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의 집권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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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승(慶大升), 1154 ~ 1183
고려의 무신. 무신정권의 세번째 집권자.
1 개요
청주[1]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지역에서 유서깊은 군반 씨족이었다. 부친인 경진(慶珍)은 권력자 정중부의 편에 서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차후의 행보를 보자면 경대승은 그러한 아버지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듯하다. 15세에 문음(門蔭)으로 견룡군(牽龍軍) 교위(校尉)가 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천문에 밝았다고 하는데 그건 그냥 영웅화일 것이고, 그냥 취미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정사에 의하면 무인임에도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는데, 이것만 해도 당시 다른 무인과는 대단히 차별화되는 점이다. 무인들은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아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였지만, 거의 대부분이 제 이름 석자도 제대로 쓸 줄 몰랐다고 한다. 사극 무인시대에서 무신정권기 고려 무인들의 이런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무술 실력 역시 매우 뛰어나 약관#s-2의 나이에 국왕의 친위대장이 되었다. 사람됨이 강직하여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자와는 말을 섞지 않았으며, 남을 꾸짖음에 말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인심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뛰어나 청주 하사관들이 일으켰던 분란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 지역의 지도층 인사로 사심관까지 지낸터라 어떤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했으며, 이후에도 선동 능력등을 보여주는 일화도 꽤 많다. 무신정권 시대에 집권한 무인 중 유일하게 고려 국왕과 문신들의 존폐를 위협하지 않은 인물(오히려 문신 우대 정책을 펼쳤다.)이었기에 상당히 고평가를 받으며 역시 유일하게 반역열전에 기록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2 성장과 관직 진출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능했고 무엇보다 무반 중에선 아주 잘 나가는 집안이었던 지라 음서를 통해 15세에 국왕 친위대인 견룡군 교위가 되었다. 명종 4년인 1174년에 그는 불과 21세의 나이로 송군수 등과 함께 고려 왕의 친위대인 견룡군에 속해 있었으며, 같은 해 견룡군의 대장직인 견룡행수로 취임한다.
그의 아버지인 경진은 타인의 토지를 많이 빼앗아 지탄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사망하고 청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자마자 가진 모든 전답을 세인에게 돌려주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때 자신과 가문이 원래 지녔던 전답까지 다 돌려줘버려서 항상 일식에 이찬으로 생활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생활고로 고생했다고 한다. 원래 지녔던 토지를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은 아니고, 국가에 환속했다.
사후 가산을 정리해보니 집 한 채와 쌀 몇 섬, 말먹이 뿐이었다고. 위에도 있지만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가신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집도 허름하여 도방 장사들이 누울 곳이 없자 자신의 방은 필요 없다 하여 허물어 버리고 호위부대인 도방들과 숙식을 같이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1178년에는 원래 충주 주민으로 개경에 적을 두고 살다가 청주로 이동한 사람들과 청주 토착민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나 100여 명이 죽게 된다. 이 때문에 경대승은 청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어 대장군 박순필과 함께 파견되지만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면직된다.
3 기해정변과 집권
1179년 9월에 견룡군인 허승, 김광립 등과 더불어 정중부, 정균, 송유인, 송군수, 대장군 이경백, 지유 문공려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족형인 장군 손석의 부추김으로 자신의 경쟁자가 될만한 인물들인 오광척, 장군 김광영, 지유 석화, 습련, 중랑장 송득수, 기세정 등을 잡아죽였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 때였다.
당시 임금인 명종을 비롯한 문신들은 폭정을 일삼던 정중부와 그 일당을 척살한 경대승에게 축하연을 열었는데 경대승은 모든 문신들이 모여있는 그 자리에서 선왕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그대들은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것인가!라고 대갈하였다. 이에 선왕 의종을 죽인 이의민이 데꿀멍해서 병사를 두어 경비할 정도로, 당시 겨우 26세의 나이였는데 26살 짜리가 소리를 지르자 온갖 대신과 장수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니 확실히 풍모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의민은 경대승을 피해 지방으로 도망가 숨어살다가 그의 사후에야 다시 관직에 들었다.
또한 이 일로 명종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는데, 사실 선왕 의종은 정당하게 계승한 왕위를 무신정변으로 빼앗긴 것이고 명종은 그러한 정변세력에게 옹립되었기에 정통성이 부족하다. 명종이 비록 인종의 아들이기는 했어도 태자로서 계승한 왕위와 무력으로 신하들이 옹립한 왕위에서 명분이 어느 쪽이 밀릴지는 자명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권력을 틀어쥔 경대승이 의종에 대해 '선왕'이란 말을 언급하며 이의민의 척살을 외친 것은 현 임금인 명종의 약한 정통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 설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였다.
1180년 12월에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허승, 김광립 등이 교만을 부리며 은밀히 불량배들을 양성하면서 방약무인의 행동을 보이자 허승과 김광립을 죽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자신을 위협할만한 경쟁자를 죽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선왕을 시해한 자라 일침을 놓았던 이의민 역시 끔살하려 했으나 이의민의 동지이자 경대승의 친우였던 두경승의 밀고로 이의민은 도망간다.
그들을 죽이자 군대의 호위를 강화하고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재상 이하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축하하니 스스로 안심하고 군대의 호위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한 국가의 권력을 틀어쥐었으면서도 평생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으며, 집권 후 군부도 사직하여 집에서 소소히 생활하였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는 대궐로 나가 왕에게 의견을 밝혔는데, 그 때마다 명종은 그가 무서워 그의 의견에 무조건 따랐다.
그가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에는 문신 우대정책을 펼쳐 많은 문인들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기도 하였지만 무신의 세력이 약화되지는 않았다.[2] 정중부 등을 처치한 이후로는 문객들을 보내어 유언비어를 탐문하고 즉시 관계자를 잡아 가두고 국문하는 등 여러 번의 큰 옥사를 만들어 가혹한 형벌을 적용하였다. 정중부를 척살한 것은 기습에 가까웠고, 권력집단인 중방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권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181년 3월에는 전(前) 대정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하자 영사동정 대공기의 밀고를 듣고 왕에게 고하여 체포했다. 이후 석화, 별장 박화, 주부 이돈실 등도 이 사건에 관계가 있는 것을 알고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이돈실 등은 귀양을 보내고 석화는 남해 현령, 박화는 하산도 구당사로 강직시켰다.
4 도방(都房)
경대승 집권기의 특징은 도방이라는 경대승의 사병 집단이다. 다른 무신집권자들의 기록에는 문객(文客)·악소(惡少)·사사(死士)·용사·장사 등의 기록이 있어 각기 사병을 거느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경대승과는 규모나 조직 면에서 차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은 정적들[3]과, 특히 무인집권 시대의 집권자면서도 문신을 우대하는 성향 때문에 무인에 의해 집권된 명종의 미움을 받아 여러번 암살의 위협을 받았고, 이에 100명의 장사를 뽑아 도방이라는 사병집단을 만들어 자신의 호위를 맡게 했다. 이 도방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싸움과 무기술에 능했으며, 이들은 경대승을 화장실까지 호위했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아버지인 경진이 착취한 토지를 반환하며 가문이 지녔던 토지까지 함께 반환해버려서,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상당히 가난한 편이었다. 집권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산을 다 따져보면 집 한채와 쌀 몇 섬, 말먹이뿐으로그나마 그 집도 허름하여 누울 자리가 없었다니 따라서 100명이라는 인원을 먹여살릴 경제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장사들은 월급을 받지 못하였고, 군적이 아니기 때문에 군인전도 받지 못하여 먹고 살기 위해(……) 점차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
다만 이 도방이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받는 와중에도 경대승의 호위를 맡을 정도로 경대승 개인에 대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점은 특이하다. 앞서 말했듯 그 자신의 뛰어난 카리스마의 덕분일 수도 있고, 같이 숙식을 하는 친밀한 대장을 버리지 않은 점에서는 의외로 의리의 사나이들이었겠지만 이후에 내부에 파가 갈리고 분란이 생겨 싸움질을 일삼았다고 한다.
결국 도방 장사들은 제 살길 찾기 위해 약탈을 일삼게 되었다. 경대승의 권력과 도방의 무력을 이용한 일종의 '상납'을 강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도방 인원을 가두면 법관이 즉시 찾아가 석방시켰으며, 이로 인해 도방 장사들은 상당히 거리낌 없는 약탈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경대승의 입장에선 도방을 해체하자니 당장 암살 위협이 다가오고, 도방을 냅두자니 당장 먹여살릴 길이 없으니 약탈을 말릴 수가 없어 상당한 울화통부담이 되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시각이 있는데 그의 상여가 나갈 때 백성들이 통곡했다는 점, 특히 도방이 집권자나 부유층을 살해하거나 하는 데에 전문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집권자들을 털었을 거란 의견도 있다. 이렇게 '상납'을 받으려면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일반 백성을 쪼기보다는 돈을 많이 가진 부유층을 터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드라마인 무인시대에서는 이를 반영해 마치 활빈당 같은 이미지로 묘사해놨다.
5 최후와 도방의 몰락
1183년 7월에 30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고 한다. 사망 원인은 대부분 암살 위협과 그에 따른 노이로제 등으로 인한 정신적인 문제였을 거라는 설이 주류다. 혹은 정말로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으며, 고려사에는 정중부의 꿈을 꾸고 병을 얻어 이로 인해 죽었다고 되어 있다.[4]
고려사에 보면, "경대승의 상여가 나가니 백성들 중 통곡하지 않는 자가 없어 그 울음소리가 왕도를 진동시키더라."라고 적혀 있으며 이것으로 볼 때 백성들의 인망을 많이 산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망하자 그의 사병 집단이었던 도방은 원래 해산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도방 우두머리였던 김자격[5]이 도방 사람들이 반역을 모의한다고 무고해버리면서 몰락하고 만다. 왕의 명을 받은 대장군 정존실, 오숙 등에게 치죄되어 그들을 혹독하게 고문하고 귀양을 보냈다.[6]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 도방에 매력적인 인물이 많았는데, 경대승의 죽음과 더불어 제3 집권기가 바로 끝나서 후일담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유언에 따라 낙향한 줄만 알고 있다가 현실은 시궁창 대부분 끔살당한 것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명종과 무신들이 경대승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도 볼 수 있겠다.
6 후일담
다만 일족들은 치죄를 받지 않아 잘 먹고 잘 살았다. 이후 문하시중에 오르는 경복흥이라는 인물도 있었다.그 후손들은 조선 중기 가세가 점점 기울어 본적인 충청도 쪽으로 이주하여 현재 25대손까지 충북 충주 지방 근처에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최근 경씨 가문에서 족보를 신편찬했는데, 족보를 편찬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실 가문…… 이라기도 뭐한,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는 '경대승? 아! 그런 사람도 있었지…….'라는 분위기라고.국사책에 뻔히 실려 있고 시험에도 나오는데 국사 공부 안 한 사람들 뿐인가...
가문의 사조는 경대승의 아버지인 경진이며, 현재 종파인 청안공파의 후손들은 경대승의 직계가 아니기도 하고 해서 그런지 역사에 이름 남은 인물을 물어보면 경복흥이 먼저 나온다고 한다. 아니면 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경권중이나. 드라마 무인시대를 보고 경대승을 알게 된 사람도 대부분이라많다고 족보 편찬자가 말한 걸 보면(……).이 사람도 국사 시간에 공부 안 했구나!
앞서 밝혔듯 고려사를 보면 다른 무신 정권의 집권자들이 반역열전에 실려 있는 반면 유독 경대승만은 반역열전에 실려 있지 않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경대승 스스로가 강직하고 청렴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으며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지 않은 데다, 무신임에도 문신들을 박대하지 않는 등 자신의 정권이 흔들릴 만한 행위를 가장 적게 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경대승에 대해 "오래 살았더라면 고려의 부패를 일소하는 개혁 정치를 펼쳤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개중 낫긴 하지만 그저 다른 무신 집권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낫다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물론 경대승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랬을지 모른다는 말이지만.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특히 아래에 서술한 단점들이 제기된다.
7 비판
무신정변을 통해 국가의 제1 정치기구로 부상했던 무신들의 합좌기관이었던 중방을 무력화 시킨 게 결정타였다. 경대승이 중방을 무력화 시킨 덕분에 후대의 집정자들인 이의민이나 최충헌이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무신정변에 참가하거나 동조한 고위급 무신들의 합좌기관이라서 권위 또한 끝내주는 기관인 데다가 고려군에 대한 모든 권한도 중방에서 나오다 보니 함부로 중방을 무시하거나 깔아뭉개는 시도를 했다가는 순식간에 다굴 당해서 살해 당할 수도 있었다. 무신정변의 삼두 중 이고가 이의방에게 살해 당해 살얼음처럼 유지되던 균형이 깨져버린 상황에서도 이의방이나[7] 정중부[8] 같은 인물들은 차마 중방을 깔아 뭉개지는 못했다. 오히려 중방이 이들의 권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이는 무신정변의 과정과 연관된다. 일단 무신정변의 주도세력은 이의방과 이고로 대표되는 군부 내 신진세력이었고 여기에 원로인 정중부를 얼굴마담으로 끌어들인 구도였다. 때문에 군부 내 원로들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고, 이들 원로들이 중방이라는 형태로 애송이인 이의방과 이고, 그리고 일단은 자기들 중 리더격이기는 해도 동료에 불과한 정중부를 적절히 견제했던 것이다. 또한 정중부도 최고권력자가 되긴 했어도 오랜 세월 동료였으며, 자신의 지지 세력인 중방을 그만큼 대우해주고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무인시대에서는 정중부가 중방의 수장으로서 원로 격의 대표로 그려졌다. 이의방이 철퇴를 마구 휘두르니 정중부가 "그래, 어디 우리 다 죽이고 너 혼자서 다 먹어봐!"라고 강경하게 나왔으며, 이의방이 이를 갈면서도 철퇴를 내리는 모습으로 이의방 정권과 군부 내 원로들로 이루어진 중방 세력의 대립과 견제가 잘 묘사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정중부 정권 때에는 중방과 정중부의 대립이 전혀 나오지 않는데 도리어 문하시중에 올라 조정의 영수가 되었음에도 정중부가 알아서 조정이 아니라 중방을 존중하며 중방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중방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이는 식으로 나온다. 대략 5.16 정변 직후 육사 선후배 기수간의 대립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경대승이 정중부를 살해하고 집권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의방이나 정중부처럼 적절하게 때가 묻어 타협할 줄 아는 집정자들과는 달리 젊은 혈기 탓인지 바로 중방의 권위를 깔아 뭉개버린 것이다. 군이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 때문이었고 또 그것이 바람직하지만 정치현실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경대승 사후 이의민 집권 전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중방의 중요인사였던 조원정이라고 하는 인물은 명종이 이의민을 상경시켜 집권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기를 들며 군대를 동원하였고 이것이 실패하여 참수를 당했는데, 당시 조원정이 중방에서 차지하던 위치[9]를 감안해 본다면 탄핵 같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할 정도로 중방의 힘이 무력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
물론 경대승의 중방 무력화 정책에 맞서 무장들의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고, 경대승은 이를 타개하고자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함께 문신들을 적극 등용하고 또한 친위대인 도방을 설치했다. 이는 무신들을 통해 왕위에 오른 명종에게는 심한 불쾌감과 분노를 가져왔으며, 자신은 평생 출사를 하지 않았지만 친위대인 도방의 권력이 커짐과 동시에 부패를 가져왔다. 경씨 집안의 순수한 자산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아버지가 수탈했던 재산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일부러 경씨 집안의 순수한 자산까지도 국가에 반환하고 도방이 약탈을 일삼게 만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도방이 무슨 수천 수만의 군대도 아니고 자신의 자산을 국가에 반환하지 않았다면 도방을 먹여살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중방의 무신들의 부패는 별로 특이할만할 사항이 아니다. 무신정권 이전의 문벌귀족들 역시 철저하게 부패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무신정권 이후 이들은 무신들과의 통혼을 통해 결국 생존하는데 성공한다.
그 자신의 청렴함은 물론 앞서의 예들을 보더라도 의심할 바가 없어 보이지만, 그의 호위부대였던 도방이 약탈을 자행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즉 지도자 개인이 깨끗할 수는 있어도 정권이 깨끗할 수는 없었다. 독재자 자신은 치부를 하지 않고 오히려 청렴한 모습을 보이는데 아랫사람들이 치부를 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은 독재권력에서 보이는 양상이다.
또한 이 도방은 국가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경대승 개인 사병집단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정당성 또한 부족했다. 약탈을 자행했을 뿐 아니라 후에는 파가 갈려 분란이 일어나고 싸움질이 끊이지 않았다. 이 도방은 후일 최충헌이 표절 그대로 따라하여 삼별초 같은 사병 집단을 보유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애초에 자신이 암살위협을 빈번히 받았기 때문에 도방을 창시했을 정도로 당시 주변인물이나 정적들, 그리고 왕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 걸 보면 사람됨도 그다지 사교적이진 않았던 모양. 사람을 가리어 사귀고 남을 꾸짖는 데 말을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았을 정도니…… 상당히 깐깐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젊은 혈기와 더불어 이 성격 때문에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데 능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끝내 명종의 신임은 별로 얻지 못한 것이 이를 드러내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정통성이 빈약하고 항상 그에 대한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는 명종 앞에서 선왕을 운운하는 것은 세조 앞에서 노산군의 정통성이 어쩌구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경씨 일가는 정말로 세조 앞에서 노산군의 정통성을 떠벌이다가 일가가 참살당하고, 당시 삼남이었던 경학중이 조카 경사원을 데리고 야반도주하여 겨우 일족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 조상에 그 후손이랄까...
정통성에 관한 문제가 명종과의 불편한 기류를 만드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강직하고 똑바른 성격인만큼 융통성이 지나치게 부족하여 적을 양산하는 스타일임은 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르게 보자면 이렇게 적이 많은 와중에서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자택에 칩거하고 있었는데도 다른 경쟁자나 적들이 무서워 지방에 도망갔을 정도라면 개인적 능력과 카리스마 만큼은 굉장했던 모양이다.
또한 자신의 경쟁자가 될 만한 자들을 잡아죽이고 의심에 사로잡혀 옥사를 많이 일으켰다. 다른 무신들과 마찬가지로 인명을 조금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모양으로 집권기 대비 옥사한 인물은 무인집권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았다. 다만 이걸 갖고 말 그대로 '경대승은 살인마'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첫째로 시대상을 봐야 한다. 고려시절은 현대처럼 만민평등이나 인권의 개념이 확립된 시기가 아니었다는 점과 그 중에서도 무신시대라는 혼돈과 살육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례로 고려 경종 시절에는 복수법이라는 희대의 악법이 시행된 적도 있었다.
둘째로 다른 무신집권자들의 집권기에는 경대승의 제3집권기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살인이 이루어졌지만 그 대부분이 암살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무신정권의 집권자 12인중 경대승을 제외한 나머지 집권자 전부는 암살이나 백주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등 포악한 방법으로 수많은 인명을 해하였으며 이에 비해 재판을 걸친 옥사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경대승은 반대로 깐깐한 기준으로 인사를 행해서 옥사한 인물의 비율은 높았지만 암살한 인물의 비율은 적었다. 애초에 이쪽은 그런 식으로 권력을 휘두를 생각이 없었고, 휘두를 시간도 없었다.
셋째로 옥사한 인물의 수가 많다는 것도 애초에 '집권기 대비 옥사한 인물의 수'인 거지 옥사한 인물의 절대수가 가장 많다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경대승의 집권기는 단 4년뿐인데 이때 옥사한 인물이 무신정권 100년중 가장 많았다면 경대승은 지금쯤 살인마로 이름이 드높았을 것.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오히려 경대승 자신이 암살보다는 법에 따른 취조를, 비록 그 기준이 지나치게 깐깐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선호했다는 반증이다.
넷째로 경대승의 집권기만 해도 무신정권 초기고 전체적으로 나라가 혼란과 살육의 시기였다는 점 또한 감안해야한다. 그의 집권기 4년은 어찌보면 혼란과 광기로 치닫던 시대에 브레이크를 걸던 유일한 시기였으며 그 안정을 위해서 다른 무신이나 정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과연 그릇된 선택인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
다섯째로 경대승 자신이 인명을 경시하거나 깐깐한 치죄를 선호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경대승은 옥사나 재판에 관여하는 지위가 아니었고 집권 후에는 자신의 원래 직위였던 무신직도 사직하고 집에서 뒹굴거렸다놀았다. 즉 그의 집권기에 행해진 옥사 모두가 그의 주관하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시각.
마지막으로 결국 경대승에게 죽은 위험요소라는 사람들 또한 대부분이 깨끗하지 못하고 그 시기 가혹한 수탈과 폭력을 저지른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옥사니 뭐니 해도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정치상황에선 죄에 대한 문초를 받아 처형되었을 인물들이 많다는 것. 이 역시 경대승 사후의 민중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다. 정말 무고한 자들을 잡아다 문초해 죽였다면 깨끗한 영웅이 아니라 더러운 학살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정치적인 소신이나 비전은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 이외에는 그닥 없어보인다. 실제로, 학계 일각에서는 만약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지 않았더라면 경대승에 의해 의종이 복위되었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다만, 이에 대해서 그는 평생 조정에 출사한 바가 없고, 집권 후 곧바로 군부에서도 사직하였으며 이후 고작 4년 여 간의 집권기 동안도 딱히 무슨 일을 하지도 않았고 몇 차례 왕에게 찾아가 간언을 했다는 기록만 남았던 걸로 볼때, 정치적인 소신이 담백했기 때문에 오히려 정치적인 권력욕이 없었던 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차라리 권력욕이 넘칠 걸 그랬어
실제로 그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큰 정책은 극히 위축되었던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 몇 개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 기술에서는 제대로 먹혔다. 문신들은 자기들 평가해준 쪽에는 무조건적으로 찬사를 보냈고, 경대승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이 때문만은 아니라 무인시대 등장하는 최충헌까지의 무인집권자들을 보면 이의방, 정중부는 의종 폐위, 이의민은 의종 시해, 최충헌은 명종, 희종 폐위를 하였지만, 경대승만이 유일하게 왕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도 조선의 문신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다. 덕분에 집권자 중 유일하게 반역록에 기록되지 않았다.
8 무인시대에서의 경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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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방-정중부에 이어 3번째 주역으로 등장. 박용우가 열연했다. 주무기는 언월도.[11] 공홈의 기획의도에서는 경대승의 주무기가 부채로 나온 걸 보면 초기 설정은 달랐던 모양이지만, 부채는 너무 무협지스러워 보였는지 교체한 듯 하다. 이의민의 수하 부루가 경대승을 암살하려 기습했을 때, 부채를 들고 격퇴하는 묘사가 나타나긴 한다. (78회). 또한 두경승과 더불어 이 작품의 주요인물들 중 더러운 모습이 그려지지 않은 몇 안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이의방이 죽기 얼마 전, 견룡행수 였던 경대승은 이의방을 찾아가 권력을 휘어잡고 전횡을 일삼은 이의방에게 일갈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한다. 이 때 이의방은 권룡행수 시절 자신이 간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거사를 일으킨 과거가 오버랩되듯이 적잖이 당황스러워한다. 그런 경대승의 의기를 높이사면서 살려보낸다. 그래서인지 경대승 역시도 훗날 자신을 암살하러 온 부루의 목숨을 살려준다. 그리고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따른다. 물론 제작진의 푸쉬를 받은 캐릭터였는지라 위에 서술된 부분 중 안 좋은 부분은 허승이 자기가 죽이고는 경대승이 시킨 거라고 이름을 빌려 뒤집어 씌우거나, 측근이나 친척이 경대승 모르게 뇌물을 받았다는 식으로 약간의 미화 내지 생략이 있기는 하다.
극중에 등장하는 무인 집권자 가운데 유일하게 죽기 전까지 초심을 잃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무인시대에서 타 집권자들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권력에 중독되어 천천히 타락해가는 모습이 묘사되지만, 경대승은 혈기왕성한 이상주의자가 가혹한 현실과 부딪히고 고뇌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을 묘사한다.[12][13] 실제로 정사에서도 아버지가 빼앗은 재산을 원래 주인들에게 되돌려주는 등 개념찬 행보로 백성들의 호감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작중에선 그의 치세 기간에만 유일하게 지방 민란이 그려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과도한 역역에 반발한 전주 관노들이 군대와 합세해서 반란을 일으킨 전주 관로의 난이 이 때 벌어졌다. 사실 민란은 꾸준히 터지고 있었고, 무인정권 초기의 반란은 애초에 반무신란이라서 민란이라고 하기도 좀 애매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 민란이라고 할 수 있는 서계민란의 세력이 김보당의 난에 참여한다거나, 교종승려들의 반란이 알고 보면 문벌귀족과의 연결고리에서 벌어졌다거나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과 하급무관, 군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경대승에 대한 신뢰는 황제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작 벼슬이 '장군'직에 불과하지만, 중방의 상장군, 대장군들이나 조정의 고관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소드 마스터에 훈남에, 일종의 사기캐……. 다른 무신집권자들과 달리 유학과 불교에 대한 식견이 있고 글도 잘 쓴다. 실제로 경대승은 학식과 덕량이 없는 자와는 사귀지 않았다고 전한다
정사에서는 만난 적이 없는 최충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최충헌은 그에게 고려를 백성을 위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문하시중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경대승은 그를 거절하며, "자네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라는 말을 했다.
죽은 뒤에 두두을 앞에 귀신의 모습으로 잠깐 등장하였는데, 백성들이 지배층의 수탈과 착취에도 모자라 장차 몽골의 침입으로 고통 받을 것을 생각하니 반역수괴가 될지언정 차라리 자신이 황제가 되었어야 했다며 괴로워한다. 이는 훗날 최충헌이 죽는 순간 꿈에서 지난 날의 자신과 대면하여 질타를 받는 장면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처음에는 박용우가 캐스팅된 것에 대하여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다. 함께 영화 무사에 출연했던 정우성은 박용우가 '경대승 역을 맡게 되었다.'고 하자 "뭐, 형이 장군이라곸ㅋㅋㅋㅋ" 수준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뭐 그럴만도 한 게 무사 당시 박용우가 맡았던 배역이 찌질한 역관이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박용우가 각성하여,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이상을 가진 젊은 무인상, 현실과 이상의 격차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면서 점점 고립되어가는 경대승을 잘 묘사하였고, 처음의 우려와 달리 오히려 무인시내 내 최고의 캐스팅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 경대승이 마지막에 눈을 감는 장면에서 눈물을 쏟는 시청자가 적지 않았다. 시청자 게시판에 경대승 추모글이 수없이 올라왔을 정도로 대단한 명연기였다. 98화에서 퇴장.
이 명연기 덕분에 후속작으로 불멸의 이순신이 발표되자, 팬들은 이순신 역으로 박용우를 원하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명배우 김명민을 알리게 됐지만. 그런데 박용우와 김명민은 2002년 '스턴트맨'이란 영화의 투톱 주연으로 캐스팅되어 촬영까지 진행했었다. 그러나 김명민의 부상과, 치료 후에도 흥행 전망에 비관적인 제작사와 투자사의 포기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 후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침체기를 겪은 두 배우가 나란히 대하사극 주인공 역을 맡아 인상 깊은 연기로 재기했다.
여담으로 정균과의 일전에서 정통 사극 최초로 와이어 액션을 찍은 캐릭터란 의의가 있다.- ↑ 지금도 경씨들의 본관은 청주다.
- ↑ 사실 이 때 쯤이면 이미 문벌 귀족들과 고위 무신들의 혼인동맹이 맺어지고 있는 때였다. 특히나 정중부는 문벌 귀족들의 말살을 원하지 않았던 인물로 자기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문벌 귀족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마구 날뛰는 이의방과 이고를 제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경대승이 한 것은 중방의 권위를 짓밟은 것 뿐이었고, 결국 권력자들의 견제기구만 없애 이의민과 최충헌이 절대권력을 지닐 수 있게 되어버렸다.
- ↑ 평민 출신으로 최고 집권자의 자리까지 오른 정중부는, 당시 무신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적' 가운데에는 정중부의 죽음에 반감을 가진 일부 무신들도 포함되는데, 이는 정중부 항목 참고.
- ↑ 이 기록은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등장하는 무신 집권자들이 최후를 맞기 직전, 자신이 제거한 전 집권자에게 냉소와 비난을 받는 연출의 모티브가 되었다.
- ↑ 김자격은 정중부 살해 당시 경대승측에 가담했던 인물이었고, 이때 일로 경대승은 김자격이 도방을 다스리도록 임명했다.
- ↑ 귀양을 간 사람은 4명이었다고 한다. 1명이 귀양을 간 건지 아닌지 불확실한데, 그렇게 따져도 5명이다. 나머지 95명은 고문을 못 견디고 옥사했다.
- ↑ 이 쪽은 중방의 수장인 정중부가 최대 정적이었다. 따지고보면 때로는 힘을 빌리기도 했으나 주로 서로 정적이었으며, 이의방이 알아서 중방을 존중한 것은 아니었다.
- ↑ 이 쪽은 중방의 수장 출신이었으나 지지층이 중방의 원로들이었다.
- ↑ 응양군 상장군으로 정중부 이후 중방의 수장이었다.
- ↑ 무인시대에서는 경대승의 이런 행동에 두경승이 중방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냐고 소리 치고, 중방을 무시하는 행동을 질타하기도 한다. 작중에서 두경승은 중방을 비롯해 무신들은 다시 무인으로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하고, 정치는 조정에 맡겨야한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중방의 권위도 중요시했다. 정확하게는 상명하복을 중시하며 고위 무인들의 상위기관은 중방은 정치는 조정에게 맡기고, 황실과 나라를 보위하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하지만 중방의 권위를 하급 무관이 무시하는 행태를 용납할 수는 없다는 것.
- ↑ 여담으로 극중에서 경대승이 이 무기를 창이라 칭하는 어이없는 대본오류가 있었다.
- ↑ 경대승도 권력에 중독되는 기미는 여러 번 있었다. 당장 거사를 성공한 후 강압적으로 변해 상관들에게까지 명령을 내리고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하고 두경승에게 천하권력을 쥐고 변해간다는 질책을 듣고 충격을 먹어 스스로 관직을 버려 권력에서 물러나려고 애를 쓰기도 하도록 묘사된다. 그 후에도 정치적 입지가 적다는 이유로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펼치고자 하는 이상에 빠져 황제의 사위가 되서 권력을 쥐려는 행보를 보이나 허승의 계략으로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후 자신이 권력을 쥐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어 스스로 고뇌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 ↑ 애초 정중부를 척결한 후부터 자신 역시 권력에 취해 저렇게 추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권세의 단맛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후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최고권력자이면서도 권력에 의해 흑화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는 반항아적 이미지도 보이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