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북벌

1 의의

삼국지연의 후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건, 그렇기에 보통 삼국지 관련 매체는 왠만하면 북벌의 종결인 추풍오장원까지 전개하는것으로도 유명하다. 삼국지연의 본편은 제갈량 사후도 다루긴 하지만 내용이 매우 부실하기 때문에 대충 얼버무렸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후한말 황건란부터 서진의 통일까지의 이야기 중 제갈량 사망은 흐름상 딱 그 중간에 놓이지만, 연의에서 다루는 제갈량 사후의 분량은 전체 분량의 1/8~1/10 정도이기 때문이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그의 유지를 이어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여러번의 북벌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채 오장원에서 쓰러졌다. 흔히 '육출기산(六出祁山)'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다섯 차례의 출병이 있었으며 기산 방면으로 출병한 건 2번(1차, 4차)이다. 육출기산이 된 이유는 3차와 4차 사이에 창작 기산전투가 추가되었고 2, 3, 5차 북벌도 전부 기산에 한 번 이상 진출한 걸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 정황

2.1 촉 내부

촉은 건국하자마자 이릉대전에서의 대패, 건국군주 유비의 사망, 그리고 이릉대전으로 인한 영토/인재/병력/재정의 막대한 손실, 내부에서의 반란이라는 엄청난 동시다발적 악재에 맞닥뜨리게 된다.

제갈량은 촉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대혼란을 수습한 것은 물론, 오히려 5년만에 외부 원정(북벌)까지 가능할 정도로 내정을 견실하게 다져 낸다. 이회나 마충, 장익, 장의 등을 등용해 모든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불만있는 세력들을 회유하였으며, 남중(남만)을 촉의 영토에 편입하면서 경제적/군사적인 알짜배기 기반을 확보한다. "평년만 되어도 다른 곳의 풍년이요, 흉년이라 해도 다른 곳의 평년이라"라는 말[1]이 나올 정도로 1개 주 이상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고[2], 남중의 구리를 이용한 촉의 화폐는 형주와 관중 지방에서까지 통용되었을 정도로 경제력도 견실해지고 있었다.[3]

거기에 북벌의 철저한 군사적 준비까지... 이릉전투의 대패 후 유비가 싸질러 놓은 삽질들을 치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플러스까지 거두어낸 이 모든 일을 거의 혼자 도맡아 겨우 5년 만에 완성시킨 제갈량의 능력은 그야말로 초인의 경지(…)라 할 만 하다.[4]

2.2 촉 외부

유비가 이릉에서 패한 222년부터 제갈량이 북벌을 시작하는 227년까지는 가히 위나라와 오나라의 대결이라 할만하다. 위략에 따르면 당시 위나라에서는 유비가 죽은 후 더 이상 익주에는 인재가 없다고 여겼고 실제로 몇 년 동안 국경지대가 잠잠했기 때문에 촉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당초, 국가(國家-위나라)에서는 촉(蜀) 중에 오직 유비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이미 죽고 여러 해 동안 조용하고 아무 소리가 없었으므로 거의 아무런 방비가 없었다.

위략에서

촉이 끝났다고 생각한 위나라는 오나라와 박터지게 싸우기 시작한다. 220년 즉위한 조비는 총 3번의 대규모 남정을 실행했다. 222년 스스로 완으로 친정하고 대사마 조인과 정동대장군 조휴, 상군대장군 조진[5]장료, 장패, 장합, 하후상 등을 동원해 세 갈래 군사로 오나라를 쳤으나 조인이 유수에서 주환에게 패하며 좌절된다. 224년과 225년에도 각각 강릉과 수춘으로 친정했으나 홍수와 한파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퇴각했다. 226년 조비가 사망하자 이번에는 손권이 역습에 나섰지만 강하에서 문빙에게 막혔고, 제갈근심덕도 각각 서황과 조휴에게 격파되며 오군의 공격 역시 실패로 끝났다.

제갈량이 북벌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227년 겨울이다. 원래 맹달의 배신을 통해 상용이라는 전략적 거점을 선취하며 북벌을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이는 맹달의 우유부단함과 사마의의 과감한 기동으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맹달 문서 참조.

3 진행

3.1 1차 북벌 - 기습, 가정 전투, 그리고 읍참마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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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년 조비가 사망하고 조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위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제갈량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227년에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을 개시한다. 이때 제갈량이 5년간 뼈빠지게(...) 육성한 촉군의 규모는 생각외로 상당했던듯 한데 후주전 주석 제갈량에선 유선의 하조로는 북벌군의 규모를 20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한진춘추에도 제갈량이 촉군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과장되어 보이지만 일단 각각 유선과 제갈량 본인의 언급인데다 위략에도 당시 관중지방에는 촉군에 대한 방비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력상 촉군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어서 조운이 별동대를 이끌고 기곡으로 진출한다. 조운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옹주군 중 주력을 이끌던 조진의 본대가 즉각 조운과 맞선다. 하지만 이는 위군의 주력을 돌리려는 훼이크였다. 그 사이 제갈량의 본대는 반대편인 서쪽으로 돌아 기산을 통해 옹주의 서쪽으로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이에 호응하여 순식간에 촉군에게 넘어가고 만다. 이로 인해 기곡의 조진 서쪽으로 남아 있는 위군의 세력은 상규에 주둔한 곽회, 그리고 양주(서량)에 주둔한 서막만 남게 되었다. 당시 제갈량의 전략은 이렇다.

(1)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주력을 유인
(2) 제갈량이 기산으로 우회해 옹주 서부의 거점들을 점령
(3) 옹주 동부에 있는 위군전력을 협격하여 격파
(4) 본래 위나라의 지배력이 강하지 않았던 관중지역 전체를 평탄
(5) 장안으로 진격

위나라의 대응은 다음과 같았다. 조진이 야곡으로 나와서 조운을 막았고, 조예는 장합으로 하여금 5만의 병력을 이끌고 가정을 지나 촉에 넘어간 3군을 탈환할 것을 명령한다. 또 위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산관으로 병력을 보내 촉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제갈량 또한 가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시간적/지리적으로 이곳을 선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마속에게 군대를 주어 장합을 저지하게 하고, 예비대로 열류성에 고상을 파견하여 대비를 단단히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제갈량의 결정적인 패착이 된다.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제갈량이 내린 명을 따르지 않고 군을 부적절하게 운영하다 장합에게 패한다. 마속전에 의하면 그는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 위로 올라갔다고 한다. 선봉이었던 왕평이 여러 차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정에 도착한 장합은 이를 보고 급수로를 끊은 후 들이쳐 마속을 궤멸시켰다. 거의 동시에 열류성에서 가정을 백업하던 고상도 옹주자사 곽회에게 패했고, 기산이 무너지자 기곡의 조운도 조진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촉군은 세 곳의 전장에서 모두 패했으나, 사실상 마속의 패배와 동시에 제갈량의 1차 북벌은 끝났다. 제갈량은 자신을 포함한, 본대 병력의 퇴로가 완전히 끊기기 전에 최대한 신속하게 퇴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왕평전에서는 병사들이 산산히 흩어졌다고 하고 명제기, 장합전에도 모두 대파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의 피해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곽충오사엔 제갈량이 남여 수천인을 약탈해서 촉인들이 축하했다는데 배송지에 의하면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서현[6]의 1천 가구를 뽑아(拔) 돌아왔음에도 이 손실을 보충하기엔 부족했다고 이 기록을 비판한다. 다만 가정의 피해가 컸어도 그나마 수습이 가능했던 것은 왕평의 공이 컸는데 촉서 왕평전에 따르면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장합이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왕평은 천천히 여러 군영의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두고 장사들을 인솔하여 되돌아왔다.'라고 적혀있다. 기곡에서는 조운이 몸소 부대의 후미를 막았기 때문에 병력이나 물자의 손실이 거의 없었다.[7]

어쨌거나 점령했던 천수군 서현의 인구 천여가를 한중으로 데려왔으나 큰 패배인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제갈량은 스스로 벼슬을 깎아 우장군으로 강등된다. 그리고 군법에 따라 마속을 참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사자성어인 읍참마속의 기원이 된다. 한진춘추에 의하면 제갈량은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오자, 이후 병사와 장수의 수를 줄였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촉의 1차 북벌은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북벌이었으나 결국에는 실패하고 만다. 맹달이라는 내부조력자의 도움을 얻는데는 실패하긴 했으나, 본 게임인 옹주 전선에서는 제갈량의 양동작전이 제대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어느정도의 논란은 있지만[8] 이걸 감안하더라도 다른 북벌보다는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결국 1차 북벌의 실패로 촉이 가졌던 기습의 이점은 사라지고 이후 제갈량은 매 북벌마다 위의 강력한 전략적 방어에 맞닥뜨린다.

이런 패배 중에도 제갈량에게는 강유라는 큰 인재를 얻는 소득[9]은 있었으나 아직 이 시점에서 강유의 위상은 옹주 3군에서 따라 온 여러 투항자들 가운데 제갈량에게 촉망받는 기대주 정도였다. 실제로 제갈량 사후의 직속 후계자 위치는 내정/군정 모두 장완이었고, 장완이 죽은 후 그 후임자는 비의였다. 그리고 비의가 253년 곽순에게 암살된 후 그의 후임자는 없었다. 내정에서는 그의 상서령직을 이어받은 진지가 있었지만, 그가 맡았던 대장군직은 256년까지 비게 된다. 강유가 대장군이 된 것은 256년, 적도 전투에서 왕경의 군사를 대파한 공으로 대장군이 된 것이다. 강유는 스스로의 힘으로 대장군이 된 것이지, 처음부터 제갈량의 후계자로 낙점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제갈량이 강유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계자인 장완 등에게 편지를 보내 훌륭한 인재라며 열심히 그를 칭찬해 항장인 강유가 촉한 정계에서 순조롭게 높은 위치에 편입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것은 강유를 당장 후계자로 삼는다는 것 보다 장완 이후 촉한을 이끌만한 차세대 유망주 중 하나로 본 것에 가까울 것이다.

3.1.1 제갈량의 마속 인선

제1차 북벌의 가장 큰 실패요인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마속을 가정 전투로 보낸 것을 꼽는다. 남만 정벌 당시에 마속이 제갈량에게 남만은 군사적 점령으로 끝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조언을 제갈량에게 했고 제갈량도 이에 호응했다는 기록이 마속전에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마속은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었고 이에 제갈량도 마속을 나름대로 총애했음을 짐작 할 수가 있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마속의 나이도 30대며, 나름 경험도 있어서 절대 풋내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군 지휘는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마속을 가정으로 파견할 당시, 제갈량 휘하의 장수들이 위연, 오의[10]등을 보내고자 건의했음에도 제갈량은 이를 묵살하고 신뢰하는 마속을 대장으로 삼고 능력치 출중한 왕평을 부장으로 딸려보내며 정예병과 작전, 행동방침 등 아낌없이 지원을 해서 가정으로 보냈다. 그런데 설마 유능하고 전략에도 밝아 기대를 가지게 했던 마속이 장평대전조괄 같은 놈일 줄이야.

어쨌든 위군보다 먼저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길을 막으라는 제갈량의 지시를 따르는 대신에 가정의 정상으로 올라가 진을 친다. 부장이었던 왕평은 가정의 지형이 복잡해 병력 운용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마속에게 여러 차례 반대했으나 마속은 왕평의 진언을 무시한다. 결국 왕평은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따로 진을 쳐서, 이후 촉군이 위군에게 패퇴할 때 위군을 제지하여 시간을 벌고 군사들을 수습하는 공을 세워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장합에게 발리는 와중에 촉한의 정예군 이끌고 내놓은 마속의 전술은 한신의 배수진 흉내였는데... 앞뒤 다 잘라먹고 그냥 병사들을 사지로 내보내면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싸울거야 흉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물론 현실은 병사들을 사지로 내보내면 죽는다는 걸 재확인했을 뿐... 이쯤되면 한신에게 미안하기까지 하다.[11]

결국 마속이 패퇴하고 가정이 뚫리면서 천수, 상규 방면에 본진을 두었던 제갈량의 북벌 본대는 후퇴한다.

3.1.2 자오곡 계책

위연전에는 위연이 매번 제갈량에게 지휘권을 받아 양동작전을 수행하게 해줄 것을 청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위략에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정병 5천과 보급병 5천을 이끌고 자오곡을 통해 장안으로 간다면 지휘관인 하후무는 겁에 질려 도망치고 장안 서쪽이 온전히 촉의 영역이 될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제갈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갈량이 남정에서 수하장수들과 의논할 때 위연이 말했다.

"하후무는 위나라 주군의 사위인데 겁이 많고 지략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저 위연에게 정병 5천과 양식을 짊어질 5천명을 주신다면, 곧장 포증을 출발해 진령을 돌아 동쪽으로 가서 자오에 당도하여 북쪽으로 간다면 열흘이 자니지 않아 장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내가 도착했던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배를 타고 도망갈 것입니다. 장안에는 문관들만 있을 것이고 창고와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식으로 군량을 충당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위나라가 동쪽에서 병력을 모으는데 20일은 걸릴 것이므로 공이 야곡을 빠져나와 충분히 장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위략에서

일단 계책의 실존여부를 두고 말이 많은데, 다만 위략이 죄다 어환의 "촉한이 이렇게 나오면 무섭다"라는 위나라의 상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위략의 기록은 대부분 배송지가 정사의 주석을 달면서 인용한 자료들인데, 인용을 하면서도 사리를 헤아려서 각 사료들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위 평가 부분은 자오곡 계책의 실존여부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위연이 양의에게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다는 기록에 대한 비판이다. 자오곡에 대한 부분에는 어떠한 비판도 없기 때문에 이 기록을 무턱대고 괴담이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자치통감에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긴 하지만, 엄연히 다른 신뢰할만한 사서들에 기록이 남아있고 거기에 대해 특별한 비판이 제기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오곡 계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진수의 본전에 나온 위연의 제안과 자오곡 계책이 일치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애초에 위연의 제안은 한신의 고사를 들어 얘기한 것인데, 한신의 고사는 특정 거점을 우회해서 쳤다는 게 아니라, 유방의 본대와 한신의 군대가 서로 다른 길로 진격해 삼진을 토벌한 고사다. 요컨대 진수의 본전에서 위연이 제갈량에게 했다는 제안은 동관을 합류점으로 해서 자신에게 자유행동을 허가해 달라는 의미에 가깝고, 그 구체적인 내용 중에 하나로 자오곡 계책이 포섭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꼭 자오곡 계책이었다고 단정짓기도 무리가 있다.

이에 대해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위략의 기록에 대해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기에 자오곡 계책이 실존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주장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배송지는 애초에 위연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군사전략 관련으로는 인용한 사료에 대해 별다른 비판을 한 바가 드물다. 더군다나 진수가 직접 수록한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대해서도 출전이 된 장엄의 기록에 대한 의문 때문에 위작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그 외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여러 자료들 중 배송지가 반박하지 않았더라도 신뢰도에 의문이 있는 자료들은 결코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략만이 출전이라면 비판이 없으니 확실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위략은 애초에 유선의 출생에 대해서부터 제대로 삑사리를 친 사료임에도 그에 대해 배송지가 별다른 비판을 한 바가 없고, 그저 유선이 '정치는 갈씨(제갈량)에게 맡긴다'는 발언을 했다는 데 중점을 두어, 유선이 제갈량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바도 있다. 자오곡 계책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위연이 주장한 것이 자오곡 계책이다라고 단정짓는 것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자오곡 계책이 실존했다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1) 수백 km가 넘는 산길을 들키지 않고 넘어가서 2) 하후무가 장안을 그냥 버리고 탈출해야 한다는 황당한 작전이며[12] 3) 도시 하나만 점령해봐야 사방에서 두들겨 맞을 뿐 의미가 없다.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유지하기도 힘든 장거리 점령전에 병력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제갈량이 무타구치 렌야 같은 병신이고용서해주십시오! 제갈 승상님!, 촉군이 인민군마냥 보급을 무시하는 군대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위군의 전략기동 전문가를 무시해도 상황이 저렇단 소리다.[13] 게다가 위연이 말한것과는 달리 당시 장안으로 위명제 조예도 움직일 태세를 하고 있었는데 하후무야 그렇다쳐도 만약 황제가 친히 이끄는 지원병으로 장안에 온다면 위연은 더 힘들어지는 셈이다.

이렇게, 위에서 지적되는 것처럼 위략에서 나오는 위연의 주장은 실제로 북벌을 여러 차례 나서고 뛰어난 성과를 거둔 장수가 내놓았다고 보기에는 '비현실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실제로 위연의 주장이 이랬던 것인지는 의심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또한 이 기록은 "무능한 하후무"나 "장안에는 문관만 있다" 등. 주로 "위나라 관점의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존재하며, 현실적으로 보자면 "채택되지 않은 작전안" 같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안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에는 의미가 없기도 하므로 이처럼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러므로 위연이 자오도를 이용하는 "어떤 계책"을 넀다는 것은 검증할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디테일"이 위략에 나온 것과 같은 것이라고는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유사한 기록이 있는 정사 삼국지나 자치통감에서도 위연이 계책을 제시했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위략을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위연이 자오도 계책을 냈다는 비교적 사소한 정보를 부풀려서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

몇몇 의견으로는 장안의 동쪽에 위치한 요새인 동관이며 장안을 구원하기 위한 부대를 동관에서 요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제갈량의 본대가 기존의 루트로 진군해 장안의 서쪽에서 진입한다면 위연은 동관의 위연과 호응하여 장안 이서 방면을 꿀꺽할 수 있을 거라는 그림이 나온다지만 애시당초 위략의 계책은 제갈량더러 내가 먼저 장안을 점령할테니까 야곡 방면을 통해 동관에서 몰려들 위군을 방비하기 위해 제갈량 본대도 장안으로 오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몰랑 일단 장안을 먹고 나면 모든 상황이 종료라는 식인데 유비 사후 촉한의 에이스이자 평생을 전장에서 구른 베테랑이 낸 전략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주변을 고려하지 않은 계책이라고 밖에는 판단할 수가 없다. 그리고 몇몇 의견대로 제갈량이 위연의 병력 5천명을 장안에 놔두고 장안 이서로 진출해 버리면 위연은 장안을 (설령 점령했다고 쳐도) 5천명 가지고 장안에 고립된다는 소리다.

거기에 문제는 이럴경우 미처 다 제압되지 못한 위의 옹양주군이 촉군의 뒷통수를 칠 수 있다는 점이다. 신중하게 군대를 운용한 신중파 제갈량의 성품을 나무랄 바 없다고 해도 위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게 아쉽다는 의견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장안의 배후인 옹양, 관중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고선 설령 장안을 공략한다고 해도 그 배후가 위험하다. 애시당초 제갈량부터 시작해서 강유 시대까지 촉한 북벌군의 1차적인 목표가 항상 농서, 옹양 지역이었던 것은 옹양을 삼켜 촉의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이 지역을 완전히 삼키지 않고 장안에 대한 공성전에 돌입할 시 리스크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공성전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아무래도 수세에 몰린쪽이 유리하고 위군은 유사시 장안과 동관에 투입하여 농성할 군사적 역량이 있었다, 즉 이 기습이 자오곡계책대로 아주 빠른 시일내에 정리 되지 않으면 갈수록 촉군의 위험도는 높아진다. 이는 굉장한 하이리스크 였던 셈이다. 그리고 조진이 역으로 촉을 침공했을때와 낙곡대전 당시 자오도를 이용한 수송과 공격을 시행했으나 둘 다 상당한 수송상의 문제와 시간지연의 문제를 겪었다, 위연이 한중독으로서 주변의 지형에 능숙했다고 한다면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수가 있었을까.

몇몇 사람들은 위연이 '반골의 상'이라 제갈량이 무시했다고 하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인데 애초에 반골의 상 자체가 연의의 창작이며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소설의 떡밥정도로 볼 수 있다. 실제로는 오히려 위연이 제갈량에 대해서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갈량은 그럼에도 자신의 북벌에 있어선 위연을 끝까지 중용했다. 쉽게 말하면 불만은 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반발하지는 않은 부하와 그런 인물을 써야했던 보스의 관계정도. 그리고 반골의 상인 것 만으로 정말 확실한 계책을 '절대 하지 않겠다' 할만큼 제갈량이 바보도 아니라는 것은 모두들 알 것이다. 유선이면 모를까.

아무튼 이러한 계책을 진언했다는 언급이 있을 정도로, 위연이 전술에도 관심이 있었던 장수임은 분명하다. 다만 성공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고, 촉군이 실질적인 야전에서는 기동전에 자주 휘둘릴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전황을 보더라도, 이 계책은 수많은 작전 중의 하나였을 따름이다. 이렇게 진언한 계책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오곡 계책이라는 IF썰 하나만으로, 위연을 제갈량보다 높게 보는 것은 지나친 고평가라고 할 수 있다.[14]

게다가 이 자오곡 계책이 실제로 쓰여진 사례가 있었다. 후세 동진환온영가의 난으로 뺏긴 서진의 중원 고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북벌을 감행해 먼저 낙양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장안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환온은 이때 강주자사 사마훈과 위략에서 위연이 시도하려다가 제갈량에게 막힌 자오곡 계책을 그대로 활용했다가 군량 수송 문제와 기습으로 대패하여 철수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必要韓紙?

여담으로 코에이의 프랜차이즈 게임 진삼국무쌍 7에서는 위연이 장안을 기습하자는 자오곡 계책 비슷한 것을 제시하자 받아들여져 결국 장안을 얻고, 그 여세를 몰아 낙양까지 빼앗아 허도의 조조까지 압박하는 상황이 나온다. 이 게임에서 위연은 비운의 충신으로 나오고, 제갈량은 음험한 인물로 나오기는 하지만 이 장안 기습 시나리오가 'IF' 만약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가상 시나리오다. 그리고 위연은 어디까지나 장안을 기습하자고 의견을 내기만 했고, 그것을 위한 계획을 짜서 실행을 옮긴 건 방통과 서서. 지략이라는 측면에서는 이 게임 내에서 방통과 서서가 위연보다 훨씬 뛰어난데다 관우가 생존하여 형주 일대를 장악, 장비도 생존, 촉과 오는 다시 재연합, 제갈량은 노숙과 함께 남만 평정을 하면서 연의와 실제 역사와 비교해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기에 나올 수 있는 시나리오.[15]

삼국전투기에서 제갈양위연에게 자오도 계책을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꽤나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제갈양 문서 참고.

3.1.3 제갈량의 공성계

배송지는 제갈량전에 주석으로 곽충3사를 인용하여 제갈량이 성을 비우는 공성계 일화를 적었다. 내용은 사마의가 공격하자 성 안에 군사가 적은 제갈량이 꾀를 써서 성을 비우고 태연자약하게 있자 의심이 많은 사마의가 뭔가 계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을 돌렸다는 이야기이다. 배송지는 사마의가 완성에 주둔 중이라서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참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 일화가 거짓이라고 했다.

제갈량의 공성계 일화는 정사에서 기록된 이야기지만 배송지가 거짓된 내용이라고 반박한 내용이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차용하여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사마의도 참전한 것으로 각색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공성계 일화가 비슷하게 나온다. 1차 북벌에서 가정에서 마속이 패하고 성 안에는 사마의를 막을 군사가 없었다. 제갈량은 꾀를 써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루로 올라가 악기를 연주했다. 의심이 많은 사마의는 매복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고 퇴각한다.

3.2 2차 북벌 - 진창성 공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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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북벌의 실패 이후, 위는 오를 공격했으나 석정 전투에서 대사마 조휴의 위군이 육손에게 패배하면서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이 당시 위나라는 조휴/사마의/가규 등으로 오를 정벌하려 했었는데, 조예는 장합에게 관중의 군대를 이끌고 형주로 가 사마의의 지휘를 받게 했다. 이리하여 관중의 압박이 사라지자 제갈량은 2차 출병을 개시한다. 하지만 2차 북벌은 제갈량이 노리고 있었던 북벌이라기보다는 석정 전투의 결과를 보고 1차 북벌의 여력을 투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228년 가을, 제갈량은 제2차 북벌을 감행한다. 제갈량의 전략적 목적은 여전히 관중을 얻는 것이었는데, 한중과 관중 사이의 교통의 요지인 진창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곳은 동한 광무제 때, 공손술의 수하 정언이 군을 이끌고 한나라 장군 풍도와 싸웠던 곳인데 노선은 한중→산관→진창길이었다. 여기서 산관은 나중에 남북조시대나 남송시대때 남쪽에 자리잡은 왕조가 촉 지역의 북쪽 경계선으로 삼은 대산관을 말한다.

그러나 위나라의 대장군인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 패했기 때문에 재침한다면 틀림없이 다른 경로를 통해서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미 228년 봄에 학소에게 진창에 성을 쌓게 했다.

228년 12월, 겨울이 되어 산관을 통과하고 진창에 도달한 제갈량의 북벌군은 진창성의 1천여 명과 마주하게 된다. 이에 제갈량은 진창을 빨리 통과해 관중에 들어서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준비한 병량이 적어 최대한 빨리 진창성을 뚫으려 했다. 하지만 진창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인 학소는 그 자신이 유능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진창성을 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에 제갈량은 병량부족과 시간에 쫓기어 쉴새없이 진창성에 공격을 퍼부었으나 학소의 농성에 막히고 만다.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조진은 비요를 파견했고, 조예도 장합을 불러 수도와 황궁을 지키는 남북군(南北軍) 3만을 딸려 보냈다.[16] 장합은 제갈량이 학소의 농성에 막힐 것이라 예상하고, 조예가 '제갈량이 진창을 점령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제갈량은 군량이 부족하니 자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퇴각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장합이 예견한대로 제갈량은 철수한다. 왕쌍이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오자 반격하여 참했다. 하지만 진창성 공성전의 기간은 20일 정도고 3차 북벌이 바로 이듬해 1월에 이뤄진 걸 보아 단순히 진창 공략이 목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진창 함락여부는 관계없이 위군의 시선을 진창에 몰려있게 한 뒤 무도, 음평을 공략했다는 것. 실제로도 성공했기에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다.[17]

제갈량의 2차 북벌은 삼국지 위서 명제기에는 228년 12월에 있었다고 써있는 반면에, 조진전에는 다음해(229년) 봄이라고 기술 되어 있다.

3.3 3차 북벌

어쩌면 제갈량의 북벌 중 가장 큰 이득을 보았던 북벌이다. 229년 봄[18], 제갈량은 진식을 보내어 음평과 무도 2군을 접수하게 한다. 이에 곽회가 진식을 공격하려 했으나 제갈량이 직접 본대를 이끌고 건위에 도착하자 곽회가 퇴환(退還)[19]하여 2군이 평정되었다.

장기전을 보면 한중공방전 이후 조조가 사민정책으로 무도 일대의 저족 5만명을 천수, 부풍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후한 시절에도 무도군 인구는 8만에 불과했는데 이 시기에 5만을 빼냈다는 건 아예 텅텅 빈 상태. 양부전에 의하면 백성들만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군청까지 옮겨버렸으므로, 결국 관민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얘기다. 따라서 무도, 음평의 점령은 인구적으로 커다란 수확이 있었다고 보긴 힘들고, 지리적인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제갈량전의 후주 조서에서는 2,3차 북벌을 두고 '저, 강을 위무했다.' 고 평하는데, 실제로 무제기의 장로 정벌 파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제갈량이 거쳐간 산관-진창도는 물론, 무도와 음평은 본디 저족의 터전[20]이었고, 특히 음평은 양주와 접하는데, 양주는 강족의 보금자리였다. 여기서 장기와 양부가 두 차례에 걸쳐서 옮겨간 저족들은 어디 멀리 간 것이 아니라 모두 부풍-천수의 경내 혹은 경계 지역에 살았고, 무도는 다름아닌 천수와 직통으로 접한 지역이다. 따라서 무도가 촉에 넘어갈 경우, 자연히 천수 경내에 잔존하던 저족들이 영향을 받기 쉽고, 이는 실제로 1차 북벌에서 출격 한번에 천수, 안정은 물론 관중 지역까지 한꺼번에 준동한 점, 그리고 4차 북벌에서 장합이 기산의 민심을 우려한 기록으로 모두 증명되고 있다. 더 나아가 강유의 대에 이르게 되면, 음평을 통해 농서, 남안, 금성의 강족을 이용해 함께 북벌을 시도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제갈량의 대에서도 위연과 오의가 음평의 강중(姜中)을 통해 양계(농서), 남안을 기습하여 4차 북벌의 사전 작업을 해놓은 기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21]

무엇보다도, 위가 중간 지대인 무도와 음평을 내주면 천수와 농서가 촉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는 반면, 위가 이 지역들을 점령하고 있을 경우, 이들은 굳이 답중이나 건위를 경유할 필요 없이 바로 하변을 통한 한중 진공 + 교두를 통한 검각 진공이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263년의 제 3차 촉정에서도 강유가 진언한 것은 바로 음평의 교두 방어책이었고, 유선의 판단미스로 그 대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군은 한달간 음평에 묶여 있었다. 게다가 무도는 북벌군의 배후인 진창도가 위치하는 지역으로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경우엔 1차 북벌처럼 위진이 제안한 촉군의 후방 보급로 기습이 가능하지만, 이를 상실할 경우 그게 불가능해지며, 실제로 촉군이 무도를 점령한 229년 이후 전개된 그 어떤 북벌에서도 위군은 촉군의 후방 보급로를 공격할 수 없었다.

즉, 진식의 무도 공격 때 옹주자사 곽회가 기민하게 대처한 것도, 조진이 자극을 받아 촉정을 기획한 것도 상기한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차 북벌 당시 촉군이 무도를 씹고 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략의 서술처럼 그게 기습이었기 때문일 뿐, 3차 북벌에서 진식이 무도를 침공하자 곽회는 이를 즉각 요격했으며, 제갈량이 오기 전까지 형세는 결정되지 않았고 그 이상의 진군도 불가능했다.

소결하자면, 3차 북벌의 무도-음평 점령의 의의는 이민족에 대한 공작 용이 + 공격/방어 루트 확보 + 보급선의 안정적 확보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대외적인 성과 뿐 아니라 촉 내부적으로도 의미가 있어, 무도, 음평의 평정과 왕쌍의 사살을 명분으로 제갈량이 다시 승상직에 복귀한다.

3.4 번외편 : 위의 반격(제갈량의 3.5차 북벌)

제갈량의 공격이 계속되자 조진은 촉을 먼저 공격하여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작전을 입안했고, 대군을 동원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조진 자신은 자오곡(...)을 통해 한중으로 진출하고 사마의가 상용에서 한수를 거슬러 올라와 남정에서 조진과 합류하며, 다른 군세는 야곡, 무도에서 진군하여 세 방향에서 촉을 공격하려 했다. 제갈량은 성고, 적판에 진을 치고 대비하였으나 여름에 장마가 쏟아져 잔도가 끊기고 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자 조진의 군대는 별 소득 없이 철수한다.

이 해에 제갈량은 위연을 강중으로 진출시켜 양계에서 곽회를 대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다.

228년 조휴가 사망한 이래 위 군부의 1인자는 조진이었으나 230년 조진마저 사망하면서 드디어 사마의가 부상한다.

연의에선 조진이 철수를 결정한 후 바로 4차 북벌이 진행되었다. 조진과 사마의의 내기, 진식 처형 등의 에피소드가 들어갔지만 당연히 이는 모두 허구. 그리고 이 때문에 실제 4, 5차 북벌은 연의에선 5, 6차 북벌로 바뀌었다.

3.5 4차 북벌과 이엄의 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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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침공 직후인, 230년 모월, 제갈량은 위연과 오의를 강중으로 진군시켰고, 위연은 양계에서 곽회를, 오의는 남안에서 비요를 대파하고 돌아왔다. 이 작전이 무슨 목적으로 진행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시기상으로 보아 4차 북벌의 전초 작업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진 231년 2월, 제갈량은 목우를 사용해 병량을 보급하며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진출하여 농서를 노렸다. 이에 위는 사마의를 파견하여 제갈량을 맞서게 했고 장합, 비요, 대릉, 곽회가 이를 따랐다.

제갈량이 기산(祁山)을 포위하고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이 옛 북지의 석성에 도착해 제갈량에게 호응했다.(견초전, 한진춘추) 기산 북동쪽인 상규 일대에는 보리밭이 있었는데 촉군에게 빼앗길 것을 걱정하여 여물기 전에 베어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조예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사마의에게 지키도록 했고, 사마의는 곽회, 비요, 대릉에게 정예 4천을 주어 지키게 했으며, 바로 이 보리를 두고 전투가 벌어졌다. 제갈량은 왕평에게 기산의 포위진을 맡긴 채 상규로 나왔고, 이를 요격하러 온 곽회의 위군과 조우해 그들을 격파하고 보리를 대거 수확했다. 그러나 보리의 손실을 우려한 사마의의 본대가 급진해 험준한 곳에 이르자, 양군은 각기 진채를 정비하며 대치했다. 이후 촉군이 기산 방향으로 돌아가자 위군이 이를 쫓아가 5월 10일 경, 노성 부근에서 사마의와 제갈량이, 기산 남부에서 장합과 왕평이 크게 싸웠는데,(왕평전, 화양국지, 한진춘추) 노성에선 제갈량이 사마의를 대파했고, 기산에선 왕평이 장합을 격퇴했으며, 이에 위군의 두 지휘관이 퇴각하여 본진을 지켰다. 여담으로, 이 싸움의 결과에 대해 진서와 한진춘추 두 사서는 정반대의 기록을, 정사 본전은 기록 누락을 택했는데[22] 자세한 설명은 아래 항목 참조.

노성의 승패가 어찌되었건, 그것으로 전황이 결정되진 않았다. 다시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곧 장마가 시작됐다. 전투가 있었던 것이 5월 초순인데 장마는 5월부터 시작되어 6월까지 계속 내렸고 촉군의 보급에 문제가 생겨 6월~7월 초 사이에 촉군이 회군하게 된다.(유후주지와 장합전은 6월, 명제기는 7월 4일) 책임자였던 이엄은 문책받을 것이 두려워 제갈량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제갈량에게 식량이 떨어졌음을 알려 회군할 것을 권했다가 막상 촉군이 돌아오자 "군량은 충분한데 어째서 돌아왔습니까?"라며 놀란 척을 했고, 성도에도 거짓으로 표를 올려 제갈량이 일부러 후퇴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이것은 유후주지의 기록인데, 이엄전에는 제갈량이 후퇴한 것은 적을 유인하기 위함이라는 식으로 이엄의 표에 관한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때 위군 역시 군량이 다했으나(화양국지, 곽회전) 곽회가 주변 강족들에게 식량을 징발하여 위기를 넘겼다(곽회전). 그러나 전쟁 직후에도 두습을 비롯한 관료들이 촉군의 재침을 우려하며 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에 옮겨야 한다며 간언한 기록이 있고(선제기), 제갈량의 침공으로 군량 난에 허덕이다가 차후 사마부의 농서 부흥책으로 인해 비로소 이것이 해결되었음을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진서 안평헌왕전), 당시 곽회의 군량 갹출은 임기응변일 뿐, 위군의 군량난을 완벽히 해소하진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그 갹출은 관중에서의 대량 보급을 논의할 정도로 군량 사정이 악화됐을 때에 벼락치기로 이뤄졌으므로.(곽회전)

위의 연장선으로, 화양국지에선 제갈량이 기산에 있을 때, 이엄에게 상중하 3가지 계책을 진술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상계는 적의 퇴로를 끊는 것, 중계는 적과 지구전을 벌이는 것, 하계는 퇴각하는 것' 이라며 거듭 군량 운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갈량은 한 차례 대승을 했고, 위군은 군량난에 허덕이며 방어로 일관하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장마로 인한 보급 차질 없이 양측이 끝장 승부를 봤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결국 운송 차질은 생겼고 촉군은 퇴각했으며 북벌이 실패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퇴각하는 촉군을 장합이 추격해 왔으나 제갈량이 목문에서 반격하여 장합을 사살했다. 위략에 의하면 이때 장합은 추격을 반대했으나 사마의가 들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나섰다. 넓적다리에 쇠뇌를 맞아 죽었는데, 다리라고는 해도 허벅지 쪽의 대동맥에 맞으면 치명상이다.

제갈량은 회군한 후 이엄과 주고받은 서신들을 증거로 제출하는 한편, 중신급 관리 20여명과 함께 이엄을 탄핵했다. 결국 그의 잘못이 모두 드러나 이엄은 실각하여 서민으로 강등당한 채 연금생활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 4차 북벌은 제갈량의 북벌 중 가장 파죽지세로 전개된 면이 있다. 위연과 오의의 사전 공작→곽회와 비요 격파 후 군량 탈취→사마의 본대 대파, 장합 요격군 퇴각까지, 군량 문제로 철수하기 전까지 촉군은 그 모든 전역에서 상승무패를 이어갔다. 촉한 북벌의 최대 성과라는 강유의 조수 전투는 규모 면에선 준수하지만, 그것은 결국 왕경이라는 문사에 가까운 인물을 상대로 얻어낸 결과였고, 정작 곽회 - 진태 - 등애 같은 명장들에겐 변변한 우위 한번을 잡아보지 못한게 강유의 현실이었으나, 제갈량은 사마의 - 장합 - 곽회 등 당대 위나라의 1급 지휘관들을 압도했던 것. 더군다나 북벌의 중단 요인이 확실한 승패의 갈림이 아니라, 장마로 인한 이엄의 변심이라는 영 깔끔하지 못한 요소였기 때문에 더더욱 논쟁을 촉발시켜 왔다. 물론 결과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고, 그는 패배자임에 분명하나, 이때 보여준 활약이 제갈량 군재 논란의 한 축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23], 4차 북벌은 흥미로운 파트라 할 수 있다.

3.5.1 노성전투

제갈량은 대군(大軍)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뭇 장수들을 이끌고 상규(上邽)의 보리를 수확했다. 제장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자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慮多決少)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우리가 이틀 동안 급히 행군하면(兼行) 충분하오.” 그리고는 갑옷을 벗고(卷甲) 밤낮으로 달려가니, 제갈량은 멀리서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 선제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행군해 피로하나 이는 용병에 밝은 자라면 바라는 바요. 제갈량이 감히 위수(渭水)를 점거하지 못하니 이는 다루기 쉽소.” 진군하여 한양(漢陽)에 주둔했는데 제갈량과 서로 조우하자 진을 치고 맞이했다. 장수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병으로 유인했는데 군사들이 막 접전했을 때 제갈량이 퇴각하니 이를 추격해 기산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노성(鹵城)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점거하고 물을 끊고 두텁게 포위했다. 선제(宣帝)가 공격하여 그 포위한 것을 무너뜨리니 제갈량은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뒤쫓아 이를 깨트리니 사로잡거나(俘) 참수한(斬) 것이 만(萬)을 헤아렸다.

진서 선제기에서
제갈량은 군을 나눠 남겨두어 기산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상규(上邽)에서 선왕을 역격하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선왕과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선왕이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鹵城)에 도착했다.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멀리 와서 우리에 맞서서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보아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게다가 기산에서는 대군이 가까이 도착했음을 알고 민심이 자연 안정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병(奇兵-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전진할 뿐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은 의당 해서는 안 될 일로,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선왕이 이에 따르지 않고 제갈량을 뒤쫓았다.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賈栩), 위평(魏平)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선왕이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宣王病之)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 무당감(無當監) 하평(何平-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中道)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연(魏延), 고상(高翔), 오반(吳班)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수(甲首-갑옷 입은 군사) 3천 급, 현개(玄鎧-철갑옷) 5천 령(領-벌), 각노(角弩) 3,100 장(張)을 노획했다. 선왕은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한진춘추에서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촉서 왕평전에서
건흥9년(231년) 봄, 승상 제갈량은 다시 출병하여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를 이용해 수송하였다. 참군 왕평에게 남쪽 포위 진형을 지키게 하였다. 사마선왕이 제갈량을 막고, 장합이 왕평을 막았다.

화양국지 유후주지에서

상규와 노성, 기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는 정사 본전에선 기록이 누락되었고[24] 진서에선 사마의의 대승, 한진춘추에선 제갈량의 대승으로 기록했으며, 화양국지에서도 승부의 결과를 기록하지 않았다.[25] 사서의 주장이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은 진서와 한진춘추 뿐이고, 나머지는 기록이 없는 상황이다. 정사 왕평전에선 왕평이 장합을 이겼다고 확실하게 기록하지만 정작 본대인 제갈량과 사마의의 전투 결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먼저 진서는 정사이자 관찬사고 한진춘추는 사찬서라는 점에서 진서의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으나, 진서는 최초의 관찬정사라는 독보적인 의의에도 불구하고 기록의 신빙성이나 편찬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편찬 시기도 진서는 당나라, 한진춘추는 동진으로 한진춘추가 약 300년 더 앞선다. 북송 사마광의 명사서 자치통감은 한진춘추를 채택했고, 청나라의 왕명성와 임국찬은 진서를 비판하며 한진춘추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왕명성과 임국찬의 논지에는 몇 가지 허점이 존재한다. 각각 '제갈량이 가정을 제외하면 패배한 적이 없으며', '가정의 패배는 조금 꺾였을 뿐'이었다고 적었으나 살펴봤듯 제갈량은 가정 이외에도 진창에서 패했으며, 가정패배의 손실은 컸다.

이 문제는 정사 본전을 교차해볼 때 비로소 검증이 된다. 먼저 제갈량이 대패로 인해 북벌을 그친 1차 북벌(228년)의 경우, 명제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장군 장합을 파견하여 가정에서 제갈량을 크게 격파(大破)했다. 제갈량이 패배하여 도주하자(亮走), 삼군이 평정을 찾았다.

명제기에서
16일, 제갈량 토벌의 공훈에 따른 논의(論討亮功)가 있었는데, 작위를 봉하고 영지를 증가시키는 데에 차등을 두었다.

명제기에서

이렇듯, 격파, 패배, 토벌의 표현을 가감 없이 쓰며 제갈량의 대패를 드러낸다. 그러나 선제기의 기록을 신뢰할 경우, 똑같이 대패로 인해 북벌이 중단된 4차 북벌의 기록(231년)에선,

가을 7월, 6일에 제갈량이 퇴각하여 도주하자(亮退走),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더함에 차등을 두었다.

명제기에서

격파, 패배, 토벌 중 어느 하나의 표현도 없이, 단순히 퇴각했다고만 기록한다. 이는 1차, 4차 북벌 당사자인 장합과 왕평의 기전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 부분인데, 1차 북벌의 경우,

장합은 급도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大破)했다.

장합전에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조언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따르지 않아 가정에서 크게 패(大敗)하였다.

왕평전에서

이렇듯, 승자인 장합과 패자인 마속의 부장으로 종군했던 왕평의 기록이 모두 교전 대상/주장의.패배 사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4차 북벌의 경우엔,

제갈량이 물러나 기산을 지키자 장합이 추격해 목문에 이르렀는데, 제갈량군과 교전하다 날아온 화살에 오른쪽 무릎을 맞고 죽었다.

장합전에서
위나라 장수 서질과 싸우다가 장억은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그가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 적은 배가 넘었다.

장억전에서

장억의 경우처럼, 설령 장수가 전사하더라도 훌륭한 전공을 세운다면 본전은 이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선제기의 기록대로라면, 제갈량을 추격하면서 무려 1만급을 참수했을 장합은 본전에서조차 그 전공이 유실되고 화살에 맞아 죽은 기록 밖에 없다. 왕평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선왕이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왕평전에서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을 물린 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조운전에서

1차 북벌처럼, 설령 부장(왕평)이 분전하더라도, 주장(마속)이 대패하면 본전은 이를 기록했다. 조운전처럼 전투과정에서 피해를 입어 군을 수습한다면 그것 역시 기록한다. 그러나 4차 북벌에서 1만급 참살이라는 대패를 맞은 제갈량의 패전 기록은 왕평의 기록에 없다. 1차북벌 때 왕평 본인과 조운처럼 싸운 과정에서 군대가 피해를 입어 그것을 수습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저 굳게 지키어 물리쳤다는 기록뿐이다. 등애가 단곡에서 강유를 1만급 참수로 대패시켰을 때도 당사자들의 본전은 물론, 고귀향공기 역시 대파(大破)라는 표현으로 이를 기록했는데, 유독 사마의의 대승 기록만은 관련된 인물의 본전에서 모두 누락됐다는 뜻이다.

부연하자면 왕평전이나 장합전 모두 제갈량군과 왕평군에 포위 돌파는 커녕 위군이 어떤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뒤쫒아 깨트렸다는데 정작 위나라의 장합이 죽었다는 기록만 있고 선제기엔 남북으로 포위한 것을 무너뜨렸다는데 정사 삼국지엔 남쪽에 있던 왕평을 이기지도 못하여 깨드리지 못했고 촉군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술도 없다. 선제기의 기록대로면 장합은 어떤식으로든 촉한군에 다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얘기인데 정작 정사 삼국지를 살펴보면 위군은 촉군의 포위, 후방을 뚫지 못했고 별 다른 피해를 주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교전중 장합이 전사했다는 결론이 도출됨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당장 명제기에 나온 명제 조예의 조칙에서도 이 교전의 승패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이 달 제갈량이 사곡(斜谷)을 지나 위남(渭南)에 주둔하였으므로 사마선왕은 모든 군대를 이끌고 막고 있는데, 명제가 조칙을 내렸다.

단지 성벽을 굳게 지켜 촉나라 군대의 날카로운 기운을 꺾음으로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수 없게 하고, 물러나 싸울 수 없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 군량미가 부족할 것이다. 설령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반드시 군대를 물릴 것이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할 때는 아군을 안전한 상태에 놓고 오랜 시일 동안 피곤해진 적군을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한다.


명제기에서

이것은 제갈량의 5차 북벌 당시 조예가 사마의에게 보낸 조칙의 내용으로, 교전을 피하고 그냥 촉군의 군량이 떨어질때까지 무작정 지키기만 하라는 내용이다. 이건 맹달을 공격할 때나 이전의 북벌들에서 촉군과 교전했던것, 이후에 공손연을 공격할 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위나라의 황제조차 전선 사령관에게 교전하지 말라고 할 정도의 일이 있었다는 얘기다.

후주전에서도 1차 북벌과 4차 북벌의 표현은 각각 '不克(=패했다)'과 '군량 부족'이고, 제갈량전 역시, 4차 북벌 퇴각 요인을 군량 부족으로 기록하며, 이는 이엄전에서 상세한 정황을 교차 검증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관련 사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포위한 것이 무너지거나 촉군이 어떤식으로든 피해를 입어 퇴각하는 게 아니라 촉군의 군량이 부족해서 퇴각한 것이라는 서술들이다. 본전 주인공의 대패 기록은 가급적 회호하는게 정사 삼국지의 필법이라지만, 1만급 참살 정도의 대패는 조휴전이나 강유전, 제갈각전에서 볼 수 있듯 거의 반드시 기록하는 것 또한 삼국지의 필법이다.

따라서 선제기가 진실일 경우, 서진의 관리인 진수는 장합 - 등애 - 강유 - 육손 등 잡다한 장수들의 전공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서진의 선제인 사마의의 제갈량 북벌군 1만 참살(또는 제갈량에게 어떤식으로든 피해를 입혔다)라는 기록을 유독 감추려 했다는 뜻인데, 그에게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는 둘째치고라도, 사마의와 사마소의 피휘를 위해 오의를 오일로, 위소를 위요로 바꿀 정도로 서진의 눈치를 본 진수가 기록을 감추려 했다면, 그것은 과연 어느 쪽의 패전이어야 아귀가 맞을까.

무엇보다도 진서는 사마의-사마사-사마소가 총지휘관으로 재직할 당시에 겪은 대패 기록을 모두 누락하고 있다. 선제기의 경우 언급한 노성대패, 경제기의 경우 제갈각에게 당한 동흥대패가 전체 누락된 뒤 바로 합비신성으로 건너뛰고 있으며, 문제기의 경우 동흥대패는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으나, 강유에게 당한 조수(도수)대패는 아예 누락되어 있다.[26] 더더군다나 선제기는 사마의의 독단 때문에 장합이 전사한 기록조차 싣지 않고 있다. 이쯤되면 무턱대고 '관찬 사서의 신뢰성' 운운하는 것이 미묘할 정도.[27] 그러나 한진춘추의 기록은 다른 사서들의 정황과 교차해도 어긋날 부분이 없다. 제갈량이 밀어붙인 건 맞지만 결국 군량 때문에 퇴각했다. 이러면 추후에 벌어진 모든 정황들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

결정적으로, 배송지가 4차 북벌의 주석을 달 때, 선제기의 모태가 되었을 기록은 전혀 쓰이지 않았고, 이에 대한 당대의 비판도 전무했으며, 근현대를 거치며 집해가 서술될 시점에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였다. '사마의가 제갈량에게 피해를 입혀 포위를 풀고 1만 촉군을 참살했다'는 기록은 당나라 시대에 진서의 조각들을 모아 편찬하면서 마지막으로 등장했으며, 이후 송대에 자치통감이 저술될 때는 다시금 원래대로 한진춘추의 기록이 쓰여졌다. 무엇보다, 해당 부분에서 선제기의 기록을 비판하는 견해는 있어도 한진춘추를 비판하는 견해는 없다는 것이 또 하나의 증거. 즉, 선제기의 해당 기록은 오직 선제기만이 근거인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노성전투의 승자는 제갈량으로 보는게 여러모로 타당하다는 뜻.

정리하자면, '사마의의 승리'라는 선제기의 서술이 지니는 최고의 약점은, 사마씨의 왕조에서 쓰여진 정사 삼국지 본전에서조차 그 기록이 누락됐다는 점이다. 진수가 서진의 관리인 시점에서 사마의의 전공만을 누락한다는건 언어도단이며, 이는 제갈량에 대한 그의 개인적 호감 이전의 문제다. 물론 4차 북벌은 초중반까진 제갈량이 파죽지세로 이겼으되, 후반부의 군량 운송 때문에 결과적으론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게 맞으니, 그 점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아무리 곽회 바르고, 사마의 바르고, 장합 바르고, 보리를 뺏으며 위군을 군량 부족 사태로 몰아넣었어도, 결국 목표했던 땅 한 조각 얻지 못하고 퇴각한 시점에서 4차 북벌 역시 패배한 전쟁이라는 뜻.

3.6 5차 북벌, 추풍오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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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년, 제갈량은 4차 북벌 이후 국력을 기울여 마지막 북벌을 준비한다. 이때 제갈량의 북벌군의 규모는 약 10만으로 이릉대전 이후 촉이 투사했던 전력 가운데 두번째로 규모가 거대한 군세였다.

최초 제갈량의 목표는 미현(眉縣)의 위수(渭水) 남쪽까지 진군하고 주둔하며 무공(武功)이란 곳에서 동진하는 것이었다. 무공은 산악지대로 지형이 험준한 편이라 산을 끼고 싸우면 촉군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위나라 입장에서는 촉군의 무공산 행에 대하여 좋든 싫든 장안을 방어하기 위해 요격을 나가 공세적 입장을 취해야만 했으니 제갈량이 무공으로 올 경우 당시 수비로만 일관하려던 위나라의 대전략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거꾸로 제갈량이 오장원으로 간다면 위의 의도대로 전쟁이 진행된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이 나가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우려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갈량이 오장원 근처에 왔을때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길,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武功)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五丈原)에 오른다면 제군(諸軍)이 무사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갈량은 그의 최후의 출전에서 사마의가 우려하던 상황인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하는 것이 아닌 서로 향해 오장원에 향했다고는 하는데 사마의는 지구전을 의도하고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막혀 오장원으로 강요당했다고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당시 무공으로 가는 길목인 양수에 이미 사마의의 수비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사마의의 저 발언은 자신의 군사로 무공을 지키고 있으니 제갈량이 다른 것으로 갈 것이라 확신한 발언인 듯 하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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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 선제기와 곽회전에 따르면 오장원은 동서남북이 산과 강으로 막혀 있어 제갈량은 먼저 맹염을 시켜 강을 건너서 동쪽에 거점을 하나 만드는데 사마의는 무공수를 넘어와 거점을 만든 촉군의 영채를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바로 다리를 만들자 영채 공격을 멈추고 퇴각하였다. 이는 태평어람의 기록인데 어느 시기의 일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정황상 양군이 맞딱드린 이 시점이었을 확률이 높다. 이로서 제갈량은 위수 남쪽의 촉군 영역을 넓혔다.

위군의 거의 모든 장수들은 모두 제갈량이 무공을 건너 결전할것이라 여겼으나 오직 곽회만이 이를 반대했다. 곽회는 사마의에게 "만약 제갈량이 북원을 노리고 병사들을 북산까지 이어 우리가 농서 가는길 끊고 백성들과 오랑캐 동요시키면 우리는 망했어요 상태가 될 텐데 님 어쩌실거임?"이라고 진언했고 사마의는 어마 뜨거라 하고 곽회의 진언을 받아 그를 북원으로 급파하여 방비케 했고 얼마치 않아 정말 제갈량의 대군이 서쪽의 북원을 급습하여 점령하려하니 그가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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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다시 제갈량이 서쪽으로 가는 척 하니 역시 다른 장수들은 모두 서쪽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지만 곽회가 동쪽의 양수를 노리는 제갈량의 계획을 눈치채고 막아낸다. 한 마디로 위의 제장들이 잠깐 다들 어리버리 한 사이에 곽회가 혼자 정신 차리고 제갈량의 계획을 혼자서 동서로 막아버린 것이다. 흔히 추풍오장원을 제갈량 vs 사마의 구도로 생각하지만 알고보면 곽회의 하드캐리나 다름없었다. 다만 모든 제장들이 반대하는 가운데에도 곽회의 의견을 받아들인 사마의 역시 뛰어났다.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을 조율하고 뛰어난 부하를 제대로 쓸 줄 아는 것 또한 대장으로서 갖춰야 할 요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곤 해도 오장원 초반의 주역이 곽회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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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기동이 모두 막힌 제갈량은 이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오장원에서 병사들로 하여금 둔전을 실행하고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며 민심을 획득하는 등 아예 오장원에 눌러앉아 버린다.

이는 처음부터 사마의가 공세로 나오지 않고(위에도 나왔듯 한 번 공격했지만 패했다), 이전처럼 수세로 촉의 북벌군이 제발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것을 예측이라도 한 행동인 듯 하다. 당시의 기록을 보자면 위수 연안에서 촉군 10여 만이 현지인들과 함께 뒤섞여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 촉군은 백성들을 해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촉군에 반항하지 않았다.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서량주의 백성들은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노래로 부르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진서 노지전에 따르면 천수 부근은 사람이 텅 비어있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고도 하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해야할 듯.

위치상으로 보면 촉이 오장원을 점유함으로써 위수 이남이 촉의 세력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장원이 공격하기 쉬운 지형이냐고 할 수도 없었으니, 오장원에 주둔한 촉군은 위수와 무공수를 통해 도강 중인 적을 요격할 수 있고 도강이 성공해도 오장원은 평지에 불쑥 솟은 150m 지점이라 적을 감제하기도 편하고, 구릉 위의 적을 공격하기도 힘들다. 만약 촉군을 공격하다 패배라도 해서 후퇴해야 한다면? 강이 등뒤에 있으니 배수진이 되니 후퇴한다 해도 괴멸적인 타격을 면할 수 없다. 다시말해 사마의가 오장원의 촉군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촉 역시 무조건 공격하기는 힘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지구전으로 가게 되면 보급, 군사수, 화력 측면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공급을 받을 수 있는 위나라측이 유리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위나라는 오나라와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제갈량이 북벌이 있었던 228년에도 오히려 오나라로 10만 이상의 대군을 파병할 정도였으나, 이 시기가 되면 군부의 1인자로 부상한 사마의가 동생 사마부와 함께 관서부흥책을 실시하여 대촉전선을 상당부분 보강한 상태였다. 다만 이 관서부흥책이 5차북벌 당시엔 오히려 역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는데 이 덕분에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버티면서 둔전하기 쉬워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마의가 이후 촉군 퇴각 후 많은 양곡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고.

때문에 사마의는 촉의 군사전략과 제갈량의 동태에 계속 신경을 기울이며 수세로 일관했고, 제갈량은 사마의와 싸우기 위해서 여자 옷을 보내며 도발하기도 한다. 때문에 사마의는 이 사신에게 제갈량의 전략은 물어보지 않고, 제갈량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만 물어본다. 이 때 사신은 제갈량의 유능함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는지 태형 20대 이상은 직접 처리하느니 얘기를 떠벌거렸는데 사마의는 이걸 듣고 제갈량이 너무 자신을 혹사하여 오래 못 살 것이라 예측한 것으로 보인다. 식소사번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자료는 불명이지만) 이 일을 알게 된 제갈량은 조금만 담아도 많은 양처럼 보이는 밥그릇으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며 기 싸움을 했다고 한다.

계속되는 제갈량의 도발에 사마의를 제외한 위의 장수들은 격분했는데, 공세로 나간다고 해도 승리의 가능성이 높지 않았고[29], 혹 패하기라도 하면 차후의 전략을 이끌어 나가는 것에도 애로사항이 꽃피는지라 사마의는 장수들의 불만에도 끝까지 지구전─수세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장수들의 불만이 계속 고조되자, 결국 사마의는 조예에게 출전허가를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장수의 재량이 폭넓게 인정되는 점과 사마의의 지구전 중심의 전략을 고려해 보았을 때 사마의의 출전요청은 오히려 출전하지 않을 명분을 위해서였다고 보는 것이 중론. 실제로 춘추와 진서 선제기에도 제갈량(諸葛亮)은 그 일을 두고 <사마의(司馬懿)가 그렇게 했던 것은, 제장(諸將)들을 안정시키고, 동요를 막기 위한 허세(虛勢)였을 뿐이었다.>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예는 군의 출진을 불허한다. 이렇게 사마의는 장수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고, 양군의 대치는 유야무야 시간만 흘러간다. 이렇게 백여 일의 대치 끝에 제갈량은 과로와 병세로 쓰러진다. 위서에 따르면 "군량이 다하고 형세가 어려워지자 제갈량은 근심과 분노로 피를 토하고, 하룻밤에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나다 계곡으로 들어섰을 때 도중에 발병하여 죽었다."고 하는데 배송지는 ㅅㅂ 암만봐도 당시 형세가 대등했는데 이건 무슨 개소리야라면서 위서의 기록을 미친듯이 깠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오장원은 옹주의 요충지로 제갈량이 이곳에 계속 자리잡고 앉으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고 살며 대치하였는데 촉에게 형세가 불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제갈량이 사망하고 촉군은 철수한다. 사마의는 촉군이 갑자기 철군하자 추격하나, 후군 퇴각을 맡은 양의와 강유가 군기를 반대 방향으로 든 다음 진군을 의미하는 북을 울리면서 대응하자 사마의는 추격을 중지하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났으며 감히 촉군을 핍박하지 못하여 촉군은 퇴각에 성공한다. 그리고 여기서 백성들이 퍼뜨린 말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이른바 사공명주생중달, 뒤늦게서야 제갈량이 죽고 촉군이 철수한 걸 알게 된 사마의는 제갈량의 영채를 방문하여 제갈량에 대해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평했으며 위의 말에 대해선 '산 사람이면 몰라도 죽은 사람의 속내는 어찌 알겠냐'며 웃었다고 한다.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추격을 그만둔 사마의는 촉군이 남겨둔 오장원 진채에서 촉군이 남긴 수많은 양곡과 책서들을 노획했다고 한다.

3.6.1 연의에서의 묘사

5차 북벌 초반에 제갈량의 작전이 사마의에게 간파되어 참패를 당하는 대목이 묘사된다. 연의의 묘사에서 제갈량 본인이 사마의에게 깨끗하게 당하는건 이 경우가 유일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호로곡에서 사마의를 거의 잡을 뻔 했지만 소나기가 내려 놓치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이는 연의의 창작으로 삼국시대 당시에는 호로곡이라는 지명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사마의를 놓친 제갈량이 했다고 전하는 말이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다.

3.7 제갈량의 북벌 당시의 대결에 대한 평가

3.7.1 1차 북벌(228년)

당초, 국가(위)에서는 촉에 오직 유비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죽고 여러 해 동안 조용했으므로 아무런 방비가 없었다. 그러다 돌연 제갈량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야(朝野, 조정과 바깥)에서 몹시 두려워하고, 농우, 기산에서 특히 심했으니 이 때문에 삼군이 제갈량에게 항복했다.

위략에서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위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니 관중이 진동했다.

제갈량전에서
이렇게 되자, 조정의 신하들은 무슨 계책을 세워야할지 아무도 몰랐으나, 명제가 말하기를 “제갈량은 산을 거점으로 굳게 지키다가 지금은 스스로 왔으니, 이는 병서에서 말하듯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과 합치되오. 하물며 제갈량은 삼군을 탐하여 전진할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니, 이제 이때를 이용한다면 그를 쳐부수는 것은 필연적이오.” 라고 했다.

위서에서
제갈량은 (중략)살을 잘라 내고 뼈를 상하게 하면서도 스스로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니, 이는 우물 안에서 용병하고 소발굽 위에서 노니는 격이었다.

위략에서 조예가

3.7.2 2, 3, 4차 북벌(228~231년)

명제가 장합에게 물었다, “장군이 더디게 도착하면 제갈량이 이미 진창을 차지해 버리진 않았겠소?” 장합은 제갈량이 현군(縣軍-외떨어진 군사)으로 군량이 부족해 오랫동안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입니다.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볼 때 제갈량의 군량은 10일 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장합이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해 남정(南鄭)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퇴각했다.

장합전에서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둔주(遁走-도주)케 했다. 저, 강을 항복시켜 모으고 2군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고 공훈은 현연하도다.

제갈량전에서 후주 유선이
위 명제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사마의)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한진춘추, 선제기에서
당초 제갈량이 출군했을 때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길, 제갈량군에 치중이 없어 군량이 필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니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어서 군사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상규 주변의 보리를 미리 베어 적의 식량을 없애자고 했는데 황제가 이를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 앞뒤로 군사를 보내어 사마의의 군을 늘려주었고 또한 보리를 지키도록 명했다.

위서에서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 미에 주둔시키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전군(前軍)이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초의 3군이 경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한진춘추, 선제기에서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전진할 뿐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은 의당 해서는 안 될 일로,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한진춘추에서, 장합이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사마의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한진춘추, 가허/위평에서

3.7.3 5차 북벌(234년) 이후

제갈량은 기산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에서일 것이고 농서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에 오른다면 제군이 무사할 것이오.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선제기에서, 사마의가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곽회전에서
대신들은 대장군 사마선왕이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 군사와 대치하고 있어 승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명제에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으로 가서 사마선왕을 후원해 줄 것을 건의하자, 명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권이 도주했다면 제갈량의 배짱은 이미 무너졌을 것이고, 대장군(사마의)은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할 필요가 없소.”

명제기에서, 조예가
군이 퇴각하자 선왕(宣王-사마의)이 그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제갈량전, 선제기에서
선왕이 퇴각하니 백성들은 속어를 지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했다.

한진춘추, 선제기에서
공명은 파, 촉 땅에서 일어나 1주의 선비에 의지하니 대국에 비하면 그 전사, 관민이 9분의 1 정도에 불과했으나, 오나라에 예물을 바치면서도 위나라와 맞서고, 밭 갈고 싸우며 대오를 갖춰 형법이 엄정, 가지런하고, 보졸 수만을 거느리고 기산으로 장구하니, 개연히 하수, 낙수에서 말에게 물 먹일 뜻이 있었다. (그러나)중달은 천하에 열 배의 땅에 의거하여 겸병지중을 거느리고도, 견고한 성을 점거하고 정예를 끼고는 적을 사로잡을 뜻이 없고 스스로 보존하는데 힘쓸 뿐 공명이 스스로 오고 가게 만들었다.

묵기에서, 오나라 대홍려 장엄이

사마의가 북벌군과 대적하는 위군의 총지휘를 맡은 이래,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 내용은 위에 명기되어있듯 싸움 자체가 별로 없어서 꽤나 싱거워 보인다. 하지만 대치하는 와중의 심리전을 잘 알고 본다면 꽤나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촉의 경우 북벌은 곧 나라의 사활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사실상 온 나라의 국력은 북벌에 투입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1차 북벌까진 꽤 여유롭던 조예는 4차 북벌 즈음하여 태도를 급변해 사마의가 아니면 서방의 일을 맡길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로 제갈량의 북벌을 위협적으로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진, 장합, 사마의 등 현장 지휘관들도 마찬가지로서, 조진의 경우 계속되는 북벌과 영토 상실에 기어이 무리한 촉정을 기획하다 사망했으며, 장합 역시 촉군을 내버려 둘 경우 일어날 기산의 민심 준동을 걱정했고, 사마의는 촉군을 선봉만으로 대적할 상대가 아님을 일찌감치 꿰뚫고 있었다. 더군다나 4차 북벌에선 사마의를 비난하며 만장일치로 합전을 주장하던 위나라 장수들 역시, 본대가 대패당한 뒤론 사마의의 견벽거수 방침에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아예 황제인 조예부터가 견벽거수 하나를 고수하도록 칙령을 내린 것도 모자라 신비를 감독관으로 파견했을 정도. 그러나 북벌이 위협적이었던 것과는 별개로, 북벌의 결과물 자체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다곤 하지만 결국 제갈량의 촉군은 옹주는 커녕 정작 중요한 교두보인 기산, 상규조차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까일만한 소지를 남기게 된 것.

다만, 애초부터 위와 비교하자면 촉의 국력은 취약했다. 이릉대전 이후로 촉은 상당수의 군사와 군부 쪽 인재를 잃었고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상용을 탈취하는게 아니라 맹달을 회유하여 상용을 탈취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를 미리 눈치챈 사마의는 맹달이 우유부단하게 멍때리고 있는 사이에 속전속결로 상용을 점령하고, 촉의 양방향 진군을 처음부터 봉쇄했다.

또한 몇 차례 접전을 통해 제갈량과 맞서 본 사마의의 입장에서는 만만하지 않은이라기보단 넘사벽인 제갈량을 상대로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지구전으로 갔다. 하지만 제갈량은 국력이 약한 촉군을 이끌고 북벌을 행할 때마다 주변 지역이나 민중의 호응을 얻고 군량을 현지조달내지는 주둔지역장악[30]으로 위군을 농락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의 수명 앞에서는 무력했고, 그의 사망으로 북벌을 당분간 중단되기에 이른다.

결국 제갈량의 북벌은 위의 수세 우위주의 전략에 옹양주 겸병이라는 목표 달성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 덕택에 촉은 무도와 음평의 두 요충지를 장악, 위에서 촉으로 들어오는 공격 루트를 단순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촉은 음평을 통해 들어온 등애의 위군에 멸망한다.

4 북벌의 전략적 목적

북벌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밝힌 옛 도읍, 즉 장안과 낙양의 회복. 또 다른 하나는 사마소가 언급한 옹양주의 장악이 그것이다. 그리고 제갈량의 궁극적인 목적이 중원을 도모하여 위나라를 병합하는 것이었다고 배송지는 말하고 있다.

제갈량이 삼고초려 당시, 유비에게 제시했던 융중대에 따르면 제갈량의 전략적 도안은 첫째, 익주와 형주를 지배한다. 둘째, 오와 굳은 동맹을 맺고 동쪽의 우환을 없앤다. 셋째, 오의 도움을 얻어 위를 견제하고, 익주와 형주 양쪽에서 군을 이끌고 위를 압박한다. 넷째, 위에 변고가 일어날 경우 이를 노려 진군한다.

하지만 이 계획에 가장 중요했던 형주는 관우의 사망과 함께 물 건너 가버리게 되고, 이 때문에 발발한 이릉전투까지의 과정에서 촉한의 주요인재와 병력 등이 쓸려나가게 된다. 거기다 맹달이 다스리는 상용마저 조위에 투항하고, 이릉전투로 오와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제갈량이 생각했던 위나라 공략의 모든 전제조건이 무너지게 된다. 이에 제갈량은 오와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맹달의 회유를 시도한다. 비록 형주는 완전히 손에서 벗어났지만, 상용만이라도 되찾고 오와의 관계를 개선한다면 초기안과는 다르지만 북벌을 이루는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데는 성공했어도, 정작 맹달은 우유부단하여 촉에 투항하기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사마의에게 걸려 속전속결로 패망하고 만다. 결국, 두 방향으로 위를 압박해 진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려던 제갈량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그리하여 시행한 제갈량의 북벌의 최우선적인 전략적 목적은 관중농서를 얻는 것이었다. 정사에 수록된 사마소의 언급에 따르면 제갈량의 북벌 목적은 농서의 서쪽을 자르기 위함이었다 한다.

물론 최종 목적은 후한의 국토 회복으로 볼 수도 있다. 촉은 유비 이래 한실의 부흥, 정확히 말하면 전한이 멸망하고 후한이 태어났듯, 후한 다음의 새로운 한의 탄생이 목적인 사상을 정치적 이념으로 삼고 있었고, 비록 많은 이들이 한실은 끝났다고 보고 있었으나, 4백여 년 이상의 통치로 인해 한실 그 자체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선비들은 다수 존재했다. 제갈량도 그 중의 하나였으며, 조운을 비롯한 다수 무장과 유비가 입촉할 때까지 그를 따랐던 인재 대부분이 바로 이 대의명분을 받들었던 이들이었다. 거기다 조위 내에서 순욱처럼 한실을 지지했던 세력들도 존재했었다.

촉의 한나라 부흥의 방침은 유비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 이념은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3군이 단숨에 촉에 호응하고 이후 관중의 민심에 촉에 쏠리는 등의 반응으로 어느정도 구체화된다. 제갈량의 북벌 당시는 한나라가 멸망한지 얼마 안되던 시점이었으므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자기 세대에 한나라를 이었다는 정통성을 이용해서 확실한 기반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으며 위나라를 점령할수는 없어도 옹주와 양주를 점령해서 비슷한 정도의 힘의 균형을 만들어낼 이유가 있었다. 관동은 발전한 지역이었고 장안만 해도 충분히 교역의 중심 지역인 동시에 옛 한나라의 수도라는 정치적 입지까지 더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촉한은 이 지역 주민들, 이민족들과 경제, 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이 지역을 얻으면 한나라의 옛 중심지엔 관중+파촉 지역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경제, 인적자원의 시너지를 얻을 수 있으며 진출과 물자 보급이 용이해지고 파촉에서부터 지속적인 무기개발과 새로운 진법의 도입으로 위나라와 맞서는게 가능했던 촉군에 군마 등 군수물자를 지급해 전투력을 더 올리는것이 가능하다. 또 지리적인 이점이 있어 동쪽은 장안 인근 관을 통해 방어가 쉽고 서쪽으로는 외부세력과 교역할 수 있는 교역로가 열린다, 위나라가 소유한 중요 요지를 타격하고 2개 주를 위나라에서 갈라 촉에 소속시키는 것 이상의 시너지가 가능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또 당시 양주 지방은 마초 및 양주 군벌들과 조조 세력의 전투가 214년까지 이어지면서 215년 이후에야 위의 행정구역으로 들어왔다. 이후에도 반란이 이어져 당시 옹주 자사였던 장기가 애를 먹었으나 그래도 겨우겨우 대충 반란은 안정시켰고. 이후 222년 옹주 자사 대리로 부임한 곽회가 강인들을 흡수하면서 나름 행정력을 갖춰가게 되었다. 하지만 위나라는 오랜 내부의 전란으로 내부의 국력도 상당히 저하되어 있으며 촉한이 북벌할때마다 내부반란+이민족들의 이탈 같은 문제가 수시로 발생하여 단일한 국력으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만일 위가 이전 후한시기 9주의 국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모르되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아직 국력을 수습하지 못하고 내분이 일어날때를 노려 위가 완전히 행정력을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차지해 국력을 증진시키려는 제갈량의 계책이 나쁘다고 볼 순 없다. 실제로 제갈량의 융중대 조건은 국력을 키우는 상태에서 위에 내분이 있을때 치고 올라가자는게 기본적인 전략이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위를 치기 위해선 위가 어느정도 분열된 것을 상정했다는 것인만큼 당초 계획이 상당히 무너진 상황에서도 위나라의 분열과 행정력 장악 부족 상황에선 시도해 볼 만했다. 결국 이 당시 촉한의 입장에서는 북벌이 더 늦어지다가 곽회가 이 지역에 완전히 행정력을 미치고 촉 위 경계를 확정할 정도의 방어력을 갖춘다면 진짜 완전히 익주에 갇히게 되어 중과부적이 되므로[31] 가만히 있기보단 북벌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강유의 북벌 시대까지 이어보면 사마의, 사마부 형제의 관서진흥책이 성과를 보고 곽회가 계속 관동지역의 행정력을 확대함으로서 강유가 매우 고전분투하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는데 그럼에도 강유의 북벌 시기에조차 위가 안정된 상황이 아니어서 사마씨로 인한 정치혼란, 그리고 이에 따른 수춘 3반란. 강유, 왕사등의 농서의 강저족 회유 등이 있어 그래도 북벌을 해 볼 이유가 있던 것이다. 하지만 촉과 위의 국력차는 제갈량 이후 계속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장기적으로 북벌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안하면 죽는 환경이라 죽으나 사나 북벌을 해야 했지만

5 북벌의 결말

옹양주 겸병이라는 북벌의 전략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1차 북벌에서 방심한 위나라의 허를 찌르는 진군으로 장안 서쪽 지역을 점거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가정에서 제갈량의 신임을 받고있던 마속의 실책으로 기껏 얻어놓은 성과를 고스란히 반납하고 퇴각한 시점에서 북벌은 순탄치 않았다. 위나라 입장은 국력으로 촉을 압도할 수 있는 상황에서 1차 북벌에서 보여준 제갈량의 전술을 토대로 이후 수비 위주로 전략을 세웠기 때문이다. 즉 제갈량이 어떻게 나오는지 파악하고 그에 맞춰 적절한 수비를 하면서 일정 지역에 촉군을 묶어놓고 그저 대치상태만 유지해도 워낙 국력의 차이가 심한 상태이고, 그나마도 원정군 입장인 촉은 항상 보급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허다했다. 촉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빠른 속전속결로서 원하는 전략적 목표를 획득해야 했지만 번번히 위의 수비적 전략과 소모전에 말려들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수는 제갈량이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몇 가지 설명을 하는데 첫째는 위나라에는 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국력이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고 평가한다. 일단 국력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난 차이였고, 인재의 경우도 제갈량은 혼자서 조진, 장합, 곽회, 사마의 등등을 상대해야 했다.[32]

북벌이 성공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융중대에서도 밝혔듯, 형주를 보전한 상태에서 익주를 점거해 국력을 다진 다음, 촉의 본대와 형주의 별동대가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이 북벌을 나갔을 당시 촉한은 형주와 이릉 전투의 패전으로 인재를 많이 잃고 세가 기울어진 상태였다. 원래 촉한의 중신들 태반은 유비가 방랑하면서 각지에 모은 인재들과 형주로 피난했던 인재들이 대다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형주와 이릉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노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이후 촉한은 익주 자체에서 나오는 인재에 의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익주의 인구는 위의 중원에 비교하기에는 빈한하였다. 제갈량 입장에서는 그토록 오와 화친하면서 형주를 온전하게 보전[33]하길 당부했었던 관우가 독단적인 행동[34]을 하여 커다란 전략의 한 축을 망가뜨린게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이후 제갈량의 정책으로 양국은 다시 동맹을 맺었으나 촉과 오 양자의 거리 차로 서로간의 연락하기가 어려워 위에 대한 동시 공격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게다가 손권은 과거 뒤통수 친 경력도 있어 완전한 아군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기에 제갈량은 북벌 때 항상 오나라의 뒤통수치기를 염려하면서 전략을 구상해야했다.[35] 때문에 촉은 위에 비교하여 병력 및 보급 측면에서 밀리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위를 공격한 셈이다. 한마디로 제갈량은 당시 정황상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현실은 시궁창.

비록 제갈량의 북벌 자체야 결과적으로 큰 성과는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가 이끌었던 촉한은 조위에 패배했기에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제갈량을 무능하다고 매도하기도 하지만, 그 중간의 과정을 중시해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여러번 쳐들어 갔는데도 내정은 안정되고 오히려 몇 번의 접전에서는 위나라를 압도하기도 한 제갈량의 능력과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36] 이릉전투 이후 1강(위) 2약(촉, 오)으로 국력차이가 심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북벌을 계속한 것은 위가 촉을 상대로 소극적 내지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여 촉의 수명연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삼국지연의나 여러 각색물에서는 후반부의 볼거리로 손꼽힌다. 연의의 중반에 거의 귀신처럼 활약하던 제갈량에 그나마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는 사마의가 튀어나오는 것도 흥미진진. 아무래도 연의에서 만총 vs. 오나라간의 합비 방어/공략 전, 주연, 육손의 조중 정벌을 씹어버리는 바람에... 덕택에 오는 공기가 되었다[37]
  1. 이 말을 한 사람은 초주이다. 양양기에도 언급되어 나온다.
  2. 오파츠급 인프라인 도강언을 개보수해 농업생산력을 당시 수준에서 극대화시켰다.
  3.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존자원이 사기캐급으로 풍부했던 사천 지역을 제갈량이 잘 경영한 결과였다. 내륙지역이었음에도 암염을 정제해 소금을 조달했는데, 천연가스석유화력을 원시적으로나마 활용했다고 한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당시에는 선진기술이었던 게 함정...... 참고로 천연가스와 석유의 화력은 제철에도 활용됐다. 거기에 국가적으로 비단 직조 공장을 운영했는데, 위나라와 오나라 상류층들이 환장했을 정도라고.
  4. 물론 모든걸 혼자서 해결한건 아니다, 제갈량이 중용한 장완, 비의, 동윤 등의 보좌도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민족의 제압은 그쪽 방면으로 뛰어난 마충과 이회 등을 중용하였다.
  5. 원래 조진은 진서장군 도독옹양주제군사로 대촉방면의 사령관이었는데 222년 중앙으로 불러와 승진시킨 후 동부전선으로 보낸다.
  6. 제갈량이 주둔한 기산과 서한수 일대의 바로 북쪽 인근이다.
  7. 이것이 대단히 평가받는 것은 대체로 전투에서는 큰 이변이 없는 한 퇴각할때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며 또 공격받기에도 좋다. 그런 전투에서 사령관이라 할 수 있고 촉의 건국공신인 조운이 몸소 나서서 뒤를 지켰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8. 장합의 가정 진출은 황제 조예의 명을 직접 받아 온 것이기에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 조운과 대치한 조진의 기곡 진출은 얘기가 약간 다를 수 있다. 조운과 충분히 대치하며 이것이 양동임을 알아낸 조진의 대군이 어떻게 움직였을지 또한 가정 전투의 결과 못지 않게 중대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다만 촉서나 위서의 묘사에서 가정 쪽은 명백한 패배/대승으로 적는데 기곡 쪽은 제갈량 이외엔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고 조운의 상대였던 조진전에선 기곡의 전과를 자랑하지 않았다. 기곡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진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9. 제갈량이 강유를 얻은 직후 그를 칭찬하는 편지를 장예장완에게 보낸것만 봐도 제갈량 개인도 인재를 얻었다고 여긴듯하다.
  10. 이는 요지를 막고 숙장들을 이용해 바로 옹양주 일대를 빠르게 제압하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최훈은 삼국전투기에서 이 의견과 비슷하게 기산을 지키면서 제갈량이 미에 있는 조진등을 치려고 했다고 보았다.
  11. 배수진의 의미는 후대에 (교육적으로) 변형된 감이 크다. 한신의 배수진은 애초에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죽을 힘을 발휘하게 하려는, (즉 가정전투의 마속처럼) 불확실성에 기대는 허술한 전술이 아니었다. (집단멘붕에 빠진 병사들이 먼저 무너져버릴 위험이 훨씬 크다.) 적으로 하여금 방심하게 만들어 성에서 뛰쳐 나오게 만들고, 그 틈을 타 소수의 정예 별동대가 빈 성을 들이쳐 기세를 떨쳐 보임으로서 혼란에 빠진 적군을 앞뒤에서 들이치는, 치밀하게 계산된 작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때 한신의 병사들이 배수진에서 말한 대로 죽을 힘을 발휘한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별동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동대가 적의 본진을 쳐서 점령하면 전투에서 이길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지 이때도 만약 별동대가 무너졌다면 역시 무너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배수의 진은 어쩔 수 없을때에 단기결전용으로 도박을 거는 거지 정석으로 할 만한 작전은 절대 아니다.
  12. 그런데 위략은 위나라 관점에서 쓰인 책이라서 하후무는 자국내에서도 이런 소리가 나올 만큼 한심한 인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13. 위연을 고평가 하는 사람들은 자오곡 계책이 제갈량에게 부족한 기책을 채워줄만한 요소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위에서도 보듯이 장안을 접수할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점을 빼면, 촉군의 최정예를 사지에 몰아넣어서 얻는 전략적 가치는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1만명과 위연의 목숨 포함. 차라리 제갈량이 생각한대로, 몇몇 거점을 꾸준히 점령해서 최소한의 싸움으로 서량을 꿀꺽하는 계획이 스케일도 크고 무엇보다 빨리 처리해야할 과제였다. 심지어, 상대는 기동전과 물량전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위군이었다. 정촉군이라 불리는 정예기병대 2만을 상시 촉과의 전선에 배치했는데 거기에 장안 근방과 수도에서 보내는 원군까지 더한 이들을 상대로 등을 잡힐지도 모르는 사지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이릉대전 후 그나마 남아있던 촉군 2세대 장수진을 종이장처럼 써버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14. 위연은 주로 전술담당으로 활약했던 야전 지휘관이고, 제갈량은 보다 거시적인 국책을 지휘하던 전략담당이었다. 그리고 자오곡 계책은 전술보다는 전략의 영역이었다. 위의 우연과 보급무시로 가득찬 위연의 작전보다는 제갈량의 전략안이 타당했을 확률이 높다.
  15. 사실 상황이 이쯤 되면 방통, 서서 등 지략이 뛰어난 책사들이 있어 제갈량 본인에게 걸리는 부담이 한결 줄어드는데다, 관우가 형주 일대를 장악하고 오나라와 화친한 상황에서의 북벌이라면 촉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절호조다(...). 위연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아래가 아닌 맹장 장비가 살아 있는 것도 플러스 요소. 즉 대담한 계책을 써 볼 만한 여유가 갖춰지는 것이다.
  16. 당시 관중의 군대를 오나라 정벌을 위해 차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북군을 보내야 했다.
  17. 이 공세에서 제갈량은 오나라에 쏠린 군세를 관중으로 견제할 목적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당시 제갈량이 강동에 있던 형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양소곡(綏陽小谷)은 산세가 험하고 물줄기가 얼기설기 흐르고 있어 행군하기에 어려운 곳이지만, 지난날 순찰병들은 이 험한 오솔길을 통해 드나들었습니다. 지금 이미 전군(前軍)을 파견해 돌을 깨고 나무를 베어 길을 닦게 함으로써 대군이 진창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적군의 역량을 완전히 견제할 수 있으므로, 저들이 군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진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제갈량집)라고 했다. 또 수양소곡, 진창도는 무도, 음평으로도 통한다. 따라서 제갈량은 우선 강동으로 쏠릴 위나라의 군사력을 억제하고, 또 한편으로는 옹양주를 공략하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관중으로 위군의 시선을 돌리겠다는 복합적인 의도로 진창을 향한 진군을 결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조예는 강동 정벌에 동원했던 장합을 급히 소환하고는 남북군을 그의 지휘에 맡겨 진창을 구원케 했으니, 의도대로 된 셈이다. 물론 적에게 실제적인 위협을 느끼게 해야 하고 진창을 차지하는 것도 촉한에게 전략적 이점이 되니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심정으로 공략을 진행했을것이다.
  18. 시기상으로 2차 북벌 직후다. 두 가지 군사활동이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삼덕은 2~4차 북벌, 위의 촉 공격시도를 큰 틀에서 하나로 묶어서 본다.
  19. 제갈량전 후주의 조서에선 둔주(遁走)케 했다고 표현한다.
  20. 과거 오란이 음평으로 퇴각했을 때, 그의 목을 베어바친 자가 바로 음평의 저족 강단이었다.
  21. 이 당시 진서 사마부전의 기록을 보면, 계속된 제갈량의 침공으로 군량이 부족했다고 기록하는데, 등애전엔 농서와 남안을 두고 '강족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위연과 오의의 기습 목적을 군량 탈취로 보는 시각도 있다.
  22. 제갈량과 사마의의 교전 결과 한정. 양측의 교전 사실과 왕평의 승리는 정사 왕평전에 기록되어 있다.
  23. 선제기가 이를 누락/왜곡했던 점에서
  24. 정확히는 제갈량vs사마의의 기록만 누락.
  25. 拒는 상대를 했다는 뜻일 뿐, 막아서 이겼다는 뜻이 아니다.
  26. 총지휘관 신분은 아니었으나, 어디까지나 대패한 낙곡전투 역시, 피해는 누락하고 위기를 탈출한 부분만 강조 서술.
  27. 당연한 말이지만, 진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교차 검증으로 오류를 짚어낼 수 있는 부분들 뿐이며, 이 때문에 다른 기록들까지 무턱대고 거짓으로 치부할 이유는 없다.
  28. 이 때문에 호삼성은 사마의의 오장원 점거 예측은 맞는데 이를 힘으로 제압하기 어려워 제장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한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29. 우선 상대가 그 제갈량이었고, 오장원 역시 공성에 유리한 지형은 아니었다.
  30. 왕기의 이릉 점령방법보다 먼저다.
  31. 위가 가만히 있다면 몰라도 위 역시 목적은 다른곳에 진공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원자袁子에서도 제갈량의 북벌은 소국의 입장에서 가만히 있으면 국력 차이로 버티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32. 그나마 조진,장합은 자신이 날려버리지만 사마의는...
  33.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형주는 위나라의 중심부인 허창이나 낙양까지 거리가 가까운 편이고, 익주에서 장안쪽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가는 진령산맥같은 험난한 지형을 극복해야하는 부담감도 없다. 관우가 번성을 치는 상황에서 조조는 목전에 다다른 관우의 기세를 피하기 위해 천도를 생각했을 정도로 형주의 지리적인 위치는 그 자체로도 위나라에게 큰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34. 오에 대해 적대적 외교정책을 벌인게 가장 큰 실책이다. 최소한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했더라도 형주를 허무하게 빼앗기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관우의 북진이 관우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는지 유비의 지시나 사전 합의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35. 그래도 오 역시도 함부로 촉을 공격하긴 애매한게 오라고 해서 위를 홀로 상대할정도로 강한것도 아니고 내부에서 문제가 생겨 이쪽도 촉을 공격할 여력같은건 없었다.
  36. 삼국전투기가 제갈량의 북벌을 이 시각에서 평가했다. 다만 작중에서 북벌에 대한 비중이 가정전투 정도를 제외하면 빈약하고, 결정적으로 이 평가가 나온 화에 지각+오류 콤보를 내서(...) 묻혀버렸다는게 안습. 자세한 내용은 제갈양(삼국전투기) 문서 참고.
  37. 진짜로 이릉대전 이후 조비가 오를 공격하는 병크 외엔 공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