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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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강기동구춘선권동진권병덕김경천
김동삼김병조김붕준김상옥김성수
김완규김익상김지섭김하락나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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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환박열박승환박용만박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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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윤이봉창이상설이상재이승희
이위종이은찬이인영이재명이종일
이종훈이필주임예환장건상장인환
전명운전해산정환직조성환조완구
주자화주시경지청천채상덕천청
최석순최성모탕지야오편강렬홍기조
홍범도홍병기황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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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함께.. 이 땐 사이가 좋았지[1]

1 소개

김성수(金性洙, 1891.10.11 ~ 1955.2.18)는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의 부농(그래서 일명 전라도 만석꾼)이었으며 일제강점기의 교육인 겸 언론인(동아일보 창간), 광복 후인 1946년엔 고려대를 창립했고[2] 부통령까지 지낸 정치인이기도 하다. 호는 인촌(仁村).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독립유공자(주의할게 독립운동가가 아니다!)이면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이기도 하다.(...) 다만 이후 반독재투쟁에 나서는 등 나름의 업적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공식 홈페이지로는 인촌 기념회가 있다.

2 생애

2.1 생애초기

1891년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태어났다. 1906년 전라남도 창평 영학숙에서, 1907년에는 내소사(절)에서 공부했다. 1908년 10월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가 1909년 4월 도쿄 긴조 중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 4월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 이듬해 같은 대학 정경학부로 진학했다가 1914년 7월에 졸업했다.

2.2 실력양성운동과 기업인 활동

1915년 4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1917년 3월에 교장에 취임했다. 이 해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고 경영했다. 1918년 3월 중앙학교 교장을 사직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19년 10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경성방직주식회사[3] 설립 인가를 받아 회사를 인수. 경영하였고, 이듬해 동아일보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 7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 일했다. 1921년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하면서 사장을 사임하고 취체역으로 활동했다. 동아일보를 매개로 1922년 11월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 보관위원으로 활동했다.[4]

1924년 4월 동아일보 취체역(取締役=이사(理事))을 사직했는데, 그 이유가 친일 정치깡패 박춘금의 압력때문이었다.[5] 그러나, 같은 해 9월 고문으로 동아일보에 복귀했다.

여튼, '박춘금의 동아일보 테러사건'을 전후로 자치론,민족개량주의의 길로 접어들어 기울기 시작했다.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으로부터 반발을 받아 물의를 빚고 중단되고 말았다.

이어 1924년 10월부터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전무와 상무를 겸하다가 1927년 10월 사임했다. 1928년 3월 경성방직 이사에서 물러났다. 1926년에 또다시 '자치운동'을 전개하다가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커다란 물의를 빚었다. 이를 계기로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27년 2월에 신간회를 결성한다.[6] 신간회 결성이후, 김성수는 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여러번 시도했으나 사회주의 세력의 거센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1931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뒤, 1932년 6월부터 1935년 6월까지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활동했다. 그 해 4월 중앙학교 교장을 사임했다.

1935년 3월 '조선문화 향상을 위해 도서출판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다. 1935년 11월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내의 사상선도와 사상범의 전향지도 보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소도회'의 이사에 선임되었다.[7]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정간되었고, 사장 송진우가 소수 기자(현진건 등)들의 실수였다고 총독부에 정간 해제해달라고 부탁, 폐간을 모면한 뒤 송진우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모든 활동을 그만둔채 칩거생활을 지냈다. 그 해 11월 '일장기 말소 사건'의 여파로 김성수 역시 동아일보 취체역(이사직)에서 물러났다.

2.3 전시체제기 활동

동아일보는 1937년 6월 복간되었지만, 이를 전후로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에 '어용 기관지'로 전락해 지원병을 적극 권장하거나 미화하는 기사글을 여러번 올렸다는 흑역사를 남기게 된다.#

1937년 5월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다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 30일8월 2일 이틀 동안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9월 학무국이 주최한 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다. 이밖에도 각종 전시체제 협력 단체에 관한건 상당히 많이 참여했다.

김성수가 1937년~1945년 기간동안 전시체제때 일제의 정책에 협력했었지만, 그렇다고 1937년~1942년까지는 내심 민족운동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그래도 '합법적인 공간'에서 최대한 실력양성운동에 관해 지원해주는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1930년대 후반 독립운동단체였던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흥업구락부 사건'에 관련되어 조사받거나 처벌받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무렵 조선어학회(한글연구단체)에 비밀리에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총독부는 김성수를 배후 지원자로 보고 연행, 심문하였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투옥을 모면한 적도 있었다.

고로 여기까지 보면, 김성수에 대해 '선(先)친일, 후(後) 항일'이라는 기준 아래 '김성수는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940년대 들어 총독부의 가혹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실력양성운동 같은 '합법적 공간' 활동이라는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1942년을 전후로 김성수는 자포자기 심정인지 완전한 친일파로 변절하고 만다. 특히 1943년~1945년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경성일보, 월간 잡지 <춘추>등 총 25편 이상의 내선일체 찬양글, 학도병 권유문 글 등을 집중적으로 많이 썼다.[8]

이러한 점 때문에 김성수는 '선(先)항일, 후(後)친일' 인사로 분류되 한국독립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군상' 263명 가운데 한명으로 수록되었고, 민간단체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수록되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3년만 참지 하긴 일제가 망할걸 알았다면 친일한 사람들 몇 되겠냐만..

2.4 광복 이후

해방 이후에 송진우,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창당에 관여했다.

1945년 9월, 미군정청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월 동아일보 사장에 다시 취임했고, 오랜 친구인 송진우의 사망으로 공백이 된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에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1947년 2월에는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했다. 해방정국 동안 김성수는 한민당을 이끌며 이승만과 함께 '반공,반탁운동',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주도한다.

여담으로 그의 집의 가사도우미의 아들이 박광옥인데, 조병옥의 추천으로 경찰이 되었다. 그런데 박광옥은 장덕수 암살범으로 배희범과 함께 직접 장덕수를 쏴버렸다.(...)

2.5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2월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동아일보 고문이 되었다. 1951년 6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2년 5월까지 활동했다. 부통령 재임기간 동안 상당히 개념인으로 활동했는데, 그는 독재정권 장기화를 막고자 많은 노력을 했었고 구 악습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했었다. 그러다 부통령 임기 만료 직전인 1952년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며 이승만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남은 임기를 때려친다.(...)

현 정부는 충언과 직언을 혐오하고 아부만을 환영하며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범 야당 세력을 결집시키며 반(反)독재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1954년부터 뇌질환 등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호헌동지회를 기반으로 '민주당'이 1955년 9월에 결성되기 이전인 1955년 2월 18일에 심근염, 뇌일혈, 위장병 등의 합병증으로 종로구 계동 자택에서 사망한다.

3 사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년 보고서에 포함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이유는 일제강점기 말 친일기고문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과 활동했다는 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 경성일보, 잡지 <춘추>등 학병권유문을 수차례 기고했다는 점 등이다.

다만 '김성수 친일논쟁'은 현재 인촌기념사업회가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것을 취소해달라고 법원에 소송을 내 소송 중에 있다. 때문에 2011년 '친일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 19명'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취소 결정 내려졌을때, 김성수만이 보류 결정되었는데, 바로 '법정 소송'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향후 결정에 따라 지켜봐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16년 기준 2심까지 진행되었는데 김성수 친일행적이 대부분 인정되었다.# 다만 동아일보에선 인촌의 친일 행적이 인정되었다는 대다수 언론과 달리 같은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인정안된 부분만을 거론하며 '“仁村 친일반민족 행위 증거 없어”… 항소심도 정부 결정 부당 판결'이란 기사제목을 다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판결 이후 과천 서울대공원에 있는 김성수 동상 철거여론이 더욱 강해지기도 했다. 그러게 3년만 참지

반론 측에선 전시체제기간(1943-1945년) 동안 집중적으로 쓴 여러편의 글이 있긴 하지만 강압이나 조작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고, 김성수는 적어도 그 전까지 실력양성운동 등 항일활동을 실천으로 보여준 지식인 가운데 한명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 같이 대놓고 친일파라고 분류하는 건 아니라는 것.[9] 또 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10]에서 신문, 회사, 학교를 살리기 위한 '소극적인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11] 물론 법원에선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튼 이 부분은 민감하기 짝이 없는 문제인만큼, 객관적 사실보단 좌우가 서로 정치적으로 따지다보니 문제가 꼬이기도 하는데, 특히 우익 세력에선 '같은 친일 기고문 떡밥이 있는 여운형은 안 오르고 김성수는 오르냐.'는 이유로 민족 문제 연구소를 공격하기도 한다.결국 친일인건 인정한다는건가 다만 여운형이 친일인명사전 문제에서 빠진 이유는 '선(先)친일, 후(後)항일'이라는 기준 때문이다. 일제말에 국내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중국 옌안의 조선의용군,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고, 광복에 대비하는 등 구체적인 활동한 것이 객관적으로도 분명하게 밝혀졌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제 말기 국내에서 독립운동 단체는 건국동맹 이외에 거의 전무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건 살아생전 김성수와 여운형이 사상적으론 정반대 관계였지만, 인간적으론 매우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이다. 김성수는 여운형 계열 인사인 조봉암을 많이 밀어주기도 했다.

각종 독립 운동 가담 제의를 표면상으로는 대차게 거절하면서 뒤로 몰래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사라진 돈이 그 신문을 통해서 한국 독립군 쪽으로 갔다고 한다), 그런 걸 감안하면 그냥 자기 재산을 위험에 처하게 하기는 싫었지만 그렇다고 민족을 버릴 수도 없었던 어중간한 자본가 계층의 일원이 아니었나 하는 설도 있다. 이러한 어중간한 입지 때문에 객관성 여부보다는 친일파 떡밥이나 좌우갈등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심심하면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어느 시사 카툰은 여운형을 번번히 건국훈장 독립장 심사에서 탈락시키면서 일제 말기 징병을 옹호한 전적이 있는 김성수에게 진작에 건국훈장을 추서한 보훈처의 행동에 대해 깠던 적 있다. # 후에 여운형이 김성수보다 더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친일인명사전 문제 이후로 사상에 따른 훈장수여 문제가 불거져 나와 보수측에서는 여운형에게 수여한 1급 훈장을 치탈하라고 주장하고 있고 진보측에서는 김성수를 포함하여 친일경력이 있는 자의 훈장을 치탈하라 주장하며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12]

한편 조봉암을 밀어준 몇 안되는 보수 정치인으로 반(反)독재 운동에 헌신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봉암이 민주국민당(민주당의 전신)에 참여하는 문제를 두고 장면, 조병옥신익희가 그를 받아들이길 꺼려하자 김성수는 조봉암이 사상전향을 공식적으로 성명한다면 참가하게 해줘야한다고 적극적으로 밀었다.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조병옥과 신익희가 마지못해 허락했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성명 발표 전에 죽어버렸고, 조봉암은 참여가 무산되어 따로 진보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어난게 진보당 사건이다.(...)

사실 동아일보가 우익으로 전향하기 전에는 각방면에서 찬사를 받는 인물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와 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라고 말했으며, 2000년 3월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라고 김성수를 찬양하였다.

김수환 추기경 또한 1991년 10월11일 인촌 탄생 100주년 추념사에서 "인촌 선생은 한 시대를 이끌어 온 각계의 훌륭한 일꾼을 수없이 길러낸 ‘민족사의 산실’과 같은 존재", "스스로 몸을 낮추어 항상 겸양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뒷자리에서 남의 공로를 드높여 주는 것이 인촌 선생의 인품이자 경륜이었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근래의 평가절하는 동아일보의 정치성향 변화와 마냥 무관하진 않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대학교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보성학원의 설립자는 김성수가 아닌 이용익 선생으로, 김성수는 당시 운영난에 시달리던 보성학원을 인수하였고 광복이후 보성전문을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창립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보성학원도 이 사람이 창립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건 상대적으로 김성수가 더 잘 알려져서 그런듯. 고려대학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인촌기념관을 짓고 본관 앞에는 인촌 동상을 세웠다. 인촌기념관은 1991년 김성수의 묘가 있던 자리에 지어졌는데, 학생들은 인촌의 친일행위를 문제삼아 이 건물을 인촌기념관으로 부르기를 거부하는 보이콧을 시행하였다. 그래서 한동안 이 건물은 '4.18 기념관'으로 불리었는데, 그러자 학교는 진짜로 4.18 기념관이라는 건물을 지어버렸다.(...) 학생들은 당연히 이 건물에도 4.18 기념관이라고 부르지 않고 '제2학생회관'이라고 부르는 보이콧을 결행하였다. 그래서 한동안 이 건물들의 명칭이 혼용돼서 사용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인촌기념관, 4.18기념관으로 굳어진 상태가 되었다. 인촌기념관 만큼이나 김성수의 동상도 수난의 동상이다. 학내 분규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이 줄을 매고 끌어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한땐 김성수의 묘도 고대 캠퍼스 내에 있었는데, 학생들이 그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는 대변을 보는 일이 잦아 결국 이장했다는 루머도 있다.(...)

중앙고등학교의 창립자이기도 하며 김성수의 동상과 인촌 기념관이 이 곳에도 있다.

말당 서정주와 약간 인연이 있는 편인데, 서정주의 아버지가 김성수 집안의 토지를 관리하는 마름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종놈의 자식이 아니다 서정주와 김성수의 생가도 각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와 부안면 봉암리에 위치해 있어서 별로 멀지 않은 편. 어째 가까운 동네 사람들끼리 재미있는게 서정주의 아버지는 지역 주민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은 반면에, 지주인 김성수는 오히려 소작인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등 그럭저럭 평판이 좋은 편.

하지만 박정희 지지자들 특히 TK출신들은 빨갱이취급을 하고 있다.[13]

3.1 역사학계의 평가

한국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 역시 김성수의 정치활동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김성수가 없었다면, 아마 제1공화국은 더욱 썩어문드러졌을 거다'라면서 그가 주도해서 결성한 '호헌동지회'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에서 정치인의 귀감이라고 굉장한 호평을 하였다.

친일파 문제에 적극적인 역사학자들도, 김성수가 친일파인 건 인정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정치인 김성수를 높게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4 가족관계

1903년 13세에 고정주(高鼎柱)의 딸이며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하였다. 장인 고정주는 장흥 고씨로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으로 규장각제학을 역임한 인사였다. 또한 전라남도 창평군(현 담양군)에서 지주이자 관료로 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전남 담양군 창평에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설립한 사람이기도 하였다.[14]

고광석과의 사이에서 모두 9남 4녀를 뒀다. 장남 김상만[15](1910년생), 장녀 김상옥(1916년생), 차남 김상기[16](1918년생), 3남 김상선, 4남 김상흠(1919년생), 차녀 김상숙(1922년생), 5남 김상오[17](1924년생), 3녀 김상현(1926년생), 6남 김상종(1929년생), 7남 김남(1930년생), 8남 김상석(1933년생), 9남 김상겸[18](1935년생), 4녀 김순민(1937년생) 등이다. 이중에 4남 김상흠은 아버지의 행적과 달리 동시기에 연희전문 재학 중 항일운동으로 해방까지 옥고를 치렀고 해방후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이 사실은 그다지 언급이 되지 않는다.

그의 동생 김연수는 삼수사(三水社)라는 회사를 세웠고, 이는 후에 삼양그룹#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고려대학교, 동아일보, 경방, 삼양그룹과의 관계는 끈끈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친일행각에 있어서도 이쪽도 빠질 수 없어서 김연수의 경우도 친일행위로 얻은 토지를 환수한 것에 대해서 적법하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다만 유명세가 부족해서 김성수 만큼 말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 김연수의 차남 김상협은 고려대학교 총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장흥 고씨 일가와 인연이 많은 편이다. 김성수의 아내 고광석과 장인 고정주도 장흥 고씨였고, 맏아들 김상만도 장흥 고씨 종손이자 야당 국회의원이었던 고영완(高永完)의 여동생 고현남(高賢男)과 혼인하였다. 넷째 아들 김상흠도 고영완의 여동생 고완남과 혼인하였다. 참고로 고영완의 막내 사위인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2014년부터 인촌기념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해평 윤씨 일가와도 관련이 있다. 아들 중 한 명은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를 지냈으며, 또 다른 아들은 윤치영의 딸과 결혼해 사돈 관계가 된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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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제로 두 사람은 일제 당시까진 서로 협력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승만이 독재를 하자 반독재 투쟁을 벌이며 대립관계가 되었다.
  2. 물론 전신은 1905년 개교한 보성전문학교를 근간으로 한다. 실제 고려대 개교시기도 1905년으로 친다. 참고로 보성전문학교는 대한제국 시기 내장원경을 지낸 이용익이 설립했다.
  3. 기존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광목제조회사인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하여 만든 회사이다.
  4. 이 기간동안 김성수는 개념인이었다. 비록 안재홍같이 비타협적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력 양성 운동에서 만큼은 커다란 공적을 남겼는데, 언론계에서는 좌-우 편향되지 않도록 노력까지 했었다.(예를들어서 여운형의 평생친구인 조동호를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시켜 대접을 잘해줬다거나... 그리고, 인권변호사로 신망이 높은 허헌을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맡기까지도 했었다.)
  5. 1924년 4월 11일에 동아일보박춘금 등이 만든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는데, 박춘금이 사장 송진우와 취체역(이사) 김성수를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 및 구타를 가했다. 그 충격으로 송진우와 김성수는 각 사장직과 이사직을 그만두어야 했엇다. 여담으로 김성수와 송진우가 충격에서 벗어나 다시 동아일보 업무를 맡기까지의 공백기간에 동아일보 사장직 대행을 맡아준 인물이 허헌이었다.
  6. 이 당시 신간회는 당시 조선일보 인사들이 적극 주도했었다.
  7. 그러나, 이건 당시 사회활동상 어쩔수 없었다고 봐도 좋다. 이 당시에는 '신문사 경영'을 비롯해 '학교 교장직'이라는거 자체가 민족운동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고, 신문사나 교육을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양성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문사,교육운동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도용 또는 이용되는 것을 묵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해석하면 될거다.
  8. 대한민국 정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내용中
  9. 가장 대표적인 반론이 매일신보 기자인 김병규라는 자가 인촌 김성수의 명의를 함부로 도용해서 자기 멋대로 실었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위여부를 놓고 재판까지 가기도 했다. 2005년 재판 당시 재판부에서는 '실제로는 김병규라는 기자가 친일논설들을 게재하기에 앞서 김성수에게 글의 내용을 보이고, 김성수가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한 이후에 이를 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는 것인바, 그런 경위로 게재된 글은 김성수 자신의 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겨지므로 위 보도는 진실에 부합하거나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10. 그러나 창씨개명을 거부했다고 잘난 것도 없다. 창씨개명 항목에도 나오듯이 노골적인 친일파조차도 이름은 못 버린다고 배째라 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 심지어 일본에 막대한 뇌물을 바치던 한 골수친일파는 창씨개명하느니 죽겠다고 버티다가 온갖 반협박을 가하자 독을 먹고 죽은 이까지 있었다. 그래서 그런 친일파도 안하는 창씨개명 안했으니 애국자라고 볼 수는 없다.친일파도 안한 창씨개명을 한 박정희 김대중은 역사에 남을 친일파?
  11. 실제로, 이를 근거로 들만한 것이 '김승학의 보고서'다. 김승학의 보고서에 '친일기준'에 따르면, '경찰의 박해를 면하고 신변의 안전 또는 지위, 사업 등의 유지를 위하여 부득이 끌려다닌 자'로 김성수는 유억겸과 같은 분류로 기술되어 있다. 유억겸은 나름 '합법적 공간'에서 신간회라든가 변호사 활동으로 꽤나 이름을 날렸으나, 유억겸 역시 흥업구락부 사건을 전후로 변절한 친일파다.(...)
  12. 상술했듯 여운형이 친일인명사전 문제에서 빠진 이유는 '선(先)친일, 후(後)항일'이라는 기준 때문이다. 일제말에 국내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중국 옌안의 조선의용군,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고, 광복에 대비하는 등 구체적인 활동한 것이 객관적으로도 분명하게 밝혀졌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일제 말기 국내에서 독립운동 단체는 건국동맹 이외에 거의 전무했었다.
  13. 60,70년대 동아일보는 반박정희성향이었으니까
  14. 1906년 인촌 김성수가 입학한 창흥의숙은 바로 김성수의 장인 고정주가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1906년 이후 김성수는 전남 담양군 창평의 처가댁에서 생활하며, 장인이 설립한 창흥의숙에서 송진우, 백관수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15. 동아일보 회장. 동아일보의 舊사옥인 일민미술관은 그의 호를 따서 명명했다. 일민의 장남 김병관,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가 동아일보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을 이어받고 있다.
  16. 前 동아일보 회장
  17. 김상오의 장남 김병철은 고려대 농대 교수였고, 후에 총장을 역임했다. 학부는 서울대 농생대에서 마쳤으며, 재학 당시 샌드페블즈 1기 매니저로 활동했다.
  18. 前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스키협회장 및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