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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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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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이동녕이동휘이명룡이범석
이범윤이봉창이상설이상재이승희
이위종이은찬이인영이재명이종일
이종훈이필주임예환장건상장인환
전명운전해산정환직조성환조완구
주자화주시경지청천채상덕천청
최석순최성모탕지야오편강렬홍기조
홍범도홍병기황싱


헤이그 특사 이상설, 이준과 함께. 가장 오른쪽의 앳된 청년이 이위종이다.

1884~1924?
대한제국 최후의 외교관 중 한 사람. 헤이그 특사의 부사였으며 경술국치 이후 러시아군 장교로 1차대전에 참전했다.

1 출생과 성장

전주 이 씨 광평대군파로, 낙동염라로 통했던 흥선대원군의 심복 이경하의 손자다. 아버지는 이경하가 기생첩과의 사이에서 얻은 서자 이범진이었다. 이범진은 왈패 기질이 강한 인물이었는데, 오죽하면 장안에 소문난 주먹패의 두목 민영주와 마주치자 장작개비 하나로 민영주를 두들겨 패놓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젊어서는 경력을 쌓으라는 고종의 배려로 지방관으로 나가면 탐관오리로 맹활약(...)했다. 매천 황현매천야록에서 젖먹이 호랑이라고 칭했을 정도였다.

그랬던 인물이 나라 밖으로 나가고 외교관이 되면서 변하는데, 1903년 용암포 조차 사건 당시에는 러시아 측에 용암포 조차 각서 제출을 거부해서 본국에 송환조치 당했을 정도였다. 엉뚱한 데서 왈패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나 할까, 시쳇말로 깡다구가 넘치는 외교관이었다. 정가에 유명한 친러파였고 워낙에 억센 기질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춘생문 사건의 주역이었고 결국 아관파천을 성공시켰다. 이후 법부대신이 되어 을미사변 수사를 맡았는데, 거침없는 수사로 일본의 기피대상이 되었으며, 일본의 견제가 심해지자 고종에 의해 1896년 주미공사로 발령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이때 둘째아들이었던 이위종이 어머니 박씨와 함께 미국으로 동행한다.[1] 이후 긴 세월 서구 각국을 거쳐 성장하며 머리가 이미 굳은[2] 아버지의 딸리는 외국어 능력을 커버치게 된다.

이범진이 미국으로 떠났을 때 이위종의 나이는 10살. 미국에서 4년을 보내고 러시아 공사가 된 이범진을 따라 다시 러시아로 떠났으며,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중등학교와 초급장교 과정을 마쳤다. 이후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관의 2등 참사관으로 아버지를 보좌했다. 특히 그는 여러 언어에 능통해 7개국어가 가능했으며,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에 특히 유창했다고 한다.

2 국제결혼, 헤이그 특사 파견

이위종의 이력 중 특이한 것이 러시아 귀족의 딸과 국제결혼을 했다는 점과 후일 러시아에 귀화했다는 것. 이위종은 1905년 옐리자베타 놀켄과 결혼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남작 작위를 가진 러시아 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 주재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 출신이었다. # 집안에서는 이위종이 공연장에서 옐리자베타 놀켄을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의 오빠와 먼저 친구가 된 뒤 구애작전을 펼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집안 구전으로는 이 과정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블라디미르 세르게비치 리라는 러시아식 이름도 받았다고 한다.

결혼 이듬해인 1907년, 이위종은 자신의 생애 전체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건 속으로 휘말려든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한 특사가 되어 활약한 것. 이위종은 부사가 되어 서울에서 출발한 부사 이준, 이준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한 정사 이상설과 함께 6월 중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독일 베를린을 거쳐 6월 24~25일경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이위종은 외국어 실력으로 모든 외교문서 작성과 인터뷰를 전담하게 된다.

이들 헤이그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했으며(자세한 것은 헤이그 특사 항목 참조), 이위종은 우연히 세 특사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은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의 눈에 띠어 7월 5일자 만국평화회의보에 대서특필된다. 이 신문은 당시 150명 이상의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모인 와중에 상당한 영향력을 보였던 매체로, 이위종은 이 인터뷰에서 직설적이면서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한다.

스테드: 여기서 뭘 하십니까? 왜 이 평화회의에 파문을 던지려 하십니까?
</br>이위종: 저는 아주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법과 정의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각국 대표단들은 무엇을 하는 겁니까.
</br>스테드: 그들은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조약을 맺게 됩니다.
</br>이위종: 조약이라구요? 그렇다면 소위 1905년 조약은 조약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체결된 하나의 협약일 뿐입니다. 한국의 이 조약은 무효입니다.
</br>스테드: 하지만 일본은 힘이 있다는 걸 잊으셨군요.
</br>이위종: 그렇다면 당신들의 정의는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며 기독교 신앙은 위선일 뿐입니다. 왜 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일본이 힘이 있기 때문인가요?
</br>이곳에서 정의와 법과 권리에 대해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

이 인터뷰는 이 항목 맨 위에도 있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특사 세 사람의 사진과 함께 <만국평화회의보>에 보도된다. 이것이 기회로 연결되어 4일 후인 7월 9일, 세 특사는 각국 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초청받는다. 이위종은 이 자리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코리아의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펼친다. 이 연설문 전문은 스테드에 의해 평화회의보에 게재되고, 기자단 사이에서는 즉석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을 동정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등 언론인들과 시민활동가들을 상대로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던 듯 하다.

일본인들은 항상 큰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 문명인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개방정책을 유지하며 모든 국가에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그들은 변합니다. 놀랍게도 원통하게도 그들은 모든 나라에 대한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 대신 추하게, 불의하게,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결정적로 야만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을사조약은 우호적으로 체결되었지만,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그 뒤통수를 치는 일본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이위종은 현지 언론에 대한제국의 왕자 쯤으로 소개된다. 물론 이위종이 전주이씨이긴 한데, 상술했다시피 광평대군파다. 오지게 먼 친척[3]

7월 11일, 이위종은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러시아로 떠난다. 그러나 사흘 후인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위종은 18일 급하게 헤이그로 돌아왔으며[4] 이상설과 이위종은 영국을 거쳐 8월 1일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고종 자신이 을사조약을 비준한 적이 없으며 조약은 무효임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이상설과 이위종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들은 9월 1일 다시 헤이그로 돌아와 뉴 아이큰다우 묘지에 묻혀있던 이준의 유해를 뉴브다이컨 묘지로 이장하고, 파리, 런던, 베를린, 페테르부르크 등에서 구국연설회를 개최했다. 이러는 사이 서울에서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에 대한 궐석재판이 열렸으며, 이상설 사형, 이준·이위종 무기징역형이 내려졌다. 구국연설회 후 이상설은 미국으로 향했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3 경술국치와 이범진의 사망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을 돕는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짧은 생애 중 대부분을 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이범진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도 제정 러시아의 연금을 받으며 공관을 버리고 아파트로 옮겨 여권 발급 등의 공사 업무를 계속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를 돕는 것도 주요한 일이었는데, 수입원이 없어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받는 상황[5]에서도 계속해서 신한촌 등에 자금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인 신문 창간 등을 주장하고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 연해주에서 크게 활약했던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과 사촌형제였다. 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이범윤과 이위종은 당시 일본의 항의를 받아 연해주 일대의 한인사회를 감시하던 러시아 측의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1908년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이 들려준 군자금 1만 루블을 들고 장인 놀켄 남작[6]과 함께 연해주를 방문한다.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리더 격으로 부상한 최재형과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중심으로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 조직이 구성되었는데, 이위종은 자금 지원과 함께 이 조직의 회장으로 중심적인 활약을 한다. 1908년 7월에는 함경북도 회령, 경성 등지로 진출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경찰부장은 이위종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끈질기던 이범진도 경술국치 소식에 끝내는 탈진했는지,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단 채 권총을 쏘아 자살한다.

한국, 서울, 덕수궁
</br>
</br>황제폐하께
</br>"우리의 조국 대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이범진의 장자이자 이위종의 형인 이기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직후 일제에 체포 당해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이미 객사했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 교외의 우스펜스크 묘지에 안장했다.

4 러시아 귀화, 그 후

1911년, 아버지가 사망한 그 해 이위종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이때 한국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로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191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1916년에는 러시아 군의 장교가 되어 동부전선에 배치되었으며, 부인 놀켄 여사는 1917년 이위종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놀켄 여사는 그의 사인이 전투 중 사망인지, 자살인지, 피살인지 확인하려 애썼지만 사인은 커녕 정확한 사망 지역도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을 이뤄줄 것은 러시아라고 주장했다는 붉은군대의 장교 '이위청'이 이위종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발굴된 구 소련 문서, 즉 이위종이 1924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의 일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924년에 러시아 공산당에 제출된 이 문서에 따르면 이위종은 1887년생이 아니라 1884년 1월 생이고, 1916년 이후 불투명한 행적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 나타난다.
1916년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보로 임관한 이위종은 전선에 투입되었고, 1918년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과 함께 러시아군의 동원해제가 이루어지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5월, 적백내전이 본격화되자 그는 놀랍게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고, 붉은 군대 산하 '제3국제연대'에 입대한다.
이후 우랄 기관총연대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초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백군을 격퇴, 이르쿠츠크 탈환에 공훈을 세웠다.
일본 밀정 보고서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모든 재러시아 한인들의 두목'으로 묘사된다. 일제가 그만큼 경계할 정도로 거물급 지도자였던 모양.[7]
이르쿠츠크 탈환 이후 이위종은 군을 나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치타 등지에서 공산당 간부로 활동한다.
그가 자서전을 공산당에 제출한 것은 1924년이고, 아쉽게도 그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이 모든 행적이 가족들에게조차 알려져있지 않았던 이유는 1917년 이후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혁명활동에만 투신했기 때문이다.[8] 그는 자서전에조차 처자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국해방과 세계혁명에 모든 것을 바친 모양.

본인의 말처럼 유서 깊은 양반가에서 태어나, 국제적인 지식인으로 성장,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에서 최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한,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이 근대세계를 질주한 사람.

근래에 사료가 발굴되서때문인지, 혹은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이위종이 공산당에 입당한 사실이 껄끄러운 것이기 때문인지,[9]
이위종에 대한 공식적인 전기는 전혀 업데이트 되지 않았다.

자서전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윤상원 (2013), 근대인 이위종의 생애와 시대 인식, 한국인물사연구, (20)를 참조하라.

놀켄 여사와의 사이에서 딸만 셋을 두었으며, 둘째 딸과 슬하의 남매가 여전히 러시아에 살아있는 것으로 1991년 보도됐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참조

2015년, 대한민국 법무부의 특별귀화자 신청자 명단에 후손 3인이 특별귀화를 신청하였고 국가보훈처에서 신청한 3인이 그의 후손이 맞다는 통보를 해왔다고 한다. 이 특별귀화자 명단에는 독립운동가인 김경천 장군의 후손 7인도 있다.###

  1. 형 이기종은 나중에 따로 미국으로 출국했으며, 이범진이 러시아로 옮겨간 후 귀국했다.
  2. 게다가 원래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하던 인물이라...
  3. 이준 역시 전주이씨인데, 이쪽은 완풍대군파로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의 후손이다.
  4. 장례식에는 이상설만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이준의 사망과 장례식은 7월 16일, 이준의 사인에 대한 이위종의 인터뷰는 7월 20일에 보도됐다.
  5. 제정 러시아는 한국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지속한다는 의미에서 이범진에게 소환령이 떨어진 후에도 연금을 지급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연금 지급 기한 만기가 다가오자 대한제국에서 온 공사가 생계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방치당하는 건 자존심 문제라는 이유로 2년간 연금 추가 지급을 약속했다.
  6. 러시아 토볼 주의 총독이었다고 한다.
  7. 이위종이 한인 7800명을 징집했다고 보고하는데, 일본군은 이를 과장된 것이라 받아들였다.
  8. 1911년 부친의 자결 이후 처자식의 생계에 대해선 전혀 신경을 안 쓴 모양이다. 이범진의 사후에도 그가 받던 연금이 이위종에게 일부나마 지급되고 있었는데, 1915년 이위종의 아내가 러시아 정부에 연금을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 달라는 청원을 보낸 문서가 남아있다.
  9. 2000년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수훈됐지만, 이후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수훈을 거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