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래 의미
在家僧. 집에 머물며 도를 닦는 승려. 좁은 의미로는 함경북도 북부 지역에서 아내를 얻어 살던 승려를 가리키던 말로도 쓰인다.
2 함경북도의 종족 집단
어떤 통시적 변천 과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말은 조선 내에서 살던 민족종교집단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이들은 주로 함경북도 두만강 연안 지역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사는 마을들을 재가승마을 혹은 중골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2.1 생활상
이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1936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의 <집단촌 답사기 - 재가승부락, 회령군> 제하 기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1]
1935년경의 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약 4천명 가량이었는데, 가장 많이 분포했던 곳으로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咸鏡北道 會寧郡 昌斗面 鐘岩洞) 그리고 함북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穩城郡 美浦面 月波洞)을 들었다. 이들이 사는 마을은 '재가승마을' 혹은 '중골'이라 불렀다. 이들은 모두 하천인으로 대우되었고, 이 곳 사람과 결혼하려는 외지인은 반드시 이곳에 거주해야만 했다. 이들은 세금이 면제되는 대신 황지(黃紙)와 초신을 나라에 바쳤는데 이는 말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을 지나가는 군인이 있으면 부녀자들은 이들에게 젖을 먹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미인이 대부분인 이 곳의 부녀자들은 유방이 큰 편이라 한다. 이들이 말하는 언어는 분명 우리말이기는 하나, 이들의 말은 외지인은 물론이고 관할 면사무소 직원들도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나물을 '나마리', 떡고물을 '영에', '지각없다'[2]는 말을 '덕새(양소래)없다'고 하는 것 등이다. 이들의 유일한 욕설은 '범이야 범이야'라고 하는데, 호환 때문에 생긴 말로 추정된다. 외지인과는 달리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제사를 할 때는 밤 8시에 지낸다. 이들은 1900년대까지는 성(姓)이 없이 그저 승(僧) 아무개라고 부르다가 , 이후부터 성을 사용하였다.[3] 성풍속은 당시 외지인의 눈으로 볼 때는 유달리 음란하게 보였는데,[4] 이것은 외부의 학대와 맹수의 피해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동족의 수를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이들은 4백여 년간 공동생활을 해 왔지만 이렇다 할 공동시설이나 규칙은 없고, 다른 마을과 통혼하지 않은 채 농경은 화전을 일구고, 부업으로 여성은 삼포(麻) 방직, 남자는 목재운반을 하는데, 단결력이 강하였다고 한다. 우환이 있는 이웃 마을로 가서 불경을 읽어 주는 부업을 하기도 한다. |
2.2 논란
여러 매채에서 재가승을 한민족과는 다른 여진족 계통의 소수민족이라고 일컫는 경우들이 꽤 많다. 그런데 정작 재가승이 진짜 여진족 계통의 족속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일단 만주족, 여진족 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퉁구스 계통의 족속들이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백성들과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의 개국 공신으로 알려진 퉁두란[5]이 여진족으로 알려졌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의 임하필기, 신증동국여지승람 原文图片편, 박원길의 북방민족의 장례습속에 대하여를 종합해보면 이들의 연원을 어느정도 추정해볼 수 있다.[6]
최종적으로 4군 6진의 개척으로 많은 여진족들은 만주로 밀려났지만 일부 여진족들은 조선 내에 동화되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후금이 세워지면서 만주 지방의 여진족은 요동과 가까운 건주여진 내몽골에 가까운 해서여진 그리고 두만강 하류의 야인여진으로 나뉘었다. 그런데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과 그가 정복한 해서여진은 후금과 후의 청나라의 지배계층인 만주족에 편입되었지만 두만강 하류지역 야인여진은 누르하치와 적대하여 일부만이 만주족에 편입 되었다. 조선에 잔류한 여진족들은 지역상 두만강쪽 여진족이기 때문에 청나라 지배 계층인 만주족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그래서인지 다른 지역 주민들은 함경도나 평안도(특히 북부) 주민들을 여진족 스파이나 자손으로 의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재가승들을 말이 통하지 않는 여진족 후손들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함경북도 회령, 종성, 경원, 경흥의 여러 재가승들은 일반 한국인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들의 인구는 대략 3-4천명 정도 있었으며 이들의 말은 현지 면사무소 직원들도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달랐다고 한다.[7] 그 외 일제치하의 두만강변을 배경으로 하는 국경의 밤에는 인근의 여진족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풍속을 유지한 것이 나온다. 1936년 동아일보 기사 이외에 이재욱의 재가승만고 등 다양한 연구자료들은 재가승이 여진족의 후예라고 기술했으며, 1960년 북한의 황철산 교수도 비슷한 주장을 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여진족의 후손들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 일단 이들이 썼던 언어는 여진어나 만주어 같은 퉁구스어족의 언어가 아니라 한국어의 하위 방언인 동북 방언이나 육진 방언[8]을 썼다.
실제로 재가승들이 구사했던 방언들을 조사해보니 동북 방언 혹은 육진 방언과 큰 차이가 없다.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함경북도 두만강 연안의 마을들을 조사해봤더니 기존의 함경북도 방언과 유사했다고 한다.
또한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 때 재가승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통혼시키고 창씨개명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지만 이 역시 딱히 근거가 없다. 다만 북한 정권에서 여진어에서 유래된 지명들을 개칭했던 적은 있었다. 예를 들어 독로강을 장자강으로, 아오지[9]를 은덕으로 바꾼 것 등등.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때, 이들이 대부분 여진족으로 구성된 집단이었으나 한민족과의 제한된 통혼과, 관리들이나 한민족 마을과의 교류를 통해 언어 전이(language shift)가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고, 처음부터 여진족 잔류파와 한민족이 합쳐져 형성된 집단일 가능성도 있다. 어느 연구에 따르면 다른 지방에서 육진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 승려들이 여진족과 결합하고 통혼하여 상호 동화되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결론적으로 재가승의 기원은 확실히 알 수 없고 풍습이 꽤 독특한 것들이 많으나 소수민족으로 인정할 정도로 완전히 한국인들과 다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이 진짜 여진족의 후손인지 확실한 그거가 없다.
그리고 "재가승"이라는 단어는 고려시대나 그 이전 시대의 승려 및 승려처럼 머리를 깎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2.3 재가승이 나오는 작품
- ↑ 원문은 [1] 참조.(모바일 열람 불가) 한글본의 일부는 [2] 참조.(모바일에서 열람 가능)
- ↑ 知覺없다. 철이나 분별력이 없다.
- ↑ 착각하지 말자. 이들이 1900년대까지 승(僧)이라는 글자를 성씨로 칭했던 게 아니라, 스님 아무개라고만 불렀다는 소리다.
본인을 스님이라고 존칭할 수는 없으니 - ↑ 오죽하면 니미럴의 어원이 여진족의 성풍속(또는, 그에 대한 조선인들의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도 있을 정도.
- ↑ 나중에는 이지란(李之蘭)이란 조선식 이름을 썼으며 개국공신이 됐다.
- ↑ [3]
- ↑ 출처: 1936.1.1. 동아일보 보도
- ↑ 육진 방언은 결국 동북 방언의 하위 방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동북 방언에 비해 보수성이 더 강하고 동북 방언과 다른 어휘들이 있기 때문에 분리한 것이다.
- ↑ 다만 이것은 함북 방언으로 물이 아우르는 곳을 뜻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충남 천안의 아우내 장터나 강원도 정선의 아우라지를 보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