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


1 성인(聖人)이나 임금의 화상(畫像)이나 초상(肖像) 또는 그리스도성모의 상(像).

한자: 聖像
영어: 이콘(icon)

영어로 icon 자체는 성화나 성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이콘이라 함은 성화 혹은 작은 지물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 경향이 있다.


1.1 개요

예수성모 마리아, 그 외의 성인들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그린 것을 말한다. 성상은 천주교정교회에서 공경한다. 다만 정교회는 예전 성상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조각은 잘 사용하지 않고 성화를 주로 사용한다. 성공회의 경우 성모 신심이나 성인 공경 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고상, 성모상 등 각종 성상을 인정하며 교회에도 다양한 성상과 이콘을 사용하지만, 천주교에 비해서는 그 사용빈도가 다소 떨어진다. 성공회 내에서도 가톨릭의 전통을 따르려는 고교회파와 개신교의 개혁정신을 따르려는 저교회파로 나누어지기 때문.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천지창조 등이 대표적인 성상이다.

성상숭배인지 성상공경인지는 상당한 어감의 차이가 있으므로, 본 항목에서는 숭배나 공경 등의 표현을 최대한 피하여 중립적으로 서술한다.


1.2 성상 파괴 운동

1.2.1 동서교회 분열 시기

성상을 이야기할 때 역사적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서방 교회에서 성상이 보편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다. 4세기 후반 훈족에 의해 밀려난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사회로 흘러들어오자, 무지몽매한 이교도를 교화시키기 위해 많은 교보재(…)가 필요했고, 글도 모르니까 이때 선교사들의 SOS로 교회가 성상을 장려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대가 흐른 뒤, 이슬람교의 등장과 함께 발생했다. 이슬람교는 이슬람교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상은 우상숭배라고 주장했고, 동로마 제국 동부 속주들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아 성상파괴운동이 발생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소수의 이단운동에 불과했겠지만, 이슬람 세력에 맞서 제국 동부를 군사적으로 수호하던 황제들이 이들의 입장에 동정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황제들은 시민에 대한 영향력의 측면에서 교회와 경쟁하였으므로, 성상파괴론을 장려하는 것은 매력적인 정치적 도구일 수 있었다.

성상파괴론의 논리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다'면서 결국 그림은 불완전한 인성(人性)만을 그리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성화상 옹호론자들을 죄다 신성(神性)과 인성을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자로 비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성상을 인정하지 않는 교파였다.(항목 참조)

하지만 교회에서는 카타콤 벽에 그림 그리던 시절부터 내려온 성상을, 더군다나 (서방교회의 입장에서는) 이교도 감화에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가진 성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성 스테파노 등 수도원 등에서 활동하던 성화상 옹호 교부들도 지속적으로 성화상에 대해 그 정당성을 설득하였다.

특히 출애굽기(탈출기) 20장의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조상(彫像) 제작의 무조건 엄금이 아니고, 다만 이를 신으로 숭배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는 행위를 금한 계명이라는게 옹호측의 설명이었다. 즉 '조각상을 신으로 섬기지 마라'는 어찌보면 매우 상식적인 우상숭배 금지계명이라는 것.

또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이 당연한(?) 계명을 하느님이 굳이 내린 이유에 대해 "유다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경향이 심하므로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우리는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미 미신의 오류를 면하고 진리를 알게 되어 하느님을 모시고 오직 그분께 흠숭지례를 드릴 줄 알며,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더 완전히 더 풍부히 가졌으므로 어린 시대를 지나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아이가 아니며 하느님께로부터 식별 능력을 받아, 형상 표시의 가능 불가능도 알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실제로 탈출기 25장에서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커룹(그룹)의 형상'을 만들도록 시킨다. 즉 '형상을 만드는 것 자체'가 죄라서 금지시켰다면, 이는 하느님이 모순을 행한 셈이 된다(...)

성 스테파노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 한 닢을 황제에게 내밀며 "폐하, 이것은 누구의 초상입니까?"라고 묻자 황제는 "짐의 초상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스테파노는 동전을 내던지고 그것을 짓밟았다. 당연히 사형선고가 떨어졌고, 형장에서 그는 "아, 내가 한 국왕의 모습을 모욕하여 사형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상을 태워 없앤 악당들은 어떠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냐!"하고 말하였다.

성화상을 기본적으로 초월적 신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창문으로 생각한 이들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며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같이 붙어다니므로 그림을 그려도 신성과 인성은 언제나 함께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상파괴론자들을 당시 치명적인 이단의 낙인이었던 단성론자로 몰아 반박한다. 이후 동로마 제국 내에서의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성상 허용과 금지가 번갈아 벌어지면서 애꿎은 인류의 문화유산들만이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서방교회에서는 동방교회와는 달리 딱히 성상파괴론을 자극할만한 떡밥이 없었으므로, 서방교회 입장에서는 동방에서 갑툭튀한 성상파괴론에 뜨악해서 동서 교회의 사이가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성상파괴론의 탄압을 받은 많은 이콘제작자들이 서방교회의 영역으로 망명함에 따라 서유럽의 성미술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342px-Hagia_Eirene_Constantinople_2007.jpg
성 이레네 성당의 내부 모습

참고로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이레네][1]가 바로 성상이 금지된 시절에 지어진 건물이다.[2] 링크를 보면 이콘은 하나도 없고 십자가와 육각별 모양(다비드의 별)만 천장에 달랑 그려진걸 볼 수 있다. 이는 오스만 치하 때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런 모습이었다. 정작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는 소피아와 달리 건드릴 물건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는지 건물 일부를 무기고로 개조했으며(다만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부분은 [당시에도 멀쩡했다]), 17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까지는 각각 오스만 제국터키 공화국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가 1950년부터 터키 문화부가 단계적으로 군사박물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복원이 시작되었고 1978년에야 복원이 완료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결국 여황제 이레네에 의해 소집된 제7차 공의회(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에 대한 공경은 성화를 통해 표현된 교리와 성인의 행적에 대한 공경이지, 성화 그 자체에 대한 공경이 아니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동방교회는 다시 과거의 성화 사용 전통으로 복귀하였다. 이후로 정교회는 매년 사순기간의 첫째주일을 정교주일로 지정하고 전세계의 정교회에서 성화(이콘)을 들고 행렬의식을 거행하면서 성상논쟁에서 정통 교리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즉 성화는 지금도 사용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2.2 종교개혁 시기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예수쟁이/폐단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405px-Tachtigjarigeoorlog-1566.png
1566년 네덜란드벨기에에서 성상파괴가 집중적으로 벌어진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

640px-Beeldenstorm_in_een_kerk_Rijksmuseum_SK-A-4992.jpeg

잠잠해지나 싶었던 성상 파괴 운동은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서유럽에서 다시 한번 재현되었다.

1522년 안드레아스 칼슈타트에 의해 비텐베르크에서 성상이 철거된 것을 시점으로 1523년 취리히, 1535년 제네바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성상 파괴 사건이 일어났는데,[3] 그중에서 1566년 네덜란드에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은 당시 상전국이던 스페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을 정도이다. 다만 이 당시에도 뭔 짓이냐며 비판적인 여론이 대다수였고 침묵공 빌렘도 처음에는 오히려 성상 파괴를 진압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현재 네덜란드의 교회들은 남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상이 제거되어 있는데 이는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80년 전쟁 도중 침묵공이 루터교에서 칼뱅교로 개종하고 남부를 제외한 현 네덜란드 지역의 대다수가 개신교 진영으로 들어가면서[4] 각 지방 의회의 동의 아래 성상 철거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5]

이는 검소하고 문자주의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장 칼뱅의 영향으로 당시는 상당한 사치품이었던 성상을 꺼리는 성향이 이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일단 소재부터 대리석에, 교회의 권위를 보여야 하는 만큼 보석이나 금은으로 치장하는 경우가 많고 2차원 성화의 경우 거진 계란 노른자를 쓰는 템페라화가 대부분이라 식량 낭비 문제도 있었다.[6] 거기다 인부의 품삯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돈지랄이 따로 없는 것. 게다가 개신교에서는 출애굽기 사건에서 나온 금송아지를 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내주신 하나님을 억지로 형상화한것임을 강조하여 하나님은 오로지 보이지 않는 존재로만 경배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더욱이 "우상을 훼파하고 찍어 없애버려라"라는 구절이 있고 열왕기역대기를 보면 구약시대에도 헤즈키야나 요시아 왕처럼 닥치는 대로 우상을 모두 가루가 될 때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린 사례[7]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근거로 당시 칼뱅파, 츠빙글리파, 급진주의 재세례파들은 성상파괴를 정당하다고 여겼다. 이후로 루터교를 포함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시각적인 요소보다는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활자적, 청각적 요소를 더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는 문해율 향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어 근대적인 공교육 개념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8]

루터교가 주류였던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교회 안에 있는 성상과 조각상들은 그대로 남겨두었지만 야외에 설치된 십자고상성모상들[9]은 남김없이 부숴버렸다. 애초에 루터파도 칼뱅파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것일 뿐 성상 사용에는 의외로 부정적이다.

1.3 기준

우상숭배라고 공격받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에, 가톨릭에서도 나름의 기준이 존재한다.

  • 공경을 표하는 것은 오로지 축복받은 성상에 한한다.
    • 축복받지 않은 것은 교회법상 신앙의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 거꾸로 말하면 성상은 하나의 도구라는 뜻이다. 개인이 만든 단순한 형상이나 그림에 함부로 공경을 표해서는 안 된다. 안 그럼 주일학교 포스터에도 공경을 표해야 할 판이다.
  • 특정한 성상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 예를 들어 발등 위에 장미꽃이 얹혀 있는 루르드의 성모상이라면 루르드의 성모님이 의미하는 은총을, 어디서 누가 만든 성상이든, 해당 성인을 의미하는 지물 등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고 사제에 의해 적법하게 축복받았다면 모두 신앙의 도구로서 똑같이 드러낸다는 것이 교회법으로 제정되어 있다.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 등을 무슨 부적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매우 곤란하다.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 이단나주 성모동산(마리아의 구원방주)는 이 기준을 위반했다.

2 군주를 부르는 경칭

聖上

왕조 시대에 집권 중인 황제천자 그리고 을 높여 부르는 경칭.

성상이란 표현은 황제의 지칭이라 명목상 제후국인 한국 왕조들은 사용이 불가했지만 외왕내제를 지향한 한국의 왕조들은 전부 성상이란 지칭을 사용하였다. 황상으로 못 이룬 천자국의 꿈 성상으로 이루자

고려시대 당시에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 성상 폐하라는 호칭이 국왕에 대한 정식 호칭이었고, 조선시대에도 주상 전하 말고도 성상 전하로도 불리웠다.

3 후한 말의 인물

盛翔

생몰년도 미상. 건위군 사람으로 성도조원강의 아들.

남양과 삼보 일대에서 유민들이 익주로 유입되자 유장이 이들을 구성으로 한 동주병을 창설했는데, 유장이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동주병들이 약탈을 자행해 유장이 민심을 잃게 되자 파중에서 민심을 얻던 조위가 유장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위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위는 대성의 씨족들과 결탁해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익주가 더욱 혼란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성상은 다섯 살로 아버지 성도가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성도와 어머니 조원강과 함께 붙잡히게 되었다가 조원강이 자신 혼자만 남는 것으로 희생해 성도와 함께 달아났으며, 이로 인해 조원강이 사망했다.

그 뒤에 대사면이 시행되자 성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1. 그냥 성스러운 평화라는 뜻이고 밑의 성상을 용인한 여제와는 관계 없다.
  2.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상 없는 정교회 건축물이기도 하다.
  3. 심지어 루터교 지역이던 코펜하겐에서도 벌어졌다.
  4. 가장 마지막으로 개신교 진영에 편입된 곳이 다름아닌 암스테르담(1578년)이다.
  5. 출처: Andrew Spicer 《Calvinist Churches in Early Modern Europe》, 116-124페이지
  6. 종교개혁가들과 성상파괴론자들 눈에 템페라화는 먹을 것 갖고 장난치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것으로 비춰졌다.
  7. 뱀발로 불지옥을 뜻하는 게헨나(=게힌놈)가 이 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다. 항목 참조
  8. 실제로 루터와 칼뱅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최소한의 교육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지금도 보수적인 개신교인들은 호세아 4장 6절(백성들에게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을 인용하여 문맹이 우상숭배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9. 지금도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 구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은 길거리에 십자고상성모상, 혹은 이콘이 모셔진 사당 비스무리한 것을 길거리에 설치해 놓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