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요리/역사

1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요리

추가 바람

2 에도 시대 이후 지배층의 요리

에도 막부시대의 지배층[1]의 식문화는 육식금지령과 맞물려 현재의 가이세키 요리의 모체가 된 혼젠 요리를 중심으로 점차 형식화, 화석화되었다. 교토의 공가나 쇼군가의 경우는 화려한 테이블 세팅 및 장식으로 꾸며진 여러 코스에 걸쳐서 나오는 요리를 먹었으며, 이는 실제 맛을 보기 위한 용도가 아닌 형식적으로 정해진 코스의(일즙이채, 이즙오채 등의 형식) 가짓 수를 채우기 위한 것으로, 실제 식사가 나오기 전의 요리는 한두 젓가락만 먹고 버리는 것이 관례였고 실제 식사는 지금의 가이세키 요리 후반에 나오는 밥과 쯔케모노 몇개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교토의 덴노 및 공가들과 쇼군과 그 가족들의 식탁은 형식적인 혼젠 요리의 형식으로 마련되었다. 한 예로, 쇼군의 정실인 미다이도코로의 상차림에는 설탕과 식초로 절인 백합근과 같이 화려함을 강조하기 위해 색을 들이는 등 손은 많이 가지만 실제로 먹기 위한 것이 아닌 메뉴가 자주 상에 오르는 것을 넘어서 이러한 메뉴가 주가 되었다. 가이세키 요리가 눈으로 먹는 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화려한 상차림을 자랑하는 것은 이와 같은 혼젠 요리의 기교에 치중한 형식적인 상차림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2][3]

따라서 메이지 유신 이전 구 지배층의 요리는 혼젠 요리의 기교와 형식을 일부 차용한 가이세키 요리를 제외하면 거의 현대 일본인의 식문화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4]

3 일본 요리와 조닌(町人), 그리고 일본패스트푸드

그러나 무사 계층 이하 서민층은 이와 달랐다.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자 쇼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영주(다이묘)들을 강제로 일정기간 에도(도쿄)로 소환하는 법인 참근교대제(산킨고타이)를 만들었다. 그런데 거의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던 초기의 에도에 살기 위해선 수많은 인력을 끌어다 모을 필요가 있었고, 풀옵션 다이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수많은 직공들이 에도 거리로 몰려들며 에도는 삽시간에 인구 50만에 달하는 초고밀도 인구의 도시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밥을 해먹을 공간조차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이유인 즉, 일본의 주택은 현대인 지금조차도 비좁기로 유명한 목조(木造)건물인데, 당장 마실 물도 모자랄 판에 만일 불이라도 났다간...[5]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음식만 전문으로 만드는 조닌(에도거리의 직공)의 등장이었고, 즉석 포장마차야타이(屋台)가 차려져 사람들에게 빠르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니하치소바(메밀국수의 일종)와 니기리즈시(초밥[6]), 텐푸라(쿠시카츠), 카바야키(장어구이), 야키토리(닭꼬치)도 이때 등장한 음식이었고, 우동과 오니기리(주먹밥), 당고(경단)도 인기있는 음식이었다.

참고로 이 내용은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누들로드에서도 언급되었다.

4 일본 요리와 개화기 이후

불교를 적극 수용하게 되는 헤이안 시대부터 이어진 육식금지령[7][8]이 떨어져 레시피가 대부분 사장당하는 바람에 육식문화는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메이지 유신의 개방 이후에서야 외국에서 각종 레시피가 유입되었고, 일본 특유의 토착화를 통해 스키야키와 같은 육류 요리가 등장했다. 또한 지금은 일본의 일상식이 되어버린 오무라이스, 카레라이스, 해시라이스, 돈가스, 고로케메이지 시대부터 발달한 것이다. 일본이 근대에 들어서 독자적으로 유럽식 요리를 받아들이면서 발달한 요리로, 전세계적으로는 일식(和食)으로 분류되나 한국에서는 반일감정상 인정하지 않고 '경양식(洋食)'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랜 기간 지속된 금육 생활에, 이미 (네발 짐승) 고기는 혐오식품이 된지 오래였다. 그래서 돈가스나 쇠고기 스키야키[9]가 사실상 개화기의 상징이 되어, 이것을 먹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비문명인이라는 얘기도 메이지 시대때 심심찮게 돌았었다.

더불어 의 위대함(?)[10]에 놀란 사람들이 오븐도, 효모도 없는 무(無)의 조건에서 빵을 만들어내려는 고된 수행(...)을 겪기도 했다. 단팥빵을 비롯한 일본의 신묘하고 기묘한 빵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양식뿐 아니라 중국 요리한국 요리를 일본식으로 어레인지한 예도 많다. 짬뽕, 라멘, 야키니쿠, 호루몬(소나 돼지의 내장요리) 등. 예의 짬뽕과 라면의 경우 일본 버전을 다시 한국에서 받아들여 또 어레인지했으니, 중국식도 일본식도 아닌 뭔가 애매모호한 정체성의 요리가 된 셈이다. 본토의 것과 달라지게 된 건 말할 나위도 없고 이젠 역수출도 하니….

5 일식의 세계화

1964 도쿄 올림픽 때문에 날생선이나 먹는 나라라고 까인 적이 있다. 이후 일본 정부에서 나서서 무려 50년에 걸쳐서 세계진출에 나선 결과 현재는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는 스시를 먹지 못하면 상류층이 아니란 말이 있을 정도로 고급 요리의 대명사가 된 상황.

요즘의 외국인들, 특히 미주/유럽인들에게 일본 요리는 대략 3개의 키워드로 완성된다. 간장, (날)생선과 해초, 쌀. 아마도 초밥이 이런 이미지를 만든 것 같다. 어떻게든 생선을 구해다가 간장을 써서 만들고 쌀과 함께 먹으면 일본 요리라는 듯. 그러다보니 간장맛이 나면 죄다 일본 요리라 치부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한식에서 매운맛 코드가 없어지면 일식과 헷갈려 하는 것도 이런 이유.(대표적으로 김밥 vs 노리마키)
  1. 교토덴노 이하 공가쇼군가 등
  2. 그러나 진짜 보는 용도에 그치던 장식용 요리에 불과한 혼젠 요리와는 달리 가이세키 요리는 모든 코스가 실제로 즐길 수 있는 음식들로 준비된다. 당장 일본 료칸에 가서 먹는 그 음식이 가이세키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3. 현대의 혼젠 요리는 결혼식 만찬에서나 구경할 수 있고, 실용적인 부분이 곁들여져 옛날처럼 형식적인 요리에서는 벗어났다.
  4. 출처: 에도의 패스트푸드(청어람, 2004년)의 제3장 '덴뿌라를 먹지 않았던 쇼군'의 내용을 요약 및 각색
  5. 정반대로 한국중국의 경우 흙벽돌이나 벽돌등 불연성 재료로 집을 짓는 경우가 흔하므로 불 사용이 굉장히 자유로웠으며 특유의 대륙성 기후와 결합하여 굉장히 뜨거운 음식을 선호하는 문화를 낳게 되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일본보다 격식을 차려 먹는것을 선호하며 길거리 음식을 천시하는 문화가 나오게 되었다.
  6. 원래 스시는 발효음식이었고, 손으로 쥐어서 내는 게 아니라 틀로 찍어내는 것이었다. 패스트푸드화로 빨리빨리 만들어 내야 하다보니 발효도 하지 않고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 손으로 쥐어서 내기 시작한 것이다.
  7. 해산물, 토끼고기, 고래고기 등은 논외 대상
  8. 오키나와홋카이도는 한참이나 나중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육식금지에 해당하지 않았다.)
  9. 원래 스키야키는 고래고기나 생선을 쓰는 음식이었다. 지금은 소고기를 쓰는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10. 당시 일본인들의 소울푸드였던 쌀밥만 먹으면 비타민 B의 부족으로 각기병에 걸리기 쉬운데, 밀가루에는 비타민 B가 들어 있어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몰랐을 일본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상상한 대로.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소설에는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간간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