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헤이에르달

1 개요

토르 헤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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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2002)

노르웨이의 모험가.인류학자.

폴리네시아 섬에 어떻게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는 미스테리였는데 헤이에르달도 이 미스테리를 해명하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러던중 헤이에르달은 남미의 페루에서 폴리네시아 섬과 비슷한 석상을 발견했고, 식물을 부르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폴리네시아 사람들의 기원은 남미에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원시적 배로는 남미에서 태평양의 섬까지 간다는건 불가능하다라는 것에서였다.

그러자 헤이에르달은 내가 직접 배를 타고 남미에서 태평양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남미에서 자생하는 발사나무등의 재료로 잉카 시대의 배를 재현하여 콘 티키라는 이름을 붙인뒤 페루에서 이스터 섬까지 가는 대장정의 여행을 시작했다(...) 싸나이의 학문에 말은 필요 없다. 행동으로 증명하겠다

1947년 4월 28일 다섯명의 동료들과 함께 페루의 카야오를 출발한 헤이에르달은 예항선으로 훔볼트 해류를 넘은 다음 이스터섬을 향한 여행(이라 읽고 표류라 쓴다)을 시작했다. 사실상 표류나 다름이 없었던 것은 일체의 동력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해류와 바람만으로 배를 움직여서 정처없이 나아갔기 때문이다.

항해 102일만에 콘티키호는 예정한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타히티에서 동쪽으로 800km정도 떨어진 라로이아 산호초에 도착해 남미에서 태평양의 섬들까지 잉카식의 배로 갈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콘티키호 모험의 성공으로 헤이에르달은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콘티키호의 모험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콘티키"는 1951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헤이에르달은 이때만 해도 박사학위가 없었던 탓에, 학계는 박사도 아닌 젊은이가 학계의 정설을 흔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헤이에르달은 남미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폴리네시아의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훗날 DNA조사에 의해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은 타이완, 말레이 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로 밝혀졌다.

이후, 헤이에르달은 아즈텍 문명이집트 문명의 유사점으로 관심이 옮겨져서 아즈텍 문명이 이집트에서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의 갈대배를 재현한 "라"를 타고 1969년, 모로코의 사피를 출발해 서인도 제도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의 항해는 서인도 제도 근처에 도달하긴 했지만 폭풍으로 결국 "라"가 가라앉고 말았다. 헤이에르달은 이듬해 다시 "라2"라고 이름을 붙인 갈대배를 타고 재도전해 서인도 제도의 바베이도스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태평양대서양을 횡단하는데 성공한 헤이에르달은 다시금 이번에는 인도양에 도전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도까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갈대배를 재현한 "티그리스"를 타고 1977년 항해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항해는 홍해에서 국제분쟁이 일어난 탓에 항해는 홍해입구에서 멈춰야만 했다.

이후에도 헤이에르달은 자신의 이주에 의한 문명 전파설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유적을 탐사하고 유물을 연구하며 지내다가 지난 2002년 사망했다.

노르웨이 해군의 프리드요프 난센급 이지스 구축함 중 한 척이 헤이에르달을 기려 "토르 헤이에르달"로 명명되었다.

2 비판점

모험가로서는 열정적인 헤이에르달이었지만, 학자로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많다. 우선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콘티키호 탐험의 경우는 남미에서 태평양의 섬까지 고대의 배로 여행할수 있음을 입증했다지만, 콘티키호 자체의 힘으로 훔볼트 해류를 넘어간게 아니라 예항선의 힘으로 넘었기 때문에 과연 고대인들이 자체적인 힘으로 훔볼트 해류를 건너 태평양까지의 항해를 할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로 헤이에르달 이후 같은 항해를 고대의 선박만으로 시도하던 사람들은 모두 훨씬 북쪽으로 떠밀려갔는데, 오히려 그런 지역에서는 헤이에르달이 남미의 영향이라고 주장한 것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또다른 문제는 사실 헤이에르달이 만든 콘티키호는 '고대'의 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헤이에르달의 배는 유럽인과의 접촉 이후 유럽의 선박기술의 영향으로 개량된 형태를 본딴 것이며, 방향 조절을 위해서는 아예 원래 뗏목에는 없던 를 사용했다. 즉 콘티키호의 항해가 성공했다고 해서 고대 남미인들의 배로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헤이에르달의 콘티키호 모험이 과연 실험항해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당시부터도 많은 논란이 일었다.

다만 헤이에르달 본인은 예항선을 사용한 것이 1500년 전 페루인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항만교통사고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뗏목은 원래 조종이 불안정하므로 자칫 항구를 벗어나면서 다른 배와 부딪힐 것을 염려했다고. 실제로도 4300마일의 항해중 예항선이 끌고간 것은 50마일 뿐이었다. 또한 키에 대해서도 원래 페루 원주민은 당연히 폴리네시아의 존재를 모른채로 무작정 먼곳으로 항해를 떠났는데 우연히 폴리네시아에 도착한 것인 반면에, 헤이에르달은 명백히 폴리네시아를 목적지로 하고 떠난 것이었으므로 항로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주장한 이론은 틀렸지만 항해과정을 사기 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키 문제는 고대 문헌을 보고 발사나무 뗏목을 만들었지만 문헌에 표현된 키를 어떻게 조작해야할지 몰라 결국 일반적을 키를 달았다. 이 전통 키가 어떤 거냐면 뗏목 통나무 틈사이에 판자를 끼어 방향을 조작한다는데 상식적으로 좌우 꼼짝도 할 수 없는 통나무 틈에 낀 판자가 어떻게 방향을 조정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항해 중 우연히 뗏목 틈 사이로 판자를 떨어뜨렸다 주워 올렸는데 방향에 조정되는 걸 보고 파악했다. 하지만 뗏목 조종에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원들 모두 기존의 키 사용에 익숙해져서 그냥 일반 키를 썼다고.

물론 DNA 조사 결과가 나온 지금의 인류학, 고고학, 역사학, 유전학 등의 연구에서는 헤이에르달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태평양 섬에 사람들이 살게 된것은 남미가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멜라네시아로, 멜라네시아에서 다시 폴리네시아로 이어졌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또한 폴리네시아 인들은 카누를 이용했고, 바람을 이용할줄은 몰랐기 때문에 남미에서 폴리네시아로 이주했다는 헤이에르달의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는게 정설로 굳어졌다. 헤이에르달은 폴리네시아인들의 조상이 동쪽에서 왔다는 전설을 근거로 들었지만 조사 결과 오히려 전설의 내용에는 서쪽에서 왔다는 암시만이 있었으며, 헤이에르달이 주장한 언어 면에서의 공통점 등도 연구 결과 모두 부정되었다.

상세한 연구가 있기 전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헤이에르달의 주장을 긍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남미 문화의 공통적인 요소들이 폴리네시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남미에서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사용된 도기 종류도 (도기를 만들 재료는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으며,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역시 남미 쪽과는 완전히 계통이 다른데다가 남미 쪽보다 비효율적인 형태였다. 결국 폴리네시아인들이 남미에서 왔다는 근거는 고사하고 고대에 교류가 있었다는 유력한 근거가 될 만한 것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 문명과 아즈텍 문명의 유사점에 대해서는 양자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게 일반적 시각이다. 헤이에르달은 카나리아 제도 테네리페 섬에 있는 귀마르의 피라미드를 죽기 전까지 연구하여 이집트에서 멕시코로 문명이 전수되었을 가능성을 열심히 파헤쳤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애당초 이집트의 피라이드와 남미의 피라미드는 단지 피라미드라는 점 이외에는 구조나 용도 면에서 사실상 전혀 공통점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열정적인 모험가로서, 그리고 자신의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실제로 모험을 감행한 그의 열의에 대해서 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할수 있다는 시각도 많다. 저 위에 언급한 다큐멘터리나, 모험계획과 과정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든 동명의 실화소설 콘티키등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목숨이 위험했던 상황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자신이 믿는바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 외에 에리히 폰 데니켄 같은 유사역사학자가 헤이에르달의 학설을 취사선택해 초고대문명설같은 개썰을 푼 적이 있었지만 이건 헤이에르달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이에르달은 비록 학자로서는 아마추어였고 그의 학설들도 부정되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학자들과 교류하며 진지하게 학문적인 연구를 하려고 했지 유사역자학자들처럼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는 행각을 보인 적은 없다.

3 기타

2014년 10월 6일 구글은 로고로 헤이에르달의 탄생 100주년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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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해군의 이지스 호위함인 프리드요프 난센급 5번함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토르 헤이에르달함이라 명명되었다.

콘티키 탐사대원 중 헤이에르달과 크누트 호클란트, 톨슈타인 라비는 2차대전에 참전했었는데 그중 크누트는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저지 작전에, 톨슈타인은 티르피츠 전함의 격침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용자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1]
  1.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크누트는 독일이 중수소를 확보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참여했고, 톨슈타인은 티르피츠 전함 근처에 잠복하여, 동정을 실시간으로 무전 보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