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1]
헤이그 특사 / 헤이그 밀사
1 소개
1907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빼앗긴 외교권과 일본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Den Haag-덴 하흐) 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3명의 특사들을 가리킨다. 그 멤버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여기에 일제에 특사인척 연막작전을 펴던 미국인 헐버트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합세했다.
2 배경
1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것은 1899년이다. 1903년 고종은 2차 만국평화회의와 1864년에 창설된 국제적십자 위원에 가입하고 싶다는 서한을 네덜란드로 보낸다. 이듬해인 1904년,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이범진[2]은 러시아 외무대신 람스도르프의 언질로 한국이 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국 명단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회담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한 것이었고 러시아는 한국에서 일본을 한창 견제하다 못해 같은 해 러일전쟁까지 치르게 됐으므로 한국이 초청국 명단에 들어간 것은 다분히 일본을 견제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이 정식 초청장을 받지 못했다고도 하는데, 이범진이 1905년 10월 이미 람스도르프에게 정식 초청장을 받았다고 한다.
3 헤이그까지의 여정
고종이 처음에 헤이그에 파견하려고 했던 인물은 이용익이었다.# 원래 보부상 출신에 발이 빨라 하루에 천 리를 걷는다는 둥, 축지법을 쓴다는 둥의 소문이 붙은 인물로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와 민영익 사이의 연락을 담당해 출세했지만 이내 경제관료로서 엄청난 수완을 발휘했던 고종의 심복 of 심복이었다. 이용익은 1905년 11월 고종의 밀명을 받아 출국했는데, 중국 상하이와 연해주 등을 오가며 논의하던 도중 김현토라는 인물에게 살해당한다.[3]
두 번째 특사 파견 움직임은 상동파라고 불렸던 상동교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됐다.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이 이회영에게 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사실을 알렸고, 이회영은 전덕기를 비롯한 상동교회 인사들과 특사 파견을 논의했다. 이회영은 대한자강회의 후신 격인 대한협회에서 만난 내시 안호영을 통해 고종에게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구성된 특사 밀파 계획을 전달했다. 이때 이준은 상동교회 청년회 회장이었다. 당시 고종은 말 그대로 왕궁에 유폐당한 상태여서,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통감부가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 특사 일행의 동정은 실로 치밀했는데, 고종은 위임장에 4월 20일자로 수결(사인)하고 옥새만 찍어서 보냈다. 문자 그대로 백지위임장이었다.[4] 첩보영화 수준의 작전을 통해 위임장을 받은 이준은 이상설과 이위종을 각각 다른곳에서 만나 합류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하고자 했다. 거기다 고종의 친서를 소지한 헐버트가 일본으로 이동하며 기만작전까지 펼쳤다.
전 평리원 검사 이준은 문자 그대로 검사, 즉 법률가였다. 법관양성소를 1회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어 법무대신 이하영[5]을 탄핵한 적이 있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해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이상설은 당시 용정에서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를 운영했지만 일제가 문을 닫아버린 상황이었다. 망명 전에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아 27세에 성균관 관장 겸 박사[6]을 지냈을 정도였고 조선에서 처음으로 만국공법을 공부한 국제정치, 국제법 전문가이기도 했다. 특히 이상설은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다. 즉,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정부 회의를 담당하는 실무 관료였으며, 어떤 위법한 절차가 있었는지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위종은 주러시아대한제국공사로서 러시아에서 버팅기고 있던 이범진의 아들로 당시 21세, 그야말로 홍안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7개국어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해 이위종이야말로 헤이그 특사가 그나마 여론전이라도 할 수 있게 한 신의 한 수가 됐다.
이준이 서울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과 합류했고, 이준과 이상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이범진을 찾아갔다.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기서 열흘 가량 소요하며 활동에 필요한 외교 서류들을 준비하는 한편 니콜라이 2세를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1906년에는 이미 러일협약이 한창 진행중이었고, 처음 이범진에게 만국평화회의 초청 사실을 알렸던 1904년과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결국 이들은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지 못했으며, 고종의 친서만 외무부에 접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범진의 주재로 러시아 호위병의 호위를 받아가며 베를린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4 만국평화회의 입장 실패
만국평화회의는 6월 15일에 시작됐다. 이보다 열흘 쯤 늦은 6월 24일~25일 경에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는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숙소에 국기를 게양한 뒤 공식 활동에 돌입했다. 일본은 헤이그에서 특사들이 희의장 입장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특사가 파견됐음을 알아챈다. 이들은 한국에서 헐버트를 감시했는데 헐버트가 일본까지 이동하며 일본의 눈길을 끄는 동안 특사 셋이 러시아를 거쳐 헤이그로 간 거였다. 여기에 헐버트 역시 비슷한 시기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에서 특사가 목격됐다는 전보를 받고 노발대발하며 고종에게 찾아가 따졌다.[7]
헤이그에 간 것까진 좋았는데 대한제국 사절단의 만국평화회의 회의장 입장은 거절된다. 그래서 그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에게까지 찾아가 일본의 국권침탈을 설명하며 항의하고, 의장 직권으로 참석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넬리도프 백작은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동정했으나 이미 러시아 본국에서 대한제국 특사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라고 밀명을 내려놓은 상황이었던 터라 결국 유야무야 말을 돌리면서 이들의 회의참석을 막아버렸다.[8]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 등 열강 대표단에게도 회의 참석 협조를 요청했지만 소용 없었다.
7월 5일, 특사의 정사인 이상설이 회의장에 나가 호소문을 발표했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 세 개 열거해보면,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9]
같은 날 <만국평화회의보>를 발행하던 영국 출신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와 이위종의 인터뷰가 있었다.[10] 윌리엄 스테드는 6월 30일 이미 <만국평화회의보>에 사설로 헤이그 특사의 입장을 옹호하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 이날 이위종은 매우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국제정치의 핵심을 꿰뚫는 거침없는 발언을 보여준다.
스테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 인터뷰는 이 항목 맨 위에도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사 세 사람의 사진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된다. 상황이 이리되자 특사들은 언론전으로 방향을 돌렸다.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이 주최한 국제협회에 귀빈으로 초대받아 연설할 기회를 얻은 것. 당시 회의장 주변에는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시민운동가들이 몰려든 상태였다고 한다. 주미공사, 유럽공사,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합류한 것이 여기서 신의 한수가 됐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 러시아에서 성장해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초급장교 훈련을 받은 바 있어 국제외교가에서 공식 언어로 통하던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 중 서양 3개국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위종 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상대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해 을사조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규탄했다. 이 연설문 전문은 스테드에 의해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되고,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게다가 서구 언론은 이위종을 '조선의 프린스' 쯤으로 보도했다. 이위종이 전주 이 씨였기 때문인데, 사실 이위종은 '낙동염라' 이경하의 손자로 광평대군파였다.[11]오지게 먼 친척
일본인들은 항상 큰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 문명인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개방정책을 유지하며 모든 국가에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그들은 변합니다. 놀랍게도 원통하게도 그들은 모든 나라에 대한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 대신 추하게, 불의하게,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결정적로 야만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을사조약은 우호적으로 체결되었지만,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그 뒤통수를 치는 일본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출처
이 덕에 각국 언론들의 주목을 받긴 했으나 상황이 달라지진 않았다. 심지어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지지한 것처럼 보였던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 역시 일본을 비난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12] 게다가 이 때, 이들이 친조선파 언론인이라 생각해 가능한한 모든 정보를 알려줬던 일본 특파원은 직함이 언론인이었을 뿐 실은 일본 대사의 첩보요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실시간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왜곡되어 조선에 전달되었다.
5 이준의 순국
7월 14일,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이준이 투숙하던 헤이그의 호텔에서 사망했다. # 동영상 초반에 호텔방 이것을 보고 후에 변절한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위암문고에서 "할복 자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자 내장을 꺼내 던졌다더라" 라고 기술했다. 장지연 자신의 변절 행위가 민망해서 그랬나
이준의 사인에 대해선 이런 저런 추측들이 많이 있었으나 헤이그의 문서 보관소, 사망 당시의 신문 등을 살펴보아도 사망 사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 정확한 원인은 나와 있지 않아 현재 사인은 불분명하다. 실패로 인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홧병에 걸려 병사했다는 설이 강하나 정설은 아니다. 당시 현지의 한 언론은 이준이 뺨 종기를 앓았으며, 종기 처치 도중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도했다고 한다는데 출처 추가바람. 또 하나의 유력한 설은 감기로 인한 사망이다. 이준을 포함한 특사 3인이 회의장 앞에서 입장을 요구할때 헤이그에 큰 비가 내렸는데, 이때 이준이 고뿔이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것. 여하튼 결국 지금에 와서는 국사 교과서에서도 호텔에서 "이준 열사는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라고만 밝히고 있으며 정확한 사인을 적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원인이 어떻게 됐든 조국의 주권을 항변하기 위해 조국서 이역만리 떨어진 외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도중 객사한 것은 분명 의심할 여지 없는 열사의 순국일 것이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 교외의 뉴 아이큰다우(Nieuw Eykendunen) 공동묘지에 가매장되었으며, 미국 일정을 마치고 헤이그로 돌아온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의 유해를 뉴브다이컨 묘지로 이장했다. 이준의 유해는 56년이 흐른 뒤인 1963년에야 서울 수유리에 이장되었다.
이준이 순국했던 호텔 자리는 1995년부터 '이준 평화박물관(YI JUN PEACE MUSEUM)'이 건립되어 있다. 현지 교포 이기항 씨의 노력으로 매입되어 유지, 관리 중이며, 헤이그 특사 관련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유럽 유일의 항일 사적지로서 네덜란드를 방문하는 관광객이라면 한번 들러보는 것도 좋을 듯.
6 실패의 이유와 평가
우선 헤이그 특사 파견 전인 1905년에도 고종황제는 미국에 헐버트를 파견해 도움을 요청하지만[13]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게 있는지라 미국은 찬바람만 쌩쌩 날렸고, 결국 을사조약은 체결 되었다. 고종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다시 한번 외교적 수단을 동원한 것이었다.
고종과 밀사들은 이번만큼은 서양 여러나라들의 공개적인 회담이기에 이를 공론화 하기만 하면, 열강들이 그냥 지나칠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이미 손을 써서 영국과 1차 영일동맹을 맺고,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는 이미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깨져서 데꿀멍. 특히 러시아는 외교적 수단으로라도 일본을 계속 견제하고 싶어 했지만,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제안했던 1904년과 1907년에 이르러선 러일간 외교적 합의가 이뤄지며 상황이 변해버렸다.
한편,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이 만국평화회의에 공식적으로 한국의 자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47개국 가운데 12번째로. 더군다나 회담 내내 "참석국은 47개국"이라고 언급되었다. 데꿀멍의 원인은 흔히 알려진 외교권 박탈에 따른 무시나 초청장의 부재가 아니라, 일본의 방해와 대표성의 부실 때문(…). 의장 넬리도프는 본국으로부터 대한제국 특사들이 협조를 요청하면 정중히 거절할 것이라는 훈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들은 부의장이었던 네덜란드의 보폴트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며, 보폴트는 네덜란드 정부와 상의하도록 주선했다. 주최국이었던 네덜란드도 대한제국의 회의참석에는 이의를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일본 대표가 네덜란드 정부에 일본 국가 명의로 항의하여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속령지역이니만큼 귀국(네덜란드)께서는 조선 대표의 회의참가를 불허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은밀히 압박을 놓았기 때문. 그렇다고 주최국인 네덜란드까지 친일성향을 보였다고 보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네덜란드가 조선과 친분이 있던 관계도 아니고, 설사 있었다고한들 동양의 실세인 일본과 척을 지면서까지 조선을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14] 외교란 철저한 실리에 움직이지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다는 걸 명심하자. 을사오적도 실리에 움직여서 을사조약을 체결했나
이 점에 있어서 고종이 국제정세도 모르고 안일하게 행동했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지나치다고 볼 수 있다. 이미 1907년의 상황은 이미 나라의 군사력은 거의 궤멸상태고[15] 황제는 일제의 감시아래 손발이 다 묶인 상황이었는데 사실 할 수 있는 카드는 외교적인 수단밖에 없었다. 고종으로서는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이다. 더구나 3국 간섭으로 일제가 물러난 기억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상황에서 달리 해볼 수 있는 방법은 그때 상황에서는 전혀 없었다. 헤이그 특사는 고종에게 있어서 최후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고종이 비판을 받을 부분은 이거 아니라도 많으며, 그래도 나름 큰 위험을 감수하고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는 최후의 저항을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평가를 받을만한 일이지, 안일했다고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여하튼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위협당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황제가 즉위하게 된다.
아키야마 요시후루도 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때 한국의 헤이그 특사들을 저지했을 것이란 추정이 있다. 그런데 그는 정작 회의에서 열심히 졸고 있었다고.- ↑ 사진에는 안나오지만 헐버트까지 포함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 ↑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으므로 당연히 이범진의 지위도 무력해진 상황이었지만, 이범진은 본국의 호출도 씹고 경술국치까지 버티며 공사관 업무를 지속했다. 경술국치 후엔 결국 자결하지만...
- ↑ <대한계년사> 중 김현토 관련 내용. 다만 대한계년사를 지은 정교는 당시 연해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현토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어 강사, 통역 역할을 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로 보이며, 김현토의 이용익 암살은 양쪽의 파벌 차이 때문이었다.
- ↑ 이 백지위임장을 전달한 것은 헐버트라고도 하고, 나중에 상동교회의 목사가 되는 전덕기가 아내의 이종사촌인 김상궁을 통해 몰래 받아왔다고도 한다.자세한 건 여기 참조
- ↑ 찹쌀떡 장수가 외무대신이 된 것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친일파 이하영이다.
- ↑ 과거의 성균관대사성
- ↑ 결국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을 폐위한다.
- ↑ 일제의 견제가 없었더라도 들어갈 확률이 희박했다. 일본과의 을사늑약으로 인해 대표가 일본이나 마찬가지기 때문.
- ↑ 박은식 <한국통사>, 위키피디아에서 재인용.#
- ↑ 이 문서를 읽는 이들에겐 듣보잡이겠지만, 신문과 잡지의 보도에 삽화를 삽입하는 보도기법을 도입한 인물이며 '인터뷰 기사' 형식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나중에 타이타닉 호에서 죽는다. #여기 참조
- ↑ 이준 역시 이성계의 형인 완풍대군 이원계의 후손으로, 전주 이 씨다. 이상설은 경주 이 씨.
- ↑ 1904 영일동맹....
- ↑ "왜 하필이면 수 많은 나라중에서 미국이냐?"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고종이 1882년 조미수호통상 조약의 제 1항 거중조정 항목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거중조정이란 상대국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때 도와주겠다는 선의의 조항이었다. 바보처럼 고종이 이 조항을 믿어버렸다는 비판이 있다.
- ↑ 오늘날에 비교하자면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정상급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압력으로 대만(중화민국),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망명정부 등이 국제사회에서 겪고 있는 외교적 어려움과 비슷하다.
- ↑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