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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 |||||
기호 | 이름 | 기호 | 이름 | 기호 | 이름 |
1 | 박근혜 | 4 | 박종선 | 7 | 김순자 |
2 | 문재인 | 5 | 김소연 | ||
이정희 | 6 | 강지원 |
이름 | 이정희(李正嬉) |
생일 | 1969년 12월 22일 |
출신 | 서울특별시[1] |
학력 | 서울 남사초등학교 → 서문여자중학교 → 서문여자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법대 공법학과 졸업 |
1 개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며, 서문여중과 서문여고를 거쳐 1987년도 학력고사에서 인문계 여자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2] 신입생 시절 겪은 6월 항쟁과 1992년 발생한 주한미군 윤금이씨 살해사건을 접한 후 인권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 활동할 결심을 한다. 또한 여성운동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1996년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 29기를 수료한 후 법무법인 덕수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변호사가 된 이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변사무차장 등을 지냈다.
이후 2007년 3월 2일, 민주노동당에 입당,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3번으로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식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과 원내부대표등을 지내며 경력을 쌓았다. 2010년 민주노동당의 마지막 대표를 거쳐 2011년 유시민과 통합진보당의 창당에 힘을 실어 공동대표가 되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 직전, 민주당 김희철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발생한 모바일 투표부정으로 인해 출마하지 않고 이상규[3]에게 양보하였다.[4] 또한 이후 이어진 비례대표 경선 부정사건에 대한 당 대표로서의 대처가 적절치 못했다는 논란에 휘말리며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다.
2012년 9월 25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을 하고 대선 행보를 이어갔으나, 12월 16일 3차 TV토론을 수시간 앞둔 시점에 후보에서 사퇴했다.
여담으로, 저러다가 대선후보 야당 통합을 해서 당시 야당 대선후보 문재인을 밀어 줄거란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 대선후보 후보 토론회 당시 박근혜(현 대통령) 후보는
대선지원금 27억 관련 공격을 하였고 ,선관위에선 이미 후보자 준비를 하여 투표용지와 홍보 책자까지 배포하여 이만저만 국민혈세 낭비라며 여론이 안좋았다.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 때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야인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로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인양촉구 등을 주장하고 있다. 트위터를 보면 2015년 이후의 발언이 없다. 하지만 2016년 2월 경 국회의원으로써 입법을 소망하던 정책을 담은 저서 「진보를 복기하다」 를 펴내어생존신고 근황을 근소하게나마 알리고 있다.
2016년 9월 25일, 백남기 농민의 빈소에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근황을 알렸다.
2009년 말싸움에서 나온 말이 합필갤에서 필수요소로 쓰였다. 자세한 전문은 어딜 만져 참고.
관련 사건 목록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
2 논란
18대 대선 토론회 당시, 대한민국 정부를 '남쪽정부'라고 지칭하여 종북논란이 일었고, NL 진영의 인사들과 함께 하는 행보를 보여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성향에 대한 논란이 심한 편이다. 본인이 대표로 있던 통합진보당은 진보적 민주주의(인민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의 이유 등으로 위헌정당해산심판에서 해산 판결을 받아 헌정사상 최초로 해산되었다.
보수 진영은 성향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비판하고 있다. 한 기자가 6.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 물어보자 다음에 대답하겠다는 발언도 했다고 하였다. 이에 당시 통합진보당은 “이정희 대표가 6.25는 남침이었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고 해명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데 당시 기자의 질문이 의도적인 악의적 질문이라 어떻게 대답해도 꼬투리를 잡아 공격할 것으로 보여서 그 자리에서의 즉답을 피하려다가 남침이라고 말했다고 당직자가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당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북한이 먼저 공격한 것이 맞지만 당시의 정세는 한국 정부가 북한에 대한 도발을 계속 해서 전쟁 발발의 원인제공을 했기 떄문에 단순히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따지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그 외에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남침이 북이 남을 공격했다는 것인지 남이 북에게 공격 당했다는 것인지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헷갈려서 즉답을 피한 것 일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으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치인으로서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이정희에 대한 반감/혐오감이 굉장히 크며, NL 운동권 쪽에서는 '종북 혐의로 유죄 판결이 난 적 없다' 라며 이정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종북몰이에 가깝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어 진보 쪽에서도 굉장히 다른 평가를 받는다.
다카기 마사오 발언
4분10초 남쪽정부 발언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선후보로 출마해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많이 했다. 대선후보 토론이라는 공식 석상에서 박근혜를 향해 "당신 떨어트리려 나왔다."[5], "유신의 공주" 등의 네거티브성 발언을 했고일삼았고,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 만주군 아닌가 만주군이나 일본군이나 가 된 다카키 마사오"라는 패드립을 했다. 근데 오히려 이 행동이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일으켜 박근혜의 당선에 일조했다는 해석도 있어 아이러니한 부분.
하지만, 이정희의 역할은 노년층의 높은 투표율이 알려지면서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노년층의 투표율은 원래 높으며 굳이 선거상에서 이정희의 책임을 묻겠다면, 다소 유리할 수도 있었던 남은 부동층 따먹기 싸움에서 불리한 포지션을 차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2012년 후반기 들어 고정표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고, 선거가 양자 구도로 재편된 이후로는 40% 중반의 지지율을 차지하며 앞서고 있었다. 12월 들어서 여론조사상의 부동층은 고작 10%에 불과했을 정도로 후보 양자의 지지층 결집은 매우 공고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에서의 80%를 상회하는 높은 투표율에는 이정희 효과가 개입되었다고 볼 개연성도 있다. 결과론적인 분석이긴 하지만 당시 문재인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기 때문에 그 원인이 이정희의 발언으로 보수가 결집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해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꼭 그게 아니어도 당시 선거토론을 회화화한 SNL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이정희와 박근혜만 부각되고 문재인의 거의 묻힌 감이 없는 것도 영향이 컸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해석을 내리던 선거에 작용하는 변수들은 무수히 많고 그걸 모두 짐작하고 적용해서 결과를 도출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결과를 보고 과정을 추측하는데는 한계가 많다. 어느 정당이나 정치집단, 의원실, 선거 컨설팅 업체에서도 어느 정도의 과정과 결과물들을 가지고 짐작할 뿐 이것이 분명하게 맞다고 결론 내리지는 못한다.
당시 군대 복무하던 사람이나 전역한 20대들은 이정희 후보의 남쪽정부라는 듣도 보도 못했던 해괴한 말을 듣고 단일 문화 민족안에서 저런 사상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문화 충격을 받아 20대 또한 보수층을 지지했고 30,40대 층을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보수층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12월 16일 3차 TV토론을 수시간 앞둔 시점에 사퇴해 '진짜 박근혜만 까러 나온 거냐.', '선거지원금 먹튀하러 나왔냐.' 등의 비난을 들었다. 사실상 저격수 역할은 고사하고 그냥 즐겜유저 X맨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대선후보 토론을 보면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의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밉상 그 자체, 진보 성향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일순 통쾌할 수도 있지만 걱정이 더 큰 발언이었다.
비단 보수적 성향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쪽에서도 비판 여론이 크게 일었다. 국가의 대표자가 되려는 사람이 공개 석상에 나와, 국민들에게 무엇을 해주려 하는지, 국민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하고, 주제에 대한 상대 후보의 의견을 들으며 토론하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상대 후보를 까내리기에만 혈안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의 문제가 무엇인지, 표현의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만 걸고 넘어졌을 뿐, 정작 국가의 대표가 되어서 어떤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자신은 보여주지 않았다. 위 토론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좋게 이야기 해도 건설적인 토론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정희 후보가 다카키 마사오를 거론하며 박근혜 후보를 까고, 박근혜 후보는 발끈해서 '나를 까내리려고 작정했다'는 어조의 발언을 하는 등, 두 후보 모두 토론의 주제가 뭐였는지조차 잊게 할 정도로 엇나간 모습을 보여준다.
진보 성향 유권자들 중에선 이정희에 대한 평판이 어떻든 듣는 순간엔 당장 통쾌한 발언이었다고 반응도 있었다. 다만 이정희의 태도가 대통령이 되어 뭘 하겠다는건 거의 없었고 보수를 결집했다는 시각도 있었기 때문에 비판도 컸다. 특히나 약간이나마 박정희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부동층에게 역효과만 일으켜 대선패배의 원흉이라고 지탄 받고 있다.
통진당의 대표 시절 이적단체로 분류된 범민련 결성 21주년 및 22주년 기념식 행사장에 참석해 축사를 한 적이 있다.
21주년 기념식 발언2011년 12월 18일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범민련 결성 21돌 기념 및 2012년 양대 선거 승리 결의대회’통진당대표 이정희가 참석해 “범민련 동지 여러분, 존경의 마음으로 인사드립니다”“(통진당은) 종속적 한미군사동맹을 철폐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완수하며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겠다는 것을 40대 강령에 분명히 못 박아 두었다는 걸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1]
22주년 기념식 발언"범민련의 정신과 함께 진보당은 조국통일을 하겠다"며 축사를 낭독한 바 있다. [2]
3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3번) | 민주노동당 | - | 당선 | |
2012 | 제18대 대통령 선거 | 통합진보당 | - | 후보사퇴 |
- ↑ [3]
- ↑ 나이를 생각하면 원래 대학 진학년도는 1988년이 되어야 하나, 어렸을 때 학교를 일찍 보낸 모양이다.
- ↑ 본래 지역구가 은평 을이었으나, 당내 경선에서 천호선에게 패배한 상태였다. 또한 이상규는 당내에서 이정희 직속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사였는데, 직권으로 이상규에게 후보직을 양도한 것에 대해 절차상의 문제가 크다는 비판 역시 많이 있었다.
- ↑ 이전 서술에서는 비례대표 경선 부정으로 출마하지 않았다고 나왔었지만, 비례대표 경선부정사태는 총선 이후에 터진 사건이었다.
- ↑ 선거가 상대방을 떨어뜨리고(낙선) 자신이 선택되는 것(당선)에서는 틀린 것이 아니겠지만, 선거 토론 자리에서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자신이 선택이 되어서 간접적으로 상대방을 떨어뜨리도록 유도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전혀 없었다. 한편 무한도전 '선택 2014' 특집서 박명수 후보가 유재석 후보에게 "당신 떨어트리려고 있다"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