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충

후량의 역대 황제
20대 애종 이축초대 태조 주전충2대 영왕 주우규
묘호태조(太祖)
시호신무원성효황제(神武元聖孝皇帝)
연호개평(開平, 907년 4월 ~ 911년 4월)
건화(乾化, 911년 5월 ~ 913년 1월)
주(朱)
전충(全忠)
생몰기간852년 12월 9일 ~ 912년 7월 18일
재위기간907년 ~ 912년

1 개요

오대십국시대 후량의 건국자로 태조. 생몰년도 852~912.
어찌되었든 국가를 창건했으므로 태조란 묘호가 붙었지만, 과연 이런 인물에도 태조란 말을 붙일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인 개막장 군주다.

본명주온(朱溫). 본명이나 당나라 정부에서 하사해준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이나 모두 많이 쓰이는 한자라서 황제가 되어서는 피휘를 위해 황(晃)으로 개명했다.

2 유년기

아명은 삼(三). 셋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태생이 본디 미천하여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씨에 서민 출신... 어? 어릴 적 부친이 죽자 가족과 함게 먼 친척뻘인 유숭 밑에 몸을 의탁한다.[1]

3 청년기

하지만 주온은 하라는 농사는 안하고 학문과 무예에 흥미를 보였다.평생 농투성이로 썩는 것보단 낫지. 장성하자 이미 멸망 직전의 부패한 정권에 불만을 품은 황소가 대대적으로 난을 일으키자 형과 함께 참전, 그 밑에서 두각을 세운다. 880년 황소는 파죽지세로 중앙 정부군을 물리치고 이에 놀란 황제 희종사천() 지방으로 달아났다. 황소는 장안을 함락시켜 국호를 '대'라 하고 황제에 오른다. 하지만 오합지졸들을 끌어모은 정권이 오래 갈 일은 없는 일. 곧 당 왕조에 충성하는 사타족[2] 출신 독안룡 이극용이 군대를 이끌고와 장안을 공격한다.

더욱이 처음부터 황소는 인망이 있었던 주전충을 경계하고 있었다. 당연히 주온도 그 일을 민감하게 알아채고 있었다. 이때 에 있던 당나라 장군 왕중영이 주온에게 밀사를 파견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소 교활하고 야심이 있던 주전충은 왕중영과 내통하게 되었다. 그 후 주전충은 장안에서 황소를 배신하고 이들을 격퇴하여 몰아내었다. 이 전공으로 주온에게는 왕중영은 물론 당나라로부터 사례가 내려졌다. (황소는 3년 후에는 장안을 버리고 이듬해 산동의 태산 부근에서 자결하였다.)

당나라 조정은 주온을 양왕(梁王, 량왕)으로 봉하고 좌금오위대장군-하중행영부초토사의 지위와 함께, 당나라에게 충성하라는 의미가 있는 '전충'(全忠)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후 그는 당나라 무장으로서 주전충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나...

4 장년기

4.1 당을 멸하다

황소까지 무찌르고 두려울 게 없는데다가 이미 오늘 내일하는 유약한 왕조를 보며 주전충은 황제 희종이 하사한 이름인 '전충(全忠)'을 멋대로 인왕중심(人王中心)(...)이라고 해석한다. 당시 환관들이 황제 소종을 몰아내고 그의 장남 이유(李由)를 황제로 세우자 껀수를 잡은 주전충은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재상 최윤을 비롯한 조정대신들과 환관들을 학살하고 핍박하는 등 온갖 간행을 일삼는다. 특히 환관들은 궁궐 업무를 위한 최소한의 인력을 위해서 어린 환관 30명만 남기고 나머지가 모두 숙청되어, 결국 환관은 송나라 때까지 세력이 커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종을 협박하여 낙양으로 강제 천도할 것을 강요한 후, 장안을 무참히 파괴했다. 그리고 장안 궁궐에서 뜯어온 자재들을 이용해서 낙양에 다시 궁궐을 세우게 했다.

주전충은 하루빨리 황제가 되기 위해 일단 소종의 자식들을 대거 죽였고 자객을 보내 소종을 시해하라고 했는데 소종은 도망치다가 궁궐 기둥 아래서 결국 자객에게 시해당했다. 주전충은 소종의 장례를 관장하면서 거짓으로 울고 통곡하면서 소종의 9남 애종[3]를 세웠다. 이때 당의 명사 소리를 듣던 고관 38명을 낙양 교외의 백마역(白馬驛)에서 황하던져버리게 한 사건은 당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써 회자되는 사건으로 주전충의 참모였던 이진(李振)의 건의에 따른 것인데, 이진은 앞서 진사(進士) 시험에 몇 번이나 낙방했던 경력이 있어서 진사 출신이나 문벌귀족으로써 당의 고급 관료가 된 자들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주전충에게 "저것들은 더러운 주제에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잘난체하는 놈들인데, 이번 기회에 황하에 던져서 아주 탁류(濁流)로 만들어 버리시죠?"라고 부추겼고, 주전충은 웃으며 허락했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주전충은 마지막 황제 애종로부터 선양이라는 미명하에 기어코 제위를 찬탈했고 애제를 조주[4]로 보냈다가 이듬해 사람을 보내 독살했다.[5]

4.2 이극용을 몰아내다

한편 이 와중에 주전충은 황소에 대해 함께 싸웠던 이극용과 당 조정 내부에서의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원래 이극용은 술자리에서 주전충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치욕을 주었고 이에 주전충이 병사를 이끌고 하동군을 습격하는 일이 벌어졌기에 둘의 대립은 예견된 일이였다.

이극용은 전쟁에는 강했으나 정략에는 주전충에게 뒤졌고, 또한 그의 갈까마귀군도 그 용맹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난폭함으로 변했기 때문에 조정의 평판은 좋지 못했다. 결국 주전충은 이 싸움에서 승리해 이극용을 쫓아버린다.

그러나 그의 세력범위는 화북 일부에 한정되었고, 각지에는 -후한, 후한-삼국 교체기때와 마찬가지로 절도사라는 명목하에 각지에 군벌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전충의 후량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히 주전충에 의해 패배한 이극용은 변경에서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편, 908년 1월에 이극용은 주전충 타도를 아들 이존욱에게 부탁하고 병사했다. 향년 53세였다. 이극용은 죽을 때 존욱에게 화살 3개를 쥐어주며

"유인공[6]부자가 나를 배신하고, 거란야율아보기 또한 나와의 맹약을 배신했다. 주전충은 나에겐 원수와도 같은 존재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3개의 화살 중 첫 번째는 유인공에게, 두번째는 거란에게, 3번째는 주전충을 멸망시킬 때 각각 사용하거라. 이것이 내가 희망하는 소원이다!"

라고 말했다. 훗날 이존욱은 내분이 일어난 유인공을 멸망시키고 거란을 정벌했으며 골육상잔으로 막장테크를 타고 있던 후량마저 멸망시켜 아버지의 유언을 모두 지켰다.

5 황제 즉위 후

황제가 된 주전충은 당의 멸망이 부패한 조정 대신에게 있다고 판단하고 과거 당의 고관들을 싸그리 잡아들여 모두 끔살시킨 뒤 황하에 그 시체를 버렸다. 더더욱이 당현종처럼 자신의 양자의 아내, 즉 며느리와 간통하는 등 여러모로 막장이였다.

한편 이존욱은 아버지 이극용의 원한을 가슴깊이 둔채 전쟁준비에 힘을 쏟았는데, 마침 주전충은 향락을 즐기던 와중 정적의 병사소식을 듣고 '앗싸 좋쿠나 그놈 땅도 내가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대군을 보냈으나... 결국은 후량군은 완패, 참패에 쓰리런을 쳐먹고 패주했다.[7]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며느리와의 간통도 마다하고(!) 1년간 군사훈련에 힘쓴 뒤 자기가 직접 전쟁에 나갔으나... 역시 참패하고 화병으로 병석에 누웠다.

한편 주전충은 친자 외에도 많은 양자를 두었는데 그 중 주우문을 총애했다. 주우문을 후계자로 점찍고 있었는데 그 이면에는 주전충과 열심히 간통하던 며느리 중의 하나가 주우문의 처 왕씨였기 때문이었다. 아내를 줬으니 후계자로 갚는다 912년 연로한 주전충은 병이 들어 제위를 양자인 주우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 때 불만을 품은 친아들이자 셋째 아들 영왕 주우규(877~913)가 침실에 몰래 들어가 주전충을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하였다. 결국 일생을 비겁한 꾀와 막장으로 살았던 주전충도 친아들 손에 의해 목숨이 끊어졌으며 이후 주우규는 사람을 보내 주우문도 죽였다.

6 사망 후

하지만 주우규 또한 아버지와 똑같은 향음을 누리다가 겨우 1년 만에 오래 호사를 누리지 못했고 결국 넷째 아우 균왕 주우정(881~923)에게 살해당한다. 말제 주우정은 사람 됨됨이가 공손하고 검약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능했으며 형제들이 역모를 일으키자 그 후부터 황족을 경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끼리의 권력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8] 2년 후, 또다시 형제들이 역모를 일으키는데 915년 10월, 막 잠자리에 들던 주우정은 동생이 휘두른 칼에 베일 뻔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후량은 형제들의 황권 쟁탈로 점점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이 아버지의 원수이기도한 연왕을 칭하던 유인공을 공격하여 그 나라를 병합해 후당을 세웠다. 이존욱은 후량을 점점 잠식해 나가다가 결국 후량의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게 된다. 개봉이 함락되자 주우정은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목을 찔러 자결했고, 이로서 후량은 3대 16년만에 멸망했다.

이존욱은 주씨 황족들을 모두 도륙냈으며 주전충의 무덤도 이존욱의 명령으로 부관참시되었다. 이 때 그의 유골은 길에 버려졌다가 유골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흩날리는 쇄골표풍을 당했다. 일찍이 주전충은 이존욱에게 대패하고 홧병이 나서 와병 중에 내 자식들은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을 당해 낼 놈이 하나도 없다. 머지 않아 나는 죽은 후에도 묻힐 무덤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적중했다.

하지만 후량의 멸망은 훗날 에 의해 종식될 또다른 혼란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였다.

  1. 오대십국 중 후한을 세운 유지원의 동생이자 후한이 망한 뒤 북한(北漢)을 세운 유숭과는 동명이인이다.
  2. 투르크계 민족이라고 함. 돌궐족의 일파.
  3. 또는 경종
  4. 현재 하남성 하택
  5. 일명 당 18릉으로 불리는 당나라 역대 황릉은 장안 근교에 있다. 그러나 낙양으로 강제 천도 후에 시해당한 소종은 낙양 인근에 묻혔고 독살당한 애종은 황하 인근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소종의 무덤인 화릉은 낙양의 개발과 무자비한 대량 도굴로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고 애제의 온릉은 황하 범람으로 위치를 알 수 없게 돼버렸다.
  6. 유인공은 원래 노주(盧州)절도사였으며 연왕을 자칭했다.
  7. 이 때 패배한 원인이 비수대전 때와 다소 비슷하다. 정확히는 이존욱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대군이 와서 발라버린다고 하자 주전충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가 나중에 후회한 것.
  8. 고우영십팔사략에선 아예 주우정도 아버지 주천중과 형 주우규처럼 방탕했다고 나온다. 안습. 듣보 황제의 불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