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 이념적으로 민감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어 문서를 열람할 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한 문서의 악의적 서술 · 편집은 민사 · 형사 상 소송이 발생할 여지가 있습니다.
崔載九
1929년 7월 13일 ~ 1998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호는 청우(靑牛)이다. 아버지 우당 최갑환(崔甲煥)은 제3대 국회의원(무소속-자유당)이었고, 장남은 북한학의 권위자로 박근혜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 입각설이 돌다가 어른의 사정으로 실각한 이화여대 최대석 교수이다. 종교는 불교이다.
1929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에서 태어났다. 경남중학교,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교수(학생과장 겸임), 경기대학교 교수, 건설공제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고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국민당 최석림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주인과 민주공화당 복수공천을 받아 경상남도 고성군-충무시-통영군-거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모두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단수공천을 받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동욱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대한민국 국회 경제과학위원장이 되었다. 1980년 대한불교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 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정치규제 중인 1983년 월간 불교사상을 창간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3월 한국국민당 부총재가 되었다. 1987년 김종필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한국국민당을 탈당하여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황병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에 몸담았다. 1995년 김종필이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으나 경남고등학교 선배이자 유신 정권 시절 협상 파트너였던 김영삼 대통령과의 친분 때문에 합류하지 않았고, 1996년 한국산업은행 이사장에 임명되면서 정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