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히토

20130407_img1_window.jpg
2013년 4월 7일, 국립 오차노미즈(お茶の水) 여자대학 부속 소학교 입학식 날.

悠仁(ひさひと)

1 개요

일본최고 금수저 황손.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막내. 형제로는 15살 위의 큰누나 마코 공주와, 12살 위의 작은누나 카코 공주가 있다.

아키히토 덴노의 하나뿐인 손자로, 미래의 유력한 천황[1]. 황실로부터 받은 문양은 금송(金松). 언론에선 주로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秋篠宮悠仁) 친왕(親王)으로 불린다[2].

1965년 후미히토가 태어난 지 41년 만에 태어난 남성 황족이기 때문에, 태어난 직후부터 황태손 예우을 받고 있다.

여담으로 남성 황족이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었던 탓에 천황의 여성 승계를 허용하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려 했었는데,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이러한 시도들은 무산되어버렸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왕위의 남성 승계를 골자로 하는 현행 제도를 견지하겠다고 밝혔으며, 일본 정부도 황실전범 개정을 사실상 단념해 여성 승계는 물 건너간 듯. 여성 천황 관련 논의가 완전히 폐기되는 것으로 가 버렸고, 아베 신조 총리는 "황실은 부계로 잇는다"고 못박았다. 아이코 공주 안습

2 탄생과 그 여파

일본 황실 최초로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전치태반[3]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주팔자[4]를 맞추기 위함이라는 소문도 있다. 또한 이 출산일본 황실 사상 최고령 출산이기도 하다(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인 키코 비는 1966년생). 키코 비에게는 여러 모로 힘들었던 출산.

2.1 의미

파일:Attachment/히사히토/4a.jpg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기 얼마 전,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 히사히토 친왕을 임신 중인 어머니 키코 비,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3학년인 큰누나 마코 공주,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인 작은누나 카코 공주.

그의 탄생은 일본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2001년 마사코 황태자비가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임신에 성공하여 일본 전체가 흥분에 빠졌지만, 아들이 아니라 딸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태어났다. 마사코 황태자비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더 이상 임신하는 건 힘들었고, 당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부부에게도 2명만 있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는 2006년 9월 6일까지 일본 황실은 말 그대로 패닉에 빠져서 대책을 논의했다.[5]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방계 미야케에서도 단 1명의 적장자도 나오지 않자,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가 된 이후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해진 것이다.[6] 나루히토 황태자와 후미히토 친왕을 제외한 다른 황위 계승권자들[7]은 대부분 나루히토 황태자가 재위할 시기에 사망하거나, 살아남아도 다카히토 친왕처럼 90세가 넘는 노령일 것이 뻔했기 때문에 2006년까지 일본 정부는 미래 황위 세습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대책을 찾는 과정에서 2012년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여계 황족의 덴노 계승문제와 구 황족의 복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초에 키코 비의 셋째 임신이 알려지고, 다음해 9월 40년 만의 남자 황손이 탄생한다.[8]

히사히토는 1965년 아버지 후미히토가 태어난 지 41년 만에 태어난 남성 황족이다.[9] 때문에 일본에서는 히사히토에게 몹시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며, 심지어 두 누나 마코 공주카코 공주는 찬밥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후미히토의 지지 세력이 더 늘었고, 히사히토는 죽기 전에 반드시 덴노 자리에 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본 열도에 엄청난 관심이 쏠려 있다. 그만큼 히사히토 탄생의 여파가 크고 영향력이 세질 수밖에 없다는 점.

이 때문에 히사히토가 태어난 2006년 일본 올해의 한자는 '명(命)'이 선정되었다.

파일:Attachment/히사히토/kiko10.jpg
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 키코 비. 승리자의 표정.

2.2 탄생 이후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으로, 당시 심각하게 논의하던 구황족 복귀나 황실전범의 개정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구황족들의 모임인 국영친목회(菊榮親睦會)[10]는 당시 일어나던 여계 황위 계승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은근히 황족 복귀의 희망을 바랐는데, 이로 인해 묻혀 버렸다. 특히 가장 활발하던 구 다케다 궁가는 노골적으로 "현 덴노 가가 끊어지면 구 황족들은 사명을 다해야 한다!!"라는 주장까지 했으나 히사히토의 탄생이 모든 논란을 잠재우는 효과를 낳았다.

2.3 그로 인한 여파

그리고 황실 내부의 권력구도도 크게 달라졌는데,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 전까지만 해도 차남이라 존재감이 미미하던 후미히토 친왕이 아들을 등에 업고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특히 2008년 이후 아키히토 덴노의 건강 악화로 황실 안이 혼란스럽자, 히사히토 친왕의 아버지이자 황위 계승 서열 2위인 후미히토 친왕의 입장은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 붙이기에 충분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낳은 뒤부터 시부모인 덴노 부부에게 노골적으로 박대받기 시작, 다시 임신해서 이번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까닭으로 유폐생활을 겪었고,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9년간 대부분의 공무에서 배제되었다. 이 일로 황태자 부부와 덴노 부부의 사이는 멀어졌지만, 차남 부부는 황태자 부부보다 책임이 적어서인지 예전부터 덴노 부부와 친했다. 여기에 차남 부부가 아들을 낳아 후계자 문제를 풀었으므로, 당연히 차남 부부에 대한 총애가 더 심해졌다.

이렇게 입김이 세지자 후미히토 친왕은 2011년 말부터 아버지를 위해서라며 '덴노 정년제' 주장을 한다거나, 형님 나루히토 황태자를 몰아붙히는 발언을 자주 꺼낸다[11]. 덕분에 현 아키히토 덴노 사망 뒤 일본판 왕자의 난이 일어나나 하는 주장도 조금씩 일어난다. 이대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적장자를 낳지 못하면,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로 즉위한 뒤에는 후미히토 친왕이 계승 1순위(흔히 말하는 황태제)가 되기 때문이다.

2.4 그 외에 문제점

하지만 이것 또한 모순이 되는 점이, 현재의 황실전범은 '황사(皇嗣)', 즉 덴노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당대 천황의 자녀'만을 지칭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황태제'란 원칙적으로는 황실전범에서 인정하지 않는 직위이고 정의이다. 즉, 나루히토가 즉위할 시 '동생'일 뿐으로 다른 방계 황족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후미히토는 전범에서 말하는 황사의 정의가 바뀌지 않는한 원칙적으로 끝내 나루히토가 즉위한다 해도 황태제라는 특별한 직위를 취할 수 없다. 다만 계승 1순위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기야 하겠지만.

끝내 2013년 3월, "황실을 위해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퇴위하라!!"는 주장이 나왔다. 명목상 개인의 의견이라지만 일본에서 황실과 관련해 어떤 분위기인지 알면 이게 절대로 한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나루히토 황태자의 53세 생일 기념 공식사진 촬영 때 마사코 황태자비아이코 공주가 함께 사진을 못 찍는 초유의 사태까지 났다. 그래서 황태자 일가의 입지가 위태로운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지만, 정당한 계승자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폐위당한다는 것은 전제왕조 시대에도 없던 일이고, 단순히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이혼한다는 건 일본 내에서의 국민 감정이나 외국의 시선을 악화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에 무리다. 애초에 그 정도 일로 이혼해 줄 정도로 나루히토 황태자도 호락호락한 성품이 아니다. 당장 두 사람의 결혼 비화나 여러 일화를 봐도 나루히토가 설령 폐태자가 된다 할 지라도 아내와 딸을 그런 이유로 버린 인물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2013년 아이코 공주가쿠슈인 초등과 고학년에 올라갔을 무렵,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이 공개된 이후로는 아이코 공주의 자폐설 같은 소문은 순식간에 가라앉졌다. 이에 대해 키코 비의 공식적인 입장은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 후미히토나 누나들인 마코 공주카코 공주의 성적이 어땠는지 학창 시절에 유명(....)했기 때문에, 키코 비는 히사히토가 아이코 공주에게 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거라고 예상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십수 년 후 히사히토 친왕의 결혼 적령기가 되면 배우자 결정 문제도 일본 사회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예상된다. 히사히토 친왕의 아내는 장래에 황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히사히토의 아내로서 황실에 시집가기를 원하는 여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촉망받는 엘리트였다가 황태자비가 되는 바람에 대중의 비난만 받으며 불행한 삶을 보내게 된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우가 현대 일본인들에게 황실로 시집가는 것에 대한 환상을 아주 처절하게 캐발살낸 데다가, 히사히토 친왕과 결혼하는 여성은 마사코 황태자비나 키코 비 이상으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려야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

원하는 여성이 없다면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우처럼 황실에서 적합한 여성을 골라 거의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황실의 눈에 든 여성과 그 집안의 입장에서는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말이 '청혼'이지, 황실의 청혼을 감히 끝까지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압박을 받는다. 쇼다 미치코오와다 마사코는 황태자로부터 끈질긴 청혼을 받았고, 본인들뿐 아니라 친정도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보냈는데, 미국 여행 중에 미치코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여기서 뛰어내리면...'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ref>[12] 이를 피하기 위해, 히사히토 또래의 딸을 둔 일본 고위층들은 딸이 결혼 적령기가 되면 일찍 결혼을 시켜버리거나 일본 밖으로 내보내는 초유의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키코 비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3 유치원과 초등학교 생활


귀엽다

할아버지 아키히토 덴노, 할머니 미치코 황후, 어머니 키코 비. 저기서 떨어지면 다시 일본 패닉행
귀하신 왕자님 지나가신다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는 고대하던 손자가 태어나자마자 아이쿠(愛育) 병원[13]으로 달려왔고, 이후로도 하나뿐인 손자와만 휴가를 함께 보내고 식사를 하는 등 유독 각별한 애정을 보여 왔다.

2010년 4월, 히사히토 친왕은 가쿠슈인 유치원이 아닌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유치원에 입학했다.[14] 예상을 뒤엎은 진학에 대하여, 차남 부부는 "다양한 또래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15][16] 키코 비가 오차노미즈 여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인연도 있고. 3년 후인 2013년 4월에는 역시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로 진학했다.

1346883919975.jpg
2012년 여름, 당시 국제기독교대학 3학년이던 큰누나 마코 공주(왼쪽),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3학년이던 작은누나 카코 공주(오른쪽)와 함께.

photo_1373457891578-1-0.jpg
20130714000077_0.jpg
2013년 4월 7일자로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유치원에 이어 진학한 것으로, 또 다시 가쿠슈인이 외면받게 된 일이 화제가 되고 있다.[17]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아들의 진학에 대해 "또래 아이들과의 폭넓은 교류를 위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학교들의 경우, 중학교까지만 남녀공학이고 고등학교는 여고이다. 따라서 히사히토 친왕이 입시를 치러 타 고등학교로 진학할지,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여고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할지, 부속남고를 세울지, 향후가 주목된다. 단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여고는 매우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인지라, 남녀공학 전환에 대해서는 동창회 등을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히사히토/ise.jpg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 어머니 키코 비, 작은누나 카코 공주와 함께 이세신궁을 참배하는 히사히토. 큰누나 마코 공주영국 유학중이었다. 차남 부부는 2013년에 들어서는 히사히토 친왕을 데리고 이세신궁과 역대 덴노들의 무덤을 참배하였고, 오키나와 현의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여 전몰자 묘역을 참배하기도 했다.

2013년 3월 25일 이세신궁에 참배하는 등, 사실상 황태손으로 간주되는 듯하다. 어머니 키코 비는 늦둥이 아들의 교육에 무척 신경쓰고 있으며, 장차 도쿄대학에 보내려 한다고 한다. 최근 도쿄대학에서 추천입학 전형을 도입하려고 검토 중이라는데, 이게 장래 히사히토 친왕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일이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오차노미즈 부속에 입학할 때, 다른 아이들은 시험을 치고 입학했는데 혼자 무시험 전형으로 입학했다는 걸 보면 아예 불가능한 상상도 아니다. 도쿄대학은 아무나 가나 그러나 도쿄대학이 추천입학 전형을 도입하고 히사히토가 이를 이용해 도쿄대 입학을 시도한다면, 이에 대한 비난과 반발이 전국적으로 쏟아져 나올 공산이 매우 크다. 아무리 일본 사회가 천황가에 대하여 왈가왈부하기를 꺼린다지만, 히사히토의 큰누나인 마코 공주가 국제기독교대학(ICU)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한 걸 두고도 "엄마 빽으로 학위를 받으려 한다!!"며 비난이 쏟아졌는데, ICU가 명함도 못 내밀 초명문대인 도쿄대학에 추천입학한다? 황족이건 뭐건 간에 일본인들이 피꺼솟하게 될 것이다.[18]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키코 비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3.1 이지메

2014년 4월 경에 히사히토가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미래의 천황을 왕따시키는 일본의 패기 한국에서는 보도된 적이 없지만 다음의 카페에서 '히사히토'를 치면 나오는 기사 중 3개가 이지메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내용인즉, 히사히토의 어머니인 키코 비가 2013년 2학기 말(히사히토가 1학년 때) 학부모 회의에서 "이 교실에 이지메라든가, 따돌림을 당하는 어린이가 있는 듯합니다만,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요?"는 요지의 발언을 해 학부모들이 동요했고, 그 다음에는 담임을 따로 만나 "히사히토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만, 제대로 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항의까지 했다는 것. 또 그 학부모 회의가 있은 후 PTA 활동으로 학교에 온 키코 비가 다시 담임을 만나 험악한 표정으로 "제대로 대응해 주십시오."라고 몇 번이나 항의했다고 한다. 같이 있던 학부모들이 다 놀랐다고.

기사에 나온 설명을 보면 이지메의 형태는 사촌누나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당한 경우처럼 폭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울리지 못하는, 이른바 은따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에서는 히사히토 친왕의 담임 교사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린 상태이다. 아래는 그 번역본.

기자: 히사히토가 이지메를 당하는 것 같습니다만?
담임 교사: ('히사히토'라는 낱말을 듣는 도중에 표정을 흐리며) "그런 얘기는 학교 쪽에서 하지 않도록 단단히 얘기를 들어서…미안합니다."
기자: 키코 비가 학부모회 등에서 선생님한테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만?
담임 교사: …
질문에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학교 측에 취재를 신청했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파악해 두지 않았고, 개개 아동의 일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용서해 주십시오."(오차노미즈 여대 홍보팀)

현재까지 궁내청에서 히사히토의 이지메 문제에 대해 아이코 공주 때처럼 공개적으로 대책마련을 촉구한 적은 없다. 그래서 현재는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히사히토가 제 아무리 황위계승서열 3위의 귀한 왕자라 해도 일반 학부모들 입장에서는 깊게 관계하고 싶지 않은 존재인 것은 맞다는 것. 특히 또래의 을 둔 부모 입장에서는(…)[19]

일반 학부모의 입장은 아무래도 아이들은, 특히 남자아이들끼리 놀다 보면 넘어지거나 말다툼을 할 수도 있는데, 황족이자 유일한 후계자라는 히사히토의 입장이 부담스러울수도 있다. 애들 싸움으로 코미소시루

기사에 따르면 히사히토는 또래들보다 몸집이 작고[20] 침착한 성격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차차기 덴노 즉위가 기정사실화되어 있고 황족인 만큼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 못지않은 억압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어마어마한 기대와 부담감이 한 몸에 집중되어 있는 히사히토이니 만큼, 키코 비의 과민반응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다.[21] 실제로 키코 비는 히사히토의 교육에 대단히 열성일 뿐만 아니라 경호에도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한 예로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 운동회 때는 학부모라도 사전에 허가받은 사람만 입장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했으며, 많은 경찰들이 동원되어 삼엄한 경호를 펼쳤고, 기자들의 관심도 지대하였으나 취재도 불허하고 비공개로 했다. 너무나도 엄격한 보호에 시부모인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도 당혹스러워하였으며,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의 학부모 및 인근 주민들의 불만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일본 황족이 학창시절에 이지메를 당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황실을 떠받드는 일본 사회의 특성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실제로 현 아키히토 덴노의 딸이자 히사히토의 고모인 구로다 사야코도 그렇고,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도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 이지메를 당한 적이 있다. 또한 다른 황족들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증언이 여럿 있다. 사야코 공주의 경우는 학우들로부터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라면서 폭언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패기쩐다 다른 남성 황족도 비슷한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는 것도 그렇고, [22] 히사히토도 이런 경우일 가능성이 있다.

3.2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최근(2015년) 부모와 작은누나 카코 공주와 함께 공무에 나오고는 하는데, 또래 남자아이들에 비해 여전히 키나 몸집이 작다. 어쩌면 주변환경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감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 때문일지도.[23]

요즘은 다행히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고 한다. 그리고 히사히토는 동년배의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히사히토와 결혼하면 황후가 되는 거잖아?"라는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나(…). 너희가 아직 어려서 시월드의 무서움을 모르지 일본 황실은 시월드의 급이 다르단다 학부모들은 히사히토와 친하게 지내는 여자아이를 이슈로 삼아 "저 아이가 미래의 황후가 되는 거 아냐?"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누나들에 비해 아버지 후미히토에게 꽤나 오냐오냐 떠받들려 자라고 있다. 그 때문에 누나들이 아버지에게 더 혼내라고 눈치를 준다는데, 특히 작은누나 카코 공주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많이 표현한다고 한다. 이렇게 동생을 편애하는 경우, 형제자매끼리 사이가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사실 히사히토는 아들이길 바라고 태어난 아이인 만큼, 누나들의 질투를 받을 수도 있는 입장이다.

그러나 히사히토 역시 고충이 있다. 어머니 키코 비는 히사히토에게 게임을 금지시키고, tv도 뉴스와 다큐멘터리 외에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조차 다 금지한다고 한다. 불쌍하다. 교육 프로그램만 보면서 자란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과연 친구를 제대로 사귈 수 있을까 의문이다. 실제로도 히사히토와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편인 같은 반 아이들은, 전부 배려심과 인내심이 강하고 상냥한 성품의 여학생들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여학생들과는 물론이고 특히 남학생들과는 가까이 지내지 못하고 있으며, 상술한 이지메 사건 이후로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키코 비가 이렇게 아들을 엄격하게 교육하는 이유는, 키코 비 나름대로의 경쟁심과 압박감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일본 황족들 사이에서 히사히토와 유일하게 같은 또래인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는 우수한 모범생인 걸로 유명한데다, 그 어머니인 마사코 황태자비 역시 도쿄대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유명한 희대의 수재이자 유능한 커리어우먼이었다. 그에 비해 키코 비는 우수한 모범생이긴 했어도 직장 경험도 없는 고전적인 비(妃)라는 인상이 강하고, 주간 기사에도 아이코 공주의 성적 찬양을 보며 애를 태운다는 소문이 있다. 이에 대해 키코 비는 공식적인 입장은 없지만 아이코 공주에게 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거란 소문이 있다.

아무튼 히사히토 역시 엄청난 고충을 겪어야 할 듯. 히사히토는 아들이기 때문에,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지만 학업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누나들과 정반대의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기사가 이럴 정도면 키코 비의 치마바람이 엄청나긴 한 듯하다.

3.3 현재

여전히 2016년 2학기가 시작되어도 저능아에 학습 부진아라는 소문이 돌고 있으며, 학교에 거의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아이코 공주의 자폐설 역시 여전히 돌고 있긴 해도,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 덕분에 금방 가라앉은 것에 비해, 제대로 된 정보가 흐르지 않는 이상 히사히토 친왕에 대해서는 쉽게 소문이 진정되지 않을 듯하다. 당장 일반인들 중에서도 20세 생일이 되어 성년 기념 기자회견을 할 때는 소문의 진위가 판명이 날 테니 그때까지 두고 보자는 의견이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아이코 공주와 다르게 히사히토에 대한 보도 규제가 심하다 보니, 사진 한 장 제대로 보도되는 일이 잘 없다. 그래서 말로만 "우수하고 상냥하다."라고 떠들어대 봤자 증거가 없으니 저런 소문이 도는 게 당연하다. 성적표는 고사하고, 하다 못해 아이코 공주처럼 공부를 하거나 악기 연주를 하는 각종 영상이 시시 때때로 쉽게 공개되거나 도촬되는 상황도 아니고 말이다.

심지어 금년 봄에 공개된 학교 운동회 사진만 해도, 2년 만에 공개된 사진이다. 궁내청은 당일 히사히토가 참여한 4개의 종목 중, 기사 사진이 올라와 있는 '태풍의 눈'이라는 종목 1개에 대해서만 촬영을 허가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번 운동회에서 히사히토가 참여한 종목은 큰 공 굴리기, 주머니 던지기, S자 달리기, 태풍의 눈. 종목 명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모두 일반적으로 저학년생들이 참여하는 종목이다. 그런데 저학년 종목을, 특히나 매스게임도 아닌 종목들을 개인이 별도 연습을 했다고 해도 꽤나 우스운 상황인데, 정말로 가족들과 연습해서 참가했다고 언론 플레이를 해댔다. 그것도 단체종목을 말이다! 사실 아니할 말로 '큰 공 굴리기'만 해도,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의 경우 가쿠슈인 유치원 운동회에서 했던 영상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겨우 그런 걸 이기기 위해 엄청나게 연습했다고 언플을 해댄 거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게다가 궁내청의 촬영 허가도, 동영상이 아니라 사진 몇 컷만 허용했다. 왜 이 종목에만 촬영을 허가한 건지, 게다가 영상은 안 되고 사진만 허용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또한 히사히토 친왕의 등교 현황과 관련해서는, 상술한 이지메 사건 당시만 해도 1년 동안 많이 가 봐야 1~2주였다고 한다. 현재 오차노미즈 여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말로는, 창 너머로 학교 주변 경비가 강화된 걸 보면 "히사히토가 와 있으려니" 하고 짐작할 정도라고 하니, 실제로 경비의 강화로 등교 여부를 파악할 정도로 학교에 잘 안 오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종이공작을 해서 숙제로 출품하는 작품에 한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그 나이 또래에 맞지 않는 대단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대부분 싸늘하다. 우선 제작 과정과 관련한 영상이 없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게다가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 교실에 두고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가쿠슈인 초등과와 다르게,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는 만들던 것을 집에 가져갈 수 있다. 때문에, 작품들을 본 많은 일반인들이 '보나마나 궁저의 직원들이 도와줬을 거야.'라고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후미히토 일가에 대해서는 찬양만을 늘어놓는 언론조차도 이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것. 분명 딱 봐도 그 또래 아이가 만든 거라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작품들인데 왜 침묵을 택했을까??


d9436d7c0b21bb2d681f0d68908d08ad.png
[문제의 종이공작 사진. 6세이던 2012년 무렵에 출품한 작품으로 소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임을 감안했을때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언론은 찬양의 말 한 마디 없이 침묵했다.]

미래 일본 황실에서 유선이나 사마충을 보게 될수도

4 히사히토 치세의 일본 황실 문제

설령 히사히토가 황위에 올라도 여전히 문제는 있다. 즉위를 아무리 빨리 하더라도 최소 30년은 지났을 텐데, 이때쯤이면 남성 황족들은 모두 세상을 뜰 시기고, 여성 황족의 경우 결혼으로 대부분 황족 지위를 잃어 사실상 히사히토 1명에게 모든 황족의 책무가 모인다. 이는 겨우 20~30대의 덴노에게는 너무나도 무겁다.

그리고 일본에는 황실에 중대한 일이 날 때 이를 결정하는 황실회의(皇室会議)[24]가 있는데, 히사히토 치세에는 황실회의에 참여해야 할 황족이 없다. 100세로 사망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임기를 맡았을 만큼 황족회의 구성이 불안정하다.[25] 그런데 히사히토 치세에 더 설명이 必要韓紙?

만에 하나 히사히토 친왕이 요절하거나 아들을 못 낳고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일본 황실의 대가 끊기는 헬게이트가 열린다. 사실 일본에서 황통이 단절한 적이 있지만, 그 사이는 세습친왕가[26]라는 보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세습친왕가들은 태평양 전쟁 이후 모두 강등했고[27], 지금의 황실 구성으로는 만약 히사히토 친왕이 아들을 못 낳으면 일본 황실의 종말이라는 사태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스토쿠 천황의 저주가 살현된다

히사히토의 치세가 된다면, 이미 다른 계승권자들은 모두 죽고 그의 직계에만 계승권이 있는 상황이 불보듯 뻔하다. 그런데 그런 히사히토 천왕이 아들을 못 가진다면 그야말로 2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 황실의 유일한 독자인 히사히토 천황이 적장자를 못 낳아서 벌어지는 논란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따라서 히사히토의 비(妃)는 적어도 아들을 1명은 필시 낳아야 하는데, 마사코 황태자비 이상의 정신적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지며, 그걸 떠나서 아예 결혼 자체가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28]

이렇게 된다면 훗날 히사히토의 결혼대상은 사촌 누나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뿐이다(...)한국에서라면 얄짤없는 근친크리[29] 물론 이게 현 일본 황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할 방안 중에서는 제일 현실적이지만, 히사히토의 아버지인 후미히토아이코 공주의 아버지이자 히사히토의 큰아버지라 할수 있는 나루히토의 사이가 굉장히 나쁜 것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높진 않다. 외려 히사히토가 장성하여 후미히토가 자기 친아들에게 시집 보낼 일본 여성을 찾지 못해 아이코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시도할 경우, 나루히토가 격렬하게 반발하여 이러한 후미히토의 행동에 제동을 걸 공산이 크다. 나루히토 : 결혼시킬 여자가 없어서 니 놈 아들한테 우리 딸을 시집 보내? 절대 불가야!! 하지만 서로가 좋아한다면 막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장에 히사히토가 아이코 공주를 사랑할지는 의문이다. 설령 히사히토가 아이코 공주가 좋다고 쫓아다닌다고 해도 아이코가 순순히 결혼을 해 줄 지도 의문이다. 히사히토가 차차기 덴노일지 몰라도 아이코 공주 역시 차기 덴노의 외동딸이니까 본인에게 감정이 없는데도 결혼하라고 압박을 주는게 쉽지 않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사실 둘 사이의 감정은 둘째치고 결혼을 미루고 안 하는게 오히려 아이코 공주에게 이득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구황족들이 노리는 전면 복귀도 꿈은 아닌 셈이며, 전례도 있고, 구황족 대부분이 외척이나 인척으로 여전히 깊게 연관하기에, 일본 황족들 간에 대혼란이 펼처질 가능성이 농후하다.[30]

이러면 사민당이나 공산당 등의 진보 측에서 덴노제 폐지 여론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 이들 정당은 덴노제를 부정하기 때문에 의회 개회식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또한 일본에서도 젊은 사람들 중에는 황실을 니트 취급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진보 계열 정당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덴노제가 사라질 가능성은 적다[31]. 아래에서 말한 것처럼 여계 덴노를 인정하거나, 구황족을 복귀시켜서 덴노제를 이어갈 가능성이 더 높다.

뭐 가끔식 제기되는 여성 덴노 즉위를 실현시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는 할텐데, 보수 진영에서 들먹이는 '만세일계' 논리 때문에 이마져도 실현 가능성이 높진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32].

  1. 현재 그의 일본 황위 계승 순위는 3위
  2. 사실 이는 잘못된 것으로, 친왕가를 이을 아들에겐 와카미야(若宮)라는 칭호가 붙는다. 따라서 제대로 부르려면 아키시노노와카미야(秋篠若宮)가 된다.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寛仁親王)이 직접적으로 자신을 미카사노미야라고 부른 것에 대해 항의를 한 적이 있어서, 일본 내에서 이 문제는 잘 알려진 편.
  3. 태반이 산도를 막는 증상.
  4. 2006년 9월 6일 아침에 태어났는데, 장수하고 여자를 많이 거느릴 사주라는 소문이 있다.
  5. <일본 왕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책에 의하면,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아이코 공주가 태어나자 기뻐하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아들을 낳아야 한다며 다시 임신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6. 현재 일본 황실에서 제위계승권이 있는 사람은 겨우 6명에 불과하다. 자세한 것은 아키히토/가족관계 참조.
  7.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형제들과 숙부. 아키히토 덴노의 막내 숙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경우 이미 나이가 99세이다. 그의 장남 토모히토 친왕, 차남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3남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리고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8. 사실 이 임신 자체가 궁내청과 덴노 내외의 거의 강요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한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이를 더 가지지 못한 채 40대를 넘겼고, 심신의 병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 등 임신하기 어려웠지만, 키코 비의 경우 아직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이 때문에 덴노 부부가 차남 부부에게 엄청난 강요를 했다고. 소문으론 히사히토 친왕이 인공 수정으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9. 1965년~2006년 동안에는 줄줄이 공주들만 9명이 태어났다.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1969), 미카사노미야 아키코 공주(1981), 미카사노미야 요코 공주(1983),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1986), 다카마도노미야 노리코 공주(1988), 다카마도노미야 아야코 공주(1990),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1991), 아키시노노미야 카코 공주(1994),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2001).
  10. 쇼와 덴노가 1947년 신적강하 이후 신적강하된 구 황족들을 위해 만들어준 단체. 직황계와 11궁가의 당주 모임을 결성했고, 매년 각 궁가가 모여 신년이나 연말에 행사나 모임을 가지며, 2000년대 이후 구황실 관련 의견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11. 일본 황족은 가문이나 정치 관련으로 언론에 입조심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러니 이 말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후미히토 친왕의 궁내 권력이 얼마나 커졌나를 알 수 있다. 예전부터 후미히토 친왕은 효자라는 평을 받았고, 그의 발언 대부분이 부모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닌 편이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극우주의자들과 가깝다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어서, 일본에서는 딱히 나루히토 황태자의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이 상황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
  12. 단 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 키코 비는, 스스로 원해서 황실에 시집왔다고 한다.
  13. 도쿄에 있는 산부인과소아과 전문 병원. 아키히토 덴노의 막내 숙모 미카사노미야 유리코(三笠宮百合子) 비가 총재를 맡았던 사회복지법인 소속의 병원이다. 히사히토 친왕 외에도, 유리코 비의 막내 아들이자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 남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세 딸 쓰구코 공주, 노리코 공주, 아야코 공주도 이 병원에서 태어났다. 히사히토 친왕이 아이쿠 병원에서 태어난 후, 아이쿠 병원에서 출산하려는 부모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14. 같은 시기 큰누나 마코 공주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가 아닌 국제기독교대학에 진학하여, 남동생과 함께 화제가 되었다.
  15. 항간에는, 조총련계 스파이가 가쿠슈인의 교직원이어서 차남 내외가 가쿠슈인을 피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16. 그런데 현재 학업 부진이란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도는 걸 보면, 가쿠슈인 유치원 입학을 아키시노노미야 부부가 거부한 게 아니고 입시에서 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7. 2008년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한 이후로, 전통을 깨고 가쿠슈인이 아닌 다른 교육기관을 택하는 황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18. 그런데 마코 공주카코 공주가 ICU(학부)에 입학했을 때도 그러했지만, 히사히토가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유치원에 입학할 때부터 의혹투성이임에도 애매모호하게 넘어간 전적이 있다. 또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도저히 시험을 치를 정도가 되지 못해서 가쿠슈인에서 입학을 거절했기 때문에 부랴부랴 돈으로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유치원에 넣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애초에 황족과 화족을 위한 학교였으며 학군 내에 있는 가쿠슈인을 놔 두고, 유치원부터 저렇게 타 학교, 그것도 국립대학교 부속에 넣는다는 것부터가 모순이다.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은 아키시노노미야 궁저가 있는 주소지 기준으로는 통학권 외의 지역, 즉 해당 학군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소학교나 유치원 등의 원서도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황족들이 주로 대학은 몰라도 초ㆍ중ㆍ고등학교는 가쿠슈인에서 다니는 것이 이 때문이다. 설립의도도 의도지만, 무엇보다 통학권 내에서 학교를 보낼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애초에 처음에 가쿠슈인 유치원에 본인들이 지원도 안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외부 진학반이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가쿠슈인의 요청으로, 중학교부터는 가쿠슈인 중등과에 다닐 것"이라는 등의 언플이 나올 리가 없다. 즉, 도쿄대 건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19. 더군다나 당일 키코 비가 "장래에 덴노가 될 아이를 왕따시키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거 같냐"는 식으로 난리를 치고 갔으니, 아이들이나 부모나 더욱 얽히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나 학부모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학교에 나오질 않아 얼굴도 못 보는데 무슨 소리를 하냐"였다고 한다.
  20. 이는 남자여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인 후미히토 친왕이 황실에서 최장신이니 나중에는 키가 클 가능성도 크다.
  21. 또한 키코 비는 어린 시절 중 6년여 가량을 외국에서 보낸 귀국자녀라는 것도 감안해 볼 필요가 있다. 1살 때부터 약 6년여간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초등학생~중학생 시절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몇 년간 살기도 했다. 키코 비 항목을 참고. 비록 두 딸 마코 공주카코 공주는 학창 시절에 왕따 문제는 없었으나, 둘 다 성적이 참 그렇고(…), 대학 입학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을 보면, 꼭 성적이 자식교육의 척도는 아니지만 키코 비의 자녀교육이 그렇게 좋다고 보기는 힘든 듯. 단적으로 비교해서 아이코 공주의 경우 등교거부를 하기 전까지 개별적으로 항의하는 경우도 없었고 (물론 당시 마사코 황태자비가 여러 사정으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며칠간 함께 등하교를 함께 하고 수업을 참관하며 해결했다. 훨씬 보기 좋은 해결책. 더군다나 이런 저런 루머와 왕따에 시달리면서도 네티즌들을 입 다물게 만든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은 마사코 황태자비가 애쓴 결과다.
  22. 실제로 다카히토 친왕의 둘째아들인 요시히토 친왕의 경우, 가쿠슈인에서 그러한 폭언을 듣고 상처를 입은 것이 계기가 되어, 앞으로 자신이 낳을 후손들이 대물림으로 그런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본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가 평생 독신으로 산 것도 이 때문.
  23. 근데 꼭 스트레스와 억압이 원인인 것만으로도 보기가 어려운 게, 보청기를 끼고 전시회를 감상하고 있는 영상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소학교 운동회 때는 아동 발달장애 관련 전문가가 와서 히사히토를 참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걸로 봐서,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4. 황족·3권의 대표와 부대표. 즉, 덴노 부부를 뺀 친왕·친왕비, 총리대신, 궁내청 장관, 참의원 의장·부의장, 중의원 의장·부의장, 최고재판소장, 최고재판소 판사 1명 가운데서 10명을 의원으로 선발하며, 각 부의 서열 3·4위, 의원으로 선발된 인원을 제외한 다른 친왕·친왕비, 관방장관, 궁내청 차관, 참의원·중의원 최다선 각 2명, 최고재판소 판사 2명 가운데서 다시 10명을 뽑아 예비의원으로 하며,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25. 2016년 10월 27일에 다카히토 친왕이 사망하였다.
  26. 원래 덴노의 자녀들은 '친왕'의 칭호를 받고, 친왕의 자녀들은 '왕'의 칭호를 받으며, 왕의 자녀들은 분가를 해서 황적에서 나가기가 기본적인 황가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가 끊어지는 등의 위협이 있자, 세습친왕이라고 하여 보험으로 몇 대를 이어도 친왕의 이름을 잃지 않는 가문들을 만든다. 이를 세습친왕가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후시미노미야가츠라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간인노미야의 4대 세습가문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츠라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일제강점기에, 간인은 방계에서 현 덴노계통인 직황족(直皇族)을 배출한 뒤 직계가 1988년에 단절했다. 현재 유일하게 남은 후시미 직계도 적장자가 없어서 히사히토 대에는 단절할 예정.
  27. GHQ에서 한 신적강하. 세습친왕가 가운데 당시 남아 있던 후시미, 간인의 2궁가와 후시미계 방계궁가 9개 궁가의 11궁가 26친왕을 평민으로 강등한 사건이다. 이 조치로 현 황실은 전부 다이쇼 덴노의 직계만 남았다.
  28. 실제로 가능성이 많다. 나루히토 황태자도 그의 결혼 적령기에 즈음하여, 황태자비로 물망에 오르던 명문가의 미혼 여성들이 외국으로 대거 빠져나가거나 결혼을 서두르는 풍조가 일어났다고 한다. 장래의 황후라는 압박감, 개인적 삶의 상실, 미치코 황후가 수십 년간 당한 악독한 시집살이를 비롯한 황실의 오랜 인습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실제 마사코 황태자비도 별반 다를 바 없었고(...) 다른 후계자도 있는 나루히토 황태자가 이랬는데, 유일한 후계자인 히사히토 친왕이라면 그 압박감은 상상초월(…).
  29. 참고로 일본은 사촌끼리 결혼 가능하다. 실제로 간 나오토 전임 총리의 부인인 노부코 여사도 그의 사촌 누나이기도 하다. 다만 법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거지, 실제로 사촌 간 결혼은 일본에서도 아랍처럼 일상적인 일이 아니고 특이한 사건에 가깝다.
  30. 실제로 직계 단절로 신적에서 돌아온 구황족이 황위를 이은 전례는 과거에 4번 있었다.
  31. 더구나 일본에게 있어 덴노란 일본국 헌법 제1장 덴노가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일본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덴노제가 없어진다는 것은 일본의 정체성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덴노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일부 진보성향의 일본인들도 덴노에 대해 험담을 하지 못한다.
  32. 그러나 히사히토가 태어나기 전까지 여계 천황의 후보로 아이코 공주가 굉장히 많이 거론되었고, 실제로 히사히토가 태어났을 때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왜 하필 쟤가 태어나서 저 망나니 같은 인간(...)의 핏줄이 천황직을 잇냐'는 반응이었기에 히사히토가 그대로 황위 계승을 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아버지부터 해서 누나들의 학창시절 성적표가 매우 화려해서(…), 히사히토가 공부를 못한다고 밝혀지면, 대번에 자기 사촌누나의 황위계승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게 될 것이다. 게다가 지금 히사히토 말고는 적법한 남계 후손이 없어서, 어찌 되었건 근미래에 여성 천황이 나올 가능성은 매우 크다. 신적강하된 구 황족을 복귀시키는 방안도 검토될 테지만, 이건 일본 국민들의 반발을 살 공산이 크다. 신적강하의 이유가 뭐건, 일본국 헌법과 국민 감정은 '직계 여성을 제치고 왜 방계 남성에게 천황 자리를 넘기려 드느냐'라서, 구 황족으로 천황가 계승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일본 국민들에게 본의 아닌 오해를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