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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人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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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되는 105인 사건 관계자. 출처 |
1911년 조선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 탄압 목적으로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대거 체포한 사건. 별칭으로 '안명근 사건' 이라고도 한다.
1 사건 개요
1910년 경술국치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취임하면서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 의사가 사촌 형의 업적을 이어받아 1910년 12월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데라우치 총독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듣고 평안북도 선천 역으로 가서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일제(日帝)에 의해 발각되어 바로 체포되었다.
이를 구실로 일제는 그 배후에 신민회 회원과 평안도 주재(駐在) 개신교인들을 공범으로 지목하고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애초 600명을 검거했다가 이들이 압록강 철교 암살 미수사건에 개입한 적이 없음을 주장하면서 그 중 대표적인 128명을 기소 한 사건이다. 유죄 판결 받은이가 105인이라 105인 사건으로 불린다.
1.1 사건의 발단
사실 일각에 의하면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었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明石)를 찾아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이 총독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제보를 하게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가 써 왔다는 일기장 문서에도 이 같은 사실이 상황적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명근 야고보는 사촌 형인 안중근 토마스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당시 사촌 형과도 친했다는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 총독을 암살하겠다는 의사를 알린 것이 발단이었으며 이를 듣게 된 빌렘 신부가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를 찾아가 그에게 직접 보고하여 결국에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총독부를 찾아가 그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천주교의 흑역사로 간주되는 경향이 짙고 관계자들은 잘 언급을 하지 않는다. 실지로 90년대에 김상중이 주연한 백범 김구전기 드라마에서 이 부분이 묘사되자 관련 단체에서 방송사에 대해서 상당히 비난을 퍼부었고 동 방송사에서 방영된 105인 사건 다큐멘터리도 같은 반응을 얻었다 흔히 알려진 대로 정말 고해성사 과정에서 들은 것을 신부와 주교가 까발린 거라면 이건 한국인 시각에서 인간 쓰레기들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시각에서도 인간 쓰레기들이다. 신부로서 고해성사의 비밀을 까발리는 건 어마어마한 대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명근의 행동은 미래에 일어날 죄에 대해서 고해한 것이기 때문에 비밀유지의 대상이 되는 합법적인 고해가 아니어서 고해성사의 비밀을 누설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만약에 안명근이 테라우치를 제거하려고 계획을 꾸몄지만, 살인을 저지른다는 죄책감 때문에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받았고 이를 빌렘 신부가 누설하였다면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죄이다. 그러나 안명근이 테라우치에 대한 살의를 버리지 않은채 "내일 테라우치를 제거하겠다."고 밝힌 것은 미래에 일어날 것을 고해한 것이고, 자기의 범의를 밝힌 것이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악용한 것이므로 사죄경을 줄 수 없고 설사 사죄경을 주었더라도 고해성사의 성사성을 모독한 모고해로 고해사제가 비밀준수의무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고해성사가 유효하려면 앞으로 죄를 안짓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하는데,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고해하는 것은 그런 결심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법상 문제가 없다는거지 뮈텔 주교의 처사는 매우 잘못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억압 받는 한 민족이 진정으로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걷어찼기 때문이다.
1.2 사건의 과정
애초 일제는 신민회 간부 및 회원을 포함해 평안도 주재 기독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총 600명을 검거했고 이들로부터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온갖 악독한 고문을 가하였고 그 중 대표적인 주범 기소된 128명을 기소했다.
1.3 체포된 인물 및 인사
이 사건에서 체포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민회 간부인 윤치호,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외에도 백범 김구, 김홍량 등도 포함되었다. 암살사건 조사를 핑계로 대거 체포한 인사들은 대부분 개신교인이었는데 기소된 . 105인 사건 때 드러난 경찰 기록에 따르면, 기소자 123명 가운데 장로교인이 96명, 감리교인이 6명, 동학교인이 2명, 천주교인이 2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남강 이승훈은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던 중에 검문 중이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지원 하에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같은 출신인 김규식은 만주에 인삼 장사를 한다는 사유로 몽골로 피신했다가 후에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남강 이승훈,양기탁,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 김구, 김규식,이승만은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윤치호는 후에 일제의 압박으로 결국에는 친일파로 변신하여 총독부로부터 작위를 받게 되었지만 1945년 해방이 되자 친일파로 지목을 받았고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드러누웠다가 그대로 병사했다.[1]
백범의 동지였던 김홍량은 가석방후 1920년대 중반부터 적극적 친일로 변절했다.
2 영향
105인 사건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을 빌미로 꾸며진 일제의 자작극으로도 알려졌는데 이 때문에 신민회가 공식 해산되고 105명이 집단으로 체포 및 투옥되어 고생을 치러야만 했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사건 당시 공식적으로는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큰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 결과 체포된 105명 중 99명이 무죄 석방되고 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 등에게 징역 5~6년의 판결을 내렸으며 그나마 대부분 형 만기 이전에 석방되었다. 사건 자체를 완전히 날조한 자작극이라서 일제로서도 막나가기가 곤란했고, 변호인들도 이러한 약점을 노려서 집요하게 무죄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2] 물론 사건 과정에서 고문 등으로 인한 인사들의 고통은 결코 적지 않았겠지만......
야구를 전파한 것으로 유명한 필립 질레트가 영국 에딘버러 국제기독교선교협의회에 "이 사건은 일제가 날조한 사건입니다."라고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일제가 이 사실을 알게되자 1913년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YMCA 지도자 강습회에 참석한 후 조선으로 돌아오려던 그를 조선총독부가 방해, 두 번 다시 한국땅을 밟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105인 사건은 일본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증거라고 조선문제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따윈 안중에도 없던 미국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령이었던 홍콩의 언론에는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홍콩의 기독교인들은 비난을 퍼부었다.[3] 홍콩 그리스도인들은 일제가 조선의 개신교와 가톨릭 등 기독교를 탄압한다며 맹비난했고 결국 영국 본토에까지 알려져 언론을 타고 일제는 스타일을 구겼다. 그리고 같은 영연방인 캐나다와 호주 등에도 사건이 보도되었다.
3 미디어
사건의 중요성 때문에 웬만한 어린이용 역사 만화(...) 등에서 사실적으로 고문 장면들이 묘사되는 사건이다.
유인촌이 주연한 KBS 드라마 역사는 흐른다에서는 원작대로 주인공 이규직이 여기 연루된 걸로 그리고 있다.
김상중이 주연한 KBS 백범 김구 드라마나 김진태가 주연한 백범일지에서도 상당히 잔인한 고문 장면이 묘사돼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