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국 7대 고도(古都)란 시안(西安, 서안. 즉, 옛 장안), 베이징 시(北京, 북경), 뤄양(洛陽, 낙양), 난징(南京, 남경), 카이펑(開封, 개봉), 항저우((杭州, 항주), 옛 임안(臨安)), 안양(安陽, 옛 은허(殷墟))을 아우르는 호칭으로, 중국 역사상 국가의 중심지인 수도로서의 역사가 깊은 지역을 뜻한다.
물론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수도가 있었고, 그 중에는 저 일곱 도시에 전혀 밀리지 않는 곳(대표적으로 청두, 즉 성도(成都)라든가)도 있지만 저 7개 도시가 대표적인 중국의 고도로 대표성을 지닌다. 해마다 고도(古都)를 택해 열리는 중국고도학회(中國古都學會)의 회의가 저 7곳을 돌아가면서 열리기 때문. 이 학회는 중국 도시사 연구 방면에서 최대 규모의 학회로, 연간 잡지인 <중국고도연구(中國古都硏究)>를 간행하는 등 중국에서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하다.
2 선정 역사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에 관한 논의는 1920년대에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시안, 베이징, 뤄양, 난징, 카이펑, 이렇게 해서 5대 고도가 선정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모두 수백년동안 수도였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가장 수도의 역사가 짧은 카이펑도 후량, 후진, 후한, 후주, 북송, 금나라 합쳐 231년 동안 수도였고, 그중 북송은 통일왕조였다. 가장 역사가 긴 시안의 경우 수도의 역사가 무려 1000년이 넘는다.) 따라서 이 5개 도시는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로 인정받을 만 했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 5대 고도에 항저우를 더해야 한다는 6대 고도설이 등장했다. 이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맞추어 상당한 지지를 얻었고, 1988년까지 인정되었다. 이러한 6대 고도설이 제기된 배경은 남송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거기다 당시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이민족 왕조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남침에 대향한 남송의 역사적 경험이 환기(즉 '일본군 = 여진 = 몽골, 남송 = 현재(1930년대)의 중국'이라는 인식) 된 결과 한족 전통 문화의 근거지로서 항저우의 의미가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항저우가 들어가니까 다른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아니 우리 도시 역사가 항저우보다 못한게 뭔데?'하는 인식 하에서 '우리 도시도 고도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특히 그 선두에 선 것은 안양이었다.
명나라 주원장에게 반향했다가 초토화돼서 오늘날에는 별로 크지도 않은 이 도시가 '우리가 항저우만 못한게 뭐냐'는 주장을 할 수 있게된 것은, 다름아닌 은허의 발굴때문이었다. 1920~1930년대 북경의 중앙연구원 주도하에 은허가 발굴된 결과, 안양은 단숨에 우리는 중화문명의 시초인 은나라의 수도라고 내세울 수 있게 되었고, 바로 이 점을 내세워서 '우리가 지금은 좀 초라하지만 수도였던 역사로 따지면 항저우에 못하지 않거든?'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
이러한 이유에서 제기된 7대 고도설은 1981년 상해 복단대학 역사지리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찬반양론이 이어지다가 결국 1988년 10월, 중국고도학회 제6차 대회가 안양시에서 열리게 되면서 공인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7대 고도라고 하지만 사실상 5대 고도 + 2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의 다섯개는 대부분이 납득하지만 뒤의 두개는 아무래도 비슷한 격을 지닌 고도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3 각각의 도시 소개
3.1 시안
장안이라고 불렸던 도시. 중국 고대~중세까지 가장 역사가 깊은 고도. 수도로서의 역사가 1000년을 넘는다.
서주시대의 수도였던 호경부터 수도로 이름을 올렸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최초의 통일왕조였던 진나라의 수도 함양도 이 곳에 있었고, 항우가 파괴해 버렸지만 초한쟁패시기를 거처 천하를 재통일한 전한이 다시 장안으로 재건해 수도로 삼았고, 신나라때도 이쪽이 수도. 후한이 세워질 당시 왕망과 경시제, 적미군의 트리플 콤보로 또한번 초토화되면서 뤄양에 수도의 자리를 빼앗겼지만 이후에도 관서, 관중지역의 중심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오호십육국시대에는 이 시기 서쪽지역에 성립된 국가였던 전조, 전진, 후진의 수도였고, 북위시절엔 약간 뒤로 밀렸다가 북위의 분열로 서위가 성립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 서위에서 북주까지 전한대 장안을 수도로 삼았으나 수나라때 수문제가 전한대 장안성에서 약간만 자리를 옮겨 대흥성을 쌓았고, 당나라때 대흥성이 다시 장안으로 개칭되어 수-당대 장안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망하면서 수-당대 장안성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이후 지력의 쇠퇴가 겹치면서 다시는 수도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된다.
고대로부터 시작해 수 차례에 걸쳐 도읍이 된 곳이지만, 한편 왕조가 바뀔 때마다 수 차례 파괴되고 다시 지어지면서 그 때마다 실제 도읍의 위치가 조금식 바뀐 곳이기도 하다. (진나라의 함양과 한나라의 장안, 수/당의 장안은 각각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3.2 뤄양
중국 고~중세에 시안에 맞먹는 위상을 차지한 고도.
황하의 지류인 낙수가 남쪽에 흐르고 있어 '낙(洛)' 또는 '낙읍'으로 불리고, 도시의 입지가 워낙에 좋아서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때부터 주요 도시로 거론되던 곳. 서주의 수도 호경이 견융의 공격으로 쑥대밭이 되어 버리면서 동주가 이쪽으로 천도하여 춘추전국시대 명목상이나마 종죽국인 주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전한시대에도 유방이 처음에 낙양을 수도로 삼으려 할 정도였고, 후한은 아예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동탁의 천도 과정에서 쑥대밭이 되었지만 조조는 이지역을 꾸준히 복구했고, 선양을 통해 위나라가 세워지면서 복구한 낙양을 다시 수도로 삼았다. 이후 서진까지 이어진다.
오호십육국시대초기 수도로 번창하던 낙양은 다시 이민족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낙양은 대도시 중 한곳으로, 몇번이나 동진의 북벌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북위가 선비족의 한화정책을 밀어붙이는 와중에서 낙양은 또다시 수도로 주목받게 되었고, 효문제에 의해 이전보다 더 큰 대도시로 확충되어 수도가 되었다. 이후 북위가 분열되고, 시안을 수도로 한 수나라에 의해 재통일되었지만 여전히 낙양은 제2수도, 즉 '동도'로 불리며 종종 황제와 조정이 이동하여 정무를 보기도 하였다. 이후 오대십국시대에 후량은 이지역을 서도하남부로 삼고 제2수도로 중시하였으며, 후량을 멸망시킨 후당도 이 곳을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이 때를 마지막으로 이 지역은 수도가 되지 못한다.
3.3 베이징
중국 근세~현대까지 가장 수도로서의 역사가 깊은 곳.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였던 계, 또는 연경이라고 불리면서 주요도시로 대두. 이후 전연, 후연, 북연 등 동북쪽에 자리잡은 왕조들이 이지역을 수도로 삼았다. 그래도 이시기까지는 아직 지나치게 동북쪽으로 몰려 있고 하북을 넘어선 지역과의 연계망이 원활하지 않아 수도로서 적당한 편은 아니었으나 수양제가 이지역을 대운하의 북쪽 종점으로 삼으면서 여타 지역과의 수송, 통신망이 갖춰지게 되었다. 당나라때도 동북쪽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중요시되었고 안록산의 난 당시 안록산의 핵심 거점도 이곳.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이 지역은 연운십륙주에 속하여 요나라에게로 넘어갔고, 마찬가지로 5경 중 한곳이자 매우 핵심적인 지역으로 중요시되었다. 북송은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매번 실패. 이후 금나라가 들어서면서 화북까지 빼앗긴다. 금나라는 이지역을 수도로 삼아 중요시하여 동북변 관리의 중추로 삼았다. 그러나 이렇게 남북 대치형국이 펼처지면서 수양제의 대운하로 구축되었던 연계망이 끊겼다.
이 연계망을 다시 잇고, 베이징을 완전한 수도로 만든 게 원나라, 원나라는 대운하를 철저하게 복구하여 강남의 물자를 운송할 체계를 완성했고, 베이징(대도(大都))을 기점으로 중국 전역을 연결하는 역참제도를 완비하여 베이징을 북부의 중심도시에서 중국 전체의 수도에 걸맞는 도시로 부흥시켰다. 이렇게 수도로 완비된 것을 이후 중국 통일국가인 명나라, 청나라도 아주 잘 써먹었고, 신해혁명 이후에도 중국의 수도 하면 베이징으로 인식될 정도였으며, 오늘날까지 중국의 수도가 되고 있다.
3.4 난징
중국 강남 정권의 고도.
최초로 이지역이 이름이 거론된 건 진시황의 천하 순행 시기. 진시황은 이지역이 제왕의 기운이 느껴진다면서 소나무를 빽빽히 심고 '금릉(金陵)'이라 불리던 이곳을 '말릉(末陵)'이라고 이름믈 바꿨다. 이지역이 수도가 된 것은 삼국시대 손오에 의해서이다. 손권은 이지역을 수도로 삼고 이름도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의 건업(建業)으로 바꿨다.
이때부터 난징은 강남 지역에 세워진 한족 왕조인 육조시대의 주 무대가 되여 역사에 오르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피휘를 위해 건강(建康)이라고 이름이 개칭된다. 그리고 통일왕조인 당나라 시기에 이름이 다시 금릉(金陵)으로 원상복귀. 오대십국시대에는 십국에 속하는 오와 남당의 수도였다.
14세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을때 최초의 수도를 이곳으로 잡았다. 이때 베이징을 '북경'이라고 부르면서 이지역이 자연스럽게 '남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가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제2수도가 되었고, 이후 북경이 완전한 수도로 확정되면서 수도의 자리에서 밀려난다. 이후 남명이 이지역을 기점으로 버텨보려고 했지만 뭐 제대로 되지 않고 금세 몰락. 그래도 대도시는 대도시라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혼란기때 남경을 점령하고 이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남경정부가 몇번 성립되었던 적이 있다.
3.5 카이펑
오대십국시대~북송의 수도. 잠시 금나라의 수도였기도 했다. 옛 이름은 대량, 변, 변량, 변경으로 불렸다. 위의 네 도시에 비해 역사가 떨어지지는 않지만 몰락과 중흥을 반복했다.
원래 전국시대 위나라의 수도였다. 이후 진시황의 초토화 명령때문에 몰락했다. 수나라때 다시 복구된다.
당나라를 멸망시킨 주전충의 봉지가 이곳이었기 때문에 주전충은 후량의 수도를 카이펑으로 잡았다.(동도개봉부) 이후 후당시대에 잠시 낙양이 수도가 되었으나 다시 카이펑이 수도가 되었고, 이는 북송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멸망하면서 그 지위를 상실.
지리적으로는 양쯔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 남부구간의 북쪽 종점이고, 황하에서 베이징까지 이어지는 대운하 북부구간의 출발점이라는 위치를 지닌다. 광활한 평야라 방어에 취약점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수도가 될만큼 도시가 번창한 건 이때문.
3.6 항저우
남송의 수도. 삼국시대에는 회계, 남송시대에는 임안으로 불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앞선 5개 고도에 비한다면 격이 좀 떨어지는 감이 있다. 남송의 수도로 번창했으며, 지리적으로는 대운하의 남쪽 종점이라는 장점이 있다. 난징보다 약간 남쪽에 위치.
3.7 안양
화북 평원의 주요 도시. 삼국시대의 업군이 바로 이곳
은허의 발굴로 이 지역이 상나라의 수도임이 확정되면서 7대 고도에 이름을 올리게되었다. 이때문에 이전까지 사실상 은나라의 수도 취급이던 뤄양은 그 지위를 빼앗겼다.(...) 어쨌든 은나라 시기의 수도로 번영했고, 이후에도 주요도시로 거론되었다.
전국시대에는 위의 영토였고, 후한시기에 화북 평원의 중심지로, 기주의 주도가 되어 번영했다. 하북의 패자였던 원소, 원가를 제거한 조조가 이지역을 자신의 세력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뤄양의 압도적인 위상에 밀릴 수밖엔 없었고, 위나라가 건국된 후 수도는 뤄양이 되었다.
다시 이 지역이 수도가 된 것은 북위의 분열 이후. 동위의 실권자인 고환은 업을 수도로 삼았고, 이는 북제시기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수나라의 통일 후에 그 지위를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