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마오쩌둥중국 국가 주석과 찍은 사진. 구석에 린뱌오도 보인다.
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 국왕과 악수하는 차우셰스쿠.
파일:Attachment/158912-fidel-castro-ruz.jpg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
ceausescu-danse-avec-kim-il-sung.jpg
1971년 6월 북한에서 김일성과 차우셰스쿠
“경제 파탄? 웃기지 마세요. 우리 식료품 가게에는 유기농 식료품으로 가득하답니다.”
"나 같은 막장지도자는 500년 만에 한 명씩 밖에 나오지 않는다.[1]-1970년대 초 보건부 장관에게

1 소개

2010041000185_0.jpg
이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Nicolae Ceaușescu)
생몰년1918년 1월 26일 - 1989년 12월 25일[2]
출생지루마니아 왕국 올트 주 스코르니체슈티
사망지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듬보비차 주 트르고비슈테
정당루마니아 공산당
종교없음(무신론)
배우자엘레나 차우셰스쿠

루마니아독재자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 자칭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Geniul din Carpaţi, 영어로 The Genius of the Carpathians)' 이자 '콘두커토르(Conducător; 지도자, 지휘자 '. [3] 긴 칭호로는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그러나 전세계에 존재하는 독재자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사악한 독재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만천하에 낱낱이 알려 뼈저리게 교훈을 준 인물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공산권 국가 원수 중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받았다.

키 165cm로 서구권 남성으로서는 작은 체격에 속한다.

2 집권 이전의 생애

만 15세 때 공산주의 활동으로 투옥되어 감옥에서 찍힌 사진.

차우셰스쿠는 1918년 루마니아 왕국 남부 스코르니체슈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차우셰스쿠에게는 1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있었으며 그의 아버지 안드루쩌(Andruță)는 3헥타르의 경작지와 양 몇 마리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부모님은 농사 이외에도 마름질을 하면서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 소년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리나(Alexandrina)는 순종적이고 성실한 집안 출신이었던 반면에 아버지 안드루쩌는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의 한 신부는 그의 아버지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자기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도둑질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싸워서 다치기 일쑤였죠." 차우셰스쿠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은 10명의 형제와 부모님이 살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방은 겨우 2칸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옥수수죽과 비슷한 루마니아의 전통음식인 머멀리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일상 다반사였다. 그는 마을에 있는 한 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 역시도 루마니아 시골의 어려운 삶처럼 별로 좋지 못했다. 그 학교의 선생님은 한 교실에서 동시에 여러 반의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차우셰스쿠는 심지어 책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학교에는 거의 맨발로 다녔을 정도였다. 10명이나 되는 형제들 중에 막내로 태어났고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이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없었으며 성격 또한 거칠었고 이상한 행동을 자주 했다고 그의 어린시절을 지켜본 사람들은 증언한다.

그러다가 차우셰스쿠의 나이 11살 때 그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서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로 도망쳤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가난 때문에 그곳에서 도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대체로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가 싫어서 그랬던 것이 가장 유력한 이유이다. 그곳에서 숙모인 니쿨리나 루세스쿠(Niculina Rusescu)와 함께 살다가 제화 수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루마니아 공산당(PCR : Partidul Comunist Roman)의 당원이었던 알렉산드루 선둘레스쿠(Alexandru Săndulesc)가 운영하던 곳이였다, 그러자 선둘레스쿠는 차우셰스쿠를 비밀 임무를 띈 수습생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1932년 차우셰스쿠는 마침내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루마니아 공산당은 루마니아에서는 불법 단체로 찍혔던 데다가 아직 십대였던 차우셰스쿠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잡일들만 맡겨질 뿐이였고 대부분의 임무는 불법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 차우셰스쿠는 1933년 일련의 파업들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처음 체포되었다. 그리고 1933년 첫번째 체포 이후 차우셰스쿠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감옥 생활이 시작된다. 이듬해인 1934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감된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석방 탄원서에 시민들의 서명을 받다가 체포되었는데 그는 이런 활동을 2번이나 더 했다고 한다.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수도 부쿠레슈티 이외에도 크라이오바, 큼풀룽, 름니쿠 블체아 등 루마니아의 여러 도시에 파견되어 공산당관련 임무를 수행했으며 수차례나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런 활동들과 잦은 수감생활로 인해 루마니아 정부 당국은 차우셰스쿠에 대하여 "공산주의 프로파간다와 반파시스트의 활동적인 보급책"이라는 인식을 갖고 그를 "위험한 공산주의 선동가"로 낙인찍는다.


체포되었을 당시의 차우셰스쿠.

차우셰스쿠는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공산당을 위한 지하활동을 위하여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1936년 6월 6일 브라쇼브의 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형을 받고 도프타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받은 혐의는 그가 살고 있던 차우셰스쿠의 후원자인 블라디미르 타르노브스키(Vladimir Tarnowski)의 집에서 발견된 루마니아 정부에 대한 반란과 봉기를 선동한 전단지에 맞춰졌다. 차우셰스쿠를 기소했던 검사의 기소장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피의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사실상 유죄 1936년 1월 15일 고의적이며 사기성이 짙은 의도를 가지고 자극적이고 비밀스런 책자를 소지했으며 그것들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하였고 시민들에게 사회 투쟁을 유발하려 한 점에서 고의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래 구두 수선공의 수습생이었다가 당시 파도처럼 유행을 타기 시작한 공산주의에 감화되어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반정부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감옥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할 정도로 수감생활이 화려했다, 이 때에 감옥에서 그는 스탈린주의에 더욱 심취하였고.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한 차우셰스쿠는 스탈린주의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던 중 같은 노동자 출신인 엘레나와 만나 결혼하였고 공산주의 운동가였던 출세길이 열리려는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4]의 심복이 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루마니아 공산독재 정권 수립 후 여러 직책을 거치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말년에 심각한 의심병으로 인해 차우셰스쿠만 믿게 되자 서서히 권력을 휘어잡아 나가다가 1965년 초대 루마니아 공산정권의 초대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서기장이 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는 헌법에 없던 대통령직을 추가해 대통령이 되어 기존 서기장보다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젊었을 때는 나름대로 기득권에 대항하던 투사였고 공산당 활동을 하면서 당시 추축국에 놀아나던 권력자들에 맞서는 개념찬 모습을 보였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련의 자국 간섭에 저항하면서도 미국 등 자본주의 진영과 화해하는 제스쳐[5]를 취하는 등 오히려 제정신을 넘어서 개념적[6]인 모습도 보여주곤 했다고...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국민과 공산당 내의 반대세력을 탄압, 학살하는 등 권위주의적 독재자의 전형이었다.

거기다 1960~70년대에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면서, 문화대혁명을 통해 권력 재장악에 성공하여 자신에 대한 맹목적 추종만이 허용되는 독재 체제로 만든 마오쩌둥과 한국전쟁 이후 8월 종파사건을 비롯해 정적에 대한 가차없는 대규모 숙청을 벌여 개인 독재 체제 구축에 성공한 김일성을 본 뒤 저 두 인물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집권 초반기에는 인기가 좋았는데, 기본적으로 1950-60년대 경제성장과정에서 쌓아올린게 꽤 되어서 당시 유럽 기준으로도 생활수준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거기에다 공산권의 일원으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가맹국임에도 서방과도 적극적인 화해협력을 추구하는 나름 줄타기 외교를 펼쳤다. 이때문에 서방국가들과의 무역도 활발해서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소련을 일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모습이, 몰도바를 소련에 내준 뼈아픈 기억이 있던 인민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실제로 1960년대 중후반에 루마니아에서 이미 콜라를 생산했었는데 그것도 고유브랜드가 아니라 미국 회사인 펩시에서 직접 면허를 받아서 생산했다. [1]

물론 어디까지나 초창기 이야기. 장기집권하면서 맛이 간 이후로는 인민궁전을 짓는다고 막대한 빚을 지고, 국민들이 굶주리는 동안 자신은 온갖 사치향략을 누리는 등 경제를 파탄상태로 만들면서 그 인기를 죄다 까먹었다.

3 독재정치

차우셰스쿠의 독재는 전세계적으로도 악명이 자자하며 괴상한 정책으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되는 짓만 골라서 했다는 이야기다.

차우셰스쿠를 비판한 알렉산드루 이바시우크(Alexandru lvasiuc)는 차우셰스쿠의 독재정치를 이렇게 비판했다.

"한 미치광이의 공상 속에 2천만명의 사람들이 사는 나라"

또한 1989년 12월 혁명이 끝난 후 지식인들은 그의 독재정치를 이렇게 평가했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야만적인 수단을 더 많이 동원했지만 지능적인 차원에서는 차우셰스쿠가 한 수 위였다."

3.1 우상화 정책

그의 우상화를 꾀한 그림들.

차우셰스쿠의 통치법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개인숭배정책이었다. 이는 국가 스탈린주의를 고수한 북한, 알바니아 등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으로 다른 동구권 국가들에서는 있지 않은 지도자와 지도자들의 가족들에 대한 신적인 추종과 우상화 작업이 이뤄지곤 하며 당연히 차우셰스쿠는 살아있는 신처럼 신봉되었다. 루마니아의 국경일은 차우셰스쿠의 생일이었으며 이것도 모자라 부인 엘레나의 생일도 국경일로 정했다. 그리고 엔베르 호자, 김일성이 자신이 민족적 정통성을 이어받은 지도자처럼 행세한 것처럼 차우셰스쿠도 자신이 로마인의 현명함과 다키아인의 용맹함을 물려받은 루마니아 민족의 지도자의 정통성의 계승자라고 선전했다. 거기에 우상화 작업과 국민들을 동원한 대형 행사, 그리고 부자 세습 등의 개인숭배 정책은 평양 방문 이후에 북한의 모습을 보고 혹해서 따라한 것이다. 문제는 그게 자기 명줄을 재촉했다는 것. 실제로 많은 루마니아인들은 “1971년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후 차우셰스쿠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근묵자흑은 진리

1978년 60세 생일 때 차우셰스쿠가 썼다고 한 664페이지의 책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책을 보면 일반적인 건강한 사회나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역겹다 못해 혐오스러울 정도의 칭찬으로 범벅된 책이었다. 이 책은 차우셰스쿠를 다정다감한 가장, 영도력 있는 지도자, 창조적인 사상가로 묘사하며 추켜세웠고 그가 살았던 집 또한 성역처럼 그려졌다.

또한 차우셰스쿠가 나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는 비밀경찰이 사전 감시를 철저하게 좋은 영상만 비추도록 비밀경찰의 구미에 맞을 때까지 몇시간 사진 편집작업을 해야 했으며 어색한 자세, 머뭇거리는 태도, 말을 더듬거나 찡그린 표정의 필름 찌꺼기들은 모두 수거해 비밀경찰들이 가져갔다.

또한 화면에 나오는 그 누구도 차우셰스쿠의 키(165cm)보다 커서는 안됐으며 갖가지 방법으로 키 차이를 줄이는 작업을 해야 했다. 도저히 편집이 불가능할 정도로 장신인 샤를 드 골(196cm)이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189cm) 같은 사람들은 차우셰스쿠 옆에 선 사진들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거기에 차우셰스쿠의 키가 작아 보일까 봐 차우셰스쿠의 사진 기사들의 키는 반드시 차우셰스쿠보다 작아야 했다. 그럼에도 본 문서 상단의 사진 3장은 모두 차우셰스쿠보다 상대방이 더 크다 (안습)

그러나 이러한 우상화 정책은 오히려 차우셰스쿠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본래 이 우상화 정책 방법은 북한과 동일하게 자신을 따르게하는 선전 운동이었고 루마니아 국민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 이유가 본인에게 우상화를 시킬 만한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본인이 건국한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워 위상이 높아진 것도 아닌 단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눈에 들어서 그의 사후 집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본인을 억지로라도 우상화 시키려면 전임자를 우상화하여 그 후광에 기대는 것도 모자랄 판에 전임자를 격하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실제로 니키타 흐루쇼프이오시프 스탈린을 격하하면서 소련의 독재체제를 종식시키고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한 것이 대표적인 예시.

이렇게 건국자도 공로자도 아닌 차우셰스쿠가 본인 우상화를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명분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헛소리로나마 본인이 무언가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획이 있고 이로 인해 국가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어필해야 한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도 일단 나의 투쟁같은 불쏘시개를 내세워 국가 비전안을 일단 내놓기는 했고, 혹부리우스역시 주체사상을 통해 나름대로의 국가 비전과 우상화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그런 생각을 염두하지도 않고 할 능력도 없었다.

또한 우상화 정책은 1인 독재체제의 특성상 이를 위해서는 정적을 제거하여야 잘 먹히는데 스탈린의 경우 대숙청으로 히틀러의 경우 장검의 밤으로 김일성의 경우 8월 종파사건으로 일치감치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방해하는 요소가 없어서 우상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정적 숙청을 하지 않아서 우상화에 방해요소가 많았고, 나아가 정권 장악에도 뭔가 불안정한 요소를 떠안고 가는 계기가 된다.

정리하자면

  • 건국자가 아니고, 하다 못해 국가기여에 이렇다 할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님.
  • 본인을 우상화 하는 주제에 전임자를 격하함. 그렇다고 본인이 전임자보다 잘난 것도 아님.
  • 국민들에게 헛소리로라도 이렇다 할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함.
  • 정적을 제대로 숙청하지 못해 우상화 정책의 효과가 반감됨.

하다 못해 본인에게 뛰어난 카리스마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특출난 면모도 없고 나사빠진 행동거지를 하는 얼빵한 작자에게 카리스마가 느껴질 리가 없었다. 결국 우상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차우셰스쿠는 무력으로 국민들을 복종 시키는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명분없고 엉성한 우상화 정책은 체코슬로바키아 인민들에게 좋은 비웃음 거리(…)가 됨과 동시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일당독재에 대한 좋은 합리화 수단(…)으로 작용했다.

3.2 비밀경찰

차우셰스쿠는 권력의 독점과 강화를 위해 국민을 도청했다. 이게 가능하겠나 싶지만, 진짜로 가능했다. 말 그대로 사방팔방에 도청기를 다 뿌려놓은 수준이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인구 2,100만에 도청센터만 1,000개, 도청기만 300만 개가 있었다. 한마디로 국민들 대부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말. # 때문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집안에서조차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다.

호텔의 모든 층은 도청의 대상이었고 관광업무를 담당하는 모든 일자리는 비밀경찰의 끄나풀이었다. 또한 잠재적인 경쟁자와 동료들에 대한 첩보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러고도 비판을 할까 봐 비밀경찰들을 풀어서 사찰을 하거나 몇 사람만 모이면 잡아버리는 짓까지 했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끔 만들어 이런 식으로 반정부집단을 무자비하게 유혈진압했다. 당연히 그와 그 일가붙이가 감행한 수탈과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다.

이 때 루마니아의 비밀경찰과 그 끄나풀이나 정보원들을 다 합쳤을 때 그 숫자는 약 루마니아 인구의 1/4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기 몇년 전부터는 권력 장악력이 떨어진 차우셰스쿠의 빈자리를 비밀경찰들이 채웠다. 문제는 이러한 비밀경찰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이 때에 들어간 돈은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가끔 차우셰스쿠도 돈의 사용처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부하였던 실비우 브루칸이라는 공산당 간부가 직접 계산을 해본 결과 나와 나의 집을 감시하는데 필요한 직원, 자동차, 시간외 수당 등을 감안하였을 때 한달에 약 20만 레이(Lei)가 들어갔다. [7]

다만 이에 대해서는 매우 과장되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차우셰스쿠 집권 시기에 비밀경찰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을 도청하는 일보다 오히려 도청기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역정보를 흘리는 것을 사람들을 도청하는 것보다 더 중점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도청된 것처럼 몇몇 사람을 잡아 불순한 말을 했다고 잡아버리거나 모든 대화가 도청되는 것처럼 꾸몄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에 전 국가를 도청한 것이 아니라 그냥 도청하는 것처럼 꾸며서 공포심을 주려는 의도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제기 되고 있다. 왜냐하면 직접 도청하는 것보다 모든 도청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한 심리적 압박과 자기검열을 하는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도청기 숫자가 꽤나 적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반드시 도청해야 할 정적에 대한 도청이나 군부나 공산당 의원처럼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반드시 도청했으며, 루마니아의 중요한 장소, 예를 들어 호텔이나 대통령 궁 같은 루마니아 내에서 중요한 장소들은 24시간 내내 도청을 실시했다.

3.3 아내 엘레나 차우셰스쿠

elena-ceausescu.jpg
Elena Ceauşescu
1916년 1월 7일 ~ 1989년 12월 25일

진정한 만악의 근원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인물로, 성질이 남편보다 더 잔학하여 국민들의 증오를 샀다. 얼마나 악명이 자자했냐 하면, 훗날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고 난 뒤에 한 인터뷰 중에서 차우셰스쿠가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라고 말한 차우셰스쿠의 최측근들마저도 그녀를 경멸하고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자식들마저도 중립적인 니쿠를 빼고는 전부 엘레나를 혐오했다.

본명은 레누차 페트레스쿠(Lenuța Petrescu)로 니콜라에처럼 빈농 출신에 봉제공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이러한 콤플렉스가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는 후술한다.

엘레나는 감옥에 있던 차우셰스쿠를 만난 뒤 그와 결혼했다. 맨 처음에는 엘레나는 차우셰스쿠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차우셰스쿠가 계속 구애를 하자 결국 결혼했다.

훗날 엘레나의 올케였던 아델라는 죽기 직전에 엘레나가 독일군을 상대로 매춘부 노릇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거의 대부분의 주변사람들은 엘레나는 그런 여자가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개성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며 독일군들이 좋아할 여성이 아니었다는 주장. 아무튼 엘레나가 매춘부 노릇을 했든 안 했든 그녀가 최소한 차우셰스쿠보다 이성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했다.

아내 엘레나는 차우셰스쿠를 공산당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차우셰스쿠의 단점들을 고쳐주었다. 특히 말을 심하게 더듬는 차우셰스쿠를 위해 말더듬는 것을 교정하는 훈련을 시켰고 그 결과 완벽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고쳐졌다. 이렇게 그녀는 차우셰스쿠의 참모이자 조언자로써 부족함이 없었고 차우셰스쿠는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정도까지 되어버렸다.

그 후 그녀는 자신도 걸맞는 영부인이 되기 위해 엘레나는 1955~59년 동안 화학 강좌에 참여했는데 다른 사람이 대리출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녀는 상당한 배려를 받았다. 어떤 젊은 교수 한명은 그녀가 시험 중에 커닝을 했다고 쫒아냈다가 그 이후 오랜 시간을 공포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그 후 루마니아 국립 화학연구소에 전임 연구원이 된 그녀와 대화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엘레나는 명령만 했지 토론은 기피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것에만 힘을 쏟았다. 훗날 그녀가 죽은 지 몇달이 지난 상태에서 인터뷰를 했지만 과학자들은 도청장치가 없다는 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확인한 뒤에 증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습관 때문인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눈치를 봤다고 한다. 다른 과학자들도 엘레나가 천박하고 악마 같았다는 점에 동의했으며 직원들의 복지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경비를 삭감했으며 별의별 방법으로 시설에 들어가는 돈을 줄였다. 그녀는 자신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토론을 극단적으로 꺼렸다고 한다. 일례로 독성이 매우 강한 실험용 에탄올 사용 신청서도 집에서 술 만들어 마시려고 한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봉제공 출신이라 무식에 한이 맺혔는지(...) 엘레나는 국립화학연구소의 소장이 되자마자 당연히 부하 직원들의 땀을 훔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논문(!)도 썼고 명함도 신나게 뿌렸다. 물론 공식적인 명칭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화학자"였다. 또한 엘레나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명예 박사를 요구했다. 권좌를 물려줄 아들 니쿠 차우셰스쿠를 제외하면 자녀들의 직업이 핵물리학자, 수학자와 같은 이공계 관련 직업인 것도 이런 열등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공부는 제대로 안 했다.

이 악녀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렀던 루마니아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은 엘레나가 차우셰스쿠의 악의 원천이라는 점이었다.

루마니아 공산당 당원이였던 에우젠 프로카는 엘레나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래도 차우셰스쿠에게는 인간의 냄새가 좀 남아 있었지만 엘레나는 철저한 악마였다."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 중국의 장칭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사실 페론은 사실 여기서 거론된 세 명 보다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차우셰스쿠의 전용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바실레 말루찬 공군 대령은 "엘레나는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모두 우리들의 잘못이었으며, 헬리콥터 안에 카펫에 보푸라기가 일어나거나 날씨가 나빠 카펫이 들춰지기라도 하면 모두 우리 탓이었으며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고 모두를 증오했다"고 한다. 훗날 말루찬 대령은 차우셰스쿠가 잡히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식탁에 다른 사람들은 초청되는 것을 꺼렸는데, 물론 차우셰스쿠 부부가 다른 사람들을 잘 초청하지도 않아서 그런 면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이유는 엘레나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언제나 무슨 요리가 나오든 만족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만든 요리가 맛있다고 언제나 이야기하며 요리사들에게 왜 자신처럼 잘 못 만드느냐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녀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사진사는 그녀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녀는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진을 보면 "왜 내 코가 높게 나왔어?"라거나 옷이 예쁘지 않으면 "사진도 못찍는 머저리 같으니, 차라리 내가 찍는 게 더 잘 나오겠다."라며 쉬지 않고 잔소리를 했다.

거기에 의심도 많아서 대통령궁 직원들이 물건이나 음식을 훔쳐갈까 봐 계속 주방과 숙소를 돌아보며 직원들을 닥달했고 항아리에 든 요구르트를 훔쳐먹거나 독을 탈까 봐 항아리에 자물쇠를 채우기도 했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3.4 엽기적 행각

그 시절 차우셰스쿠 및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일화들. 그만큼 미쳐 돌아갔다고 보면 된다.

  • 세균 및 암살에 대한 공포로 영국 방문 시 엘리자베스 2세와 악수한 직후 그 자리에서 손을 알코올로 소독했다. 친한 친구 사이끼리에서도 이랬다간 싸움이 날만한 행동을 신뢰가 중요한 외교적 현장에서 상대를, 그것도 그 나라와 나라의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 원수에게 대놓고 '나 너 못 믿겠음'이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이게 얼마나 큰 외교적 결례인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신생아 건강을 이유로 모든 영아들에게 수혈을 하도록 했는데 혈액 검사를 제대로 안 해서 수백 명이 에이즈에 감염됐다. 수혈은 말 그대로 타인의 혈액을 그대로 자신의 혈액으로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혈액 검사가 매우 중요하다. 헌데, 그걸 대충 했다는 소리다.
  • 차우셰스쿠가 보는 글씨는 보통 글씨에 비해 3배나 크게 쓰여졌는데 그 이유는 차우셰스쿠가 근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석에서 안경을 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종이와 잉크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 아내 엘레나는 지하에 대형 냉장고를 설치해 국민들이 아사할 지경에 이를 때에도 언제나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었다고 한다.
  • 서방에서 성경을 지원받아서 화장지로 만들었는데 파쇄가 제대로 안 돼서 화장지에서 성경 구절이 보이게 되었다.
  • 지하철 공사장 자리에 있던 공원을 보고 싶다고 하여 하룻밤만에 복구시켜버렸다.
  • 아들 니쿠가 한 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녀가 탐탁찮았던 엘레나는 니쿠가 잠시 해외로 나간 사이 병사들을 시켜서 그 미녀를 윤간한 뒤 그 사진을 니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그 피해자가 된 미녀가 나디아 코마네치라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그래도 니쿠가 중립인 것을 보면 좋은 아들인듯
  • 루마니아 공산당에서 차우셰스쿠의 아내 엘레나에게 부여한 정식 명칭은 "인민의 자애로운 어머니". 한편 같은 시기 그녀는 "인민들은 마치 벌레와 같다. 아무리 먹여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는 발언을 했다고.
  • 또한 화려하게 꾸민 대통령궁의 침실 페인트 냄새가 싫다면서, 단 하룻밤도 잔 적이 없으면서도 청소부가 그 방을 청소를 게을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카페트 밑에 핀을 숨겨두었고, 이를 치우지 않자 즉시 해고했다.
  • 스스로를 외적에 대항하는 루마니아의 왕으로 생각해 기마병들을 동행하고 성지순례를 하거나 의도적으로 애국주의를 강조하기도 했다.
  • 앵무새 1마리가 훈련받은 대로 "니쿠 바보" 를 연발했다. 앵무새는 루마니아 비밀 경찰에 끌려가 심문받은 뒤 사형 당했다(...). 것도 목을 비틀어 죽였다고...

  • 국민들은 쫄쫄 굶고 있는 상황에도 평양의 주석궁을 보고 혹한 나머지 차우세스쿠 자신의 치적을 기념한답시고 부쿠레슈티 한복판에 인민궁전(Casa Poporului, 혹은 Casa Republicii)[9]을 세웠다. 이 건물을 세우기 위해 부쿠레슈티에 있는 유서깊은 석조 건축물들이 대거 철거당했고 근처에 있던 교회는 통째로 35m 옮겨졌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부쿠레슈티 시가지 전체의 약 1/3에 달했다고. 단일 건물 중에선 세계에서 미국의 펜타곤 다음으로 거대한 건물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크기만 컸지 기능적인 면에서는 쓰레기 그 자체로, 가히 아시아에 있는 어떤 건축물에 비견될만한 쓰레기다. 더군다나 이 건물은 미완성이다. 심미안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차우셰스쿠가 기분에 따라 그때마다 설계도면을 싹 다 바꾸는 일을 일삼아 균형미는 찾아볼 수조차 없으며 나중엔 재정난 때문에 대리석으로 반쯤 꾸며진 방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있던 계단을 철거하고 다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세운 철기둥은 그가 사형되자마자 미관상의 이유로 철거되었다. 여담으로 인민궁전에 있는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산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엔 루마니아 국회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차우셰스쿠 본인은 별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독재정치를 겪은 국가들중에서는 독재와 관련된 건축물이나 기념물들을 부수지않고 비극적인 역사를 잊지말라는 반면교사의 취지로 일부러 남겨둔 경우가 있긴 하다. 자세한 것은 인민궁전 항목 참조.
  • 북한을 벤치마킹하여 대규모 매스게임을 매년 했다고 한다. 영상을 보면# BBC의 다큐멘터리 아리랑 공연과 매우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거리 행진에서 국민들이 소극적인 반항으로 아무도 함성을 지르지 않자 영상에서 소리를 합성해 넣었다.
  • 자신을 찬양한 자서전을 써 전국 각지의 매장에서 판매시켰는데 간부들에게 의무적으로 판매했다. 인두세도 아니고... 어쨌든 이로 인해 차우셰스쿠의 자서전은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판매고가 계속해서 상승했다.
  • 수도 부쿠레슈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생존자 구조 작업으로 인해 복구가 더뎌지자 구조 작업을 중단하고 잔해는 그냥 불도저로 밀어(!)버리라고 명령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잔해 철거 과정 중 시체의 팔다리(...) 등이 발견되기도 하여 실종자 가족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물론 분노한 실종자 가족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로 대답했다.
  •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의 초청으로 요르단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엘레나는 요르단 왕실 요트가 마음에 든다며 당장 달라고 요구했다. 그 요트는 다른 것도 아니고 후세인 1세가 자신의 딸에게 준 선물(...). 다행히 후세인이 다른 요트를 즉시 선물하겠다고 약속해서 일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참고로 후세인 국왕은 그래도 국가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요트 이름을 '우정'이라고 짓자고 했는데, 차우세스쿠 부부는 요트를 받고 나선 이름을 '지도자'로 지었다(...). 공산 정권이 무너진 후 이 요트는 민간 여행사에 관광용으로 팔렸다.
  • 김일성의 부자 세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그것까지 벤치마킹해서 자기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려고 시도했다. 물론 그 결과가 어떤지는 후술할 내용에 전부 설명되어 있다.
  • 죽기 얼마 전에는 차우셰스쿠를 비방하는 전단들이 루마니아 전역에서 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에 차우셰스쿠는 대자보가 타자기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자 루마니아 전국에 타자기 사용을 금지시켰다.
  • 자신의 검은색 래브라도 개한테 텔레비전과 전화기가 딸린 전용 침실을 주었고, 이 개를 보호하기 위해 개의 음식을 먹어보게 하는 전속의사까지 두었다.

물론 근거가 없거나 과장 된 일화들도 존재한다.

  • 루마니아 사람들이 구두 1켤레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의 가게를 다녀야 할 만큼 경제 사정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차우셰스쿠가 낭비를 일삼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매일 새 와이셔츠나 양복을 입고 나서 버렸고 그 옷을 곤룡포처럼 불태웠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훗날 차우셰스쿠의 양복 재단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 차우셰스쿠의 실제 별명 가운데 하나는 루마니아의 흡혈귀였는데 그 이유는 생전에 주기적으로 건강한 어린아이들의 피를 수혈받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바토리 에르체베트? 그러나 이 또한 차우셰스쿠의 사후 흡혈귀 전설을 연상시키기 위해 지어낸 거짓이라고 판명났다.
  • 둘째 아들 니쿠가 흔히 개념 없이 각국의 외교관들이 모인 만찬에서 탁자 위로 올라가서 소변을 갈겨댄[10] 개념없는 인간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와는 다른 주장이 있다. 1990년 니쿠는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비록 차우셰스쿠의 자식들 가운데 아들 니쿠가 차우셰스쿠의 부부에 대한 불만이 가장 적었고 그도 물론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니쿠가 차우셰스쿠에 협조했고 온갖 문란하고 난잡한 생활을 일삼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재판에서 니쿠의 모습은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서 개념찬 사람이라는 증언과 사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89년 12월 혁명이 있기 몇년 전 니쿠가 시비우 지역 당1서기로 있을 때 여러가지 책임감 있는 조치를 취했다고 하며 재판에 나온 많은 증인들은 니쿠가 시비우 주민들의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증언했다.
  • 심지어 세계올림픽에서 여자 체조 부문의 스타로 떠올랐던 나디아 코마네치에게 구애를 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녀의 손톱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 등 나디아 코마네치와 관련된 모든 루머들은 거짓으로 확인되었다. 니쿠가 강간을 일삼고 난잡한 성관계를 예사로이 했으며 학대행위를 즐겼다는 루머는 루마니아의 경제상황과 사기가 급전직하자 흉흉한 민심 속에 터져 나온 루머일 뿐이다. 그러나 술버릇이 있었으며 방탕한 여자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정말 나디아 코마네치는 뭔 죄인지...

3.5 인구 증가 정책

어느 정도 필요하긴 했는데 방법이 막장이라 욕먹는 케이스. 막장도 너무 개막장이었다(...). 인구를 증가시키려면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인프라를 만들어 두는게 우선인데, 차우셰스쿠처럼 덮어놓고 무작정 인구만 늘리면 헬게이트만 열릴 뿐 좋을 일이 없다. 차우셰스쿠 치하의 루마니아처럼 인프라조차 안되는 나라가 무작정 인구만 늘리면 나중에 따로 방출을 하지 않는 한 고령화로 인한 부양인구 증가 vs 생산인구 감소[11] 콤보를 맞게 된다. 보통 이런 경우 2~2.5명 정도로 인구 유지를 조건으로 어느 정도의 증가를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구가 국력이라고 생각한 차우셰스쿠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인구를 늘리려 했다. 처음에는 낙태와 피임, 이혼을 금지했다. 그러자 서로가 싫었던 부부들이 서로 별거를 시작했다. 그러자 차우셰스쿠는 경찰을 동원하여 여자의 배란기 때에 부부가 같이 있었는지를 조사하여 같이 있지 않으면 똑같이 세금을 물렸다.배우자에게 미운 털 박혀서 세금 물어낸 사람은 안습. 거기에 나중에는 아예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아이를 많이 낳도록 했으며 아예 낳지 않으면 또한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이때 내야할 세금 액수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인데 한번 걸리면 연봉의 20~30% 정도의 돈을 세금으로 내야했다. 웃긴 사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장애인이나 심지어 불임인 여자나 고자에게까지도 세금을 물렸다는 사실이다. 물론 간부 부인들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이 루마니아 사회에 안긴 가장 큰 재앙은 다름아닌 성병이었다. 루마니아인들은 강제로 아이를 가져야했고 만약 그러지 않으면 굶어죽게 되었으므로 배우자가 성병이 있더라도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12] 결국 온갖 성병이 창궐하게 되었고, 특히 에이즈 환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웃긴 건 성병 환자가 결혼한 거 적발되어 벌금을 무는 일은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루마니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인구 대비 에이즈 환자의 비중이 굉장히 높은 상황이다.

이딴 막장 짓거리를 하다보니, 열받은 사람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 루마니아에서 헝가리로 탈출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인구가 줄어 들어서 열받은 차우셰스쿠가 다뉴브 강을 건너 헝가리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모조리 총살하라고 명령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월경(越境)을 시도하다가 다뉴브 강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 다뉴브 강은 죽음의 강이라 불렸다. 이런 막장스러운 정책을 시행한 결과 차우셰스쿠의 바람대로 많은 수의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억지로 인구를 늘리려고 했기 때문에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을 양육할 사회 기반이 없었고 자식을 많이 낳은 사람에 대해 경제적인 지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버려진 아이가 발생하였다.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있었는지 아이를 살려서 버리는 것은 처벌하지는 않았다.그냥 생각이 없었던거 아닐까 더 큰 문제는 태어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자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당연한 것이, 인프라 구축이 인구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당연히 일자리 창출이 될 리가 없다. 자세한 건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을 참조할 것.

참 아이러니한 사실은 차우셰스쿠를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바로 이 정책으로 인해 태어난 세대의 아이들이었다.다만, 역으로 차우셰스쿠에게 가장 철저하게 충성하던 세쿠리라트 역시 이 정책으로 태어난 세대의 아이들이었다.

3.6 에너지 절약 정책

무리한 산업화로 인해 부채 문제에 시달리게 되고 개인적으로 돈을 펑펑 쓴 탓도 있는지라 차우셰스쿠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전기와 온수 공급을 중단하고, 아파트에도 한 겨울에만 조금씩 난방을 넣어 주었으며, 냉장고와 진공청소기의 사용금지는 물론 전구도 40와트 짜리만 사용하도록 강요하였고 1집 1등 켜기 규정을 지켜지는 지를 철저히 감시했다. 이런 식으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다보니 매우 황당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갑자기 정전이 되는 경우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막장을 벗어나야 했고막장이다, 수술을 하던 의사는 환자를 끝까지 살피지 못하고 수술을 그만두어야 했으며, 어린 환자에게 씌워 놓았던 산소 호흡기가 정전으로 갑자기 멈추거나, 환자의 인공으로 만든 장기가 움직임을 멈춰버린 경우에 환자가 사망하기도 했다. 거기에 인구 증가를 위해 공장 노동자들의 낙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초음파 검사기를 쓰지 않고 수치스러운 방법까지 동원하여 임신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또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루마니아의 텔레비전 방송은 동구권에서도 꽤 재미있는 방송을 내보냈지만 80년대 들면서 에너지 절약 정책이랍시고 채널수를 2개에서 단 1개로 줄이고 방송시간도 평일 2~3시간 정도로 줄여서 차우셰스쿠를 우상화한 방송들만 마구 내보냈다. 결국 부쿠레슈티 지역의 주민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불가리아 TV방송을 볼 지경이었고, 이외에도 북부지역 주민들은 몰도바, 서부지역 주민들은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의 TV방송을 수신하려고 애썼다.

3.7 무리한 산업화 정책과 긴축정책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인구 정책과 비슷한 사례. 공업화로 인해 해외에서 빌린 채무가 100억 달러에 이르자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정부가 다른 나라에게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은 국치다."라는 발언을 했고 그 국치를 씻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모든 복지예산을 긴축하고 세율을 올려서 불과 9년만에 100억 달러의 채무를 다 갚았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1950~75년 사이에 루마니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의 하나였는데, 이것은 외채를 끌어와 실시한 중공업 투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공업 투자에만 몰빵한 나라들이 결과적인 말로가 안 좋듯[13] 루마니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쨌든 1950~70년대에 루마니아는 경공업이 발전한데다가 중공업도 상당히 발전해서 사회주의 국가치고는 괜찮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오일쇼크가 터진 이후의 경기침체와 이자율 상승으로 외채를 갚을 길이 막막하자, 차우셰스쿠는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여기에 긴축정책의 대강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IMF가 권고한 것이었다.

루마니아는 IMF가 권고한 목표를 맞추기 위해서 식량배급을 줄이고, 복지를 축소하는 등 국민들을 쥐어짰다. 이 시절 국민들은 수출하고 남은 돼지 비계, 닭발 같은 찌꺼기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외국 채권자들은 돈 잘 갚아주니까 무지하게 좋아했다. 참고로 당시에 라틴 아메리카는 고이율과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빚을 제때 갚지 못하게 되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나라가 부지기수였고, 설사 빚을 갚아낸다 해도 위낙 이자가 비싸서(1980년대 기준으로 10%대) "수입은 안하고 수출만 하기"식의 경제정책을 펴고 국민들을 쥐어짜서 매년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해도 빚을 줄이기 힘든 판이라 채무 탕감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폴란드나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등의 동구권 국가들 또한 1960-70년대 당시에 서구권에서 대거 차관을 들였는데 오일쇼크와 이자율 상승 2연파를 맞은 상황이라 경제구조적으로 빚을 갚아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빚을 탕감해 달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상황이었고,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는 몇 차례씩 외채를 탕감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마니아는 고이율에 대해 몇번 말을 꺼낸 것을 빼면 별 다른 군소리하지 않고[14] 꼬박꼬박 돈을 갚았으니 채권자들 입장에선 안 이쁠래야 안 이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덕에 국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사실 외채를 갚기 위한 국민적 긴축정책은 상당히 많은 나라에서 실시되는 것이고, 한국의 1990년대 말의 IMF 사태나 현재 그리스의 초긴축 정책도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과정의 하나였다. 문제는 외채가 차씨 일가의 사치에 의한 것이었느냐인데, 차우셰스쿠의 사치에 의한 부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산업투자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런 긴축정책은 모라토리엄이나 디폴트까지 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모라토리엄이 발생하면 국가신용도가 바닥이 되어 미래를 도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 생활 수준을 아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는 것 자체는 빼도 박도 못할 병크가 맞다. 외환위기 당시의 대한민국도 대량의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시키긴 했지만 적어도 모든 국민들이 음식찌꺼기 따위나 먹을 수준으로 퇴보하지는 않았으며,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도 부유층들이 호위호식을 했다거나 하는 얘기가 있긴 했지만 차우셰스쿠는 지도자였음에도 국민들이 고통을 겪는 긴축정책 와중에서도 모범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사치를 부리고 국민들에게 출산을 강요하는 천하의 개쌍놈 짓을 해댄 탓에 그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높아져서 몰락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제 무덤을 판 일인데, 그나마 국가적 신용도는 유지시킨 것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구석이 있긴 하다.

피델 카스트로블라디미르 레닌같은 공산권 독재자들이 국민들을 탄압하고 감시했음에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를 잘 생각해보자. 악명높은 이오시프 스탈린도 독소전쟁 당시 대숙청으로 수많은 장교와 당 간부들을 잔혹하게 숙청한 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의 자신의 숙청행위에 대해 일갈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행동이 멍청한 짓이라고 조금이라도 느끼기라도 했지 차우셰스쿠는 그런거에 귀기울일 작자가 아니었으며 최소한 어떻게든 자신의 실책을 만회할려는 수단을 생각하지 않았다.

3.8 외교정책

x300px
히로히토와 차우셰스쿠
그러고보니 둘이서 사이좋게 저승갔다[15]
독재자 킬러와 차우셰스쿠

한편, 막장이나 다름없는 국내 정책에도 불구하고, 냉전기 서방 세계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미국소련으로 양분된 냉전 시기, 차우셰스쿠는 탈소련화 정책을 추진해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이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며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간섭에 저항하였고 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함께 중립주의를 표방하며 서방에 화해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어필(공산권 국가 최초로 서독과 수교, GATT 체재가맹, EC 무역협정 조인)하는 공산권 지도자였다. 그외에도 자본주의 국가도 종종 방문했는데 일본이나 미국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히로히토지미 카터를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서방으로부터 대량의 자금이 유입되면서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물론 짧은 기간이지만) 황금기를 누렸다. 물론 훗날엔 족쇄가 되었지만.

심지어 차우셰스쿠는 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반군들을 비공식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으며, 이스라엘PLO를 동시에 인정, 수교를 맺었다.

심지어 공산권 국가들이 단체로 보이콧했던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 유고, 중국과 함께 루마니아를 대회에 참가시키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차우셰스쿠의 대외정책은 서방권에서 비교적 환영받았다. 아무리 국내적으로 막장이라고 해도 자기들 정책을 지지하고 빌린 돈도 잘 갚는데 안 좋아할 리가 없었다. [16] 그러나 차우셰스쿠의 이러한 탈소련화 정책은 우방국이었던 소련을 격분하게 했고 그 결과 소련은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에게도 판매하였던 Mi-24 공격헬기Su-22 지상공격기 같은 무기들을 당시 루마니아에게 판매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차우셰스쿠가 외교에서는 정상적이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그는 상술했듯 암살을 우려한답시고 악수한 손을 면전에서 대놓고 소독하는 병짓을 하고, 간단한 대화를 구사할 능력조차 없어서 공식 행사 자리에서 굳은 자세로 일관했으며, 그 외에도 각종 해괴망측한 짓을 했기 때문에, 언제나 당사국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국가 원수들에게 차우셰스쿠의 방문은 피할 수 없는 재난과도 같았다."

지스카르 대통령은 그런 지긋지긋한 경우를 두번 경험했다. 첫번째는 1978년 차우셰스쿠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였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국빈 방문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관리들은 차우셰스쿠 일행이 떠난 뒤 해괴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차우셰스쿠가 머물렀던 영빈관 내의 모든 전깃줄과 전화선이 까뒤집어져 있었던 것이다. 차우셰스쿠의 경호원들이 도청장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그들은 영빈관에서 간단히 가져갈 수 있는 시계, 재떨이, 공예품들을 모조리 훔쳐갔다. 외교를 하는데 그것도 신뢰가 가장 중요한 일에서 도둑질을 하는 지도자는 아마도 차우셰스쿠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어이가 없던 지스카르 대통령은 이후 루마니아 사절단의 방문 일정이 잡혀있던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 차우셰스쿠 일행의 도벽에 대해 귀뜸해 주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버킹엄 궁전의 관리인들에게 루마니아 사람들의 행동을 잘 감시하라는 주의를 주어 좀도둑질의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여왕은 지스카르 대통령이 차우셰스쿠가 버킹엄 궁에도 도청장치가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아연실색했다. 사석에서 그를 저 지독하게 작은 사람이라고 불렀던 여왕은, 차우셰스쿠가 도청장치를 두려워하여 버킹엄 궁 안의 잔디밭에서 아침 일찍 수행원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 황당해했다고 한다.

3.9 여행과 사냥

차우셰스쿠 부부가 여행을 할 때마다, 언제나 제 각각의 수행원들이 동행했다. 차우셰스쿠의 수행원, 요리사, 경호원들은 하루도 쉬지 못했고, 경호원 중에는 영화 필름을 전문으로 만지는 기사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수석 수행원의 회고에 따르면 차우셰스쿠 부부는 코작(Kojak) 시리즈를 특히 좋아했고, 프랑스 혁명 전 한 아름다운 여성의 모험담을 그린 미셸 메르시에 주연의 저속한 영화 '니울 숲의 속삭임(La Marquise des Anges)'도 즐겨 봤으며 그 외 "다락방", "위대한 갯츠비",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도 좋아했다. 수행원들은 영사실에서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가벼운 포르노 영화도 싫어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376446_f260.jpg
요시프 브로즈 티토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과거 황제들의 흉내를 내 호화판 사냥을 즐겼지만 역시나 차우셰스쿠는 이에 한 술 더 떴다. 루마니아 공산당 지방당 간부들의 주 관심사는 차우셰스쿠 부부가 지방을 여행할 때 농민들의 환영식이 끝난 뒤 차우셰스쿠에게 좋은 사낭터를 제공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루마니아 내의 대규모의 땅들이 차우셰스쿠 개인 전용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그가 죽을 때가 되어서는 그의 개인 사냥터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컸을 것이다. 티미쇼아라 지역에서만 250만 헥타르[17]가 그런 용토로 쓰였으며, 루마니아 전국에 걸쳐서 약 23개의 사냥터와 봄의 궁전 흉내를 낸 15개의 별장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별장 내부는 트로피와 짐승의 박제로 가득 차 있었다.

시나이아와 브라쇼브 사이의 아주가 지역에서만 세 개의 사냥터가 있었고 차우셰스쿠 부부가 좋아했던 스위스식 커다란 통나무 오두막집에는 비밀경찰들의 감시가 삼엄했다. 차우셰스쿠 부부와 초청받은 손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실제로 한번은 딸 조이아가 주변을 구경하고 난 다음 물 한컵을 마시려고 그 통나무집으로 갔다가 문 앞에서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사냥과 사격에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났다. 왜냐하면 샤낭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들을 부분적으로는 해외에서 수입하기도 하고, 또 일부분은 고기와 사료를 먹여 사육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러다 부족한 사료를 야생 멧돼지와 곰에게 줘 버리자 수많은 양들이 영양실조로 떼죽음을 당한 일도 있었다. 샤냥꾼 관리인은 훗날 에드워드 베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차우셰스쿠는 포악한 사냥꾼이었습니다. 영국 귀족들이 좋아하는 네덜란드제 엽총으로 짧은 시간안에 수많은 동물들을 죽였습니다." 별장 관리인은 차우셰스쿠가 희귀종이며 보호동물인 검은 산양 66마리를 죽였으며 시니이아 근처에서는 고지대의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스키 리프트를 탔다고 증언했다.

차우셰스쿠 별정에 전속으로 배치되었던 전문 사냥꾼들은 차우셰스쿠에게 재미있는 샤냥놀이를 끝없이 제공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산양은 오스트리아에서 곰은 알래스카에서 수입했고 수의사는 야생동물들을 수시로 살피고 인민들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치즈, 생선, 고기, 당근, 사과 등을 주었으며, 연구기관에서는 차우셰스쿠 북극곰을 사냥하기 위해 북극곰이 루마니아 산악지대에서도 살 수 있는지 조사하기 의하여 5개년 계획에 착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풀어놓은 곰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거기에 사냥에는 옛날 들이 사냥한 것처럼 수많은 몰이꾼과 전문사냥꾼들이 동원되어야 했다. 1983년 차우셰스쿠와 그가 초청한 손님들을 위해 샤냥에 비행기 2대, 헬리콥터 4대, 산악용 지프차 6대가 동원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원된 사람들은 차우셰스쿠를 명사수로 만들기 위하여 사냥감이 언제나 목표지점을 배회하도록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방법으로 차우셰스쿠가 좋아햤던 사냥감인 곰을 동물원에서 굶긴 다음에 샤낭터로 몰면 좋은 과녁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각본 아래에서 사냥꾼으로써의 솜씨는 매우 좋은 것처럼 포장되었다.

이렇게 차우셰스쿠가 사냥에 미쳐 헤어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때문이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또한 죽어있는 야생동물들을 자기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걸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사람들은 사냥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결같이 증언한다. 차우셰스쿠의 헬리콥터 조종사였던 말루찬 대령은 차우셰스쿠의 사냥 여행 당시는 악몽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차우셰스쿠가 몇 시간이고 사냥에 열중하면 밥조차 먹을 수가 없었고, 또 그가 사냥터에서 밤을 지새면 조종사들은 헬리콥터 안에서 추위에 떨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충복들에게도 인색했던 차우셰스쿠 부부는 해외여행에 수행한 언론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방문에 수행했던 언론인들에게 식비로 지급했던 금액은 하루에 8달러였다.

엘레나가 명예학위에 열중이었던 것처럼 차우셰스쿠도 사냥해서 잡은 야생동물들을 박제로 만드는 데 열을 올렸다. 이렇듯 사냥에 심취했기에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 토도르 지프코프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지프코프는 이놈과는 급이 다르다. 독재자였지만 나라를 완전히 박살내어버린 차우셰스쿠와 달리 최소한의 최소선 하에서 독재를 했었고, 지프코프 정권 시절 불가리아는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동유럽에서 잘사는 나라였다.

이렇게 수많은 동물들을 잡아 박제로 만들다 보니 1989년 12월에는 무려 244마리의 사슴 박제, 385마리의 곰 박제를 모았다. 사냥할 때마다 동행했던 사람은 차우셰스쿠가 매년 수천마리의 야생동물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차우셰스쿠는 언제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선물한 망원경이 장착된 장총을 즐겨 사용했는데, 그 장총은 차우셰스쿠의 전성기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즐겁고 사치스러운 생활도 서서히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4 종말

051031_2304.jpg
차우셰스쿠 공산독재의 종식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루마니아 국민들의 모습.
중간에 웬 폴란드 스파이가 있는 것 같지만 무시하자 루마니아의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해 바웬사가 원군을 파병한것일지도?

루마니아는 동구권에서 연달아 공산당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유혈사태가 일어난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냉전 시기 동유럽에서 벌어진 자본주의화의 바람은 루마니아에도 불었다. 헝가리개혁교회 목사 퇴케시 라슬로(Tőkés László)를 체포하자, 루마니아 서쪽의 도시 티미쇼아라[18]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차우셰스쿠 정권은 이를 잔혹하게 유혈진압하였다. 이에 대해서 수천명이 학살당해서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는 둥 하는 근거없는 소문[19]이 서방 언론을 통해서 확산되었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매우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민주화 시위가 루마니아 전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국민을 감시하던 정보부 또한 민심을 읽었지만, 이미 민심을 돌이킬 수가 없는 지경이며 그의 종말이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차우셰스쿠에게 이런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차우셰스쿠 부부는 정국이 혼란한 와중에도 이란을 2박 3일의 일정으로 방문하여 그해 갓 취임한 최고 종교지도자 하메네이를 만나는 위엄까지 보였다.

사실 차우셰스쿠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국민들을 감시하고 도청했으며 우상화 작업을 철저히 해왔다. 또 1984년에 일어난 쿠데타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국민들의 소소한 저항은 항상 유혈진압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1989년 12월 21일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차우셰스쿠는 평소 하던 대로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 광장에서 국민들을 불러놓고 지지대회를 벌였다. 이 과정이 차우셰스쿠 입장에선 정말 재수가 없었는데 원래대로라면 광장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열성당원들이 모여서 차우셰스쿠의 연설을 화려하게 장식해야 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늦는 바람에 연설이 취소되었단 소문이 퍼지면서 모여있던 열성당원들은 해산해버렸고 이에 허겁지겁 인근의 노동자들을 닥치는대로 징발해서 모아놨는데 난데없이 꼴보기 싫은 폭군의 연설에 강제로 모인 사람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평소처럼 자화자찬식의 연설을 했지만, 연설 중간 광장에 모여 있던 국민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차우셰스쿠여! 우리도 사람이다", "학살자를 타도하자!", "루마니아는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식으로 야유를 퍼붓고 티미쇼아라 시위의 무력 진압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치는 등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루마니아 자유화의 시작이었고 차우셰스쿠 정권의 몰락의 시초였던 이 역사적인 순간을 방송국은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급하다면 2분 40초부터 보자. 2분 40초부터 이러한 광경이 나온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연설에 군중이 야유와 비난을 퍼붓자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한 채 손을 흔들어 보이는 뻘짓을 했고 공산당 보안국 간부들이 "어서 관저로 들어오십쇼!"라고 재촉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사자후에 군중이 진정할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hallo!"만 미친듯이 외쳐댔다. 옆에서 엘레나는 "닥치시오!"라고 재촉하는 간부들과 군중들에게 을러댔고 결국에는 부부가 같이 군중들에게 "동무들, 좀 조용히 하시오!"라고 악을 써대는 상황이 되었다. 한참동안 목이 쉬도록 조용히 있으라고 소리질러도 군중이 잠잠해지지 않자 당황한 차우셰스쿠는 멍청하게 손이나 흔들면서 말을 잇지 못했고 5분 30초 경에 보다못한 아내인 엘레나가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Talk to them, talk to them!)' 라고 말한 것이 결정타였다. 당연히 연설은 TV 생방송 중의 연설이었다. 결국 차우셰스쿠는 국가의 단합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허겁지겁 연설을 마무리했지만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고 옆에서 엘레나와 공산당 간부들만 열심히 박수를 쳐댔다. 한편 군중들의 성난 함성은 마침내 폭발했다. 차우셰스쿠는 예정된 것인지는 몰라도 연설중에 90년 1월부터 전국민의 월급을 2000 레이에서 2200 레이로, 노인 연금도 800 레이에서 900 레이로 올려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당근으로 국민들을 진정시키기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결국 텔레비전 연설 방송은 도중에 중단되었지만, 라디오는 방송을 계속 진행되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알려졌다. 방송이 나간 후 상황은 급변했다.

여기서 차우셰스쿠의 희대의 병크가 터지는데 차우셰스쿠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국방장관인 바실레 밀리아(Vasile Milea) 장군에게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맹비난하면서 앞으로도 병사들에게 데모 군중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면 갈아치워 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장군은 앞에서는 차우셰스쿠의 말을 따르는 듯이 행동했으나 실제로는 발포명령을 끝내 내리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해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부는 그의 암살을 데모 군중들에 의한 암살이라고 선언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다른 소식통들은 차우셰스쿠의 지시에 따른 처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에 데모 군중에 의해 국방장관이 암살될 정도라면 이미 시위는 엄청난 수준이며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자 군 내부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어? 우리 보스가 우리 국방장관까지 팀킬하네? > 그럼 우리는 시위를 진압해도 살아남기 굉장히 힘들겠네? > 우리한테 주는 것도 없으면서 뒷통수를 치냐?! > 차우셰스쿠를 죽입시다! 차우셰스쿠는 나의 원수! 이런 입장으로 돌변하여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던 빅토르 스탄쿨레스쿠 장군은 가짜 깁스까지 하면서 끝까지 차우셰스쿠와 연루되지 않으려고 했으나, 엘레나 차우셰스쿠에 의해 끝내 국방장관으로 임명당했다. 당연히 후임 국방장관은 시위대 편이었다.

그리하여 22일에는 시위를 진압하러 보낸 정규군이 혁명 세력에 가담해 차우셰스쿠에게 총부리를 겨눴고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정규군과 세쿠리타테 사이의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루마니아 공산당도 차우셰스쿠를 제명시켰다. 국민들 뿐 아니라 군과 당에게까지 버림받은 차우셰스쿠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대다수의 반대파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루마니아 정규군이 차우셰스쿠를 지지하지 않은 것은 차별대우 때문이다. 이 당시 정규군과 보안군의 대립은 루마니아 판 임오군란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차우셰스쿠는 정규군을 신뢰하지 못했고 낙태콘돔 사용 등의 피임을 금지하면서 급증한 고아원에 넘쳐나는 고아들을 뽑아다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비밀 경찰과 특별 보안군, 즉 '세쿠리타테(Securitate, Departamentul Securității Statului)' 를 조직했다. 친위대 역할을 맡은 보안군에게는 정규군에도 지급되지 않은 최신 장비와 높은 보수가 주어졌고별기군 이에 정규군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우셰스쿠가 체포된 후 즉시 총살된 것도 보안군의 반격을 염려한 탓이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의 처형 직후까지도 보안군의 지하요새는 건재했으며, 이들을 진압하는 동안에도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후 차우셰스쿠 시대에 태어난 고아들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큰 골치가 되었다.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 혼란 상황에서 고아원이 더이상 그나마의 재정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더욱 삶이 열악해진 아이들이 거리를 메우며 방황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차우셰스쿠는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즉시 도주를 시도했고 관저 옥상에 헬리콥터를 보낼 것을 요청해 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20], 조종사 바실레 말루찬 중령도 차우셰스쿠의 망명 계획을 껄끄럽게 생각했고 자신이 차우셰스쿠 부부의 독재정치에 대한 불만, 엘레나의 잔소리에 대한 불만 등이 많았기 때문에, 비행 중 일부러 기체를 요동치게 하면서 '반란군의 대공 사격을 받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헬리콥터 탈출이 힘들다고 판단한 차우셰스쿠는 육로로 이동하기 위해 착륙 명령을 내렸다. 안전한 곳에 헬리콥터를 비상 착륙시킨 말루찬 중령은 경호원들이 속임수를 알아채고 자신을 사살할 것을 우려해 곧장 소속 부대로 도망쳤다. 실제로 조종수의 증언에 따르면 엘레나가 자신을 무섭게 째려봤다고 한다. 차우셰스쿠 부부와 경호원은 도로에 달리던 시민의 차를 징발해 계속 도피하면서 은신처를 수소문하느라 바빴고, 사람들에게 계속 자신의 대의에 동의하는가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편인지를 꼭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군대들이 속속 등을 돌리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갈 곳을 잃어 우왕좌왕하다가 어느 산림 감시원들의 숙소를 발견해 그 곳에 은거하기로 했다. 하지만 감시원들은 차우셰스쿠 일당들에게 순종하는 척 하면서 혁명군 측에 몰래 차우셰스쿠 잔당들이 자신들의 숙소에 있다고 고발했고, 결국 23일 차우셰스쿠 부부는 도주한지 하루도 안 돼서 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4.1 처형 과정

체포된 이후에도 차우셰스쿠 부부는 자포자기 했는지[21] 군대의 총사령관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거나, 군인들이 먹는 식단을 가져다 주자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며 입에도 대지 않았고 이 지방의 특산품인 고급 빵과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엄청나게 희귀했던 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해 매 끼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그 요구들을 다 들어준 군인들도 대단하다... 차우셰스쿠는 건강 때문에 소금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고 항의했고, 설탕이 든 음식을 주면 각하는 당뇨가 있는데 왜 이런 걸 주냐고 아내 엘레나는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 놓았다, 또한 목욕탕 가는 것조차 거부해서 욕조를 갖다 주기도 했다.

그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관리하던 세쿠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차우셰스쿠 부부는 금슬은 좋았는지 갇힌 상황에서도 둘이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고 한다. 거기에 자신이 군중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게 해달라거나, 자고 있던 자신을 깨워서 텔레비전 방송국에 자신을 데려다 주면 100만 또는 200만 달러의 돈을 줄 수 있으며 달러를 주기 전에 가까운 마을 보이네슈티에 감춰둔 돈 수백만 레이의 돈을 준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세쿠 소령은 그토록 태양처럼 받들라고 교육받은 차우셰스쿠의 진짜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이 마을을 샅샅이 뒤졌으나 돈은 발견되지 않았다.

혁명정부는 차우셰스쿠 부부 체포 이전부터 그들의 재판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헌법에 의한 재판을 주장하였지만 혁명군부에서 "차우셰스쿠가 항소하여 살아있을 경우 그들의 추종자들이 역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있고, 그러면 큰 내전으로 변할 것이다. 결국 외국군대가 루마니아에 들어올거고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차우셰스쿠와 똑같이 처벌받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군법에 의한 군법 재판으로 그들을 처벌하기로 하였다. 판결도 내부적으로는 차우셰스쿠가 완전히 미쳤다는 증거 등이 나오지 않은 이상 무조건 사형에 처하기로 결론 내려진 상황에서 그들의 신병만 확보되면 바로 속결하기로 하였다. 그외에도 당시 차우셰스쿠를 지지하는 친위 세력을 두려워해 일찍 처형했다는 의견도 있다. 일단 세쿠리타테 같은 차우셰스쿠파와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고, 당시 혁명세력은 숨어있는 차우셰스쿠파의 저격이나 테러로 크게 고생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 재판을 위해 가던 사람이 총을 맞기도 했다.

이 페이지도 참고하자. 그의 몰락 과정이 꽤 자세히 나와있다.

차우셰스쿠 이후 집권한 리에스쿠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리에스쿠 정권이 차우셰스쿠 일가만 빠진 차우셰스쿠 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차우세스쿠 실각 이후에도 옛 공산당 정권 요인들은 대부분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차우셰스쿠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의 루마니아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대한 빨리 차우셰스쿠 제거하여 문제를 봉합하려 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참고할 것.

MBC뉴스데스크 방영 재판장면(3분)

198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한 작은 초등학교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비밀재판이 열렸는데 이 재판에서 검사는 "나는 개인적으로 사형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니므로 상관없다"고 하면서 사형을 구형했다고. 한국어 위키백과에 의하면 변호사까지 검사로 돌변했다고 한다. 차우셰스쿠의 변호사 카를로가 말하길, "당신 편을 들어줘야 하는 처지지만, 당신이 이 나라에 해 놓은 짓을 보시오. 편을 들어준다고 해결될 문제요? 당신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시오. 상식으로 누가 봐도, 아무리 당신에게 유리하게 설명해도, 당신이 이 나라 루마니아를 멸망으로 몰고 간 것을 부인할 수가 없소. 내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많은 사람을 담당했지만, 당신 같은 최악의 경우는 처음이요. 나도 당신을 포기했소." 얼마나 썩어빠졌으면 중립을 지켜야할 법정에서까지 대놓고 감정적인 의견이 나올 정도로 차우세스쿠는 그야말로 인민의 적이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누구도 자신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변호와 항소를 거부했다. 만약 항소하였다면 당시 형법상 최소 열흘 정도는 더 살 수 있었겠지만, 항소는 법정을 인정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항소조차 거부했다. 물론 항소하겠다 해도 당시 상황상 인정되었을지는 미지수.

그래도 변호는 해야 하니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사형만은 면하게 하려고 제안한 게 정신 이상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정신병이 인정되면 아무리 재판을 엉성하게 해도 사형만큼은 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권에서조차 정신 이상은 의무적인 감형 사유로 규정하고 있었다. 루시안 스타니악이 엄벌주의가 일반화된 공산권 시절 사형을 면한 것은 정신병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우셰스쿠는 이것도 거부했고 항소도 포기하여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런 엉성한 재판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은데, 차우세스쿠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공개적이고 명확한 재판으로 그의 악행을 두고두고 씹을 수 있게 정식 재판을 거쳐서 전세계에 그의 악행을 알린 후 사형에 집행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재판 직후 줄로 묶어서 끌고 나가는 과정도 가관이었는데 차우셰스쿠는 "무엄하다! 감히 날 줄로 묶으려 들다니!"라며 상황파악을 아직도 못했고 엘레나는 몸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며 난리를 피웠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권리 운운하며 포박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으나 끝내 꽁꽁 묶이고 말았다. 끝내 결박된 차우셰스쿠 부부는 흥분해서 병사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호통을 쳐댔다(...). 이때 엘레나가 한 말이 "난 너희들을 어머니로서 대해왔다!"였다. 그러다 결국 죽는다는 공포에 겨워 하소연했으나 병사 중 하나가 싸늘하게 "당신들을 도와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소."라고 일갈했다. 엘레나는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려 하다니!"라고 울부짖으며 끌려나갔다. 차우셰스쿠는 더해서 자신을 잡으러 온 혁명군들이 "인민의 이름으로 당신을 체포하겠소!"라고 외치자 그 말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유가 "내가 인민의 아버지인데 너희들이 무슨 자격으로 인민 운운한다는 거냐?"였다나. 차우셰스쿠를 총살한 병사들 중 한명은 "오늘 난 아버지를 죽였다"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The%2Bexecution.jpg

오후 4시 사형판결 1시간 반만에 차우셰스쿠 부부는 탈출할 때 입었던 값비싼 정장을 그대로 입고[22] 건물에서 끌려나와 담벼락에 세워져 총살형을 당한다. 이 후 총살형을 집행할 육군 제64공수연대에서는 기존의 사형집행 방법에 따라 부사관급 이상 소총수 열명에 실탄 다섯 발을 준비하여 사형을 집행하려 했다.

총살형을 일반 징집병이 집행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헌병대 부사관급 이상이 총살형 집행을 맡으며, 그마저도 실탄은 일부에게만 지급한다. 물론 현역 시절에 공포탄을 쏴볼 기회가 있었던 남성이라면 알겠지만 공포탄은 장약이 적기 때문에 실탄보다 반동이 약하다. 더군다나 탄피가 자동으로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과거 볼트액션식 소총으로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실탄을 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총살형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형 집행은 다 똑같이 가혹하고 부담스럽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참수형을 집행하게 되면 참수집행인에게 괜히 1건당 한화환산 1천만원의 큰 돈을 주는 게 아니다. 하는 일도 칼 한 번 싹 휘두르고 끝이며 소요시간도 길어야 10분인데 이렇게 큰 돈을 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군인들은 "나도! 나도 죽일 거야!"를 외치며 서로 자기가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아주 난리를 부렸고 결국 8명이 차출되었는데 그들 전원이 차우세스쿠를 죽이길 원하자 최종적으로 대위, 상사, 하사 계급의 군인 3명만 차출되었다. 부대측은 이들에게 규정대로 부부당 5발씩 총 10발만 지급하려 했지만 부대원들이 탄창 하나씩 갈기기로 약속하고 한사람당 탄창 2개씩 총 180발을 준비한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당시 처형 순간을 보도한 영상.
몬데그린으로 5분9초에 X발이라 들린다

자막버전

엘레나의 터진 머리가 끔찍할 정도로 나온 건 아니지만[23] 심장 약한 사람은 주의.

차우세스쿠는 재판에서 사형이 결정되자 눈물을 흘렸고 죽기 직전까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다가, 1절도 못 마치고 총살형이 집행되어 사살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터내셔널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절의 가사가 당시 상황과 완벽히 일치한다. '일어나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아/일어나라, 굶주림의 노예들아/이성의 불길이 분화구에서 타오르니/이것은 마지막 외침이 되리라/과거는 깨끗한 판으로 덮일지니/억압받은 민중들아, 일어나라, 일어나라/세상은 바야흐로 밑바닥부터 뒤바뀌고/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이 전부가 되리라 '. ...물론 이 인간이 부를 노래는 아니다.

처형 장면은 군인들에 의해 녹화된 후 프랑스 A2-TV[24]를 통해 전세계 언론을 통해 공중파를 탔다. 여담으로 미국에서 처형장면을 아침속보로, 그것도 무삭제 방영하는 바람에 이런 거에 민감한 어머님들에게 심대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다행히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조사 결과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에게는 약 120발의 총알이 박혔다고 한다. 검시의도 나름대로 즐기며 숫자를 센 듯 하다. 이 때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

그런데 부검 결과 차우셰스쿠의 경우는 총살 직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공포감에 그 정도 연령이었으면 충분히 일어날 만한 일이다. 그래도 시체에 신나게 갈겨댔겠지만(...). 그렇게 루마니아 국민들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면서 민주화를 쟁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그의 죽음을 기뻐하는 시민들에 섞인 한 여성은 울음을 터트리면서 "도대체 왜 차우셰스쿠를 그렇게나 쉽게 죽인 거냐?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을 천천히... 그리고 영원히 겪게 해야지!" 라고 했다고 할 정도니 차우셰스쿠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이 작자에 대한 집행을 끝으로 루마니아에서 사형제는 기존에 있던 사형수까지 감형하는 형태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대신 종신형으로 대체되었다. 민주화 직후 처음이자 마지막 사형집행인 셈.

총살형을 당한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체는 원칙대로 부검 뒤 가족에게 인도해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찢어진 텐트로 둘둘 말려 헬기에 실은 뒤 부쿠레슈티 교외의 운동장 한 가운데에 내려놓았는데, 시신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육군 수색대가 샅샅이 뒤져 다음날 아침 운동장 차고에서 시신을 찾아냈다. 하지만 누가 무슨 목적으로 시신을 그곳에 두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정부는 시신을 인도하려 했지만 가족이 풍비박산났기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자 그냥 공동 묘지에 매장하는 형태로 장례를 치렀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그런지 그것까지 규탄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차우셰스쿠의 처형 소식이 북한에 전해지자 김정일본방을 놓쳤는지 최단 시간 내에 처형 장면 비디오를 구해 오라고 명령했다.팝콘도! 이 때는 김일성이 생존중이었는데, 김일성은 루마니아 군대가 차우셰스쿠를 배반했다는 점, 그리고 소련이 이를 방관했다는 점에 상당히 충격을 먹었다고... 그래서 아들 김정일에게 하루빨리 군권을 넘겨 김정일이 군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남한과의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도 서둘러 추진하게 된다. 루마니아를 포함한 동유럽 공산권 붕괴에 대해 소련은 아오안이고, 미국은 갈수록 세계에서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기댈 언덕이 없어진 북한은 일단 남한만이라도 끌어들여 평화공존을 기치로 내걸면 어떻게든 체제 붕괴는 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꼼수를 부린 것.

덕분에 유럽 쪽의 북한 외교관들이 고생깨나 했다고.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이 장면을 본 김정일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반동들을 때려잡지 않으면 우리도 저 꼴이 된다."라고 부들부들 떨었다고 한다. 제 아비와 친목질 하던 작자가 분노한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져서 끔찍하게 살해당한데다가 자기도 국민들을 착취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니, 똑같이 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결국, 주석에서 설명함과 같이 김정일은 우리나라에게는 전보다 더 기만적인 화전양면전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북한 내의 반대파들을 더 무자비하게 숙청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덩샤오핑도 역시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봤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처형 비디오를 보면서 한참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물었고 공산당의 한 간부가 "반동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덩샤오핑"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라고 대답한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이 직접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국은 최고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걸 아는 양반이 천안문 사태를 일으켰나? 그래도, 차우세스쿠와 김정일보다 덩샤오핑이 인민들에게 많이 베푼 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뭣보다도 쟤네는 이 인간백정과는 달리 우상화는 하지 않았다

360px-Grave_of_Nicolae_Ceausescu_-_Ghencea_Civil_Cemetery_-_Bucharest_-_Romania.jpg
2010년까지 존재했던 차우셰스쿠의 가묘.

일련의 과정을 거쳐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신은 공동묘지 한 구석에 처박히듯 묻혔다. 보통 서양식 무덤은 대리석을 이용해 장식하기 마련인데 그의 무덤은 그냥 흙 봉분으로 되어있으며 얼마 전까지 잡초와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가 최근에야 위 사진처럼 깔끔해졌다. 비석도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세워졌다. 부부 매장도 허용되지 않아서 그의 아내의 묘지는 차우셰스쿠의 묘지에서 약 50m정도 떨어져 있으며 머리의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 되도록 묻혔다.

여러모로 독재자의 집권과 최후를 한 몸에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그의 처인 엘레나의 무덤 위에는 지금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구별이 안갔던 상황이었다.

mormant_nicolae_ceausescu_epochtimes_romania_com_35172300.jpg
그러나 차우셰스쿠의 사후 평가가 높아지면서, 지지자들의 청원에 힘입어 이 가묘는 나중에(2010) 다시 재발굴되었고, 감식팀의 감정 끝에 유골이 수습되어 이장, 정식으로 묘가 세워졌다. 위에 보이는 묘가 바로 그 차우셰스쿠의 묘지. 이장된 이후, 차우셰스쿠의 처형일이나 생일마다 지지자들이 몰려와서 꽃을 놓고 추모집회를 가진다고 한다. 그게 하필 성탄절과 겹치는 게 함정이지만 넘어가자. 아래 재평가 움직임 참조.

5 자녀들


왼쪽부터 발렌틴, 엘레나, 니쿠, 조이아,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사람들은 엄격한 통제와 세뇌에도 루머를 통해 차우셰스쿠 가족들의 행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발렌틴과 부모와의 갈등, 조이아 사건, 니쿠의 음주운전, 중매결혼 실패, 나이트클럽 여급과의 추문 등 모르는 것이 없었다. 다만 언론 자유와 정보의 소통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니쿠의 악행이나 조이아가 관련된 수많은 사건들이 부풀려진 면도 없지 않다. 차우셰스쿠의 세 자녀는 체제의 수혜자들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그래도 부모에 비해 니쿠는 빼고 두 사람 모두 개념인이라 충분히 불릴 만하다.

5.1 발렌틴 차우셰스쿠

valentin-ceausescu-04.jpg
Valentin Ceaușescu
1948년 2월 17일 생.

큰아들 발렌틴은 그나마 집안의 상식인이었다. 가족들과 사이가 나빴는데 그 이유는 발렌틴의 아내 이오르다나 보릴러가 반이 유대인 핏줄인 동시에 차우셰스쿠 정적이었기 때문. 그래서 차우셰스쿠 가족들에게 냉대를 받아 특권층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방 두개짜리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차우셰스쿠 사후 헌법에 의해 설립된 구국전선들의 행동대원에게 자진해서 투항한 발렌틴은 당시 이오르다나와 이혼한 후 중앙위원회 의원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차우셰스쿠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재판을 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이때 발렌틴은 자신이 부모인 차우셰스쿠 부부의 반대편에 섰다는 정당성과 어머니 엘레나를 증오했다는 사실로 맞서려고 했으며, 차우셰스쿠 사후에 발렌틴이 런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며 일했던 '원자 핵 물리연구소'도 그를 지원했기 때문에 결국 재판은 받지 않았다.

2015년 기준으로 차우셰스쿠 일가의 유일한 생존자인 발렌틴은 현재 핵물리학자로 살고 있으며, 그래도 아버지는 사랑했으나 어머니 엘레나는 증오했다고 한다.

5.2 조이아 차우셰스쿠

2-zoia-ceausescu.jpg
Zoia Ceaușescu
1949년 3월 1일 ~ 2006년 11월 20일

조이아의 경우도 발렌틴의 경우와 비슷하다. 수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을 때 조이아는 정권의 실체를 알고 역겨워 했다. 그래서 1974년 그녀는 가출을 했는데 이 가출이 "조이아 사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파장이 커지게 된다. 화려한 외출?

그녀가 가출하자 비밀경찰이 그녀를 찾기 위해 총동원됐다. 그녀를 찾기 위해 그녀와 친한 사람들을 모조리 가둬 그녀의 소재를 심문했다.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그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후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젊은 여성으로써의 조이아의 생활은 악몽 같았으며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었지만 결국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후 차우셰스쿠와 엘레나는 조이아에게 역심을 품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은 조이아와 친하게 지낸 수학연구소 일원들이 조이아를 심리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조이아에게 보헤미안 기질을 주입시켰다는 이유로 연구소를 해산시켜버린 뒤 연구원들을 다른 연구소로 분산시켰다. 조이아 사건의 충격이 루마니아 학계에 미친 영향은 가히 공포에 가까웠다.

결국 조이아 사건으로 약 200명이 넘는 능력있는 수학자들이 루마니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그러자 조이아는 인맥을 동원하여 수학연구소 일원들에게 출국비자를 얻어 주었는데, 이것이 차우셰스쿠 부부를 화나게 만들었다. 결국 부쿠레슈티 대학의 심리학과도 폐쇄해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이후 차우셰스쿠 부부와는 거의 데면데면하게 지냈고 차우셰스쿠 부부가 죽자마자 조이아도 체포되었으나 8개월 후 풀려났다.

그러나 조이아는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담배를 입에 대고 살았고 결국 민주화 이후인 2006년 57세라는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안습.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80년 미르체아 오프레앙이라는 공학자(당시 부쿠레슈티 공과 대학 교수)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5.3 니쿠 차우셰스쿠

media_141027717565871100.jpg
Nicu Ceaușescu
1951년 9월 1일 ~ 1996년 9월 26일

차우셰스쿠 정권의 후계자로 낙점되어서 별명이 "가족의 황태자"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별로 지도자 같은 면모는 없었다.

니쿠는 심한 음주고등학교 이후에는 플레이보이로 유명했고, 니쿠와 좋은 친구였던 사람들 중 하나는 악명높은 이라크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 후세인이었다. 끼리끼리 노네! 그는 또한 전 세계에서 도박으로 거액을 손실한 걸로 알려져 있었다. 여러가지 혐의로 인해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상기한 것처럼 개념차고 책임감 있는 모습도 많이 보여줬다는 증언들도 많았기 때문인지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 1996년 9월 26일 니쿠 차우셰스쿠는 간경화감옥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의 병원에서 4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25] 사망 후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묻혔다.

6 성격

워낙에 해괴한 짓들을 일삼고 인민의 고혈을 빨아서 자신의 사치를 위해 쓰거나 잔혹한 유혈진압도 많이 했기에 그가 머리가 좋고 많이 아는 사람인 줄로 알지만 그는 그런 사람과는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사람이었다. 20세기 초 최강, 최악의 독재자인 히틀러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 셈. 인간 히틀러는 인간 차우셰스쿠처럼 독재자 히틀러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는 어렸을적 문맹에 가깝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거기에 말을 심하게 더듬고 제대로 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간단한 전치사를 헷갈려서 못 쓸 정도로 무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어했다. 말더듬, 불투명한 전망, 그리고 모든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과거를 되살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차우셰스쿠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공식적인 보고서 하나도 읽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공산당 지식을 알기 위해 차우셰스쿠는 많은 시간들을 들여 공산당 관련 서적만 읽었으며 특히 공산당 기관지 불꽃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열독했다. 그런데도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고 주변 사람들은 증언했다. 어찌보면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라는 말은 이 작자를 보고 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독재자치고 그의 여자 관계는 매우 단순했다. 그가 공처가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은 차우셰스쿠는 엘레나 밖에 몰랐으며 다른 여자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실제로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4년 젊은 시절 동료였던 키부 스토이카가 슬픈 사랑을 못 이겨 자살하자 그런 일로 목숨을 끊을 수 있냐며 경멸하기까지 했다.

사실 굉장히 엽기적이거나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군 행위는 차우셰스쿠가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아내 엘레나가 저지른 일이었다. 그는 그런 아내에게 의지하고 또 무서워했다. 아마 그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공처가일 것이다. 최소한 그녀는 대중 앞에서는 충실한 아내였지만, 사석에서는 차우셰스쿠에게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했다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시간이나 약속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차우셰스쿠는 안절부절 못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긴장하면 항상 그랬듯이 말 더듬는 습관이 튀어나왔고 땀까지 흘렸다."고 한다.

또한 나쁘거나 엽기적인 행각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친절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몇몇 있다. 차우셰스쿠가 사냥을 갔을 때 머무르는 통나무집의 관리인은 차우셰스쿠의 뻔뻔스러운 충복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엘레나는 무척 싫어했다지만 차우셰스쿠는 좋아했다. 관리인 여자는 "차우셰스쿠는 정말 친절한(?) 사람이었지요. 한번은 비밀경찰견이 차우셰스쿠의 애견 코르부를 물어버렸어요. 불경스러운 짓을 한 개를 비밀경찰들이 쏴 죽여 버리자 차우셰스쿠는 몹시 화를 냈습니다. 또 한 번은 거실 벽난로에서 새어나온 연기가 거실을 꽉 채운 일이 있었습니다. 엘레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동지에게 독약을 먹이려 한다고 꾸짖더군요. 그녀는 나를 비밀경찰에 넘기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나서더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엘레나를 말렸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권력을 쥐지 않고 범부로 지냈다면 그냥저냥 동네 친구들에겐 잘하는 사람으로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차우셰스쿠의 독재 행각이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6.1 음모론 신봉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는 암이 발견되었을 때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 때문에 암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암에 걸리게 된 방법은 KGB가 루마니아 대통령 궁에 방사선을 쏘면 그 방사선이 자기 방의 문고리를 뚫고 방안까지 들어와서 자신이 암에 걸리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병맛 개그를 들은 사람들은 거의 어이없어 했으나 유일하게 이에 맞장구쳐주는 사람이 바로 차우셰스쿠였다. 맨 처음에는 차우셰스쿠가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와 오랫동안 친분이 있어서 그와 일부러 말을 맞춰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더 큰 신임을 얻어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야비한 술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차우셰스쿠가 저 이야기를 철썩같이 믿으리라는 것까진 몰랐을 것이다.

그는 문맹이었던 데다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철썩같이 받아들였고 이게 암살에 대한 망상에 시달리는 이유가 되었다.

차우셰스쿠는 해외여행 때에도 암살을 두려워하여 세균이로 인한 독살을 우려하여 인사하고 난 뒤 즉석에서 손을 닦았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가지고 다녔고, 식사 때마다 영양사와 감별사가 배석하였다. 차우셰스쿠가 먹을 음식은 소량을 먼저 연구소로 보내 검사를 거친 다음 24시간 동안 별도로 보관했으며, 선물받은 물건들을 다 뒤져서 확인하게 했다.

또한 그의 동료 스토이카가 자살한 이유가 소련에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다니거나, 괴이한 음모론을 설파해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했다.

6.2 일화

그래도 젊은 시절 투사의 면모가 있어 과거엔 그도 청운의 꿈을 품은 혁명가였지 않겠느냐...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생리적인 쓰레기'였다. 차우셰스쿠와 같이 생활했던 동료들은 위의 사람들에게는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었으나 아랫사람들은 무자비하게 괴롭혔으며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진 인간이었고, 부하나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악한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일례로 수감시절의 에피소드를 들 수 있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 동료 재소자 중 오스만이라는 사람이 심각하게 아픈 상태였고, 재소자들은 그를 위해 음식을 십시일반 모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그 음식을 차우셰스쿠가 중간에 탈취하여 먹어버렸다. 이를 두고 동료 재소자들이 차우셰스쿠를 몰아 세우며 비난하자, 그는 성장기 청소년의 생존권을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이에 재소자들은 크게 분노하여 그를 처참할 정도로 폭행, 이후 그는 말을 더듬는 버릇과 어눌한 말투, 잘 웃지 않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찍은 사진 중에서 차우셰스쿠가 활짝 웃는 사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점은, 그는 열렬한 사회주의 투사였던 그 당시에도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회의 약자인 프롤레탈리아를 지지하는 이념인 사회주의의 이념에 심취했었다면 감방의 약자인 오스만을 돕는 것을 주도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눈 앞의 배고픔에 못이겨 약자에게 돌아갈 몫을 갈취한 것.

공산권 국가들의 수장 중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그의 쓰레기 같은 인성을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나치에 맞서 파르티잔 활동을 하는 등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티토는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와 멧돼지 사냥을 나선 적이 있는데, 차우셰스쿠가 산탄총으로 먼저 멧돼지를 쐈지만 맞지 않았고, 티토는 백발백중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그가 달려와 자기가 잡았다며 멧돼지를 가로채려 들자, 티토는 "이봐, 당신의 총알은 땅에 박혀있을 걸?" 라고 디스하면서 멧돼지를 가져갔다(...). 이 일이 있은 뒤, 티토는 단지 공식 석상에서만 친한 척 했을 뿐 그와 사석에서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7 평가

루마니아 국내에서도 1989년 공산 정권 붕괴 후 국가를 파탄낸 역적으로 규정되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처벌되고 있으며 과거 공산권의 맹주였던 러시아나 기타 과거 같은 공산 국가였던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서도 평가가 안 좋다. 그나마 옛 소련이나 기타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은 독재 치하였다지만 상태는 좋았다. 소련의 경우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거기다 이들 국가군들은 한 집권자의 권력 독점을 제어하는 견제 장치도 그럭저럭 갖추고 있었다. 루마니아 같은 경우도 공산정권 수립 후 초기에 집권 지도자에 대한 견제 장치가 어느 정도 있었지만 1965년 차우셰스쿠가 집권하고 이후에 그가 지나친 실정과 정책 실패, 이외 다른 공산당 계파 세력들을 탄압, 제거하면서 그 견제 장치가 철저히 박살나버렸던 것.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노르웨이 등 냉전 당시 자유주의 진영에 속해있던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사악한 독재자로 대부분 비난을 받고 있다.

집권기 당시 뛰어난 탈소련 외교 정책의 수완으로 한때 서방에서는 소련의 자국 간섭에 대항해 독자적 공산주의 노선을 취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 함께 그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했으나[26]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 독재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 등 서방 세계 국가들로 망명한 루마니아인들을 통해 차우셰스쿠 정권의 인권 유린과 독재 정치,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그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서방 국가들은 경악하고 차우셰스쿠에게 등을 돌렸다. 거기다 1989년 차우셰스쿠 정권이 전복되고 냉전 체제가 종식되면서 이제는 서방에서도 그냥 나라 생으로 말아먹은 독재자로 인식하고 있다.

이원복이 90년 초반 어문각에서 낸 만화 <루마니아와 차우셰스쿠>(스토리만 맡고 그림은 다른 이가 그렸다)에서는 별명이 흡혈귀라며 신나게 깠다.

7.1 루마니아 국내의 재평가

"차우셰스쿠, 우리는 당신이 그립다." 유튜브 영상

충격적이게도 루마니아에서는 점점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 나치 놈팽이도 재평가되는 나란데 새삼스럽게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후, 들어선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러가지 혼란이 온데다가, 차우셰스쿠 몰락 이후에도 경제위기가 반복되고, 실업난까지 생겨나면서 독재체제를 그리워하는 여론이 높아진 것. 이미 민주화된지 10년도 되지 않았던 1999년에 60%나 되는 수치로 "차우셰스쿠 시절이 더 나았다"란 조사결과가 나온 바 있고(...) 2010년도 조사에 의하면 41%가 차우셰스쿠를 지지하며, 63%가 현재보다 차씨 시절이 더 좋았다고 보고 있다. 2014년에는 이 비율이 더 늘어나 무려 66%가 차씨체제를 긍정. 이는 러시아알바니아[27]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기대를 모았던 민주화가 번영을 약속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유 대신 일자리와 평등을 보장했던 독재체제에 대한 향수가 늘어나는 것. 사실 이런 터무니없는 향수에는 현재 루마니아 정치인들의 막장짓거리가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차우셰스쿠 이후 집권한 지도자들은 부화뇌동하여 표를 얻기 위해 무책임한 포퓰리즘과 성급한 민영화(신자유주의)로 인한 국부유출[28]로 일관하면서 루마니아 경제를 박살냈다. 또 부패인식지수는 3.8(2009)로서 역시 부패가 심각한 중국(3.6)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 나라는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몇년마다 한번씩 긴축을 실시하고 있으며, 1991년2009년에 다시 IMF 신세를 졌고, 2012년에는 커다란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더구나 민주화 이후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없었던 실업과 빈부격차가 생겨나서 루마니아 국민들은 더 고통을 겪는 중. 말하자면 예전에는 공평히 고통을 분담했는데, 이제는 본인의 재산에 따라 겪는 고통이 달라진 것이고, [29] 대부분의 서민은 상대적 박탈감을 더 느끼는 중. 아마도 경제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이상, 차우셰스쿠에 대한 재평가는 점점 힘을 얻어갈 듯 하다.

하지만 집권 기간동안에 저지른 그의 만행은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반인륜적인 중범죄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마니아 내에서의 재평가의 움직임만 보고 그에 대해 섣불리 환상을 갖거나 동경을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정확하게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재평가라기보다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재평가에 가깝다. 그리고 당시 사회주의 체제를 이끌던 사람이 차우셰스쿠라는 독재자였던 것일 뿐, 더 나은 지도자가 이끌던 사회주의 체제라면 당연히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독재자이면 어떠냐, 그래도 밥은 먹게 해주지 않았느냐 는 식의 논리는 경제위기 속에서 이곳저곳에서 유행하는 것이기도 하고... 공산권에서도 스탈린이 그런대상이기도 하고 (물론 그의 경제체제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체제>>>넘사벽>>>지도자. 그러나 적어도 스탈린은 차우셰스쿠처럼 국가 자체와 국가의 경제,산업을 말아먹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다르긴 하다.

8 참고 서적

  •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1. 맞는 말이다. 차우셰스쿠 같은 쓰레기 독재자 폭군은 500년 만에 한 명씩 밖에 나오지 않는다.
  2. 12월 25일에 죽었다는 것이다.
  3. 콘두커토르란 칭호는 사실 이온 안토네스쿠 때부터 썼던 (군사적) 독재관의 이름으로 두체영도자 같은 칭호과 비슷한 개념이다.
  4. 1965년 사망할 때까지 독재 정치를 펼쳤지만 차우셰스쿠에 비하면 천사표라는 평가와 차우셰스쿠와 별 차이 없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항목 참조.
  5. 심지어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6. 프라하의 봄 진압에 반대하며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진보파 알렉산데르 둡체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7. 당시 루마니아인 연봉 평균이 2만 레이였다.
  8.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는 무리하게 공업화 정책을 폈다가 진 빚이 무려 110억 달러였다고 나온다.
  9. 루마니아어가 과연 라틴계 언어라 그런지 바로 이해가 간다(...). 혁명 이후에는 Palatul Parlamentului(국회 궁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 이에 대해서는 술에 취해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11. 하지만 방출시 생산인구 감소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12. 물론 성병을 확인하고 치료를 하면 되겠지만, 차우셰스쿠에게 그런 데 신경쓸 머리가 있었다면 이렇게 욕먹지 않았다. 그리고 이 당시 배우자 이외에 대리모 대리부 지식을 가지고 있던 루마니아인도 없었고.
  13. 소련, 북한도 마찬가지고, 1970년대 한국의 불경기도 부분적으로는 박정희 시대의 중공업 과투자 때문이었다. 신군부가 이를 부분적으로 정기하고, 때마침 유가도 떨어지고 나서야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14. 정확하게는 1983년에 '돈 나중에 갚아줄 테니 제발 채무 좀 유예해주세요'라는 식으로 나섰던 적은 있었다.
  15. 같은 해에 죽은 건 사실이지만, 히로히토는 1월 7일, 차우셰스쿠는 크리스마스에 죽었다.
  16. 참고로 미국에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나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 같은 중남미 독재정부나 아시아의 여러 독재정권들을 안보상 문제나 정치사상, 경제적인 이유로 묵인했는데 이와 비슷한 이유로 차우셰스쿠 정부 당시의 루마니아와 친하게 지냈던 것이라고 보면 된다.
  17. 1 헥타르가 0.01km2이므로 약 2만 5천 km2. 대한민국 영토의 약 4분의 1이다!
  18. 역사적으로 이곳 트란실바니아 지역은 헝가리의 영토였던 지라 지금도 헝가리계 사람들이 꽤 살고 있다.
  19. 실제로 수천명 학살 운운까지는 명백한 구라였다.
  20. 북한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확증된 것이 없다. 북한 이외에도 소련,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쿠바, 모로코, 리비아, 앙골라 등 많은 국가들이 당시 국제 전문가들과 외신들 사이에서 망명 후보국으로 언급, 거론된 적이 있었다.
  21. 다비자 대위는 그녀가 미친 사람 같았다고 증언했다.
  22. 다만 서양에서는 미국을 제외하면 사형수에게는 사복을 그대로 입히고 형을 집행하는 것이 관례이기는 하다. 미결수라고 보기 때문이다. 죄수복은 사형수가 아닌 무기수부터 입는다.
  23. 목에 감았던 스카프와 피의 적절한 콜라보레이션(...). 차우셰스쿠 부부의 총살을 다룰 때 간혹 엘레나의 머리가 박살났다는 표현이 보이는데, 처형 후 시신의 입관 장면을 보면 이마에 총상으로 보이는 상처가 있지만 얼굴은 훼손되지 않았다.
  24. 지금의 프랑스-2TV(France 2)
  25. 을 즐겨마신 것이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다.
  26. 사실 차우셰스쿠는 그릇 면이나 인품, 성품에서 티토와는 절대로 비교가 안된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티토에 대한 모욕이며 오히려 티토한테 미안해야 할 지경이다.
  27. 러시아에서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절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은데 대한 반동으로 독소전쟁에서의 승리와 중공업화로 인한 경제성장을 스탈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이 많으며, 알바니아는 1990년대 피라미드 사업(...)에 의해 알바니아가 큰 혼란을 겪었던 반동과 빈부격차 문제에 대한 좌절감으로 인해 노년층을 중심으로 호자에 대해 좋게 평가하는 비율이 상당하다(...).
  28. 국영기업들이 모조리 매물로 나왔는데, 이는 외국자본의 먹잇감이 되었다. 민영화된 국영기업을 장악한 외국기업들은 멋대로 가격을 좌지우지하며 이윤을 독식했다.
  29. 웃기게도 역도 성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