다고 할 정도.

홍명희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임꺽정에 대한 전설을 채집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도적이나 호걸에 대한 이야기를 얻었으며, 그 민담들의 결집체가 된 것이 바로 임꺽정이라고 한다. 임꺽정을 위시한 두령들의 능력이나 캐릭터성을 보면 고전소설인 수호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추정된다. 사실 저자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수호지에서도 많은 걸 따왔다고 한다. 실제로 청석골두령들의 모습을 보면 양산박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한국적 정서를 드러내는 토속적인 구어체가 많이 쓰이고 있으며,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기록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 문학을 연구한 어느 일본인 교수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져가는 조선의 문화를 소설 속에 보존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비평을 하기도 했다. 역사학도이자 소설가인 초록불은 '대학생 때 <임꺽정>을 읽고 이 작품만큼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조선시대는 작품의 영역으로 삼지 않기로 했다. <장길산>도 좋은 작품이지만 <임꺽정>처럼 그 시대의 세세한 문화를 담아내진 못했다.'고 평한다.

소설속에서 주인공 임꺽정은 젊은 시절 스승 양주팔을 따라서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역사속 실존 인물들을 스쳐지나가는 식으로 만나는 에피소드들이 여러개 있다.

예를 들어 어린시절의 이순신을 만나 호통치는 장면, 토정 이지함을 제주도 가는 길에 만나는 장면[6], 이지함과 남명 조식이 만난 자리에서 이지함이 임꺽정을 평하던 장면, 남산 밑에서 초막을 짓고 인종을 방자하던 윤원형을 만나 죽도록 패주는 장면, 백정이던 임꺽정이 귀양가던 양반 이해(이황의 형)가 장독으로 죽자 관을 구해 시신을 안치하고 이를 고맙게 여긴 이황이 직접 임꺽정을 찾아오는 장면 등등

화적편에서 미완으로 끝났다. 왜 미완으로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설이 분분하다. 일제가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조선 문화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절필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한동안 북한에서 홍명희가 그 후의 내용을 써서 완결지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최근 남북교류의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손자 홍석중 씨의 말에 따르면, 광복 후 주위에서 소설을 완결 짓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홍명희가 '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의 상상에 남겨두고자 한다'고 말하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비평론적으로 볼 때 이미 임꺽정 무리의 몰락이 확실시 된 상황까지 써진 이상, 특별히 그 뒤의 내용이 필요없다는 견해도 있다. 관군을 피해서 대부분의 두령과 그 수하가 구월산으로 이동하고, 혼자 남은 오가가 청석골에 남아 있다 뿔뿔히 흩어지는 졸개들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연재가 끝났다.

손자인 소설가 홍석중이 임꺽정의 최후를 화살에 맞아 죽는 것으로 쓴 것도 있는데 이후에 홍명희의 임꺽정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은 홍석중이 쓴 결말 부분을 따른다.

2004년에 저작권에 관한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출판사 측에서 북한에 있는 작가 홍명희의 유족들에게 저작권료로 1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원래 공산주의에서는 저작권법을 인정하지 않으나, 2001년에 북한에서 저작권법이 제정된 후, 2004년 이후로 북한 출판사와의 저작권 협상을 해서 나온 책이 더러 있다.

임꺽정이 스승으로부터 받는 검은 일본도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유명한 도공인 비젠 오사후네 나가미츠 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사사키 코지로의 애검인 모노호시자오를 만든 걸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만든 칼로 임꺽정은 이 칼로 삼포왜란에서 왜구를 수없이 썰어낸다.

7.2.1 파생 작품

7.2.1.1 이두호 임꺽정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파생된 만화이다. 만화가 이두호가 그렸다. 홍명희의 원작을 사용하고 싶으면서도 정작 만화가가 검열[7]이 두려운 나머지 임꺽정과 서림을 뺀 나머지 등장인물의 이름을 싸그리 고쳤다.

자신은 등장인물의 이름뿐만 아니라 상당한 창작력을 가미했다고 주장하지만 널리 인정받진 못한다[8]. 예를 들어보자면, 만화의 김달평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소설가 김성한의 "이마"라는 소설에 박치기를 잘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윤난정의 첫사랑이었고 임꺽정 패거리에 잠깐 몸담은 적이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박치기를 잘하고, 정난정의 첫사랑이면서 그녀를 찾아 헤멘다든지 하는 내용이 이두호의 "마빡 김달평"이다. 당연히 전자의 소설이 먼저 나왔고 인지도도 높다.

이후 임꺽정의 아들 임차손이 이순신 장군과 어린시절부터 우정을 맺게되는 후속편 '파행'을 스포츠조선에 연재하다가 무슨 사정인지 흐지부지 갑자기 끝내버렸다. 소드마스터 야마토 제목부터 파행이니 잘 될리가 있나

참고로 파행에선 차손이가 서림의 목을 베어버려 아버지 원수를 갚는 가상 상황이 추가되었다. 더불어 1570년에 병으로 죽어가는 남치근에게 양반차림으로 가서 내가 임꺽정 아들이라고 말하는 게 추가되었다. 병자리에 누워있던 남치근은 눈이 커지며 놀라지만 병때문에 말도 못하고 컥컥거리다가 그대로 죽는다.

본래 임차손이 이순신과 더불어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부분까지 그려내려고 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임차손이 사촌동생의 묘[9] 앞에서 자신의 아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연재가 종료된다.

임꺽정의 아내와 처남 역시 상당 부분 다르다. 원작에서는 끝까지 사회화가 안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만화에서는 백두산에서 내려온 후 인간 사회에 나름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인 임꺽정 역시 성격이 다르다. 상술하였듯 원작에서 임꺽정은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다. 이두호 임꺽정에서도 이러한 점은 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외강내유적인 모습을 더 많이 부각시킨다. 특히 반편인 형과 여동생을 극진히 생각하고 지켜주지 못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 등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모습을 더욱 부각시킨다. 참고로 소설판에서는 형과 누나였던 사람인데 형제 관계를 뒤집어 놓은 것은 아마도 임꺽정의 소년가장적인 모습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누나인 섭섭이가 꺽정의 실질적인 보호자였지만 만화판에서는 임꺽정이 보호해주어야 했지만 결국 지켜주지 못한 것으로 묘사된다.

전반적으로 등장 인물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당대 야사에도 나오는 단천령 이억순과의 에피소드도 삭제되었는데 원작에서 몇 안되는 임꺽정의 인간미를 볼 수 있는 이벤트인데 왜 삭제되었는지는 불명이다. 돌팔매를 잘 하는 배돌석이 삭제되고 그 대신 박유복에 대응하는 조금맹이 팔매와 표창을 같이 쓴다.

작품성으로 보자면 홍명희의 소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결코 본받을 만한 각색은 아니다. 다만 문화쇄국주의시대이던 때에 우수한 즐길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여태까지 '그런 만화가 있었지'라고 기억되는 수준. 한국어의 맛과 만화적인 질펀한 선을 잘 살린 고우영의 작품이 훨씬 작품적으로 우수하다.

신문 연재가 끝난 후 1995년에 대본소판이 출판되었고 2004년 경 무삭제판이 발매되었다. 대본소 판은 헌책방이나 중고장터 등에 가끔 올라오지만 비교적 최근에 출판된 무삭제판은 거의 찾기가 힘들다. 공공 도서관에 간혹 있으니 잘 찾아보는게 좋다.

7.2.1.2 SBS의 전 드라마

임꺽정(1996) 항목으로.

7.3 고우영 임꺽정

고우영 화백의 작품 중 하나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 작품에선 임꺽정의 숙적으로 양반 출신 검의 고수 윤원빈(윤원형의 조카라는 설정)이 등장하여 춘심이란 여성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의 임꺽정은 선이 굵은 호걸이며, 아무리 사랑하는 여성이라도, 설령 그녀가 숙적의 여자라고 해도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양심적인 사람. 다만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 끝내 파국을 맞이한다. 사실 고우영 판 임꺽정의 진정한 주인공은 임꺽정도, 윤원빈도 아니라, 이 둘을 모두 농락하는 사기적인 능력자 서림이다. 남치근이 마지막에 서림을 풀어주지만, 그 꼴을 보고 열받은 병사 1이 서림을 향해 활을 쏘고 그 화살이 서림을 향해 날아가는 장면과 함께 만화가 끝이 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7.4 애니메이션

1997년, 난데없이 김청기 감독이 감독하여 개봉한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그야말로 80년대풍 김청기 애니 그림체와 효과음, 성우연기를 보여주면서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고로 끝나면 안녕~~이라는 자막7~80년대 한국 극장 애니에서 나오던 그 자막이다!까지 나온다. 결국 흥행에는 참패하였고, 이후 점차 잊혀지다가 명절때나 SBS에서 방영해주기도 하였다.

최후에 임꺽정이 사로잡혀서 처형당한다는 결말은 차마 아이들에게 그대로 보여줄수 없었는지(...) 임꺽정은 자수하고 그전까지 임꺽정과 대립하던 양반 청년은 사실 암행어사라 탐관오리 사또를 처벌하고 임꺽정을 용서해준다는 무난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지었다.

7.5 그 외

KBS-2 에서임하룡이 임걱정으로 나오는 코미디 코너도 나왔는데, 말 그대로 도적단 두령인 임걱정과 졸개인 심형래와 부하들이 나와 부하들 뻘짓으로 골탕먹으면서 끝난다. 끝날때마다 임걱정이 "걱정된다! 걱정돼."라면서 마무리하는데 그다지 인기가 없어서 오래가진 못했다.

1990년대 중반 SBS대단한 일요일 이란 프로그램 에서 남희석남걱정 이란 캐릭터로 나와 사소한 일에도 "근데 만~약에~..." 라고 읊으며 걱정만 하다 일을 그르치는 코너도 있었는데 이 또한 얼마 가지는 못했다.

웹툰 정글고에서는 왠지 모르게 프레데터와 임꺽정이 싸운다는 내용의 영화가 나온다.

1993년도에 출판한 SF 임꺽정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관군의 추격에 죽을뻔한 임꺽정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20세기 서울로 시간이동 한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1998년 가을 KBS 2TV에서 9시 주말극으로 임꺽정의 일대기를 다룬 5부작 북한영화 <림꺽정>을 10부작으로 편집하여 방영됐는데 14%대의 시청률에 머물렀지만 뉴스시간대에 방송된 것을 감안한다면 낮은 시청률은 아니었다는 게 방송가의 대체적 평가이며 정치색이 비교적 없고 극적 리얼리티가 확보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외면하지 않았다는 분석이었으나 이 작품 이후 KBS의 9시 주말극은 대가 끊겼다.

아울러, KBS 2TV는 <림꺽정>에 앞서 대담 프로그램 <파워인터뷰>(토), 가족 시트콤 <사관과 신사>(일)를 편성할 예정이었으나 <파워인터뷰>는 MC를 맡을 여자 연예인 섭외 문제, <사관과 신사>는 주요 작가와 배우들 섭외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였고 이 때문에 <림꺽정>이 대타로 들어갔다.

사족으로 <림꺽정> 5회부터 마지막회(10회)까지 경쟁한 SBS <흐린날에 쓴 편지>는 드라마 방영 전 담당 PD가 '흐린'이라는 단어를 빼줄 것을 작가에게 요청했지만, 작가가 "제목을 바꾸면 안 쓰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대로 낙착된 바 있었으며 그 결과 저조한 시청률을 면치 못한 채 조기종영됐는데 어린이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켜 담배를 사오는 장면을 내보냄으로써 위법행위를 고무·조장한 점 때문에 99년 2월 3일 방송위원회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았다. <흐린 날에 쓴 편지> 는 <서울 뚝배기> , <서울의 달> , <형> , <옥이 이모>, <파랑새는 있다> 등의 서민적인 내용의 드라마를 주로 쓰는 김운경 작가의 작품인데, 김운경 작가는 <파랑새는 있다>를 쓸 당시에도 드라마의 제목을 원래 <파랑새는 없다> 라고 정했다가 KBS 고윗층의 압력으로 <파랑새는 있다>로 제목을 억지로 바꾼 적이 있기에 결국 제목을 바꾸는걸 거부했던 것이다.

김운경 작가는 이후 SBS 에서 <도둑의 딸> 이라는 드라마를 집필했는데 이 작품은 제목에 '도둑'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도 있었지만 딸과 작은아들 외엔 전 가족이 도둑질을 해서 먹고 사는 억지설정이란 비판을 들으며 최저 시청률 2.7%를 기록했고, 동시간대 60%대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한 MBC 허준에 밀려 전체적으로 평균 2%대의 애국가 시청률에 허덕였으며 이 작품 종영 이후 10%로 상승했으나 드라마 모방범죄가 발생하여 막판에는 KBS 2TV 가을동화 때문에 한자릿수 시청률로 떨어지자 SBS는 애초 50부작으로 기획된 <도둑의 딸>을 조기종영(34회) 시킴으로써 김운경 작가와 SBS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이후 김운경 작가는 MBC에서 <죽도록 사랑해> , KBS에서 <황금사과>, <돌아온 뚝배기>, 그리고 다시 MBC에서 <짝패> 를 집필 했으나 모두 부진한 시청률을 기록하였고, 또 작품의 평가도 이전 작품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긴 슬럼프에 빠졌었으나 JTBC에서 방영한 <유나의 거리>가 호평을 받고 종편 드라마 치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오랫동안의 긴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임꺽정의 이름을 단 FPS 게임도 국내에 발매된 바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대만에서 제작된 게임 칠협오의로컬라이징. 7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데서 임꺽정 7형제를 연상했는지 모르지만 내용은 임꺽정과 전혀 관련없는 중국식 무협이라 당시 플레이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이뭐병. 임꺽정이 장풍을 쓴다 지금은 인지도도 거의 없다. 더 자세한 것은 칠협오의 항목 참조.

  1. 이 글자는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한자, 즉 국자이다.
  2. 付(부)+叱(질)
  3. 去(거)+叱(질)
  4. 이전 기록에는 실록에 기록이 없다고 되어 있으나, 임꺽정이라고 이름이 나와있지 않을 뿐 이 기사 전후에 서림의 처리를 논하는 등 임꺽정이 분명히 처형당했음을 알 수 있는 기사들이 있다.
  5. 이러한 평가를 두고 사관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대단한게 아니라 당연한 의무다. 거기에 사초는 아무도 볼 수 없고 누설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갑자사화라던지
  6. 스승 양주팔이 "재주가 삼군을 덮을 만 하나 끝내 쓰이지 못할 것"이라고 평한다
  7. 이두호가 만화를 연재하던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홍명희와 그의 작품에 대해 언급하는 건 껄끄러운 마찰음을 낼 수 있었다.
  8. 원래 만화가 이두호의 출신 자체가 일본 만화를 그대로 베껴그리는 번안 만화가였다 말이 좋아서 번안이지 사실상 킹 오브 불법복제. 이두호 본인은 "그 시절엔 다들 그랬다"라는 말로 여태껏 일관해왔다. 자세한 건 이두호 항목 참고
  9.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토포사가 씨를 남겨두면 안된다고 땅에 내리쳐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