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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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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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누이어 : Rapa Nui
스페인어 : Isla de Pascua
영어 : Easter Island

1 개요

태평양에 위치한 있는 조그마한 화산섬. 폴리네시아의 동쪽 끝. 실제 면적은 163.6 ㎢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113.5 ㎢)보다 약간 큰 정도이며 인구는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약 5,700명. 신비의 거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유럽인들이 부활절에 발견하였으므로 영어 이스터(Easter)로 더 알려졌으며, 현재는 칠레 영토이므로 역시 부활절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파스쿠아(Pascua)라고도 표기된다.

현재 칠레 영토이다. 사실 칠레 본토랑도 3000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그나마 제일 가까운 나라가 칠레다. 가는 방법도 화물선을 얻어타고 가지 않는 이상 칠레의 산티아고나 타히티에서 비행기 타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 어차피 타히티도 만만치 않은 오지이니 남미의 허브 공항 중 하나인 산티아고에서 출발하는 게 저렴하고 편수도 많다. 비행시간은 6시간.

원래 이름은 라파누이어로 라파누이(Rapa Nui)다. 원주민 말로 큰 땅이라는 뜻. '테피토오테헤누아(Te pito o te henua , 세계의 배꼽)'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곳을 발견한 네덜란드인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이 섬을 발견했을 때가 마침 부활절(Pasen, Easter day)이라서 이름이 이스터 섬(Paasch-Eyland, Easter Island)이 되었다.

특산물도 없고 숲도 없는 황무지에 가까운 섬이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섬들 곳곳에 몇미터가 넘는 석상, 모아이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섬의 풍부한 식생을 바탕으로 하여 채석장에서 통나무를 굴려 석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양쪽에서 사람이 줄로 당겨서 한발한발 걷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이 섬의 전설에 따르면 히바(Hiva)라는 섬에서 온 호투 마투아(Hotu Matu'a)와 그가 이끌던 부족들이 섬에 상륙한 최초의 인간이라고 하며, 이에 따르면 그 기원은 폴리네시아 계열으로 추정된다.

2 역사

남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이 섬은 오랫동안 변변히 큰 포유류도 없고, 지나가던 새와 나무 밖에 없었다. 이 섬에 인간이 도착한 것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진출한 대항해시대의 결과였다.

구전 전승과 고고학적 연구 결과와 얼마 안되는 서양인들의 탐험 기록에 의하면 이 섬의 역사는 고립된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문명의 성취가 있었음에도 결국 몰락과 붕괴를 한 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스터 섬은 자연을 고려하지 않은 발전이 어떻게 한 사회를 무너뜨리는지[1]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터 섬의 실존했던 역사를 단지 환경파괴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는 탓에 확실하지 않은 부분까지 무리하게 끼워맞춰지는 경향이 있으며, 이후에도 수천명 단위로 존속 가능했던 원주민 사회를 파멸시킨 유럽인과 칠레인의 접근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노르웨이의 탐험가 토르 헤이에르달은 이스터섬의 문명이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학계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이 학설의 가능성을 실증하기 위해 발사 뗏목 콘 티키호를 제작하여 직접 남미에서부터 남태평양을 횡단하는 탐험을 성공시켰다. 이를 볼 때 비록 그의 주장은 헛점이 많았지만,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탐험은 남아메리카에서 이스터 섬으로 가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훔볼트 해류를 예인선으로 배를 끌어서(...)통과했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으며, 예인선 없이 이루어진 비슷한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따라서 고대 남미인도 예인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입증하기 전까지는 그의 탐험은 사실 학술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이스터 섬의 문화나 주민들의 DNA 분석결과, 동식물의 분포 등 모든 점에서 이스터 섬은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폴리네시아와 강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2.1 인류의 도착과 발전

원주민들의 정착 초기에는 풍부한 식생 숲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고래잡이, 새 잡이, 열매, 그리고 제한적 농업까지 이루어지는 섬이었고, 엄청나게 발전했다. 대략적인 계산으로는 정착 전만 해도 1억 그루의 야자나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스터 섬은 다른 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 차례 '운 좋게' 폴리네시아인들이 도착한 이후로 유럽인이 섬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폴리네시아 사회와의 지속적인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폴리네시아 인들은 카누를 이용한 뛰어난 항해술을 가지고 있어서 태평양의 섬들을 개척하고 서로 교역도 할 수 있었지만, 사방 수천킬로미터 내에 다른 섬이 하나도 없는[2] 이스터 섬에 도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2 이스터 섬 문명의 그림자

하지만 이후에 가속화된 경쟁적 석상 쌓기, 즉 모아이 건설로 인하여 파멸이 시작된다. 섬의 부족들은 종교적/주술적 의미로 이 모아이 상을 세웠으며, 처음에는 작게 만들어졌지만 점점 더 커다란 모아이가 만들어졌다. 큰 모아이를 만드는 것으로, 섬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즘으로 보자면 모아이는 이렇게 큰 모아이를 만든 것이 자랑.moai 같은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마치 유럽 중세에 교회 높이로 경쟁한 것이나 현대 국가도 거대한 랜드마크를 만드는 것처럼.

석상이 만들어진 곳은 섬의 중심부에 있는 채석장이며, 나무를 이용해서 해안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만드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이 석상들을 해안까지 옮기려면 대량의 나무가 필요하다보니 섬의 나무는 빠른 속도로 소모되기 시작했다.[3] 물론 모아이만 만드느라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려면 식량을 생산할 밭을 만들어야 했고, 밭을 만들려면 나무를 베어내고 개간을 해야 했다. 또 해산물을 얻으려면 카누를 만들여야 했는데 카누를 만들려면 또 나무를 베어내야 했다. 하지만 실용적인 목적이 없는 모아이 만들기에도 엄청나게 많은 나무가 쓰였던 것은 확실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나무가 사라지면서 섬 전체가 사막화되기 시작하여 들여왔던 가축도 닭만 남기고 다 사라졌으며, 농사마저도 짓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돌뿌리 농법이라는 대체수단을 쓰기시작하는데, 석상을 만들다가 나온 돌멩이나 바위를 깨서 만든 돌멩이를 그나마 상태가 나은 땅 위에 올려놓고 그늘을 만들어 거기에서 토란 비슷한 뿌리식물을 키운 다음 어느 정도 자라면 그 돌멩이들이 뿌리식물을 지탱해서 척박한 땅 위에 서 있게 해주는 농법이다. 하나하나 식물에 맞춰서 돌멩이를 움직여 줘야 했으므로 엄청난 노가다가 필요했던 농법. 모아이 하나 만드는 데 필요한 바위로 수만 평의 농지에 필요한 돌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나무와 돌 등의 자원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주민들은 더욱 큰 석상을 지으려 했다. 그것도 자원이 인구를 지탱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떨어진 그 순간에 급속도로 큰 공사가 많이 단행되었다. 자멸에 박차를 가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4] 다만 종교적인 목적만으로 모아이를 세운 건 아니었다. 자원이 한정되다 보니 서로 세력을 만들고 전쟁에 이겨 자원을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치열해지게 되는데, 쟁탈전에서 이기려면 머릿수가 많아야 하고, 사람을 모으려면 힘을 과시해야 하므로 더 큰 석상을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석상을 만드는 일은 자원의 고갈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이런 악순환 끝에 섬의 나무는 모두 베어졌고[5] 마지막 나무가 베어지는 순간까지 섬의 중심에서는 모아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6]

섬에서 나무가 모두 사라지자, 카누를 만들 수도 없었다. 카누도 없으니 이스터 섬은 배 한 척 없는, 문자 그대로 '섬'이 되어 버렸고 당연히 수상 자원을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중요한 자원인 나무가 없어지자 섬의 생활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은 위태로운 평화기가 지속된 듯 보이나,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믿어온, 모아이를 만드는 행위가 사실은 섬의 자원을 무의미하게 소모시키는 행위였다는 것을 깨달은 주민들 사이에서는 큰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모아이의 눈이 파괴되고 모아이를 쓰러뜨리는 행위가 벌어졌다. 대부분의 모아이는 이 때 쓰러지고 파괴되었는데, 지금 섬에 세워져 있는 모아이는 대부분 다시 세운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스터 섬에 인간 상륙 → 섬의 자원을 이용하며 인구 증가 → 인구 포화상태,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 → 남은 자원을 사이에 둔 분쟁이 커짐 → 분쟁에서 이기려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야 하고 그러려면 힘을 과시할 필요성이 증가 → 더욱 대형화된 모아이로 인해 자원의 고갈 속도 가속화 → 식생의 황폐화 → 황무지화 → 바다새의 멸종, 선박용 목재의 부족으로 인하여 주요 식량자원인 고래사냥이 불가능 → 토지의 척박화로 인한 대규모 식량부족 → 정치체제 붕괴, 식인 풍습 시작으로 이어지는 다이나믹 막장 롤러코스터를 보여준다. 인구 증가가 정점에 다다른 시점부터 사회시스템의 완전 붕괴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00년.

이스터 섬이 동남아시아처럼 열대우림이 우거지는 곳이 아니며, 의외로 나무가 빨리 자라지 않는 기후인데다가 토양이 침식에 취약하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석연찮은 점도 분명 있는데, 아무리 기념물적 구조물이 중요하다 해도 직접적으로 먹고 사는데 영향을 끼치는 나무가 다 없어져 가 버리는데 나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현지인들이 그걸 무시하고 계속 베어 없애버릴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의외로 이성적이지 않다

또, 통나무를 밑에 깔아서 모아이를 옮겼다면 그걸 버리지 말고 남겨두었다가 다음 모아이를 만들고 옮길때 다시 쓰는게 나무를 베는데까지의 시간을 절약하고 나무자원도 아끼는 등 더 효율적이지 않겠는지?

이러한 의문점들에 대한 답변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2012년 7월호에 실린 기사가 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석상을 밧줄로 묶은 뒤 양쪽에서 교대로 잡아당겨 석상이 뒤뚱거리며 앞으로 걷는듯이 옮겼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다면 이스터 섬의 문명이 모아이를 건설하기 위해 통나무를 베다가 생긴 무분별한 환경파괴로 멸망했다는 가설은 힘을 잃게된다. 실제로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4.4톤의 모아이석상을 이러한 방법으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실험에 따르면 석상을 1시간에 약 100미터 옮길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반론들 역시 강력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간이 고립된 섬에 들어왔을 때 토착 동식물을 전멸시킨 경우는 한두번이 아니며 가깝게는 대한민국의 마라도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현대 사회에서도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데 지구온난화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들이 자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든지, 혹은 열대우림 벌채를 가속화 한다든지 하는 사례. 인간 개인의 생각으로는 환경적 자살행위에 가까운 행위가 인간 집단과 사회적 관계등이 얽히면서 버젓이 자행되어 붕괴까지 이르렀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한두군데의 일만도 아니다.

그리고 나무를 덜 소모하는 석상 이동법을 찾아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통나무 벌채가 모아이와 관계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당시에 석상을 이동하는 방법이 이미 실전된 상황에서 당시 원주민들이 나무를 덜 소모하는 방법으로 석상을 옮겼다는 것 자체를 증명할 방법은 없다.
무엇보다도 이스터섬이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후 장장 50만년 동안이나 빙하기 등을 끗끗이 살아남았던 야자수숲이 어떻게 인간이 들어오자 마자 거의 수백년 만에 없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에 대한 대답은 되지 않는다.

보다 근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스터섬의 숲이 전멸한 계기는 인간의 벌채만이 아니라 폴리네시아인들이 섬을 방문했을 때 같이 유입된 쥐에 의한 것도 크다고 한다. 다음 세대의 야자수로 자라야 할 야자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족족 쥐들한테 계속 먹히다 보니... 버틸 수가 없다!. 실제로 당시 야자열매에 쥐의 이빨자국이 발견된 경우가 많다고.#

2.3 파멸

결국, 섬의 주민들은 전쟁과 식량자원의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대다수가 사망했다. 섬은 문명 수준이 리즈 시절의 300~400년 이전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유럽인들에 의하여 발견된다. 당시의 인구는 황금기의 2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아이 석상과 이스터 섬을 연구한 학자는[7] 이 섬의 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모아이 석상을 증오하게 된다라는 말까지 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식량이 떨어져 식인 문화까지 생겼으니, 가루를 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만도 할 것이다. 이스터 섬의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이스터 섬의 언어에는 인육에 관련된 관용어구[8]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인육이 일반적이었으며 그만큼 이 섬은 피폐해져 있었다. 다만, 식인은 원래 폴리네시아인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문화이므로 식량부족으로 식인을 하게 됐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지구의 미래 모델로도 여겨진다. 즉, 자원 낭비를 한 '닫힌 계'가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중요한 증거.

하지만 새로운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것이 이스터 섬의 멸망의 원인은 될 수 없었다고 하며 1722년에 네덜란드 사람이 이스터 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스터 섬의 인구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만 이스터 섬 최전성기때의 인구가 최대 15000명으로 추산되는 실정이고 18세기의 선원들이 인구센서스를 하려고 섬을 방문한 것도 아니므로 섬이 인구 측면에서 극심한 타격을 입은 게 부정되지는 않는다.

이 또한 위와 같이 기존을 학설을 뒤집었다고 주장하는 기사.#2 고고학자인 칼 리포와 테리 헌트는 이스터 섬에서 수집한 마타아라는 도구가 기존에 알려졌던 용도인 ‘무기’가 아니라 농경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내용을 antiquity라는 잡지를 통해 발표했다. 화살촉과 같이 생긴 세모꼴의 흑요석을 막대기 끝에 끼운 형태의 마타아는 이스터 섬 원주민들이 서로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칼 리포 등은 마타아의 용도를 연구한 끝에 이 도구가 끝이 뭉툭하며 모양이 제각각이며, 농경지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농경과 관련된 도구라고 주장하여 소위 "전쟁 연관설"을 부정했다. 이들은 또한 1700년대에 유럽인들이 오기 전까지 전통적인 학설과는 달리 인구수는 줄곧 많지 않았으며, 유럽인들이 퍼뜨린 질병 때문에 이스터 섬이 쇠락하게 되었다고도 주장했다. 흑요석 도구라면 풀때기를 베는 것에는 적합하겠지만, 위 연구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정작 끝이 뭉툭해서 저걸로 무엇을 했을지 의문스럽다. 원문은 #3. 어째 주장이 제각각이다.

2.4 재안정화

그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후기는 그 정도로 막장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게, 후기에 자원이 떨어져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은 맞으나 섬에 살던 세 부족이 그렇게 멍청한 인간들은 아니었다. 모아이 건설의 중지로 더 이상의 황폐화는 막았지만 기근, 식인, 전쟁의 반복으로 섬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가 되어있었다.[9] 결국 1640년경에 기존의 사회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어 복구될 가능성도 없어지면서 다른 형태의 시스템이 등장하였다.

모아이 숭배와 신앙은 사라졌고, 후기의 이스터 섬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은 조인(鳥人) 마케마케였다. 부족들은 당장 먹을 게 없는데도 쌈박질이나 하는 멍청한 행각은 그만두고 버드맨 의식[10]이란 평화로운 방식으로 섬을 주도하는 부족을 1년마다 뽑고 자원을 분배했다. 물론 자원이 극단적으로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점치기는 힘들었다. 이들은 식량부족으로 사탕수수 즙을 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20세가 될 때까지 치아가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이렇듯 최소한 어느 정도의 희망은 있었지만 이 조그만 희망마저 철저히 깨부숴버린 건 바로 남아메리카에서 찾아온 페루인의 도래다.

2.5 외지인의 도래와 대멸망

당시 페루인들은 그나마 삶을 영위하고 있던 이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데려갔으며 당연하게도 노예로 끌려간 사람 중 살아돌아온 사람은 얼마 없었다. 게다가 유럽인이 정기적으로 상륙하면서 섬에 없던 전염병이 들어섰다. 남아메리카 노예상들의 침공과 전염병의 유행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대부분이 유럽인들을 따라 섬을 탈출했고 이 결과 19세기 말 인구수는 100명 정도로 줄었다.

2.6 칠레령이 된 이후

1888년 칠레가 이스터 섬을 차지했다. 1953년까지 이스터 섬은 항가로아 마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칠레에서 특허를 준 회사의 목장이었고, 1966년까지는 칠레군이 이스터 섬을 관리했다. 그리고 칠레에서 온 식민자와 관리자들이 섬 주민의 재산을 거의 모조리 빼앗고 작은 마을들에 몰아 넣었다.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던 원주민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임금 노동자로 부려 먹기 위해서였는데 나중에 20세기 초 언론에서 문제가 되고, 프랑스 핏줄이 섞인 라파누이 원주민들 때문에 프랑스 정부가 문제 삼으면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966년이 되어서야 이스터 섬 주민에게 칠레 시민권이 주어졌으니 그때까지는 칠레 시민으로도 인정 못 받고 창살 없는 감옥에 산 셈이다. 그 뒤로도 쭉 학교에서 자기 언어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 탄압을 받았고, 피노체트 군사 독재 정권에서는 아예 라파누이 언어를 금지하려는 시도도 한 번 있었다. 2007년 이스터 섬은 "특별 지역"이 되었다.

2.6.1 칠레 정부와의 갈등

이스터 섬의 원주민들이 국제 사회에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주된 이유는 이민 온 칠레 이주민들과 이스터 섬 원주민들의 경제적 격차. 칠레 정부는 공식적으로 10년동안 이스터 섬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2300명[11]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원주민들은 그 2배인 4000명에 이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섬의 자연 환경이 캐막장인지라 주로 관광업/어업/농업[12]으로 먹고 사는데 이스터 섬의 모아이가 유명해지면서 그 유명세로 관광업이 크게 흥하자, 칠레 이주민들이 이스터 섬으로 와서 사업을 벌였다. 칠레 이주민들은 자본을 이용해 큰 가게를 차리고 자릿세 1만 페소[13]를 정부에 내고 장사를 하는데 아이러니한 점은 칠레 이주민들이 세운 가게에서 파는 농산물은 이스터 섬에서 기른 것이 아닌 수입한 것이며 이곳의 그 유명한 모아이 상도 칠레 이주민들이 만들어서 판다.

원주민들은 정부에 자릿세를 내지 못해 칠레 이주민들의 가게옆에서 노점상으로 자기가 키운 농산물을 팔고, 자신들이 직접 만든 모아이 석상과 전통 장식품을 팔지만 칠레 이주민들의 가게에 밀려서 잘 팔리지도 않고 모아이상도 안팔려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법대 나온 원주민도 이스터 섬에 남으면 허드렛일을 하는 등 취업 상황이 좋지 못하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일자리는 칠레 이주민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칠레 이주민들이 운영하는 운송회사나 가게의 경우엔 관광객들을 상대로 지난 몇년간 몇배에 달하는 성장률을 기록한 것에 비해 원주민들은 더 가난해져 가는 것.

이렇게 되자, 원주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원주민들이 칠레 정부에게서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칠레 경찰이 이스터 섬에 파견되어 공기총을 이용한 무력진압을 했지만, 공기총에 맞은 원주민들이 피를 흘리고 부상을 입는 경우까지 발생해 오히려 원주민들의 불만은 늘어났다.

현재 원주민들은 국제 사회에 칠레 정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활동 중이며 칠레 정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원주민 보호 구역을 늘리고 배수 시설을 점검하는 등 불만을 잠재우려고 칠레 원주민들에게 온갖 약속을 해주고 있으나 원주민들은 항상 정부는 말만 그랬다면서 이젠 더 이상 안믿는 눈치다.

2010년에는 히토랑이 부족이 피노체트 행정부 시절 빼앗긴 땅에 지어진 호텔을 점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칠레 경찰은 공기총을 사용하면서까지 이들을 진압했고, 25명이 부상당했다. 6개월간의 점거 끝에 칠레 경찰은 점거자들을 끌어내 체포했다.

참고로 칠레 항목에는 칠레 정부가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써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이 '칠레 정부와의 갈등'항목이다.

2.7 그 외

"원래 섬에는 지배층인 장이족(남아메리카에서 왔다고 함)과 피지배층인 단이족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장이족을 모두 죽였다. 모아이는 장이족이 세운 것이다. 장이족 멸망 후 이스터섬의 문명 수준은 급격히 떨어졌다."라는 이야기가 상당히 퍼져있지만, 이는 헤이에르달 등이 퍼뜨린 근거 없는 이야기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섬에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한 집단이 따로 있었다고 볼 근거가 없으며, 대학살이 벌어진 흔적도 없고, 원주민들의 DNA에서도 남아메리카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터섬의 주민들이 모두 모아이와 관계없는 피지배층이었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이 설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은 나와있다. 영화 '라파누이(1994)'에서는 이러한 설을 바탕으로 하여 장이족 청년과 단이족 처녀의 사랑과 도피, 전쟁을 다루고 있다.

3 자연

최근 화구 쪽에 아주 작은 나무묘목이 발견돼서(정말 조그맣지만) 숲을 복원할 거라는 얘기가 들려오지만 섬이 워낙 척박해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은 모양.

4 사회

4.1 교통

마타베리 국제공항이 있다. 칠레란항공만 이 공항에 들어온다.

5 문화

5.1 롱고롱고 문자

6 종교

토착 종교는 크게 두 분류가 있지만 두 개를 합쳐서 라파누이 신화 로 부른다.

6.1 기원 설화

이스터 섬의 기원 설화로는 호투 마투아(Hotu matu'a)에 관한 설화가 있다.

라파 누이 신화에 따르면 호투 마투아는 자신의 2개의 카누, 혹은 2개의 카누를 엮어 만든 하나의 카누카타마란를 타고 이스터섬, 그러니까 라파 누이에 나타났다. 그의 카누에는 히바의 땅 이라고 불리우는 곳에서 온 폴리네이아인 이주자들이 타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카나게나 해변에 상륙하였고 섬 전체로 퍼져나갔다.

6.2 조상 숭배

그 유명한 모아이 상이 바로 조상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후술할 조인 숭배가 생겨나기 전 까지 라파 누이 인들이 믿었던 종교이다. 라파 누이 인들은 산자와 죽은자가 공생관계라고 믿었으며 죽은자는 산자에게 건강이나 풍요등의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며 그럼으로써 영적 세계에서 더 나은 자리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즉 모아이 석상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셈,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거주지는 해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모아이 석상은 이 해변가를 따라 세워졌다. 모아이 석상들은 라파 누이 인들이 영적 세계가 있다고 믿었던 바다를 등지고 서있는데 이는 모아이 석상 앞에 있을 그들의 자손들을 굽어살피기 위함이었다.

6.3 조인 숭배

후대에 섬이 황폐화 되고 이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등 개판 5분전이 되자 라파 누이 인들은 조상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종교인 조인 숭배, 그들의 말로는 탕가타 마누(조인, 탕가타는 인간을, 마누는 새를 뜻한다)의 신앙을 가지 시작했다. 이 조인 숭배는 비록 섬에 카톨릭이 유입되자 배척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도 섬의 토착 신앙으로서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교회의 장식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탕가타 마누, 조인 숭배에는 총 여덟명의 신이 나타난다.

  • 마케마케(Makemake) 조인 숭배 신화의 우두머리 신이자 인간의 창조자. 풍요와 산란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 하와-투-타케-타케(Hawa-tuu-take-take) 알을 주관하는 신이다.
  • 비에 호아(Vie hoa) 하와-투-타케-타케의 아내.
  • 비에 카나데아(Vie kanadea) 추가바람

총 네명의 주신이 있었으며 이들 네 신은 각각 하인 신을 두고 있었다. 이들 여덟 신의 이름은 각종 알 사냥 의식에서 참가자들의 노래로 불러진다고 한다.

7 창작물에서의 이스터 섬

워낙 신기한 곳이라서 서브컬쳐, 특히 오컬트 관련물에서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 이 섬의 멸망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라파누이가 있다. 사실 라파누이 자체가 이스터섬을 뜻하는 말
  • 디멘션 W에서는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코일사고로 생명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됐다.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라파누이라는 이름의 발견물 겸 상륙지로 나온다. 태평양 전체를 훑다시피하는 지리학 연계 퀘스트들을 모두 통과해야 라파누이 발견용 퀘스트가 뜨는 발견물로 악명이 높다.
  1. 문명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명저 '문명의 붕괴(Collapse)'에 이스터 섬의 사회 붕괴에 대한 상세한 고찰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있다.
  2. 주변에 있는 자잘한 섬들은 제외
  3. 모아이를 걷게 했다는 설이 제기되면서 모아이 항목에 나와있듯이 옮기느라 나무가 소모되었다는 설은 힘을 잃고 있다.
  4. 일부 학계에서는 이 사실은 근거로 모아이가 이스터 섬 주민들이 그들의 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원이 떨어져갈수록 신의 모습을 본딴 석상을 만들고 자원이 생기길 기도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5.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는 "섬에서 마지막 나무를 벤 사람은 자신이 섬의 마지막 나무를 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라고 말한다. 흠좀무.
  6. 완성되지 못한 모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7. 외국인도 아니고 현지인인데도 이런 말을 했다. 자국의 문화 유산임에도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얼마나 비참한 배경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8. 아침에 먹은 네 엄마의 살이 이빨에 끼어있다라는 식의 표현.
  9. 야자수가 전멸해 버려서 토양 침식이 심해짐은 물론이거니와 식수를 구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10. 거창한 의식은 아니고, 험한 바다를 헤엄쳐 건넌 뒤 바위섬에 있는 새 둥지에서 알을 가져오는 것. 가장 먼저 가져온 사람이 속한 부족이 주도 부족이 된다.
  11. 칠레 본토인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
  12. 그나마도 관광온 관광객들한테 판다.
  13. 한화 가치로 약 26만원 가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