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쿠돔 퍽유두미
컵스 시절. 염소의 저주를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설레발이 적혀있다
한신 타이거스 No.8 | |
후쿠도메 고스케(福留孝介) | |
생년월일 | 1977년 4월 26일 |
국적 | 일본 |
출신지 | 가고시마 현 |
출신학교 | PL학원 고등부 (오사카)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우투좌타 |
체격 | 183cm 91kg |
프로입단 | 1999년 드래프트 1라운드 |
소속팀 | 주니치 드래곤즈 (1999~2007) 시카고 컵스 (2008~201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1) 시카고 화이트삭스 (2012) 한신 타이거스 (2013~) |
200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리그 MVP | |||||
가네모토 도모아키 (한신 타이거스) | → | 후쿠도메 고스케 (주니치 드래곤즈) | →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
1 개요
일본의 야구선수.
2 일본 시절
1977년 생으로, 키요하라 카즈히로, 타츠나미 카즈요시 등을 배출한 명문 PL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5툴 플레이어로 주목받으며 지명 순위 1순위로 무려 7개 팀이 경합한 끝에 킨테츠 버팔로즈가 교섭 우선권을 따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주니치나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라며 지명을 거부하고 일본의 사회인야구팀 닛폰생명에서 2년간 뛰다가 1998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의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 은메달 획득에 기여하기도 했다.
1999년 데뷔 시즌부터 주전 유격수로 뛰며 신인으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최다 삼진을 당하는 등 선풍기도 아낌없이 돌렸다. 흔히 이종범이 후쿠도메에게 유격수 자리를 뺏겼다고 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이종범은 부상당하기 전부터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 "유격수의 기본이 안되어있는 선수" 라는 혹평까지 들어가며 까이다가 부상을 당한 이후 3루수를 거쳐 외야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즉 1998년 후반기에 이미 이종범은 외야로 옮겼기에 후쿠도메는 이종범 자리를 뺏은 것이 아니라 무혈입성한 셈.[1]
그러나 차세대 주니치 드래곤즈의 유격수로 생각되던 후쿠도메 역시 수비력에서 꽤나 문제를 보였다. 루키시즌 페넌트레이스때나 일본 시리즈 때 패배로 직결되는 에러를 수도 없이 저지르며 호시노 센이치에게 개갈굼을 먹고 이종범 테크를 그대로 밟는다. 3루수를 거쳐 외야수로 전향한 것.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주니치 드래곤즈는 이바타 히로카즈가 입단하기 전까지 주전 유격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돌림빵으로 막아간다.
외야수로 전향한 후에는 골든글러브급 수비와 함께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활약하며 MVP 1회, 타격왕 2회, 베스트나인 3회, 골든글러브 4회를 수상했다. 특히 MVP와 타격왕을 차지한 2006년에는 .351/.438/.653 OPS 1.091의 리그 최고 비율스탯과 31홈런 104타점 117득점을 기록하며. 홈런왕-타점왕 2관왕을 차지한 타이론 우즈와 함께 공포의 중심타선을 꾸렸다.
2006년, 2009년 두 번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였는데, 특히 2006년 대회 준결승 한국전에서 김병현에게 결승 2점홈런을 쳐 낸 바가 있다. 이 대회 결승전에서도 9회 대타로 나와 훗날 크보에서 뛰게 되는 한 투수를 상대로 일본의 승리에 쐐기를 박는 2타점 적시타를 때리며 우승에 기여했다.
3 미국 시절
2007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얻으며 시카고 컵스와 4년간 4,800만달러의 먹튀대형 계약을 맺으며 메이저리거가 되었다.[2] 이때만 해도 마쓰이 히데키의 활약을 통해 일본의 정상급 타자들도 미국에서 통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지라 후쿠도메를 영입하기 위해 미국에서도 경쟁이 있었고, 컵스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2008 시즌 데뷔 경기에서 첫 타석 2루타를 기록하며 컵스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시즌 중반까지 적절히 활약하며 내셔널리그 올스타에 팬 투표로 뽑히는 등 성공적인 미국 데뷔를 하는 듯 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들어 대 삽질을 하며 3할을 훌쩍 넘던 타율은 온데간데없고 2할 5푼대의 최종 성적을 찍고 말았다. 그 와중에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 1차전과 2차전에 선발로 뛰었으나 두 경기 전부 무안타에 그치며 역시나 삽질.
2009 시즌도 역시 시즌 초반에는 타율 3할대를 기록하며 잘 나가다가 5월 이후 또다시 삽을 푸며 역시 2할 5푼대로 시즌 종료. 특히 좌완투수 상대 타율이 1할 6푼대라는 처참한 좌상바 기질을 보이며 좌투수가 선발로 등판하는 날에는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기 일쑤였다.
2010시즌 역시 좌투수가 선발로 나올 경우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는 경우가 다반사..(...) 그 와중에 6월 18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9회말 끝내기 안타를 치며 나름대로 살아있음(!)을 과시했으나, 여전히 타율은 2할 6푼대.
2011시즌부터는 더이상 봄쿠도메가 아니었다! 다만 처음부터 평범한 성적을 냈을 뿐. 이쯤 되면 먹튀 확정. 시카고 컵스 팬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지 못하다고 하니 지못미
7월 29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부족한 외야진을 보충하기 위해 영입했다. 추신수와 그래디 사이즈모어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한 트레이드가 성립된 것. 클리블랜드에 대해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었지만 클리블랜드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쓰지 않았다고... 컵스 팬들은 드디어 꼴보기 싫은 선수 들어냈다고 환호한 반면 인디언스 팬들은 돈은 없는데 선수보강할 자신 없으니까 전력보강 시늉만 했다며 단장을 깠다.(...)
영어로 표기,발음하기 애매한 이름(Fukudome = F*ck You Do Me)을 가지고 있어 부진할 경우 컵스 팬들로부터 이름과 비슷한 욕을 듣기도.(...)
2012년 2월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1년 1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지만 6월에 방출되었고 7월 뉴욕 양키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한번도 콜업되지 못하고 웨이버 신세. 이적시장에서도 오퍼가 없어서 일본 복귀가 확정되었다.
여담으로 국내 팬들에게는 봄에만 잘한다고 봄쿠도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본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한때 같은 외야수인 닉 마카키스와 더불어 추신수와 비교할만한 선수로 거론되던 시절이 있었으나, 결국은 '5월까지의 후쿠도메'와 '5월까지의 추신수' 성적만 비교되는 신세(...)
4 일본 복귀
2012년 12월 25일 한신 타이거스와 3년 6억엔에 계약을 맺고 국내로 복귀하였다. 타율이 2할을 밑도는 부진에 허덕이고 있다가 5월 들어서는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메쟈 방출생 출신 니시오카 츠요시는 날아다니고 있는데... 결국 왼쪽 무릎수술이 확정되면서 사실상 시즌 아웃...
게다가 2014년에는 개막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니시오카 츠요시와 충돌하며 니시오카가 전반기를 날려먹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본인도 타율 2할대를 밑도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한신의 대형 먹튀 계보를 이어갈 기세, Aㅏ... 결국 6월 초순경 타율 1할대를 뚫고 들어가는 부진끝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이처럼 정규시즌에 죽을 쑤며 한신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한신 타이거스가 센트럴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이후 타선에서 맹활약을 하며 한신의 2014년 일본시리즈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MVP는 오승환이 받았지만 후쿠도메 역시 마우로 고메즈와 함께 타선에서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계약 마지막 해인 2015년에는 반등에 성공, 140경기 0.281, 20홈런, 76타점이라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고 시즌 후에 구단과 1년 2억엔에 재계약에 성공했다.
2016년 7월 30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홈경기에 4번타자 우익수로 선발출장, 4타수 4안타 1홈런 5타점 3득점으로 맹활약하며 개인 통산 두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였다. 이날 후쿠도메는 만 39세3개월3일로, 1983년 4월30일 한신전에 사이클링히트를 달성한 야마모토 고지(당시 히로시마)의 만 36세6개월을 훌쩍 뛰어넘어 일본 프로야구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였다. 일본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