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련문서 : 올림픽
역대 하계올림픽 (Citius, Altius, Fortius) | ||||
22회 | → | 23회 | → | 24회 |
1980 모스크바 올림픽 | → | 1984 LA 올림픽 | → | 1988 서울 올림픽 |
1984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로널드 레이건, 유리 안드로포프 1983 | → | 피터 위버로스 (LA 올림픽 조직위원장) 1984 | → | 덩샤오핑 1985 |
1 개요
Games of the XXIII Olympiad In Los Angeles | ||
대회기간 | 1984년 7월 28일 - 8월 12일 | |
개최국가/도시 | 미국/로스앤젤레스 | |
공식 주제가 | Olympic Fanfare and Theme | |
마스코트 | 샘(Sam) | |
참가국 | 140개국 | |
참가선수 | 6,829명 (남자: 5,263명, 여자: 1,566명) | |
경기종목 | 21개 종목 - 221개 세부 종목 | |
개회 선언자 | 로널드 레이건 | |
선수 선서 | 에드윈 모지스 | |
심판 선서 | 샤론 헤버 | |
성화 점화 | 라퍼 존슨 | |
주경기장 |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
한번쯤은 들어본 일이 있을 공식주제가.
같은 기간 히트하여 LA 올림픽의 상징곡처럼 여겨지는 Bruce Springsteen의 Born in the USA.
2 특징
반쪽 대회 시즌 2
1984 LA 올림픽은 딱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모스크바 올림픽 파행에 대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보복.[1] 다른 하나는 돈잔치. 참가국 수는 당시까지는 역대 올림픽 최다. 불참국도 적었다. 문제는 불참국들이 주로 소련과 동독같은 스포츠 강국이라 올림픽 자체를 심심하게 만들었다는 것. 이 문제는 다음 올림픽인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대부분 정도 해소되고, 궁극적으로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완전 해소된다.[2]
개회식 장소이자 주경기장은 1932 LA 올림픽 주경기장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 52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흑자를 본 올림픽이다. 8년 전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 최악의 적자를 보면서 막을 내린 것과 달리, LA 올림픽은 중계권료의 폭등과 다양한 마케팅으로 흑자(250만 불)를 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이는 올림픽의 지나친 상업화의 시초라는 점에서 오늘날 비판받기도 한다.[3]
대만이 1972 뮌헨 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 복귀했다. 단,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는 쓸 수 없었고, 중화 타이베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등장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처음 하계 올림픽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LA 올림픽이다.[4] 참고로 대만은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1979년 다시 자격이 주어졌지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보이콧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중국도 역시 보이콧에 끼었다. 미국보다 소련이 더 미워
대한민국은 다음 대회 개최지로서 스포츠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그 전 대회까지 금메달 단 한 개를 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 번 대회를 통해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7개(전체 10위, 메달수 스웨덴과 공동 10위)를 차지하면서 본격적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고, 또 이후의 선전을 예고하였다. 주로 양궁, 복싱, 레슬링, 유도에서 거둔 수확이었고, 구기종목 사상 첫 은메달이 나온 대회이기도 했다. (여자 농구와 여자 핸드볼)[5]
미국이 금메달 83개를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실력을 과시했는데, 사실 홈그라운드의 이점 + 소련 및 동유럽 불참으로 인한 미국 쪽 심판의 장난질이 겹친 결과였다. 한국도 복싱에서 많은 피해를 본 편이었다. 플라이급의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김광선이 편파판정으로 1회전 탈락한 사례도 있었으니까. 이 때 이를 간 소련과 동유럽 심판들은 나중에 1988 서울 올림픽 복싱 박시헌 vs 로이 존스 주니어 판정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즉, 홈그라운드의 이점으로 한국의 박시헌에게 금메달을 준 것이 아니라, 속된 말로 "미국 놈들 엿먹어라" 였던 것이다. 그 발단이 된 것이 바로 이 대회였다. 이 것때문에 제일 피해를 본건 사실상 박시헌...
대회 마스코트인 샘(Sam). 흰머리수리와 엉클 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전 대회 소련과 함께 국가 상징 돋네 호돌이도
다음 개최지가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에 폐막식 때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되었으며[6]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올림픽 깃발을 LA 시장으로부터 받아 염보현 서울시장에게 넘겨주었다. 직후 시작된 폐막식 초반에 서울 올림픽 로고 및 호돌이가 등장하기도. [7]
여담으로 여자 육상에서는 마라톤이 처음으로 채택된 대회이며, 한국 마라톤의 영웅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옹이 성화봉송 주자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 다음에 성화를 넘겨 받은 이가 미국 아시아계 최초 다이빙 금메달리스트인 새미 리 옹이다. 야구 종목도 시범적으로 치러졌다.[8]
폐회식때는 독특한 광경이 나오기도 했는데, 바로 폐회식 중 경기장 중앙에 UFO가 착륙해 거기서 외계인이 걸어나왔다! 물론, UFO와 외계인은 가짜였다. 이는 다 관계자가 설계한 연출로 그 외계인은 관계자가 생각한 외계인의 모습과 얼추 맞아떨어져 외계인 역으로 캐스팅 된 학생[9]이었다. 어쨌거나 이 외계인이 할 일은 단 하나였는데, 그건 바로 UFO에서 걸어나와 "올림픽이 좋아서 먼 길을 날아왔어요!" 한 마디를 외치는 것이었다(...)- ↑ 루마니아와 유고슬라비아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고 참가했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
독재자의 탈 소련 정책에 의해,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세력의 맹주라는 점에서 소련의 입김을 덜 받는 나라였던지라 LA 올림픽 참가가 가능했다. 그 덕에 이 대회의 금메달 순위에서 루마니아는 2위, 유고슬라비아는 9위. 참고로 대한민국도 이러한 상황에 큰 이익을 봤고, 이 대회를 기점으로 금메달 수가 많아졌다. 루마니아의 경우 아무리 타국의 불참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도 이런 순위는 전무후무. 사실 불참 이유는 다들 보복이라는 거 뻔히 알지만 이들 불참 국가의 공식적 명분은 '선수단 안전보장이 불가능'하다는 것. 일부 아시아 국가들도 소련에 동조, 불참하였는데 이들의 보이코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2년 뒤의 이 나라의 동맹국이 개최한 아시안 게임까지 이어졌다. - ↑ 서울 올림픽에는 북한과 북한에 동조했던 쿠바, 에티오피아(당시 국명은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 등이 불참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 ↑ 특히 LA 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던 피터 위버로스는 지나친 상업화를 추구했다는 이유로 관계자, 언론, 팬들로부터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리고 그는 올림픽이 끝난 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로 추대된다. 그런데 MLB 커미셔너로서도 역시 똑같은 짓을 했으니... 그러나 위버로스의 올림픽 상업화 노선은 냉전 시대의 올림픽 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도 많다. LA 올림픽을 개최할 때만 하더라도 이전 대회였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 올림픽이 4대륙 올림픽으로 전락 + 제2의 뮌헨 참사를 막기 위한 보안 경비 투자의 증가로 사상 최악의 적자를 내며 전세계적으로 이렇게 없는 살림 쥐어짜면서까지 올림픽을 유치시킬 필요가 있냐는 목소리가 높아진 상황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전 때 많은 국가들이 올림픽 유치를 망설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올림픽의 규모가 점점 더 커져가고, 국가의 위력을 과시하는 쪽으로 변화해가면서 나타난 올림픽의 상업화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 ↑ 동계는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대회가 처음. 역시 미국이 개최국였다. 대만은 이 때 선수단이 미국까지 갔으나 이런 호칭 문제에 불복하고 불참했다.
- ↑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의 여자배구 동메달.
- ↑ 그리스, 미국 국가 다음으로 마지막에 연주되었다. 그리스는 올림픽의 창시국가이자 초기 개최국 자격으로, 미국은 당시 개최국 자격으로, 대한민국은 차기 개최국 자격으로.
- ↑ 그런데 잘보면 호돌이의 등장이 참 모양 빠진다. 나오자마자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이때문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있던 상모는 떨어져나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 ↑ 이 때 참가했던 대표적인 야구선수들은 선동열, 류중일, 강기웅, 박노준, 이순철 등이 있다.
- ↑ 그렇다고 그 학생의 얼굴이 외계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특이하게 생겼다는건 아니고, 그 학생의 키가 2.44m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