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명
John D. Carmack II. 이드 소프트웨어의 공동창업자이며 기술 감독이자 게임 프로그래머. 컴퓨터 게임사에서 FPS 장르의 창시자격으로 인정되는 인물이다.
게임계의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 중 하나인 AIAS(Academy of Interactive Arts and Sciences)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으며[1] 1970년생으로 수상당시 나이는 31세였다. 시간이 지나서도 관리직으로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소규모 팀을 유지하면서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현재는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하고 오큘러스 리프트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2 전기
어린 시절 애플 컴퓨터를 접한 후 진로를 프로그래머로 정했다. 하지만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했는데 어머니는 카맥이 아이비리그 학교에 들어가 교수 내지는 대기업 고액 연봉자 등이 되길 바랬다. 어릴때부터 이런 기대를 받은걸 보면 이 때도 그런 기대를 받을 만큼 머리가 좋긴 좋았나보다 이렇게 어머니와 마찰을 겪으며 성격이 점점 어두워지고 공격적이 되어갔다. 14살 때 애플 컴퓨터를 손에 넣으려고 테르밋과 바셀린을 섞은 끈끈이를 유리창에 부착해 테르밋의 고열로 녹이는 방식으로 인근 학교에 침입[2]했다가 걸려서 소년원에 1년 동안 가 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 덕분에 Nerd 이미지가 있었음에도 무서운 놈으로 찍혀 주변의 불량배들도 웬만하면 안 건드렸다. 유도를 배운 것도 한몫 했다.
소년원에 들어가 있을 당시 의사가 '이 소년은 다리 위로는 뇌 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써서 무지막지한 천재로 검증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 저건 머리 좋다는 뜻도 있지만 '심장이 없다', 말인즉 '이 녀석은 감정이 없다'라는 의미로 한 말이다. 실제로 그 당시 보고서를 죽 읽어보면 카맥의 정신감정을 맡은 의사는 카맥의 지능보다도 무감정함에 더 신경을 썼다.
이후로 결국 집에서 나와 혼자 생활하게 된 고등학교 시절 쉐도우포지, 레이쓰 등의 게임을 만들어 소매점에 직접 판매하기도 했으며, 대학교에 2학기 정도 있다가 자퇴한 후 소프트디스크 잡지사의 부록 게임을 만드는 부서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풀 타임 프로그래머 인생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존 로메로, 아드리안 카맥, 케빈 클라우드 등 대표적인 초기 이드 소프트웨어 멤버들을 만났으며, 때마침 어포지 사(현재의 3D 렐름즈)의 CEO인 스콧 밀러의 사업 제안을 받고 소프트디스크사를 퇴사하여 이드 소프트웨어를 설립한다.
1990년, 이드 소프트웨어의 첫 작품인 '커맨더 킨(Commander Keen)'을 발매한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아류 게임이었지만[3] 당시 PC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스크롤을 선보였으며, 어포지에서 사용한 '셰어웨어' 방식을 이용해 판매하여 좋은 홍보 겸 수익고도 갖춘다. 이드 소프트웨어는 거대 유통사에 의지하지 않고도 게임을 발매할 수 있는 셰어웨어 방식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으며, 이후로도 울펜슈타인 3D와 둠을 셰어웨어로 유통한다. 하지만 둠이 셰어웨어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둠 2부터는 GT 인터랙티브 및 액티비전을 통해 게임을 유통하게 된다.
커맨더 킨 이후 3D 게임으로 개발 방향을 돌려 원시적인 FPS 게임인 '호버탱크 3D'를 개발했지만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회사 내부에서 '커맨더 킨'의 후속작 및 다른 횡스크롤 게임들을 발매할 동안 존 카맥은 더욱 개선된 3D 엔진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고, 1992년 5월 5일, '울펜슈타인 3D(Wolfenstein 3D)'를 발매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가 22세. 그로부터 1년 후인 23세때는 '둠(Doom)'을 내놓아 일약 스타가 된다.
풀폴리곤 그래픽을 보여준 퀘이크는 26세 때, 그로부터 1년 후인 퀘이크 2를 발매한 때는 27세였으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유명세를 타서 매년 열리는 이드 소프트웨어의 퀘이크콘이라는 공식행사에서 얼굴마담 역할을 하는 등 게임업계에 유명인사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이 후 둠 3에서는 충격적인 기술 데모를 선보여 전세계적으로 큰 각광을 받았다.
현재는 기술의 상향평준화로 인해 예전같이 특출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레이지 등의 게임을 통해 아직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뛰어난 프로그래머 중 한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요즘은 아무나 다 하는 것들을 이 사람은 90년도부터 이미 하고 있었던 사람이니...
2005년 무렵부터 휴대용 게임(주로 모바일폰 게임) 개발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둠 RPG를 시작으로 다수의 휴대용 게임을 개발하였다. 2010년에는 iOS용으로 레이지를 개발, 발매하였다.
3 개발 철학
단순함 및 최소주의의 신봉자이다. 개발자가 너무 많으면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오랫동안 적은 개발자를 고집하기도 했다. 그 결과 퀘이크 3는 10명, 둠 3는 25명 남짓의 적은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언리얼 토너먼트나 하프라이프 2 같은 당시의 경쟁 게임에 비하면 1/3 정도의 수준이다. 그러나 2008년 무렵부터 이드 소프트웨어도 이와 같은 소규모 팀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공격적인 확장을 거듭했고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하기 위해 제니맥스의 이드 소프트웨어 인수 제안을 받아들여서 현재는 제니맥스의 산하로 들어가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개발 효율이나 단순함에 대해 언급을 자주 하는 편이며, "요즘 게임들은 개발하기 너무 복잡하다."는 불만을 여러번 토로한 적 있다. 2005년 무렵부터 둠 RPG를 비롯한 모바일 게임을 만든 건 그 때문이었으며 "결과물이 빠르게 나오는 모바일 게임 개발이 더 재미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의 게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단순한 디자인도 존 카맥의 영향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존 카맥은 원칙적으로 오리지널 둠 이후 게임 디자인에서 손을 떼었으며, 그간 "게임 디자인은 내 영역이 아니다"라고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따라서 이건 직접적으로 존 카맥의 영향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개발진들의 성향도 존 카맥과 비슷해서라고 봐야할 것이다.
92년, 둠 개발 당시 언급했다는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스토리와 같다. 있으면 좋겠지만, 중요하진 않다." (Story in a game is like a story in a porn movie. It's expected to be there, but it's not that important.)라는 발언이 유명하다. 이 언급은 이드 소프트웨어 게임의 부실한 스토리를 비판하는 용도로 자주 쓰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그 당시의 상황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울펜슈타인 3D가 개발되던 당시는 기껏해야 386~486 컴퓨터가 사용되던 시절으로, 뭔가 대단한 것을 집어넣으려고 해도 성능이 발목을 잡아 구현하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관련 도서인 Master of Doom[4]에 쓰여진 울펜슈타인 3D 개발 일화 중에는 당초 원작 게임인 캐슬 울펜슈타인 처럼 사살한 나치 병사의 시신을 끌어다 숨기거나 수색해서 아이템을 얻는 등의 요소를 넣고자 했으나 막상 구현 후 존 로메로가 테스트를 해 보니 게임 진행이 너무 느려지는 등 영 만족스럽지 못했던 탓에 빼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당시의 이드 소프트웨어는 개발 인원이 총 6명이었던 소규모 개발사로 너무 많은 것을 시도했다가는 게임이 언제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드 소프트웨어의 간판 게임 디자이너였던 톰 홀은 자신이 쓴 100페이지로 구성된 깊이 있는 설정안을 게임에 반영하길 원했고, 그것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여긴 존 카맥은 해당 발언으로 톰 홀의 방향에 분명하게 반대 의사를 표한다. 그리고 카맥 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 개발자들도 반대하긴 마찬가지였다. 2011년의 인터뷰를 보면 정말 본인이 저 대사를 언급한 것이 맞는 듯하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사람들은 플레이가 불편해도 스토리가 훌륭한 게임 보다는, 스토리는 그저 그래도 플레이하는 맛이 있는 게임을 더 선호하는것도 사실이다. 당장 둠과 퀘이크의 성공부터가 그렇고, 바이오하자드나 데드 스페이스 같은 명작 게임들도 종종 컨트롤의 거지같음(...) 떄문에 까이는게 현실이다.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 같은 게임도 스토리는 진짜 더럽게 불친절하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게임 자체는 상당한 무게감이 있고, 오히려 부족한 스토리를 팬들이 프롬뇌로 알아서 충족시키고 있다(...). 한국에서도 서사적인 게임 보다는 그냥 플레이하는 맛이 사는 게임이 주로 흥행한다. 메이플스토리 같은 경우는 메이플'스토리'라면서 서비스 개시 후 장장 6년 넘게 스토리가 없었음에도 잘만 흥행했었다. 카멕의 발언이 아주 근거없는 억측은 아니였던 것.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들인 슈퍼 마리오 시리즈와 마인크래프트같은 경우만 봐도, 슈퍼 마리오의 스토리야 쿠파가 피치 공주 납치해서 구하러 가는 걸로 끝이고, 마인크래프트는 스토리 자체가 없다[5] 단, 판매량이 곧 그 게임의 재미를 증명하는게 아님은 이해해야 한다. 단지 접근성이 높아 잘팔리는 경우 또한 많기 때문. 스토리가 단순하다는 것 또한 접근성을 높인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위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확대해석으로, 실제로 스토리가 없어서 망친 게임도 얼마든지 있는게 사실이다. 후반기에 들어 까이기 시작한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라든가, 전투는 잘 만들고 엔딩 때문에 욕먹은 매스 이펙트 3 라든가. 위에서 언급된 다크소울 같은 게임들은 그저 스토리 외의 재미가 충실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던 것 뿐이고 스토리 또한 게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은 절대 부정할 수 없다. 라스트 오브 어스나 GTA5 또한 스토리가 엉망이었다면 지금만한 극찬은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스토리가 부족하더라도 게임의 재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사실이나, 스토리가 훌륭하다면 게임의 재미를 훨씬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둠은 그저 액션을 극대화시킨 게임이기 때문에 깊은 서사가 적절하지 않았을 뿐 우리는 하프라이프의 스토리텔링이 게임 역사를 바꿨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자칫 일부 사례로 잘못된 판단은 주의하도록 하자.
4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1995년 울펜슈타인 3D의 소스 공개를 시작으로, 자신이 개발한 엔진의 소스를 GPL 라이선스 하에 공개하고 있다. 1997년에 둠, 1999년에는 퀘이크의 소스 코드를 공개했으며, 이어 2005년에 퀘이크 3, 그리고 2011년에 둠 3의 소스 코드를 공개했다. 퀘이크 3부터 소스 코드 공개 주기가 길어진 것은, 엔진을 라이센스한 회사들이 이른 소스 공개로 피해를 입는 걸 예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비록 소스 코드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되었으나,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프로그래밍 지식을 필요로 한다. 기본적으로 C++, OpenGL, Win32API, OOP에 대한 이해가 어느정도 있어야 비로소 코드가 눈에 좀 들어올 것이다. 또한 오픈 소스로 공개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아무데나 써도 되는 것은 아니다. GPL 라이선스로 공개되었으므로 엔진과 결합되는 게임 소스 코드도 함께 공개해야만 하는 제약이 걸려버린다. 게임 소스 코드를 공개하기 싫다면 여전히 이드 소프트웨어에 라이센스비를 지불해야 한다. 원래 프리웨어와 오픈 소스는 다른 개념이다. 프리웨어는 아무나 무료로 쓸 수 있는 것이지만, 오픈 소스는 말 그대로 소스가 공개만 되어 있을 뿐 라이센스에 따라 사용 조건이 있고 그 조건을 피하기 위해서는 원작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존 카맥은 특허출원이 기술 발전을 저해한다며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존 카맥의 기술이 큰 주목을 받던 90년대 중반, 특허를 내는게 어떠냐는 동료에 말에 "나보고 특허 내라고 하면 회사 그만 둔다."고 엄포를 놓은 일화가 알려져 있다. 특허에 대한 반대는 인터뷰나 키노트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5 하드웨어에 대한 비평
존 카맥은 새로운 하드웨어에 대해 거침없이 비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3D 가속 카드와 관련된 일화로는 글라이드 3D(Glide 3D)라는 전용 그래픽 처리기술을 갖고 있었던 부두 그래픽카드에 대해 "글라이드 3D는 어려우니까 안 쓸 거다."라고 말하며 타격을 입힌 일이나, "지포스 4 MX는 둠 3를 돌리기에 좋은 선택이 아니다."라며 혹평을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당연한 것이, 지포스 4 MX에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셰이더(지포스 3에서 도입)가 없었다. 지포스 2에서 이름만 바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효과 측면에서는 사실상 지포스 3보다도 못했다. 물론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또한 콘솔 특히 플레이스테이션 3에 대해서는 유독 많은 혹평을 남기며 플빠의 공적이 되었으며[6] , 상대적으로 호평해 왔던 엑스박스 360에 대해서도 디스크 3개로 게임 발매시 과도한 로열티를 부과한다며 'DVD 용량은 충분치 않다'는 단골 떡밥을 다시 환기시킴과 더불어 마소의 비즈니스 정책을 깠다.
콘솔은 주로 제한적인 성능과 어려운 제작 환경 때문에 비판을 많이 했는데 2006년 퀘이크콘에서 그가 두 콘솔 기종을 비교한걸 들어보면 엑스박스 360을 지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잘 보면 "둘 다 병신이고 PC가 최고임"이라는 그의 논지를 찾기 쉽다. 그러나 하드웨어 스펙을 제외하고 개발환경만 따지면 엑스박스 360의 개발환경이 무척 편하다며 매우 호평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이지도 엑스박스를 리드 플랫폼으로 제작했다.
그 외 PhysX 물리 가속카드에 대해서 "이건 쓸데 없는 짓이다"라며 매우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DX12에 로우레벨 물리처리가 포함되어 쓸모없게 됐다
2011년 들어 PC에 대하여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PC 그 자체보다는 PC 제조사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픽 카드의 성능은 충분히 빠르니 하드웨어 회사들이 소프트웨어 회사들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란 인터뷰를 한 바 있다.(브링크 관련돼서 한 말 같다. 또한 15년간 고수해왔던 OpenGL에 대해 이제는 D3D가 더 좋지만 귀찮아서 그냥 쓴다'는 논지의 발언도 했는데, 그로부터 몇달 후 발매된 레이지가 AMD 하드웨어에서 헬게이트를 연 후 아예 맘이 돌아섰는지 D3D로의 전환을 암시하기도 했다.
6 로켓 개발
2000년부터 아르마딜로 에어로스페이스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로켓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X Prize 컵에 대한 기사를 읽었고, 완전히 필이 꽃혀서 바로 로켓 개발에 착수했다고. 그에게 동기부여를 했던 X Prize 컵은 이미 2004년에 마소 공동창업자 폴 앨런의 막대한 자금력을 등에 업은 다른 팀이 우승했지만 그 이후로도 로켓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결국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8년과 2009년, NASA의 챌린지 프로그램을 통과하며 85만 달러의 상금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2013년까지 들어간 개발비만 800만 달러는 족히 넘는다. 게다가 모든 개발비는 존 카맥의 주머니로부터 빠져 나간다.
취미 생활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탓인지, 그가 오랫동안 애지중지하던 개조한 페라리를 모두 팔고 현재는 로켓 부품 수송을 위해 밴 한 대를 구입하여 굴리고 있다. 그러나, 2013년 1월 들어서 회사가 점점 어려워지더니, 결국 로켓 개발을 접는다고 한다.
7 오큘러스 리프트
2013년 8월 7일, 오큘러스 리프트의 CTO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드 소프트웨어의 자문 역은 계속 맡는다고 한다.
2013년 11월 22일,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퇴사한다고 밝혔다. 이드 소프트웨어에 기술 자문으로 계속 남고 싶었지만 일이 그렇게 풀리지 않았고, 관심사를 나눠서 집중하기 힘드니 잘 된 것 같다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2014년 8월, 마인크래프트의 놋치가 페이스북의 오큘러스 리프트 인수 후 마인크래프트로의 포팅이 취소되자 짜증을 낸 트윗에 '코드만 주면 다시 잘 돌아가게 해 줄께'라고 쿨내나는답변을 남겼다. 관련기사
8 사생활
부인인 '캐서린 안나 강'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둘은 1997년에 처음 만났는데, 안나 강은 이드 소프트웨어 사무실에 방문하여 여성 퀘이크 대회의 스폰서를 맡아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했고, 존 카맥은 그에 응했지만 기껏해야 수십명 정도의 작은 랜파티 수준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안나 강이 주최한 퀘이크 대회에는 2000명의 사람들이 운집했고 존 카맥은 그녀의 능력에 감명받아 반했다는 이야기. 둘은 2000년에 결혼하여 2004년, 2009년에 각각 한 명의 아이를 낳았다. 캐서린은 이렇게 카맥과 인연을 맺은 후 게임계에 뛰어들어 머시니마(Machinima. 쉽게 말해 게임 관련 종합 동영상 업체)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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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것보다 저 개 눈이... 분노 바이러스 감염견이 아닙니다[7]
왼쪽부터 안나 강, 나인 인치 네일스로 유명한 트렌트 레즈너, 그리고 카맥이다. 트렌트 레즈너는 둠 광팬이라고 하며, 실제로 퀘이크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다. 개이름이 데이지인데 둠가이의 애완 토끼이름도 데이지다.
고사양의 폭력적인 게임을 만들지만 정작 본인은 닌빠 기질이 농후하다. 하는 게임의 대부분이 닌텐도 게임이라고. 이건 간단하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존 카맥 본인의 믿음과도 관련 있어 보이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드 소프트웨어 게임이 퀘이크 3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대난투 스매시 브라더스 DX는 왜 재미있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대난투 스매시 브라더스 시리즈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대난투 시리즈가 원래 평이나 인기에 비해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게임 시리즈다. 참고로 그가 가장 최고로 뽑는 게임은 메가드라이브의 소닉 더 헤지호그 시리즈이라고 한다.
유도와 주짓수를 배운적이 있다. 이드 소프트웨어를 방문한 쇼 호스트를 업어치기로 제압하고 목 조르기를 시전한 적도 있다
2010년 중순을 기점으로 트위터를 시작했다.
9 기타
집중력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드 소프트웨어의 초창기 시절 프로그래밍에 심취하여 화장실 외에는 컴퓨터 앞에서 한시를 떠나지 않고 먹고 자고 하면서 며칠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존 로메로가 장난끼가 발동해 카맥이 있는 옆 방에서 대놓고 포르노를 틀어서 그를 컴퓨터와 떼어내 보려 했는데 카맥은 시끄럽길래 잠시 코딩을 멈추었다가 '음...' 하는 특유의 콧소리를 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컴퓨터 앞에서 하던 걸 했다고 한다.고자 그는 포르노보다 흥분되는 게임을 만들어서 그렇다
비디오 게임 사이트인 루리웹에서는 레이지의 PS3 30프레임 소동이나 PS3 개발환경에 대한 불만을 표한 사건 때문에 플빠로부터 3류 프로그래머로 불리곤 했다. 그런데 누군가 오타였는지 잘 몰라서였는지 '13류 프로그래머'라고 지칭한 것이 크게 흥해서 'n류 프로그래머'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으며(n값은 인기와 평판에 따라 오르내린다.) 현재는 18류 또는 그 이하까지 내려가는 등 여러가지로 말 장난의 소재가 되고 있다. 신작 레이지 개발과정에서 PS3의 블루레이 용량을 추켜세웠는데 정작 발매된 게임에서 텍스처 로딩이 개판이자 2^10류 프로그래머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이에 휘말려서 코지마 히데오 등 다른 개발자까지 'n류 개발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한다. 하필이면 레이지 PC판이 엉망일 때 존 카맥이 "PC를 게임 개발의 리드 플랫폼으로 보지 않는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해서 더 까였다.
퀘이크 2에서는 숨겨진 이스터에그 공간중 하나에서 (페라리와 함께한 사진, 둠 로고등이 있음) 그의 머리가 나오는데 아이템으로 취급된다. 최대 체력을 1올려주는 아드레날린 8개를 한꺼번에 먹는 취급이라 존 카멕 머리를 먹으면 최대 체력 8이 올라간다. 근데 이쯤되면 거의 최후반부에 입수하는 아이템이라...
둠 3에 목소리로 출연하기도 했다. 자세한것은 둠 3의 생존자 항목 참고.
퀘이크를 제작할때 실리콘 그래픽스/인터그래프사의 인터뷰 28hd96라는 1920×1080(!!!)해상도가 지원되는 28인치 16:9 와이드스크린 모니터로 제작했다.[8]- ↑ 위에서 말했듯 FPS장르의 기반을 새로 확립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큰 업적이다.
- ↑ 사제 폭탄을 제조했다는 루머도 있지만 유리창을 녹인 쪽이 맞다.
- ↑ 실제로 커맨더 킨은 이드가 슈퍼마리오3를 PC로 이식하여 닌텐도에 보냈지만 돌아온 대답은 '훌륭한 작업물이나 우리는 PC시장에 관심이 없다'여서 마리오 PC판의 엔진에 캐릭터와 레벨 디자인을 바꿔서 만든 것이었다.
- ↑ 국내 출판 명: 둠 - 컴퓨터 게임의 성공 신화 존 카맥 & 존 로메로
- ↑ 텔테일 게임즈의 마인크래프트 스토리 모드가 있기는 하지만 정식 스토리는 아니고, 텔테일 게임즈에서 짠 자체 스토리이다
- ↑ 하지만 플삼의 프로세서가 복잡한 병렬 연산으로 성능을 뽑아내는 해괴한 구조때문에 개발자들로부터 까일 만한 명분을 준건 사실이다. CELL-Broadband Engine 항목 참조
- ↑ 참고로 개의 눈이 빨간 이유는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을 때 흔히 일어나는 적목현상 때문이다.
- ↑ 요즘에야 이 해상도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저 시기는 1995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