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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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李相卨, 1870~1917)

1 개요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1],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2]이다.

2 연보

1870년 충북 진천군 출생.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 학교 설립.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고종의 밀명을 받고 파견됨.

1909년 이승희 등과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 운동 기지인 한흥동 건설.

1910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 한일합병 반대하는 독립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과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 발표.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단체 권업회를 조직.

1914년 이동녕 등과 함께 연해주 지역에서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움.

1917년 니콜라스크에서 사망.

3 생애

3.1 초년기

1870년 진천에서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에는 아들이 없는 경우 대를 잇기 위해 아들뻘 항렬의 집안 아이들 중 총명한 아이를 골라 양자로 들이는 경우가 꽤 흔했는데, 이상설 역시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됐다. 스무 살에 이미 학자로 명망이 있었고, 1894년 스물다섯에 조선 마지막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했다. 1896년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됐는데, 겨우 27세였다. 성균관 대사성에 서른도 안 넘긴 청년이 임명됐다는 소리다. 탁지부 재무관이 되며 이 시기에 호머 헐버트와 가까워져 근대학문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로 연구했던 근대학문은 수학과 화학, 법학 쪽으로 보이며, 수학의 이치와 연구를 이르는 '수리'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근대학문은 거의 독학으로 익혔다. 특히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통해 <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4일자)는 “이상설은 원래 대한 학문학의 제일류(第一流)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가 심독(深篤)하여 동서학문을 실개통효(悉皆通曉) 연정(硏精)”하다고 평가했다.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해 박승봉과 연명으로 반대상소를 올려 침략성과 부당함을 지적했고, 같은 해 8월에 보안회[3]의 후신인 대한협동회의 회장에 선임된다. 다음 해(1905) 법부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이 시기에 만국공법 등 법학을 연구하고 번역하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대신회의 실무자[4]였으므로 조약 체결 저지를 시도했으나 일본군에 가로막혀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고, 참정대신 한규설과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을사늑약은 고종의 정식 인준 절차를 거친 조약이 아니었는데, 이상설은 고종에게 같은 상소를 다섯 번이나 올려 "을사늑약은 인준해도 나라가 망하고 인준 안 해도 망한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나라와 같이 죽는 게 낫지 인준하시면 안 된다"고 요구했다. 이 해 11월 30일 민영환이 순국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종로 거리에 나가 시민들을 상대로 국권회복운동에 나서자는 연설을 한 뒤 땅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으나 주변 시민들이 뜯어말려 실패했다.

3.2 국외 망명과 헤이그 특사

이상설은 1906년 국외 망명을 결정하고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연해주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만난 뒤 다시 만주로 떠난다, 8월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직접 수학을 가르쳤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07년 문을 닫아야 했다.

1907년 고종은 용정촌에 있는 이상설을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정사로 파견한다. 이상설은 부사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떠났으나 일제의 방해로 공식 참석 국가 명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석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상설은 7월 5일 회의장에서 호소문을 발표한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48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br>
</br>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 세 개 열거해보면,
</br>
</br>*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br>*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br>*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br>
</br>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br>
</br>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br>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5]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이상설과 함께 초청됐다. 이 자리에서는 이위종[6]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연설을 해 주목받았다.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위기를 공론화하고 구미 언론에서 이 문제를 보도하게 만드는 성과는 있었으나 끝내 공식 회의 석상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이준이 순국하자 헤이그 뉴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트집 잡혀 강제퇴위당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헤이그 특사 항목 참조.

3.3 순국

헤이그 밀사 사건이 실패한 뒤 1908년 미국을 순방하며 한인교포를 결속시키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이듬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러시아-만주 국경지방에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년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을 편성했다. 퇴위당한 고종에게도 13도의군의 편성을 상주하고 도총재 유인석과 함께 고종 망명을 시도했다. 경술국치 이후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합병 반대 운동을 전개했으며, 독립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 을 발표하고 미국, 러시아,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에 주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고, 러시아는 성명회와 13도의군 주요 인물 42명을 체포했다.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신한촌에서 다시 권업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권업회는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했으며, 교민 지위 향상과 반일투쟁을 위한 경제적 실력 배양, 민족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펼쳤다. 권업회는 활발한 활동으로 인근의 거의 모든 한인 거주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1914년 회원 수 8,500명에 달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상설은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중국, 러시아 제국령 내 한인들을 규합해 이번에는 아예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출됐다. 그러나 권업회는 러시아 정부의 공인을 받았던 처음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일본의 항의로 러시아 당국에 강제해산 당했다.

이상설은 권업회 해산 후 상해로 이동해 활로를 찾았으며, 이 과정에서 1914년 박은식, 신규식, 이동휘, 성낙형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 창설에 참여해 본부장을 맡았다. 신한혁명당은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상해에 지부를 두어 대체로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7] 중국, 독일 등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였다. 같은 맥락에서 당수로 고종을 추대할 것을 결의했고, 외교부장 성낙형이 국내에 파견되어 고종 망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성낙형은 중국(위안스카이 정부)과 동맹을 맺자는 조약안을 들고 고종을 알현하기 직전 발각되었고, 망명이 수포로 돌아갔다. 국내 조직원들이 전원 체포당했고 신한혁명당도 활동이 중지되었으며, 당 조직 자체도 무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상설은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초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누웠으며,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겼지만 끝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다음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남긴 유언.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의 임종을 지켰던 이동녕,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이상설의 유언대로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이상설의 유해를 화장했으며, 문고와 유품도 함께 거두어 불살라 바다에 날렸다.

4 그 외

한학을 배워 조선시대 마지막 과거 합격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젊어서 이미 대학자로 명망을 얻은 인물이었지만 동시에 당시 한국인들 중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에 가장 해박한 축에 드는 인물이기도 했다. 신학문의 영향인지 임금에 대해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은 듯 보인다. 을사조약 당시 고종에게 "죽으면 죽었지 조약 비준은 하지 말라."고 상소한 것도 그런 맥락. 정통 한학자이자, 과거 합격자의 사고방식으로 임금에게 '차라리 죽으라'고 요구한 것은 엄청난 파격이었다.

엄청난 독서량으로도 유명했는데, 당시에 이미 집에 수천 권을 가진 장서가였고 이회영 등과 함께 집에서 스터디모임을 결성해 국제법, 국제정치 등을 공부했다. 이 책들은 나중에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수습해 국회도서관에 넘긴다.

일평생을 실패만 반복하고 산 사람이기도 한데, 젊어서는 공직에 출사했으나 곧 나라가 망했고, 헤이그 특사 사건은 회의 참석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으며 동료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하기까지 했다.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열었지만 다음 해 일제가 간판을 떼버렸고 성명회와 권업회는 동맹국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제정 러시아 당국이 뭉개버렸다. 신한혁명당은 고종 망명 성공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조직이 와해 됐고, 결국 48세 지천명도 못 채운 나이에 만리타국 추운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한창 일할 장년의 나이에 분사(憤死)한 것. 그의 일생을 생각하면 이상설의 유언은 서리서리 맺힌 한과 비애가 느껴진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1971년 숭모비를, 1975년 숭렬사를 건립했다. 2005년 12월 국가보훈처에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 파는 이제현을 파조로 하는 익재공파(益齋公派)
  2. 혹은 부재라고도 읽음.
  3.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반대운동을 펼친 단체
  4. 의정부 참찬
  5. 박은식 <한국통사>, 위키피디아에서 재인용.#
  6. 이위종은 주러시아 대한제국 공사였던 아버지 이범진의 영향으로 미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를 떠돌며 컸고 특히 프랑스에서 초급장교교육을 받았다.
  7. 자세한 것은 여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