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덕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1대 김정렬2대 최용덕3대 김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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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用德
1898년 9월 19일 ~ 1969년 8월 15일

1 개요

나라를 위해 일할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구나.

대한민국군인이자 독립운동가. 초대 국방차관, 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1]

2 생애

1898년 9월 19일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육군군관학교를 1916년에 졸업했고 1920년에 중국 베이징의 보정항공학교에 입교하여 그해 비행사가 된다. 1922년에는 김원봉을 만나 상하이·텐진·베이징 시 등지에서 의열단의 항일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비행사가 된 최용덕은 손정방 군벌 항공대의 조종사가 된다.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와 육군참모학교에서 교육을 받기도 했다. 1925년 쑨원이 죽자 장제스 중국 국민당 혁명군 총사령은 군벌정복에 나선다. 국민군상하이난징을 점령하면서 손정방 군벌의 항공대는 국민군 항공대에 흡수되었고, 이것이 중화민국 항공대의 모체가 된다. 이후 최용덕은 중화민국 공군에 헌신하며 공군지휘부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겸 공군기지학교장직을 수행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 위원회 주임, 1940년대에는 한국 광복군에도 참여하여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총무처장, 참모처장, 사령관 등을 지내며 해방까지 중국에서 활동한다.

광복 후에 귀국하여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되는 항공건설협회[2] 회장을 지냈다. 최용덕 자신을 포함해 권기옥·장덕창·박범진·김정렬·이근석·김영환 등 조종사 출신들이 항공대 설립을 추진하지만 1947년에 미군정이 중국에서 교관급 장교까지 지낸 그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았고,[3]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미국식 군사훈련을 이수하라는 조건을 내건다. 많은 이들이 반대했지만 최용덕은 다른 간부들을 설득하였고, 결국 입교하여 보병교육을 받고 1948년 4월 소위임관했다. 이때 나이가 만 49세였다. 다행히 임관 후에는 고속진급하여 같은 해 7월 9일에 대위 계급으로 백인엽 소령의 후임으로 육군 항공기지부대 2대 사령관이 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국방차관을 지냈고 대한민국 공군이 1949년에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자 공군사관학교장,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을 지냈다. 1952년에는 전임인 김정렬[4]에 이어 2대 공참총장에 올랐다. 1955년 퇴임했고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중화권과의 인연 때문에 중화민국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5]

6.25 전쟁이 터지자 50세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제 3대 공군사관학교장(1950.5.1.~1952.12.10)으로 재임하면서 김포지구 경비사령부를 편성, 김포기지를 방어했다.
그리고 1952년 12월 1일 제 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해 휴전이 될 때까지 공군의 항공작전을 총괄했다. 전쟁이 한창 일때 최용덕 장군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항공기를 꿈꾸었다. 비행기 제작기술은 미래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일임을 직감 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기어코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들의 뇌로서 만들어져 나올 비행기를 자체 제작하고 싶다.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비행기로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비통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최용덕 장군은 항공창을 설립해 대한민국 스스로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준비를 했고 1953년 한국 최초의 경비행기 부활호가 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부활(復活)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직접 친필 휘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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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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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복원되어 50여년 만에 다시 이름 그대로 부활하여 비행하는 부활호.

1955년 공군 중장으로 퇴임하고 건국공로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등을 추서 받았다. 1969년, 대한민국이 광복했던 날인 8월 15일 7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중국에서 활약했을 당시 우정을 나누었던 시인 이은상이 그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최용덕 장군에 대한 시를 남겼다.

애사(哀詞) - 시인 이은상

오늘 아침, 낯익은 벗들 공군 장병들 다 모였는데
장군은 혼자 어디로 가십니까 당신은 이 나라 공군의 아버지아들들 무럭무럭 자라는데 장군은 돌아서 어디로 가십니까 (중략)

한인전선에서 조각조각 부숴진 다리뼈 피눈물 괸 독립운동의 표본으로 절뚝거리며 다니던 불구장군 이 땅에 우글거리는 사상의 불구자

지조의 불구자들을 꾸짖던 걸음걸이 병과, 가난과, 온갖 유혹도 비웃으며 다만 광복된 조국땅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하더니 장군은 문득 어디로 가십니까.(중략)

“그, 높고 맑은 인간성 그 나라 사랑하던 정신과 지조 남은 우리들 가슴 속에 새겨졌기에 오늘 아침 당신 관 위에 태극기 덮고 원하던 조국땅, 포근한 흙 속으로 꽃이랑 먼저 보내옵니다. 보내며 마지막 드리는 말씀 몸은 비록 흙 속에 묻힐지라도 넋은 저 해와 달과 별들과 함께 조국 하늘 지켜주소서(1969,8,19,영결식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이 세계 10위권의 강군으로 성장하기까지 1세대 최용덕 장군의 의지와 결의가 매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늘을 달리는 우리 꿈을 보아라 / 하늘을 지키는 우리 힘을 믿으라, 하늘은 우리의 일터요 싸움터 / 하늘은 우리의 고향이자 무덤 등의 가사로 알려진 대한민국 <공군가>의 작사가이기도 했다.

  1. 이 멘트는 1,3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장군의 문서에도 적혀있지만, 김정렬 장군의 경우 과거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치부를 안고 있다. 그에 반해 최용덕 장군은 광복군 출신으로 일본에 맞서싸웠던 인물이므로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훨씬 떳떳한 입장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2. 당시의 항공경력자를 끌어모으는 단체였다. 파일럿과 기술자 등을 합쳐 대한민국 전체에 항공 관련 인력이 불과 5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3. 특별임관 형태로 중국군 소장을 지낸 김홍일준장 임관, 일본군 대좌를 지낸 이응준이 대령으로 임관한 걸 생각하면 좀 불합리한 처사였다.
  4. 최용덕보다 19살이나 어렸다.
  5.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군 출신의 장성들은 퇴역 후에 중화민국 대사로 가는 일이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