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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인터뷰에서 한국 팬들을 위해 행한 급조 퍼포먼스...
이름 | 모리모토 히초리(森本 稀哲) |
한국명 | 이희철 (李稀哲) |
생년월일 | 1981년 1월 31일 |
국적 | 일본 |
출신지 | 도쿄 도 아라카와 구 |
학력 | 테이쿄 고등학교 |
포지션 | 중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8년 드래프트 4위 |
소속팀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999~2010)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2011~201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14~2015) |
목차
1 개요
[1]
현역 시절 진행한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현재는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3세이며, 이희철(李稀哲)이라는 한국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애초에 '히초리'라는 이름부터가 '희철'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
2 플레이 스타일
수비형 외야수로 타격 자체는 그렇게 돋보이는 편이 아니나, 드넓은 삿포로 돔의 외야를 책임졌던 우수한 수비력과 허슬 플레이, 그리고 아래 나올 여러 똘끼, 팬서비스 정신 덕에 컬트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선수였다. 특히 외야수비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신조 츠요시가 은퇴한 뒤인 2007년부터 닛폰햄의 주전 중견수로 자리를 잡았고, 같은 해 3할 타율에 31도루를 마크하며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시즌에 111개의 삼진을 당했고, 볼넷 : 삼진 비율은 1:2일 정도로 극단적인 배드볼 히터의 모습을 보였다. 라뱅이 생각난다면 중거리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삼진이 많은 선수. 2009년 시즌 이후로는 2번 타순에 자주 배치되면서 희생번트 수가 크게 늘었다.
3 프로 입단 전
재일 한국인의 아버지와 제주도 출신 한국인 어머니[1]사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에는 축구를 병행하며 J리그팀 도쿄 베르디의 입단 테스트를 볼 정도로 운동에 자질이 있었다. 데이쿄 중학교·고등학교 시절에는 1998년에 야구부 주장을 맡았고, 유격수로서 제80회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여 3차전인 시마네 현립 하마다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8회에 와다 츠요시로부터 동점 홈런을 때려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팀은 패배했다. 고교 시절에는 통산 34홈런을 기록하며 강타자로 주목받았다.
1998년의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닛폰햄 파이터즈의 4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프로 입단 후 외야수로 전향했다.
4 프로 입단 후
4.1 닛폰햄 파이터즈 시절
1999년 ~ 2005년
프로 2년째인 2000년에 1군 무대 첫 출전과 첫 홈런을 달성한다. 주로 대수비와 대주자 요원으로 기용되었다. 2003년에는 닛폰햄 감독으로 취임한 트레이 힐만 감독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2] 1번 타자 중견수로서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명단에 올랐다. 4월에만 4개의 홈런을 기록했지만 그 이후에는 성적이 침체되면서 한신 타이거스에서 이적해 온 츠보이 토모치카[3]에게 주전을 빼앗겨 대수비·대주자로 뛰었다. 그러나 2005년에는 타격 성적이 향상되면서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에 출전하면서 타율 2할 6푼 4리, 7홈런을 기록했다.
2006년
개막전 시점에서 주전이었던 츠보이 토모치카의 부상 이탈 등도 있어 4월 하순무렵부터 1번 좌익수 주전을 차지했다. 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운 시즌이었고. 그 외에도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하는 등 테이블 세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같은 팀의 동료 외야수인 신조 츠요시, 이나바 아츠노리와 함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4] 올스타전에서도 처음 출전했다. 팀의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제패 당시 일원이었다. 좌익수로 출전하여 우승을 결정짓는 좌익수 플라이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았다. 백업 들어온 중견수 신조 츠요시와 부둥켜 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으며, 이미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에서 타구가 자신에게 날아올 때 행여나 놓칠까봐 걱정했다는 말을 남겼다.
2007년
은퇴로 팀을 떠난 신조 츠요시의 중견수 포지션과 등번호 1번을 물려받았다. 시즌 종반까지 세이부 라이온즈의 가타오카 야스유키와 도루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등[5] 팀내 부동의 1번 타자로서 전 경기 풀 이닝 출전을 완수했다. 처음으로 3할대의 타율을 기록했고, 당시 퍼시픽리그 역대 6위 타이 기록이던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이는 오시타 히로시와 대등한 구단 사상 최다 타이 기록이기도 했다. 우타자이지만 내야안타 갯수도 이나바 아쓰노리의 뒤를 이은 리그 2위를 기록했다. 최다 득표를 얻어 골든글러브상(2년 연속)과 베스트나인을 동시에 수상했고, 강한 어깨를 보여주면서 보살 갯수는 양대 리그 1위인 15개를 기록했다.
2008년
5월 25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상대 투수 니시무라 겐타로로부터 사구를 받아 왼손 새끼손가락에 골절상을 입었고(전치 5주), 2006년부터 계속되고 있던 연속 경기 풀 이닝 출전 기록도 중단되었다. 후반기에는 부상의 영향으로 인해 부진에 시달리는 등 개인 최저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래도 골든글러브상은 수상하는데 성공한다.
2009년
이토이 요시오에 주전 중견수 자리를 빼앗겨 좌익수로 자주 출전하게 되었지만, 타격 부진으로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출전 기회가 크게 감소되었다. 올스타전을 앞두고 타격이 살아나면서 출전 기회도 증가하고 있었지만 8월 6일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경기 도중 사구를 받아 전년도에 부상당했던 왼쪽 새끼 손가락에 다시 골절상을 입었다. 107경기에 출전했지만 규정 타석은 채우지 못했고 타율도 2할 4푼 7리로 시즌을 마쳤다. 다나카 켄스케가 1번 타자로 뛰면서 2번 타자로 자주 기용되었고, 리그 최다인 43개의 희생타를 기록해 높은 성공률을 자랑했지만 일본 시리즈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몇 차례나 번트 실패를 반복하는 등 2개의 병살타를 기록할 정도로 부진했다.
5월에 국내 이적이 가능한 FA권을 취득했지만 FA권을 행사하지 않고 닛폰햄에 잔류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어떤 조건을 나와도 잔류할 생각이었다. 다른 팀에서 플레이하는 이유가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2010년
7월 14일의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는 1회 희생 번트를 시도했을 때 노가미 료마로부터 사구를 받아 퇴장당했다. 또다시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골절상을 입으면서 다음날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3년 연속으로 새끼손가락에 사구를 맞아 골절상을 입었지만(...) 리그 최다인 55개의 희생타를 기록했고 타율도 2할 7푼 2리를 기록하는 등 타격 면에서 서서히 회복되는듯한 모습이 보였다.
결국 줄어드는 팀내 입지 때문인지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고, 12월 1일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의 이적이 발표되면서 12월 11일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다. 결국 닛폰햄 엿 먹임
4.2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요코하마로 이적하지만 부상 등에 시달리며 2011년에는 48경기에만 나와 .187/.236/.246의 안습한 성적을 보였다.
2012년에는 강타자 알렉스 라미레즈와 신인 아라나미 쇼에 밀려 경기 후반 대수비로 교체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9월 말 골절상을 입으며 그대로 시즌을 마쳤다. 시즌 성적은 108경기 0.244/0.320/0.323, 3홈런 18타점.
2013년에는 1군에서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즌 종료 뒤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먹튀 일단 본인은 현역 속행을 원했고, 11월 19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계약을 맺으며 일단 현역생활은 이어가게 됐다.
2014년에는 세이부에서 대타, 대수비, 대주자요원으로 쏠쏠한 활약을 하며 99시합에 출장하였다. 언제나처럼 쇼맨십을 발휘하며 덕아웃의 분위기를 북돋어준 것은 덤.
2015년에는 전년도와 같은 활약은 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 후에는 특유의 예능감을 살려 야구 해설자로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5 여담
5.1 스킨헤드를 하는 이유
초등학교 시절 범발성 원형탈모증에 걸렸었다. 이때문에 이지메를 당했다고. 현재는 거의 극복하였지만 당시의 고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또한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도 매일 머리를 밀며 스킨헤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홍미륵이 있다면 일본엔 철미륵이 있다!
5.2 재일 한국인 3세 정체성과 이름의 유래
"히초리(ひちょり)"라는 이름은 "희철(稀哲)"의 한국어 발음에서 따온 것으로 아버지가 명명했다. 프로 입단 당시, 일부 선수명감(일종의 가이드북)에서는 "히초리(ひちょり)"가 아닌 "히로요리(ひろより)"라 적히거나, "稀哲(희철)"이 "秘哲(비철)"로 오기되었던 경우가 있다. 초등 교육은 민족학교에서 받았으며, 본인도 "재일동포로서 민족 의식이 강했었습니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부모는 도쿄 도 아라카와 구 니시닛포리(西日暮里)에서 에리카(絵理花)라는 야키니쿠집을 운영했으나, 건물의 노후화와 부모의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2013년 10 월 마지막으로 폐점했다고 일본 위키에 서술되어있다. 2007년 11월에 일본 귀화, 2012년 3월 혼인 신고서 제출, 2014년 7월에 득녀하였다.
부모가 모두 제주도 출신이라 제주도에 친척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5.3 신조 츠요시의 후계자
신조 이후 가장 팬서비스에 충실했던 일본 야구선수.
2006년 7월 21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1차전)에서 드래곤볼의 피콜로 코스프레를 하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6]
합성 아님!!!
[[파일:/image/295/2011/09/02/%25B8%25F0%25B8%25AE%25B8%25F0%25C5%25E4-%25C8%25F7%25C3%25CA%25B8%25AE.%25BD%25BA%25C6%25F7%25C3%25F7%25C3%25E1%25C3%25DF5.jpg]]
절대 합성 아니다. 참고로 옆에서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두 사람은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런 사진도 있다. 코..콘헤드!!
신조 츠요시가 은퇴한 뒤 등번호 1번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신조의 개그센스도 함께 물려받는다고 선언했다, 2008년엔 신조와 함께 삿포로 돔 천장에서 줄을 타고 내려온 적이 있으며 연봉 협상 때는 돈 문제따위 제쳐놓고 어떤 이벤트를 해야하는가 의논하는게 80 ~ 90%라고 한다. 팬서비스 정신으로 유명했던 신조의 후계자로서 인정받았다. 홍성흔이나 홍창화 응원단장이 생각날수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입단식의 모습. 차이나타운에서 라면맨을 코스프레한 채 공식 입단식을 치렀다(…).
경기가 우천순연되는 와중에 상대팀 선수[7]와 프로레슬링 놀이. 이처럼 소소하게 재미있는 장면들을 자주 연출했다.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이 수석코치 시절인 2007년에 했던 팬티만 입고 구장 한바퀴 돌기 쇼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기자가 어떻게 이에 대해 알았느냐 하고 묻자 진정한 행위예술가는 세계의 퍼포먼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해 여러 사람들을 배꼽잡게 했다.- ↑ 일본인이라는 루머도 돌았지만 한국인이 맞다라는게 정설이었고, 2015년 9월 28일 인터뷰에서 사실로 확정 되었다.
- ↑ 일본의 버니 윌리엄스가 될 선수라고 칭찬했다.
- ↑ 스즈키 이치로와 유사한 '시계추 타법'을 구사하는 교타자였다. 말년에는 미국 독립리그에서도 뛰었다.
- ↑ 한 팀의 주전 외야진 전원이 골글을 탄 것은 일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본의 골든글러브는 수비만을 평가한다.
- ↑ 결과는 가타오카가 도루왕을 차지.
- ↑ 이 경기에서 신조는 LED 전광판이 달린 벨트를 차고 나왔다(...)
- ↑ 친정팀 닛폰햄의 내야수 코야노 에이이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