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Five-Year Plan
사회주의 국가나 개발도상국들의 국가주도 경제 발전 계획에 주로 붙은 계획명. 소련의 스탈린이 시행한 것이 원조로 알려져 있고[1], 대한민국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김영삼 정권 시절까지 이러한 계획이 추진되었다.
2 소련의 국민경제 5개년 계획
2.1 스탈린주의 경제개발
우리는 자본주의 열강에 한세기에서 반세기 이상 뒤처져 있다. 10년안에 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주의 조국의 미래는 없다. 그들을 따라 잡을 것인가 그들에게 잡아 먹힐 것인가. (1931년의 연설)[2]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역사발전의 원동력은 생산력 향상이다. 따라서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생산력을 증가시키는게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3] 이에 그는, 1928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정부의 모든 행정력을 동원함으로써 철강, 전기 등의 중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당시 대공황으로 전 세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은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독일과 일본에서도 벌어진 일이었지만, 소련은 스케일이나 범위, 강도에서 독일과 일본을 훨씬 능가했다. 결국, 소련은 프랑스, 영국, 독일을 추월하고, 1938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된 농업국가가 15년 만에 발전된 공업국가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다.
스탈린 주도의 경제개발은 단순한 총생산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소련 경제의 체질이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에 그 중요성에 있다. 더 나아가 스탈린식의 경제개발은 소련의 상하부 구조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사실 러시아는 덩치가 크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못해도 5강(20세기 초반까진 영국+프랑스+독일+미국과 함께)에는 꼭 드는 나라였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산업은 농업이었으며, 공업의 비중은 매우 낮았고, 사회는 봉건제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후진 농업사회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제국은 20세기 들어와서도 그 덩치와 국력에도 불구하고 초강대국으로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명분하에 러시아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제정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없었고, 문맹율은 90%에 육박했지만, 스탈린 집권기간동안 교육기관의 확충으로 문맹율은 1%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광범위한 지식층이 생겨났다. 또한 제정시설 러시아의 과학기술은 유럽본토에 비해서는 2류로 간주되었고, 연구기관이나 교육기관 모두 형편 없었으나, 스탈린 시절 소련의 과학기술은 뿌리를 내리고 일취월장하여 20세기 중반에 가면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스탈린 덕으로 소련이 20세기 후반에 미국과 맞장뜰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5] 소련이 독소전쟁의 상흔이 가시기도 전인 1950년대 스푸트니크와 보스토크로 우주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스탈린 시절에 키워놓은 중공업과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전쟁으로 소련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으나 종전 3년 만에 경제를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시킨다. 그가 죽은 50년대에도 소련의 GNP 경제성장률은 평균 5.8%.[6] 소련의 국민소득 대비 투자율은 28%로 아주 높은 수준이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도 나중에 국가 주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소련과 아시아국들의 성장에는 비슷한 면이 많지만, 아시아국들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잘 이용한 반면, 소련의 경우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것이기에 이 시기의 소련의 경제성장은 더더욱 경이적인 것이다.[7] 이후 박정희가 "5개년 계획" 등을 벤치마킹했다.[8] 김일성도 역시 중공업화를 신나게 추진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중공업화 정책은 6.25이후 1960년까지 연평균 20% 이상의 경제성장을 한 이후로 망했어요.[9] 소련의 공업화는 소비재 위주가 아닌 중공업이라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데 북한 같은 작은 나라에서 수출목적으로 많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수입대체로 자력화 목적인데 그런 생산력 수준으론 경제적 생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 김일성 당시에 경제막장의 싹 이 보였지만 일단 90년대 초반까지는 아사자가 없었는데 김일성 사후부터 수십만에 달하는 아사자가 발생하고 수백만명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황장엽을 포함한 나이가 지긋한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은 천하의 개쌍놈으로 욕하지만, [[[김일성]]에 대해선 그다지 비난의 강도가 심하지 않다.]
2.2 과학계 우대
이로인해 과학자들도 대접을 받았다. 대우가 훨씬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푸짐한 연구비를 타내 여러 최신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로켓 연구가 대표적인데, 현대 로켓의 아버지였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같은 경우 러시아 제국 때는 지나치게 공상적인 연구때문에 학계에서 푸대접을 받았지만, 소련 성립 이후에는 연구의 중요성을 알아본 소련 정부의 적극지원을 받게 되어, 소련 공군사관학교가 생겼을 때 창립 교수가 되었고 장례식도 국장으로 치뤄졌다.
비록 과학계에도 대숙청의 칼날이 덮치긴 했으나, 심지어 체포당일 처형되던 많은 다른 분야의 인재들과는 달리, 숙청대상이 된 많은 과학자들이 사형을 면할 수 있었고, 굴라그에 가지 않고 훨씬 편한 전용감방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일류신이나 우주개발의 책임자가 된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바로 이 케이스.
레프 란다우라는 한 유대인 물리학자는 서슬퍼렇던 대숙청기간에 "스탈린 독재는 히틀러와 다름 없다"고 말했다가 NKVD에 체포되어 반동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재능을 아낀 대물리학자였던 표트르 카피차[10]가 스탈린에게 "쟤 죽으면 나도 그만두겠음"이라고 직접 위협 편지를 썼고, 스탈린이 베리야에게 명령해 감방에 갇혔던 그를 석방하였다. 란다우는 결국 196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타냈고, 소련은 하마터면 천재 물리학자를 잃을 뻔했으나, 스탈린의 과학자 사랑으로 란다우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2.3 그러나 인민을 갈아넣어 만든 공업화
그러나 저런 초고속 성장을 밀어붙이기 위한 인민들의 희생은 너무나 어마어마했고, 인민들의 희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특히 농업 정책에서는 저 닥치고 밀어붙이기가 잘 통하지 않았고, 집단화의 부작용 때문에 결국 소련은 망할 때까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뭐, 그래도 국가가 안정된 다음에는 식량을 수입해서라도 국민들이 식량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하기는 했다.
집단화 직전의 소련의 농업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이 강력히 추진한 신경제정책(NEP#s-2)에 의해 농업부분에서 상당부분 자본주의적 요소가 도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은 실제로 농민들에게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스탈린도 처음엔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11] 농민들은 고무되어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농업생산량도 증대하고 부농(네프만(NEPman)/쿨라크)[12]도 생겨났으나, 문제는 다른 부문에 비해 그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그 부산물로 생긴 부농들은 정권의 위험요소였다. 사회주의 이론상 부농들을 그냥 놔두는 건 모순되었고 [13] 자연스럽게 추진하면 5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는 공업화 추진을 위해선 "내가 아니면 안된다." 생각한 스탈린은 1929년 계급의 적 쿨라크 박멸을 선언한다.[14]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잉여를 모조리 공업생산에 투입할 목적으로[15] 전국의 모든 농토를 소프호스와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으로 재편하는 강제적인 농업집단화가 행해진다. 해당 지역마다 농민집단의 상위 4~5%의 쿨라크를 때려잡으라고 할당량(?)까지 내려온다. 실제론 상위 15%~20%에 해당하는 중농까지 때려잡았다.
어쨌든 자기 땅을 잃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16] 초기에는 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을 하였고, 그게 통하지 않자 아예 종자를 태우거나 혹은 세마리 이상 가축을 가지면 어차피 쿨라크로 몰리거나 몰수되니 가축을 굶겨 죽이거나 도축해서 숨기는 등의 태업을 하였다. 그 결과로 농기계 역할을 하는 가축과 퇴비의 부족으로 다음해 흉년크리로 이어졌고 심지어는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대규모의 농민 반란이 일어나서 군대가 출동하여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연방에서 최소 700만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인구학적 타격은 2차대전 전에도 통계치에 수정을 가할 정도라 대기근의 여파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서방에선 1930년대 후반 소련의 기존 인구 증가 속도론 1억8천800만이 넘어야 되는데 2천만 명 정도가 모자르자 희한하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17] 기존의 이에 대해 정권을 잡았던 스탈린의 책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것이 농민반항을 억압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혹은 그저 자연재해와 행정적 문제로 인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대체로 서방측 학자들은 전자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후자를 주장한다. 스탈린과 소련 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연재해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전 1920~1921년 적백내전 직후 기근에 이은 발진티푸스로 1000~1100만명 정도 죽은 참사가 근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에서 굶어죽었고 우크라이나 기근은 농촌에서 굶어죽었다. 강제 공출로 도시는 상대적으로 멀쩡하고…….[18] 1932년 곡물 생산은 1930년보다 20%가 감소한걸로 추정하고 가축수는 1929년 기준으로 1935년엔 절반에 불과 했다고 한다. 명백한 인재다. 이러한 삽질은 이념상 이유로만 단순히 농업집단화를 추진한게 아니라 공업화 추진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는데 모자라는 외화를 식량 수출로 땡기기 위해서 농촌에 공출량을 늘리는데 개인적으로 갈취하기보다는 집단농장에서 공제하기 편한 사정도 있었다.
결국 이런 삽질들은 반세기 뒤인 80년대 소련 농업인구는 전체의 22~23%, 미국 농업인구는 전체의 4~5%인데도 미국은 수출 잘하는데 소련은 자기 수요도 안되었다라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물론 기후 탓도 있다. 러시아의 최남단이 미국의 북쪽 지역이다.(...) 그러나 러시아도 추운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남쪽 지대에 농사가 매우 잘 되는 비옥한 땅이 있고[19] 소련은 유럽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라는 남캅카스 지역과[20] 나름대로 농사 잘 되고 자원도 풍부한 흑토지대인 우크라이나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보면 결국 당시 소련 정부가 농업 계획을 잘못 수립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소련 농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농업 계획을 수립할수립할수립할.
그러나 어쨌든 당시의 소련 인민들의 엄청난 희생은 헛되지 않아서 1960년대부터는 소련도 그럭저럭 살기 괜찮은 나라가 된다. 냉전 이후 미국의 반밖에 안되는 경제로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하면서 국가 재정의 태반을 군사부분에 밀어 넣기는 했어도, 소련은 북한과 같은 막장국가는 아니었다.[21]
1960~1980년대의 소련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1년에 3주간의 유급휴가, 그리고 차례를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22] 월봉급 10%가 넘지 않는 임대료를 받는 국영 임대 주택. 그리고 소련 전체에서 최저/최고 봉급차는 6배에 불과했다. 참고로 현재 미국의 경우는 수천배가 넘는다.
문제는 이런 좋은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성의 혁신이 제자리걸음을 걸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인간은 이기심의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스탈린 시절 잠시였고, 잘하나 못나다 똑같은 봉급을 받으니 게으름피우는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1960년대부터는 생산성 하락 방지를 위해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기도 하였지만 어차피 치명적인 실수정도를 하지않는 이상 짤리지는 않기때문에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저서인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이런 현실을 개탄하면서 이들이야말로 사회주의를 좀먹는 반동이라고 비난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급진적인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치밀한 계획없는 시장경제 도입은 유통-배급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렸고, 그로 인해서 인민들의 삶은 오히려 하락일로를 걸었다. 급기야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일부 공화국들이 독립하기까지에 이르자 보수파들이 고르바초프를 끌어내리려던 쿠데타를 일으켰다 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보수파들이야 막나가는 나라를 걱정했겠지만, 사회주의적인 부작용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소련체제를 유지하려고 해도 얼마간 연장할 따름이었음은 명약관화. 그러나 그 이후에 집권한 보리스 옐친때에 와서는 단순히 삶의 질이 하락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구 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부정부패는 이전보다도 더 판치는 막장자본주의를 겪어봐야했다, 푸틴때는 어느정도 경제가 재건되면서 복지도 다시 확대하였지만 복지제도의 수준은 소련시절에 못미치기때문에 많은 러시아인들은 적어도 삶의 질의 면에서는 소련 시절이 현재보다 나았다고 이야기한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노선과 그 저항으로써 보수파의 쿠데타에도 여러 관점이 있는데, 이중에는 아예 당시 소련은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기여한 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공산주의적 이상이 완성되는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었는데, 그 과도기적 문제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인 고르비가 설레발을 쳐서 다 말아먹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있다. 한국에서도 대학 교수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막장 종북주의자들이 할 주장 같지만 걔들은 북한밖에 몰라서 소련은 관심도 없으며, 애시당초 북한은 출발만 공산체제지 실제로는 전제왕정이었으니 해당사항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주로 소련 말기의 개방기에 유학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한국에서 대학 다니려면 부모 등골을 빼먹어야 하는데 소련에서는 학비가 공짜일 뿐더러 대학생은 공부하는 게 일이라고 월급까지 주는 체제에 매료돼서 눈에 뭐가 좀 씌인 것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은 듯. 어쨌거나, 위 단락의 내용처럼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인들의 삶의 질은 소련 시절보다 훨씬 열악하고, 그나마 좀 나아진 것도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한 뒤의 일이다.
2.4 중공업 우선주의에 대한 후세의 평가
급진적 공업화를 위한 농업 희생이 불가피했다는 견해도 있다.[23] 이게 꼭 소련의 경우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국가 주도의 고속 공업화를 추진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농촌과 농업이 희생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공업화를 위해서는 국가의 자원을 공업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수 밖에 없고, 공업 노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일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도시에 밀집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 생산한 식량을 싼 값에 도시에 공급해야 하니까... 스탈린 정권 당시의 소련이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토지를 국유화해서 이런 문제점이 크게 두드러진 부분은 있지만, 다른 나라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24]
이렇게 중공업 우선주의는 인민 생활의 저하 등의 많은 문제[25] 를 야기했으나 소련은 안보적으로 이에 우선순위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세력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외국군들이 러시아 땅에 들어와서 혁명을 방해했기 때문에 이런 강박관념은 허상이 아니었다. 1920년대 초엔 폴란드에 쳐발리면서 붉은 군대의 현대화에 목말라 있기도 했다. 하여튼 중공업 투자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의 승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못지 않게 기계화가 되어 있어서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에 승리할 수 있었다.[26] 실제로 1920년대에 투하쳅스키가 붉은군대의 현대전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전술에 필요하다 주장한 수만대의 전차, 장갑화 차량과 항공기의 요구는 당시 소련의 공업력 수준으로 불가능했고 스탈린의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시에 소련의 생산능력은 달성하기 어려웠다. 게오르기 주코프도 공업화가 아니었다면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라며 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여하간 이런 닥치고 밀어붙이는 스탈린의 경제를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스탈린과 대척점에 선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처하는 IS(국제 사회주의) 등의 소수 시각인데, 일리가 없는 시각도 아니지만[27] IS 자체는 좌파내에서도 극좌 모험주의라고 비판될 정도로 급진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지구상에 존재한/했던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을 정부가 자본가인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마찬가지 이유로 북한도 자본주의 국가로 본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친북이 아닌 반북이 된다.
3 대한민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경제계획(대한민국) 참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 | 1962년 1월 13일 | 1966년 |
제2차 경제개발계획 | 1967년 | 1971년 |
제3차 경제개발계획 | 1972년 | 1976년 |
제4차 경제개발계획 | 1977년 | 1981년 |
제5차 경제개발계획 | 1982년 | 1986년 |
제6차 경제개발계획 | 1987년 | 1991년 |
제7차 경제개발계획 | 1992년 | 1996년 |
- ↑ 출처 바람
- ↑ 정확히 10년후 독소전쟁이 발발했고, 10년간의 무자비하게 밀어붙인 산업화로 나치독일에 승리했으니, 스탈린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 ↑ 대부분의 개발독재자들처럼 기술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경제개발에 큰 열의를 보였다.
- ↑ 미국이 영국의 공업생산을 추월하면서 세계1위의 총생산 국가가 된게 1870년대였다. 그러나 1차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강대국의 하나였지, 초강대국은 아니었다.
- ↑ 소련은 스탈린 이후 G2로 평가받은 바 있지만, 러시아는 그 이전이나 이후로도 그 위치에 이른바가 없었다. 스탈린시절과 그 사후 40년 정도가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보여준 가장 전성기였다. 19세기에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당시 양대 초강대국은 프랑스와 영국이었지, 러시아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신세계에 쳐박힌 듣보잡국가였고...현재 냉전시절 소련의 위치를 가질 수 있는 나라로 가장 먼저 꼽히는 나라는 러시아가 아니라 중국이다. - ↑ 60년대까지도 소련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대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한다.(70년대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3.7%였다.) …그래도 소련은 붕괴되기 직전(1990년)에도 한국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높았다. 1990년 당시 소련의 1인당 GNP는 9300$ 대였지만 한국의 1인당 GNP는 5800$ 대였다. 지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의 반밖에 안되는 러시아를 보면 소련보다 얼마나 몰락했는지 알 수 있다.(이걸 역으로 뒤집어 본다면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했을때 부작용이 심각했다는 얘기도 된다.) 덧붙여 저 당시 서방의 국민소득은 1만달러 ~ 2만달러였다.
- ↑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소련이 해외 시장이 봉쇄된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인구가 있었고 드넓은 땅에서 자원이 쏟아져 나왔다. 또, 소련은 혁명과 내전으로 잿더미가 되기 이전 제정시절에는 GDP만 따지면 프랑스보다도 더 높은 세계 5위였다. 유럽에 비해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선진국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예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우리나라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또, 내전으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것은 맞지만 원래 역사적으로 그런 쑥대밭 국토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GDP 성장률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2차대전 이후 50~60년대의 전세계가 GDP성장률이 쩔었던 것은 전후 수습의 탓이 크다.
- ↑ 기타 유사성에 대해서는 이정우 교수의 이 글 #을 참고할 것.
- ↑ 사실 이건 소련-중국간의 갈등과 소련의 붕괴에 따른 석유 수입통로 봉쇄 등이 원인이긴 했다. 하지만 체제 내의 무능으로 동력을 잃은 것도 역시 사실. 사실 남한이 그러했듯 북한 역시 "닥치고 광물이나 파내시고 내수나 잘 돌리시죠"라는 식으로 소련의 간섭을 받고 있었기에 중공업화 자체는 타당하긴 했는데... 중공업화 자체는 좋은데 원조 없이는 살 수 없던 경제였던지라 망했어요. 실제로 소련이 망하고 북한은 싸게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공급처와 물건 사주는 판매처가 없어져 찰지게 망했고 90년대 고난의 행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 ↑ 197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 물론 이후에 부하린은 농업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숙청되었다.
- ↑ 쿨라크는 단순히 부농이란 뜻보단 계급의 적으로 통했다.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건 아니고, 제정 러시아 시대 때에도 반동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칭했고 적백내전 당시 붉은 군대에 식량을 숨기거나 병력 제공을 거부하거나 백군과 내통하는 부농들을 뜻한다. 쿨라크 판정 기준도 한심한 게 잘산다는 기준이 자기땅에 도와 줄 일꾼을 둘 이상 쓰거나 가축이 3마리 이상이면 부농이다.(1927년 소련 재무부 기준) 나중엔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으로 폴란드인이면 반드시 쿨라크다 란 소리도 나왔다.
- ↑ 부하린도 집단농장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속도 조절을 하자는 것.
- ↑ <러시아 역사>(История государства и народов России) (신아사) 문명식 번역.
- ↑ 다만, 농촌의 잉여 역량을 도시로 흡수하는 과정 자체는 공업화 과정을 거친 모든 나라가 겪은 과정이다. 공업 지역에 밀집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부양할 식량이 필요한 동시에, 농업 구조를 개편해서 농업의 노동력 효율을 높임으로써 생기는 잉여 노동력으로 공업 노동력을 충당해야 하니까... 멀리는 인클로저 운동이 이러한 공업을 위한 농촌 착취의 효시로 꼽히고, 가까이는 60~80년대의 한국에서도 추곡수매의 저가정책을 통해 농촌 착취는 일어났다. 다만, 초고속 공업화로 인한 농촌 공동화가 지극히 격심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국에서도 스탈린 당시의 소련같은 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 ↑ 이 부분은 카를 마르크스도 농민의 소 부르주아지적 특성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공장 노동자야 어차피 공장은 자기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월급 받으면서 일한 것이니 국유화가 되건 말건 큰 불만이 없지만 농업은 가족이 소유한 땅을 가족 단위로 경작할 수 있으니 집단농장화를 곧 자기 땅을 빼앗긴다고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농민들에게 자신이 농사지을 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야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자 조직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땅과 자유.
- ↑ 니얼 퍼거슨(하버드 교수) 著 <증오의 세기>
- ↑ 이 당시 농담으로 '볼셰비즘(20년대)와 공산주의(30년대)의 차이는 볼셰비즘은 도시에 식량이 없고 공산주의엔 지방엔 식량이 없는 것' 이란 소리도 나왔다.
- ↑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도 그 해 러시아 농사가 흉작크리가 겹쳐서 전 세계 곡물가가 올랐기 때문이다.
- ↑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영토이고 남캅카스는 현재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구성되어 있다.
- ↑ 사실 북한이 이상할 정도로 막장인거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오일쇼크와 외채문제때문에 휘청거렸지 그 이전에는 고성장을 기록해서 제법 사는 편이었고, 동독은 80년대에도 한가정에 자가용 한대정도는 보유할정도로 사는편이었다. 문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공산국가는 북한인데 북한의 경제력이 90년대 이후에 막장테크를 탔고, 그 여파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있기 때문에 소련같은 다른 나라도 죄다 경제가 막장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근데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닐텐데? - ↑ 신혼부부들은 꽤 오랜 시간을 단독주택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려야했고, 배정받기 전에는 한국처럼 여러 가구가 단칸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했다.
- ↑ 대체로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저렇게 생각하며, 푸틴도 저런 식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
- ↑ 당장, 한국의 경우에도 60~70년대 중공업화 기간을 거치면서 농촌이 거의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공동화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영국도 산업 혁명 당시 농촌의 붕괴로 인해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이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는 문제를 겪었다.
- ↑ 미국인 기자가 방문하고선 강철 생산 19톤당 인민 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철생산을 위해선 베르됭 전사자 (약 70만)정도 사람이 희생 되었다고 추정한 것이다.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 ↑ 냉전 시절에 한국에서 독소전을 설명한 자료들에서는 이 부분은 빠지고 소련군을 단지 물량으로만 밀어 붙이는 야만적 군대로 묘사하곤 했다.
- ↑ 스탈린 시기에 도입된 노동영웅제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회사에서 쓰는 우수사원 모범사원제도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