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와이번스 역대 감독 | ||||
김용희 (2015~2016) | → | 트레이 힐만 (2017~) | → | 현직 |
SK 와이번스 No. | |
토마스 브래드 트레이 힐만 (Thomas Brad Trey Hillman) | |
생년월일 | 1963년 1월 4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텍사스 주 아마릴로 |
학력 | 텍사스 대학교 |
포지션 | 2루수, 유격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5년 아마추어 자유 계약(CLE) |
소속팀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85~1987) |
지도자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2003~2007) 캔자스시티 로열스 감독 (2008~2010) LA 다저스 벤치코치 (2010~2013) 휴스턴 애스트로스 벤치코치 (2015~2016) SK 와이번스 감독 (2017~) |
프런트 | 뉴욕 양키스 어시스턴트 (2014) |
SK 와이번스 영입 직전 소속팀이던 휴스턴 애스트로스 벤치코치 시절. |
목차
1 소개
미국의 야구인으로 2016년 김용희 감독에 이어 SK 와이번스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제리 로이스터에 이어 미국 국적으로는 두 번째로 선임된 감독이며, 이와 동시에 KBO 리그 역대 세 번째 외국인 감독이 된다.[1][2] 니혼햄 파이터스 시절 일본시리즈 우승 1회, 준우승 1회, 퍼시픽 리그 우승 2회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고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로열스 감독을 3시즌 반동안 역임했기 때문에 한국에 온 외국인 감독 중 최고 수준의 커리어를 가진 감독이다.[3] MLB, NPB, KBO에서 모두 감독을 맡은건 힐만이 세계 최초.
메이저리그 감독 중에서는 흔치 않게 작전야구를 구사하는 편이며[4], 한 베이스 더 뛰는 공격적 주루플레이뭐요? SK에서 도루를?를 강조하는 감독이기도 하다.[5] 단, 캔자스시티 로열스 시절 불펜 혹사가 있는거 아니냐는 말이 있긴 한데 최다 이닝 투수가 79이닝이다. 162경기에 달하는 메이저리그 경기[6]를 감안하면 혹사라고 부르기 애매하다.혹사의 아이콘을 겪어봤기에 별문제 없을듯
2 선수 시절
선수 시절은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텍사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했지만 메이저리그에는 한경기도 올라가지 못하고 마이너리그에서만 3년간 활동, 162경기 .179를 기록하며 유니폼을 벗은 것이 선수생활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주로 백업 선수로 활약했다.
이 분을 못 데려오니 미국에서 그 분과 선수 경력이 제일 비슷한 분을 데려왔다.
3 지도자 시절
더이상 선수로써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유니폼을 벗고 곧바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스카우터로 입사한후 경력을 쌓았으며 2년후인 1990년에는 뉴욕 양키즈의 마이너리그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AAA팀 매니저로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활약했으며 2001년 콜럼버스 클리퍼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002년에는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해 팜시스템의 이사 겸 필드 코디네이터로 재직했다.
3.1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 시절
2003년, 힐만은 당시 도쿄를 연고지로 하던 닛폰햄 파이터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부임당시 힐만은 일본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이었지만,[7] 마이너리그 코칭 경력이 오래 되어 신생팀에게 선수 육성 노하우를 물려줄 수 있는 인재로 평가받았다.
부임 첫 해였던 2003년에는 5위를 기록했지만, 홋카이도로 연고지 이전을 한 첫 해인 2004년에는 신조 츠요시,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맹활약으로 정규시즌 3위를 달성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2위였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하며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진출엔 실패했다.[8]
44년만의 일본시리즈 V2가 결정된 이후 헹가래를 받는 힐만. |
2005년에는 모친이 사망함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오면서 감독 대행을 맡기기도 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닛폰햄이 기록한 성적은 2승 4패. 결국 그해에는 62승 71패로 퍼시픽 리그 5위를 기록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2006년에는 2년차 신인투수 다르빗슈 유를 앞세워 연고이전 후 첫 정규 시즌 1위를 달성했고 이해 플레이오프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를 거두면서 25년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다.[9] 일본시리즈에서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상대로 시리즈 전적 4승 1패를 기록하며 우승. 팀에 44년만의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기를 안겨주었다. 그 후 제 2회 코나미컵과 2006년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대회 2연패를 달성한 그는 뒤이어 2007년에도 팀을 거침없이 이끌었고, 구단 역대 최다 연승 기록인 14연승[10]과 교류전 12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내며 2년연속 퍼시픽 리그 우승을 만들어 낸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11] 치바 롯데 마린즈를 조지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작년 상대인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작년과 똑같이 시리즈 스코어 1승 4패[12]를 당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했다.
그러나 창단이후 60년동안 일본시리즈 우승 단 한번, 리그 우승 단 두번의 전통적 약체팀을 이끌고 2년연속 퍼시픽 리그 우승이라는 기록을 달성한 것은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선 통산 689경기 351승 323패 5무, 일본시리즈 우승 1회, 준우승 1회을 기록했다.
3.2 캔자스시티 로열스 감독 시절
일본시리즈가 열리기 전인 9월 8일에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닛폰햄 감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13] 그는 이후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감독직을 수락하며 선수로써 밟아보지 못한 메이저리그 무대를 감독으로써 밟게 된다. 당시 캔자스시티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간 리그 최하위를 기록해 팀의 반등이 필요한 시점이었고 신생팀이던 닛폰햄 파이터즈를 우승으로 이끈 힐만이 제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시즌 첫해에는 75승 87패로 아메리칸리그 중부 4위를 기록하면서 4년만에 팀을 최하위에서 건져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2009년에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2010년 5월 13일 12승 23패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중이던 그를 경질함에 따라 백수가 되었다(...)
3.3 벤치코치[14] 시절
졸지에 백수가 된 그는 그해 11월 22일 돈 매팅리 감독이 이끌던 LA 다저스의 벤치코치로 영입되었고 2013년 10월까지 LA 다저스 소속으로 활동했다. 2013년 10월 22일 다저스 벤치코치에서 해고된 그는 12월 20일 뉴욕 양키즈의 스페셜 어시던트로 재직하게 되었고 2014년 10월 17일에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벤치코치로 영입되어 활동했다.
3.4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트레이 힐만과 민경삼 단장 |
2016년 10월 27일 입국 당시. 손에 낀 반지는 2006년 아시아 시리즈 우승반지[15] |
2016년 10월 27일 KBO 리그의 SK 와이번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 조건은 2년간 160만 달러. 제리 로이스터와 이시야마 카즈히데에 이은 세 번째 외국인 감독이자 2년만의 외국인 감독이다. SK 와이번스, 트레이 힐만 감독 선임[16]
원래 SK에서 차기 감독으로 외국인 감독과 내국인 감독을 놓고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시아 경험이 있는 감독 후보군으로 트레이 힐만뿐 아니라 스캇 쿨바[17], 조이 코라[18] 등을 올렸고 국내 지도자 중에서는 후보군 6명을 추렸었다고 한다. 이후 SK는 트레이 힐만과 접촉했고 "과연 KBO 리그로 올까?"라는 걱정을 했었는데 의외로 적극적으로 오겠다고 표현 의사를 밝히며 계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닛폰햄 감독 시절 스몰볼로 일본시리즈 패권을 차지한 경험이 있기에 뻥야구빅볼로 팀 컬러를 바꾼 SK와 부조화를 이루지 않겠느냐는 예측이 있었지만 본인은 원래 스몰볼을 선호하지 않는 스타일이었고 일본에서는 현지 야구 분위기와 문화 때문에 스몰볼 기조를 따라갔다고 밝힌 바 있다. 관련기사
3.4.1 2017년
트레이 힐만/2017년 참조.
4 트리비아
- 2006년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 지은 후, 그리고 일본시리즈 우승 달성 당시 "신지라레나~이(シンジラレナ〜イ)"[19] 라는 말을 외쳤는데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켜 2006년 일본 올해의 유행어 10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홋카이도 팬 사이에서는 200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상징하는 단어로 여겨지는 중.
- 독특한 캐릭터의 인물이기도 하다.
- 닛폰햄 감독 부임후 처음 한 일이 경기장 라커룸 청소와 불펜 청소였다.
- 일본프로야구 시절 선수들이 동그랗게 원형으로 돌아 파이팅을 외치는 것을 메이저리그 가서도 써먹었다.
- 닛폰햄의 투수였던 다케다 마사루가 타석에서 삼구삼진이 아니라 4구 삼진을 당하자 박수치며 좋아했다고(...)
- 고교시절 체조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2004년 홈 마지막 경기에서 경기후 백덤블링을 선보이기도 했다.
- 취미가 기타치면서 노래 부르기인데, 그래서 크리스마스 특집 CD를 자비로 제작해 팬들에게 판매한 적도 있다. 수익금은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
- 그렇지만 카리스마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04년에는 강압적인 훈련방식으로 팀 선수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정도로 고집이 굉장히 강한 편이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에대해서는 가차없이 내치는 모습도 보여준다. 2006년에 자신을 비판한 가네무라 사토루를 향해 "오늘 이후로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겠다"라며 강경한 발언을 한후 구단에 요청해 그의 라커룸을 싸그리 비워버리기도 했다. 물론 그후 잘 달래서 리그 우승까지 달성해 냈지만.
- ↑ 두 번째 외국인 감독은 2014년 두산을
나쁜 쪽으로이끌었던 일본 국적의 재일교포 송일수(이시야마 가즈히데). - ↑ 이외에도 비공식적으로 1990년 롯데에서 잠시 감독 대행을 역임했던 일본인 도이 쇼스케(등록명 도위창)가 있다.
- ↑ 제리 로이스터는 한 시즌에 한정해 밀워키 감독대행을 맡은 것이 최고 경력이고 송일수는... 경력 따위는 없었던(...) 인물이었다.
- ↑ 이는 NPB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자 2000년대 말~2010년대 초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찰리 매뉴얼 전 감독과 유사점을 보인다.
- ↑ 그러나 SK도 과거 2000년대 후반 정근우와 박재상을 테이블세터로 앞세워 빠른 발야구로 상대를 뒤흔들던 시절이 있었다. 뻥야구의 팀으로 변모한 것은 2016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김재현, 최정민, 이진석, 이명기 등등 발이 빠르고 주루센스가 좋은 타자들도 꽤 있다.
방망이에 못 맞추는 애들이 있어서 문제지. - ↑ KBO 리그는 144경기
- ↑ 2003~2005년까지 일본에서 그보다 나이어린 프로야구 감독은 없었다. 이후 후루타 아쓰야가 2006년 41세의 나이로 선수 겸 감독에 취임한다.
- ↑ 그 후 세이부는 당시 1위였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누르고 퍼시픽리그 우승,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즈를 누르고 우승했다. 근데 뭔가 감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이 해가 바로 호크스가 2010년까지 가을야구에서 계속 탈락하는 징크스인(심지어 2008년 왕감독께서 은퇴하던 해엔 꼴찌로 진출 실패!) 일명 "가을의 풍물시" 의 시작이었다(...)
- ↑ 사이토 가즈미가 최종전에서 끝내기 완투패를 당하고 주저앉아 비통히 울던 그 플레이오프 맞다.
- ↑ 이후 2016년 깨졌지만 외국인 감독으로써의 기록은 아직까지도 최장기간 기록.
- ↑ 센트럴 리그에서도 2007년 플레이오프를 도입하며 바뀐 이름.
- ↑ 패배가 결정된 5차전에서는 퍼펙트 게임을 당하기도 했다.
- ↑ 이 때문에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뭐하는 짓이냐는 팬들의 반발과, 닛폰햄의 슈퍼 스타들이었던 모리모토 히초리와 이나바 아쓰노리에게도 비판을 들었다.
- ↑ 우리나라의 수석코치급에 해당한다. LG 트윈스가 이 개념을 2016년부터 KBO 리그에 도입했는데 최정우 코치가 수석코치 역할을 하는 벤치코치로 일하고 있다.
- ↑ 이전 버전에는 일본시리즈 우승반지라고 쓰여있지만 확대된 사진을 보면 아시아 시리즈 챔피언이라고 쓰여져 있다.
- ↑ 기사에는 두 번째 감독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설마 이 사람을 한국인으로 본거야? - ↑ 과거 1998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외국인 선수로 뛴 바 있고 2016년 현재 볼티모어 오리올스 타격코치.
- ↑ 전 마이애미 말린스 수석코치이자, 2013년 SK 와이번스 타격 인스트럭터.
- ↑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냈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It is unbelievable!!"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닛폰햄의 우승이 그야말로 언더독의 대반란이었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