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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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프는 1929년에서 1933년까지의 지역별 인구감소율 표.

1 개요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 Голодомор
영어 : The Holodo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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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은 시체 옆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지나가는 행인. 어디 산간 벽지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당시 행정수도인 하르키우(하리코프) 에서 1933년에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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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사진이 찍히기 불과 2년 전의 하르키우의 풍경.

1932년~1933년소련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이다. 기록이 부실하여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예전 연구 결과들이 주장하는 피해자 수는 180만부터 1200만 명까지 다양했다. 그러다가 240만~750만 명으로 피해자 수의 범위가 좁아졌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과 맞물리는 까닭에 정치적으로 계획된 대기근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비슷한 병크로서 마오쩌둥대약진운동을 꼽을 수 있겠으며 피해 규모로는 대약진운동 쪽이 월등하다. 하지만 정책상 실수가 명백했던 대약진운동과 달리[1], 이쪽은 계획된 탄압이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학살에 확실히 무게를 두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여전히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기 위해 기근을 유발시켰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수정주의적 학파에 속한다. 이들의 주장이 인용되는 경우는 많은 경우 민족주의나 반러/반소적 선전을 위한 것이다.

우크라이나어로는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라고 부르며, 의미는 기아로 인한 살인(Killing by hunger)이다.

2 과정

소련의 스탈린은 신경제정책(NEP)으로 느슨해진 식량 생산으로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자, 사회주의적 집단화 정책을 통해 통제를 극대화하고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려 했다. 하지만 자기들이 일군 농사가 자기들 손이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넘어가게 되니 자영농들이 당연한 수순으로 반발했고, 따라서 집산화 자체도 느렸을 뿐만 아니라 곡물의 생산량도 당국의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전통적으로 자영농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집단화 정책과 함께 곡물 생산량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쿨락(부농)들을 소련 정부가 때려잡기 시작하자 생산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집산화 정책이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재앙적인 효과를 초래하게 되자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곡물 수탈 계획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자 했는데, 집산화로 워낙에 농업 생산력이 망가져버린 까닭에 우크라니아의 경우 수탈량을 원 계획에서 3분의 1까지 줄였는데도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축업 문제 역시 심각했다. 가축을 기르는 체제가 갑작스레 집단화되자, 농업지식이 전무했던 공산당원들은 온갖 문제에 부딪쳤다. 거기에 사료도 부족했고 날씨마저 돕지 않았다. 그리고 또 원시적인 농업에서 밭을 갈던 말 등이 기아로 쓰러지면서 다시 파종 등 농업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기근이 참혹했던 돈 강 유역에서 자란 러시아 작가 숄로호프는 그 군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말 그대로 "남 줄 바엔 잡아먹자"였다. 먹고 죽자!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Gremyachu Log)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種牛)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 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약 200뿌드[2]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별별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을 죽였다. 그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꾹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M. 숄로호프, 뒤엎어진 땅. (M. Sholokhov, The Soil Upturned, 영어본, Moscow 1934), 152면)

이 대재앙으로 인해 1931-33년 사이 소련 전역에서 식량 부족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는 사망자는 700만에서 1100만으로 추정된다.[3] 기근에 이은 전염병까지 포함이며 이와 별도로 200만명이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로 추방 쿨라크로 몰려 350만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한걸로 추정한다.

한편 우크라이나 법원에서는 이 대기근이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학살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종 청소였는지, 아니면 소련 농민들을 손봐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유도된 대기근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스탈린이 저지른 정책 실패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도와도 관련이 있어서 반러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소련의 인종 청소 시도라고 법적으로 명시되었다가, 친러파가 집권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해마다 공식 입장이 달라지고 있다.

3 원인에 관한 고찰

3.1 스탈린이 고의로 일으켰다는 학설

우크라이나, 그리고 그 외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집단살해로 인정한 국가들에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이후 독립되어 재합병될 때까지 볼셰비키와 크게 갈등했다. 일단 국가 자체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결과에 따라 독일 제2제국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적백내전 당시에는 백군의 주요 군벌의 기지가 되었고, 합병 자체도 소련군의 침공으로 인해 서류상으로는 자발적으로 합병되었다.

애초에 벨로루시의 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의 소러시아인, 러시아의 대러시아인으로 어렴풋이 나뉘어 있었던 루스계 민족들을 완전히 나누게 만든 것도 러시아의 탄압 같은 병크가 작렬하여 양국의 국민이 스스로를 그냥 러시아인으로 생각하지 않게 한 결과로, 이는 소련이 해체되었을 때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하게 만드는 주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단순한 민족 전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나키스트 성향의 농민군 역시 존재했기에 단순한 민족 갈등이나 과거 이 문서에서 있었던 일제강점기와의 단순 대입은 무리가 있다.

집단화 정책에 대한 저항이 가장 심한 곳도 우크라이나였다. 후에 스탈린이 "독소전쟁보다 농민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다"란 표현을 하게 할 정도의 반항을 했으며, 그 방법도 집단화로 뺏길 자기의 재산을 미리 파손 아군에게 청야전술? 하는 것이었다. 당장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육류와 낙농, 채소 같은 농산물의 생산이 급감하여 1960년대에 흐루쇼프"아직도 계란 생산량이 대기근 이전보다 못합니다"란 말을 할 정도였다.

또한 대기근 때문에 원래 수탈량의 1/3만 걷었다고 하는데 수탈량 산정 자체가 과도하게 높았다. 뒤늦게 1/3으로 줄여도 현지 주민들에게 먹을 식량이 없어지는 셈. 게다가 소련의 경우,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 소련군 식량의 대부분을 감당했기 때문에 다른 곳과 달리 철저하게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 치고 누구든 군대를 굶기려고 하지 않는다지만,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침략군을 먹여살리는 셈이니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한 홀로도모르가 일어나기 전에 스탈린 정권이 농촌이 우익적인 풍토를 지향한다며 이를 배격하는 사건이 벌어진적이 있는데, 대기근이 발생할 당시 도시와 촌락 사이에 엄청난 사망자 차이가 있었던 등의 이유로 고의적 방치라는 주장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정책이 실패했으면 시정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소련 정부에서 최소한의 대처도 마련하지 않은것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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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파란색으로 칠해진 국가들은 홀로도모르를 집단살해로 인정한 국가들이다.

3.2 반론

대기근의 책임이 소련 정부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당시 소련 정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이와는 별개로 따져야 할 문제인 것이다. 농업 집단화가 농업 생산력에 타격을 주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기 위해서 시행된 정책인지, 아니면 공산주의적 경제원칙에 따라 경제구조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정책 실패인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소련 정부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대기근을 일으킨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근거 제시가 필요한 일이며, 이 근거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소련 정부의 책임임을 주장하는 근거와는 별개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상기된 바와 같이 동일한 러시아 민족이 백러시아인, 소러시아인, 대러시아인으로 분화된 것은 러시아의 탄압 때문이라는 관점 역시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러시아인, 즉 동 슬라브족이 대러시아인과 소러시아, 백러시아인으로 분화된 것은 몽골 침략 이후 키예프 루시계의 공국들이 대부분 몰락하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시에 해당하는 지역이 러시아계 국가의 영역에서 벗어나 폴란드 등 서구 세력이나 이슬람계 칸국들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시작되어 수백년에 걸쳐 진행된 일이다.

물론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탄생한 러시아 제국이 이런 동 슬라브인의 영역을 통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동질감을 심어주지 못한 것은 러시아 제국(및 그 후신인 소련)의 책임이 맞다. 하지만 동 슬라브인의 분화는 러시아라는 국가가 탄생하기도 전부터 시작된 일이며, 백러시아인과 소러시아인은 러시아 정부의 병크 때문에 스스로를 러시아인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원래 자기들이 러시아인으로써 러시아의 일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집산화 정책을 진행하던 소련 정부의 의도 자체가 학살은 아니었다는 반론은 일단 크게 세 가지가 있다.

3.2.1 도시화를 위한 정책이었다

첫 번째로는 소련 정부가 도시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농촌 경제를 붕괴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정부가 의도한 것이든,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졌든 산업혁명을 위해 필요한 도시 노동자 공급을 위해 농촌 사회가 붕괴되는 과정이 필요했다.

영국의 경우 인클로저 운동이 그것에 해당된다. 토지의 사유화와 그에 따른 농업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농촌 인구가 급감했다.

대한민국에서도 과거에는 저곡가 정책이 농가에서 쌀을 비싸게 사서 도시에 싸게 공급하는 정책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실상이 달랐다. 한국의 대표적인 농업 영역이자 국가 식량 안보의 영역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미작농업의 예를 들어보면, 60~80년대 고도성장기 내내 추곡수매제도에 의한 식량 가격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수매 가격 역시 사실상 정부에 의해 일방적[4]으로 결정되었다. 이를 보장하는 이중가격제가 도입된 것은 1973년의 일이다. 이 이전까지는 오히려 정부가 수매를 통해 이익을 취하는 형태였다.

또한 70년대 중후반 이전 수매가격 인상의 기준 자체가 쌀 생산비에 약간의 소득보상을 더하여 가격을 책정한다는 것이다. 즉, 그 이전에는 생산비용과 농가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기준조차 없었던 것. 이와 동시에 경제성장에 의하여 물가가 빠르게 상승하면서 한국의 미작농업은 사실상 산업으로써의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익을 통한 자본증식은커녕 생산비용과 종사자의 생활비도 보장받기 힘든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21세기 초의 한국 농촌 사회는 붕괴되어 대한민국의 식량 자급률은 30%조차 넘기지 못하는 상태이다.

이런 식으로 도시화와 공업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인 저가의 인건비로 간단하게 부려 먹을 수 있고, 나고 자란 전통 사회가 붕괴되어 생존과 경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산업화의 주체에게[5] 절대적으로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대규모 잉여 노동 인력를 만들어 내기 위해 농민들에게 불공정한 정책을 강요하고 전통 사회를 파괴한 건 이념, 시기, 지정학적 위치의 차이 없이 19~20세기에 들어 1차 산업 중심의 농업 국가에서 산업화 체제로 넘어 간 나라라면 모두 다 한번씩 겪은 성장통이다. 물론 저러한 농민과의 전쟁 과정에서 영국 본토에서 처럼 시장 논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농촌 사회의 파괴를 유도했건, 같은 영국이 인도에서 저질렀거나 소련, 중공이 저지른 것 처럼 총칼을 동원한 공권력의 대대적인 탄압을 통해 문자 그대로 전쟁에 가까운 억압을 가하며 해체를 했던 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저 전통 사회의 해체 과정과 대규모 산업 예비군을 만들어 내는 건 산업 사회 경제 체제의 보편적인 과정이었다는 건 에릭 홉스봄, 마이크 데이비스 등 유수의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통해 여러 차례 입증 된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도시 노동자의 삶의 질은 급감했어도 수적인 공급은 원활히 하는 데 성공하였고, 2차대전 중에 T-34로 대표되는 물량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집산화가 큰 도움이 됐다.

3.2.2 계급투쟁의 일환이었다

두 번째로 소련 정부에게는 이 강제적 집산화가 계급투쟁의 일환이었다는 것. 소련 초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정책은 집산화를 중심으로 했다. 즉, 공장을 국유화한 것처럼 농토도 국유화해야 한다는 것이 소련 정부의 입장이었고, 이와 같은 정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인민의 삶의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소련 정부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농사 지을 땅을 갖고 싶어했고, 국유화가 자신들의 땅을 빼앗아 가는 것이라고 판단해서 저항했다. 즉, 농토를 국유화하여 집단농장을 설립하는 것이 소련 정부가 생각한 대의에 공헌하는 길이었고, 이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 입안과 미숙한 실행능력으로 인하여 끔찍한 참극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본다면 소련 정부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각각 대의로 여기는 바가 달랐기에 충돌이 벌어진 것이며, 이는 계급투쟁이 맞다. 원래 20세기 초중반의 공산주의 국가 성립 과정에서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마르크스-레닌주의, 즉 현실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사회적 소유관계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국유화에 반대하는 집단을 상대로 벌어진 것들이었으니까.

3.2.3 경제적 계산상 기근을 의도할 수 없었다

세 번째로는 소련의 경제적 손익을 계산했을 때 대기근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정권의 주요 곡창이자 국가 방위의 최전선이며, 이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고 식량 생산에 차질이 생기게 되면, 그 피해는 우크라이나에 국한되지 않고 전 소비에트 연방이 식량난에 시달리게 된다.

인종학살론자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 정부는 굶주린 우크라이나에 공급할 식량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봉쇄하여 주민들을 말려죽였다는 것인데, 식량이 넉넉한데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한 것이라면 당연히 다른 지방의 식량 공급은 원활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소비에트 연방 전역에서 기아가 발생하고 있었다. 대기근이 발생한 시기에 소련의 대외 식량 수출량이 32%로 줄어든 것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집산화 저항에 대한 주장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이 대기근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주요한 반증이다.

또한 1930년의 추수량은 전년, 즉 1929년 대비 37%가 증가한 전례없는 대풍작이었다. 유례없는 추수량에 고무된 소련의 당 관료들은 곡물 생산 목표치를 매우 높게 잡았으나, 1931년의 추수는 작황이 좋지 않았다. 무리한 수탈이 지속되지 않으면 당에서 설정한 목표치를 달성할 수 없었고, 겨우 1930년과 그럭저럭 비슷한 수준의 추수량을 달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당시 진행 중이던 제 1차 5개년 계획에 의해 급속도로 성장하던 도시 인구의 식량 수요량은 매년 15%씩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도하게 높았다고 주장되는 수탈량은 사실은 오히려 불충분한 양이었다.

대충 정리하면, 한쪽은 정부의 식량 공출 자체는 타 지역에도 차별 없이 적용된 것이며, 소련의 초보적인 관료제가 실패하면서 제 시간에 구제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이고, 사태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의 부담은 경감하는 등 뒤늦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반대편은 정부가 고의적인 식량 봉쇄를 통해 우크라이나의 기근 사태만을 더 가혹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양측 주장의 차이다.

4 참혹한 실상

영국 기자 개리스 존스는 1933년에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대기근의 현장을 접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폭로했는데, 당시 친소 성향의 기자들이 많아서 이들의 방해로 그의 기사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끈질긴 노력 끝에 뉴욕 이브닝 포스트에 기사를 올리긴 했지만 곧바로 친소 기자 중 한 명이었던 월터 듀런티에 의해 반박기사가 나왔고, 이후 존스는 소련 입국금지 처분을 받은 건 물론 소련의 공작으로 의심되는 감시까지 받다가 1935년 내몽골에서 살해된다. 유족들은 이를 소련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소련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인 <차일드 44(Child 44)>의 도입부에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소설의 본문에 따르면 '개미나 곤충 알이 있을까 싶어 흙덩이를 깨무는' 수준이었고 '나무껍질을 씹다가 잇몸이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 소설의 본문에서 이 대기근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줄어들어버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늙어버렸다."

1937년 이 지방을 다녀온 미국인 사진 작가가 말하길, 아프리카동남아시아 식민지에서 유색인종 아이들이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으로 을 뜯어먹는 걸 여럿 보았지만 백인 아이들이 똑같은 꼴로 풀을 뜯어먹는 걸 우크라이나에서 처음 봤다고 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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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여자들이 죽었다. 가장 끔찍한 광경은 꼬마들이었다"고 한 당 활동가는 썼다. 굶주림은 아이들의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자취를 깡그리 앗아갔고 그들은 고통받는 괴물을 닮아갔다. 두 눈에만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가는 곳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엎드려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얼굴과 배는 부풀어 오르고 두 눈은 멍했다.

- 20세기 포토 다큐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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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는 기근으로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와 추모비 지하의 기념관이 있다. 또한 추모비 앞에는 이삭을 소중히 잡고 있는 맨발의 앙상한 소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매해 우크라이나 장관들이 와서 곡물을 뿌리면서 굶주림으로 죽어간 넋들을 기린다고 한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러시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이 동상 앞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하였다.

5 이후의 전개

여하간 대기근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자체에 대한 차별은 심각했기에, 독소전쟁이 터진 뒤 독일 국방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자 다른 지역들과 달리 주민들이 '우리의 해방자'라고 외치며 꽃다발을 들고 나와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진풍경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이 때문인지 독일군이 소련 주민들을 사람으로 대하고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조금만 자제했어도 우크라이나 등 수많은 소련 위성국가 국민들이 줄줄이 독일 편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자신들 스스로를 망친 셈이다.

결국 흐루쇼프가 집권하기 전인 1950년대 초반까지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존재했다. 그나마 흐루쇼프가 집권한 후 크림 반도를 떼어서 우크라이나에 주는 등 거의 노골적으로 고향을 우대한 덕분에 반감을 많이 감소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로써는 행정구역 변경정도의 수준이었기에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7]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에 차라리 물자나 투자를 퍼주었다면 모르지만, 땅과 인구도 함께 퍼주어버리는 바람에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로부터 문제가 생겼고 2014년 2월부터 격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우크라이나 민족 갈등의 불씨를 심었다. 한편,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도 우크라이나 출신이어서 사태는 그제서야 진정되기 시작했다.

원래 러시아라는 지역 자체가 육류, 낙농, 채소 같은 다양한 식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고위층에 한정되고, 중산층 이하의 일반인은 밀가루 등으로 만든 '카샤'라는 죽 중에서도 재료가 저렴한 것만 주식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지만 이 기근으로 더 심각해졌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전투식량을 보면 주 품목이 돌덩이 이나 날감자, 청어 머리 같은 것으로 맛도 없고 단단해서 먹기도 고역인 물건이 대다수였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계란 같은 것은 귀중품이었다. 이는 1960년대 후반까지 계란을 하나씩 짚을 이용해서 정성들여 묶은 것이 큰 선물이 되었던 대한민국의 과거만 봐도 충분하다.

6 사과 및 보상 요구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게 스탈린이 저지른 이 만행에 대한 사과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련과 스탈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인정은 하고 있으나 소련이 무너진 지금, 러시아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라 일축했다.

7 기타

  • 이 당시에 식인 행위가 널리 퍼졌다는 문서 자료 및 사진 자료까지 있다. 이 당시 소련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포스터까지 제작해서 곳곳에 붙였고,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아이들이나 연고자 없는 이방인을 몰래 죽여서 인육 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인육을 파는 시장을 찍은 사진까지 있었는데, 이거 찍은 외국인 사진작가들은 자신도 그런 꼴이 될까봐 조마조마했었다고 한다.
  • 당시의 식인 사례를 보면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8] 자기 집 아이를 살았든 죽었든[9] 옆집에 넘겨 먹게 하고 그 옆집 아이를 받아다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우에는 특히 살아있는 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아이를 주고받는 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현지 치안당국조차 그냥 넘어가 주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살아있는 아이를 죽은 아이라고 속여서 서로 바꾸어 먹은 가족들이 총살당한 사례가 당시 적발되어 처형된 식인 범죄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닌 말로 굶주린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을 잡아먹기란 쉽지 않으니, 일단 만만한 것들을 잡아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 1978~1990년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55명의 아이들과 여자를 죽이고 강간, 심지어 시체를 먹기까지 한 연쇄살인마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형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힌 걸 본 뒤로 복수심을 가져 무작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다만 그 당시 워낙에 흔했던 일이라서 이것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치카틸로는 1994년 처형당했다.
  • 곡식을 주웠다는 이유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10]도 있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어린이들이 기차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체포되어 돌려보내지거나 고아원행 → 영양실조로 사망 테크를 밟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웃기는 건 이삭줍기 꼼수는 과거의 봉건영주 시절의 소작농들이 쓰던 방법인데 이때도 영주들이 고의로 이런 짓을 하면 엄벌하겠다고 단속하고 다녔다.
  • 사람들은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했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드니스테르(Dniester) 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월경을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이 소련 국경경비대에게 발각되어 도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강을 건넌 사람들은 루마니아에 수용되었다.
  • 좀비 영화 랜드 오브 데드가 우크라이나에서 상영금지 되었는데, 좀비들이 사람을 먹는 게 이 고통스러운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PTSD는 자신이 겪은 것과 동일한 상황을 목격했을 때도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좀비영화는 99% 식인이라
  • Ghoul이라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현장의 어떤 마을로 간다는 내용의 페이크 다큐 영화가 있다. 배경은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태어났다는 설정의 마을인데 치카틸로의 형 스테판이 대기근 당시 사람들에게 잡혀먹혔다는 설정을 가지고 이어나가는 영화이다(이건 후반부에 나온다). 내용은 말할 것 없이 대기근 당시를 겪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기 위해서 한 마을로 가면서 시작된다. 좀비 영화조차도 상영금지되는 판국에 영화처럼 당시 생존자들이 대놓고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게 말이 되나 영화 중반부터 삼천포로 빠져 마녀가 등장하지를 않나, 스테판은 악마가 되어서 치카틸로를 위해서 식인을 하고 있다는 둥 우크라이나의 한적한 시골은 마치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하와이 파이브 오의 페주보다 못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이 봤거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봤다가는 쳐맞을 내용으로 영화랍시고 제작했다. 제작자나 연기자들이 우크라이나에 가서 상영회 하면 좋겠다. 그냥 맞아죽게[11]
  • 대기근 당시에 농민들의 반발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자, 인민을 지킨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학살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에 군인들 사이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감이 생겼고, 공산당원인 군인들 중 일부가 당에서 스탈린에게 노골적으로 반대하거나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게 스탈린을 자극해서 군에 대한 대숙청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 이 시기 사진이라고 돌아다니는 사진들 중 다수는 전시 공산주의에 의해 발생한 1921~1922년 대기근의 사진이다.
  1. 그러나 마오쩌둥의 대약진도 홀로도모르랑 비슷한 것이 동시대의 흐루쇼프의 정책실패와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오는데,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건 대약진운동이 실패했다는게 1959년 수확기에 들어서면 여실히 증명되었는데 흐루쇼프처럼 식량수입을 해도 모자랄파에 이걸 의도적으로 방치플레이했기 때문이다.
  2. 3톤이 넘어가는 무게다! 그걸 다 고기 절이는 데 썼다면 고기의 양은 엄청날 정도로 많다는 소리. 근데 그 많던 고기도 얼마 안 가서 다 없어졌다.
  3.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니얼퍼거슨 <증오의 세기>
  4. 50년~71년은 국회 심의를 통해 결정되었고, 72~87년은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이 승인했다. 88년 이후 국회동의제가 부활했다.
  5. 그 주체가 서방의 경우는 사기업의 자본가, 소련과 중공의 경우는 공산당과 국가라는 차이는 부차적인 문제다
  6. 이래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반론 중 하나로 식민지 착취에 지나지 않은 걸 포장했다는 것으로 이런 사례가 나온다. 즉 이러한 대기근이 여러번 벌어졌음에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그저 백인들에 주축으로 이뤄진 기근이라고 알려진 것이니(...)
  7. 다만 흐루쇼프로써는 소련이 붕괴될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소련의 성장세는 괜찮았기에 앞으로 미국을 따라잡을것이다라는 취지(당신들을 묻어버릴것이다)의 발언도 했던 사람이었기에 흐루쇼프로써는 상당히 억울한 일이기는 하다.
  8. 위의 포스터 내용과 상충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녀를 잡아먹어서 체포된다는 것이 무서웠던 거다. 이해가 안 간다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왜 나돌아 다녔는지를 생각해보라.
  9. 산 아이를 죽여서 먹으면 살인죄가 되지만, 기아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먹는 것은 식인은 될지언정 살인은 아니라는 논리였다.
  10. 이삭줍기(Gleaning)는 본래 농부들이 수확을 마친 밭이나, 상업적으로 이득이 없는 밭에서 떨어진 곡식의 낱알을 줍는 행위였는데, 문제는 소련에서는 이게 불법이었다. 작은이삭 법(Law of Spikelets)에 따라 최소 10년의 복역이나 강제 노동, 심하면 사형까지 내릴 수 있었다. 좀 어이없어 보이겠지만 수확기에 일부러 이삭을 흘린 다음 나중에 주워 사유재산으로 챙기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범죄로 볼 수 있었다.
  11. 제작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대기근 당시의 내용들과 치카틸로 그리고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스테판을 하나로 엮어서 영화랍시고 만든 고인드립 쓰레기급이다. 우크라이나가 무슨 동남아 오지의 문명의 해택도 못 받고 대기근을 별 거 아닌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묘사해 버린 게 악의적으로까지 느껴진다.